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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기독경영학자가 한국교회에 묻는 9가지 질문

정충영 교수............... 조회 수 1643 추천 수 0 2009.03.26 19:5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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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기독경영학자가 한국교회에 묻는 9가지 질문


정충영(경영학박사,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I.  글을 시작하며


오늘 이 귀한 자리에서 제가 여러 목사님들 앞에서 말씀을 드리게 된 것을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 동시에 스스로의 부족을 알기 때문에 송구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 대해 제가 평소 생각하고 있는 바를 기독경영학자의 입장에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기독경영학자란 단어를 사용한 것을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난 2월에 경북대학교에서 정년퇴직한 명예교수이지만 지금은 대구도시가스 사장으로 있기 때문에 학자란 말을 사용하기가 주저됩니다만 저의 관심은 여전히 경영학 특히 로고스경영학에 있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경영학을 가르칠 때 저의 가르치는 내용은 세상의 경영원리였습니다. 그러다 저는 제가 가르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치는 바와 다르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성경에서는 기업의 목적이 이익을 최대화하는 것이라 말하지 않을 뿐 아니라 무한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성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의 경영원리와 정반대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수는 경영학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뜻을 같이하는 여러 교수님들이 모여 로고스경영연구회를 조직하여 성경에서 경영의 원리를 찾고 이를 실제에 적용하기 방법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공부한 내용들은 “완전한 성공”, “새로운 출발”, “성경의 경영원리”라는 책자로 발행되었고 몇 달 뒤에는 2권의 책이 더 발행될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연구를 보다 널리 보급하고 더 많은 교수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100명에 가까운 교수님들이 발기인이 되어 “한국로고스경영학회”를 창립하였습니다. 이제 만 3년이 지났습니다. 그간 1년에 세 차례에 걸쳐 학술발표대회를 가졌고 6권의 학술논문지를 발간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드릴 말씀은 로고스경영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교회에 관한 것입니다. 며칠 전에 종교개혁주일을 지켰습니다만 한국교회는 지금 상당한 위기 앞에 직면해 있다고 봅니다. 이에 대해서는 교갱협에 속한 여러 목사님들께서 더 잘 아실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만 저는 이 시간 기독경영학자의 관점에서 한국교회가 어떻게 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아홉 가지 질문을 던짐으로써 제가 생각하는 바를 감히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II. 한국교회에 묻는 질문


1. 교회는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두 주인”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한 주인은 말할 것도 없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다른 한 주인은 맘몬(mammon), 즉 재물의 신입니다. 이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결론입니다. 공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기관은 교회라 해서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기업은 재물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맘몬을 섬기는 기관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교회와 기업은 그 지향하는 목적과 사명이 서로 다릅니다. 기업이 지향하는 목적은 이익의 획득입니다. 일반적으로 기업의 목적은 “이익의 극대화”라 표현됩니다. 요즈음은 우리나라 기업도 그 사명을 강조하며 이익 극대화라는 말 대신 ‘고객만족’ 혹은 ‘고객감동’이란 말을 더 사용하고 또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기업이 고객만족을 중요하게 여기고 또 실천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기업에 큰 이익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전략을 사용하든, 어떠한 다른 그럴듯한 목표를 제시하더라도 기업의 궁극적인 관심은 이익입니다. 기업은 결코 이익의 획득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잊는 일이 없습니다.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간단하게 말하면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이어받아 행하는 부르심을 받은 이들의 공동체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들은 너무 많아 그것들이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것”(요 21:25)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 4:23)


이 말씀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마 9:35에도 똑 같은 말씀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 9:35)


한 마디로 줄이라 하신다면 “하나님 나라”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하늘나라입니다. 주기도문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요 교회의 목적이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이 급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기업이 다양한 전략을 구사한다하더라도 그들은 이익극대화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바꾸거나 잊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기업과는 달리 “하나님 나라”라는 교회의 사명이나 궁극적인 목적을 잊어버릴 때가 너무 많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교회의 성장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성장할수록 교인이 늘어나고 재정이 튼튼해지고 큰 현대식 건물이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을 것이지만 그것이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이어 받는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성장이 교회의 궁극적인 관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목사나 장로의 권위에 초점이 맞추어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목적이 약하여질 때 성장주의라든가 물량주의라든가 배금주의 혹은 자기과시적인 교만이 싹틀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관계없는 일은 교회에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란 것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대학생 때 천주교의 한 신부님이 대구공회당에서 하는 강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신부님이 말했습니다. “면죄부 때문에 개신교가 천주교회에서 분리해 나갔다면 오늘날 개신교회가 저렇게 분열되는 것은 면죄부 보다 더한 부패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저는 그 말을 듣고 대단히 분개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그 신부님이 예리한 통찰력을 갖고 있었구나 생각합니다. 교회는 교파와 관계없이 예수님께서 친히 세우신 기관입니다. 큰 교회 목사님이 작은 교회 목사님에 대해 우월감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큰 교회는 물질적으로 재정적으로 어려운 교회를 돕는 것이 당연합니다. 큰 교회가 작은 교회를 돕는다고 큰 교회가 더 훌륭하다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세상의 어두운 권세와 싸우는 하나님의 군대이기 때문입니다.


2. 귀중한 자산은 무엇인가?


교회의 예산은 교회의 모든 활동을 집약하여 금액으로 표시해 놓은 것입니다. 제가 여러 교회의 예산서를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교회 내부의 일에 거의 소비되고 있습니다. 외부에 나가는 금액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세상을 향한 선교전략을 교회가 중시하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변화하기 위한 선교전략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합니다. 교회 교육관을 짓거나 담임목사가 총회장에 출마한다고 선교비용을 줄여서 안 될 것입니다. 선교보다 더 중하고 급한 일은 없습니다.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과 선교하는 일에 더 예산이 배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관심을 가져야 할 일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인적자원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인적자원이란 믿음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교인들을 가리킵니다. 기업에서는 최근 인적자원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기업에서는 인적자원 즉 조직구성원들이 회계장부에 표시하기 어렵지만 회계장부에 나타나는 모든 자산들을 합한 것보다 몇 배나 가치 있으며 이것이 기업의 성공을 결정하는 요인이라고 그들은 믿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헌금을 하기 때문에 교인들이 귀중한 자산이 아닙니다. 교인들은 저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달란트들이 결합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지체가 중한가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지체들이 함께 어울려 몸을 이루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할 것입니다”(고전 12:21)” 모두 있어야 할 지체일 뿐입니다.


버스를 동원해서 교인들을 교회에 데려옵니다. 설교가 끝나면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의무를 다 했다는 듯 뿔뿔이 흩어지고 맙니다. 그들의 귀중한 달란트들이 이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냥 교회에 참석하기만 하면 집사도 되고 권사, 장로도 됩니다. 왜 그들이 가진 달란트들이 무시되고 그들은 기껏 “교회 다니는 사람(church goer)"이 되고 말았습니까? 이들을 귀한 자원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그들이 갖고 있는 달란트를 활용하여 교회를 섬기도록 섬기는 일을 주어야 합니다. 큰 교회에는 훌륭한 달란트를 가진 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그 달란트를 활용할 기회를 줄 수 없다면 일군이 부족한 교회에 출석하여 그들의 달란트로 교회를 섬기도록 지도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폴 헤트웨이가 쓴 “하늘에 속한 사람”이란 책을 읽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중국 지하교회는 교인들에게 순교하는 법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심한 핍박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면 한 사람의 교인도 남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만 우리 한국교회는 순교가 아니라 복 받기를 가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그렇게 쉽게 받지 못하기 때문에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교회의 인적자원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목사님들이 들어갈 수 있는 활동영역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목사님들은 시장 바닥에, 3D 업종에,  무한 경쟁의 현장에, 서로 속이고 속는 그러한 거짓이 난무하는 삶의 현장에 접근하기 힘듭니다. 그렇다면 누가 삶의 현장에서 믿음을 보여주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까? 누가 세상과 싸우는 치열한 전투장의 일선에서 적과 싸우는 군사이겠습니까? 교인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군사들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실천하는 선교사들입니다. 그래서 인적자원을 중시해야 합니다. 개신교는 “만인 제사장”을 신앙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목사님들만이 제사장이고 설교자이고 하나님의 사자이고 선교사입니다. 그런 생각으로는 인적자원의 가치를 알 수 없고 인적자원을 활용할 수 없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를 아신 주님께서는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 그리도 많이 헤매시었습니다(마 18:12)


3. 어떤 리더십인가?


세상에는 다양한 리더의 스타일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님의 리더십을 본 받아야 합니다. “CEO 예수”란 책은 베스트셀라입니다만 저는 예수님을 CEO란 칭호로 부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만 예수님의 리더십은 교회지도자들이 본받아야 할 리더십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였습니다(마 7:29) 권세 있었다는 것은 권위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권위가 어디서 왔습니까? 하늘로부터 왔습니다. 그러나 그 권세는 남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섬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말씀하셨습니다. 명령하고 다스리는 리더십이 아니라 섬기는 종의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을 우리에게 본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한국교회에는 너무 많은 주와 선생이 있습니다. 양 위에 군림하는 목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목사님이 전지전능한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모든 교회의 일들을 자기 손 아귀에 쥐고 있습니다. 저는 한 목사님에게 그렇게 많은 능력이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권한을 나누십시오. 기업에서는 CEO가 갖고 있는 권한들이 대부분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양됩니다. 아무리 뛰어난 CEO라도 혼자 다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당회장인 목사님이 어린 양떼들을 돌보는 목자입니다. 양 떼를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재정문제는 맡겨 버리십시오. 푸른 풀밭과 잔잔한 시냇가로 인도하는 일에 힘쓰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잡히신 그날 밤에 우리에게 유언처럼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섬기는 리더십 이상의 리더십은 교회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4. 투명한 경영인가?


투명한 회계처리, 투명한 의사결정 등 투명경영을 하지 않는 기업은 살아남기 힘듭니다.  회사의 재정상태가 알려져야 하고 의사결정과정이 공개되어야 하고 그 의사결정과정에 노동자도 참여하도록 강요받고 있습니다. 기업은 사회적 기관이라고 드럭커 라는 교수가 말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기업은 개인의 점유물이 아니고 그 기업이 위치하고 있는 사회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회의 필요에 의해 존재하게 되고 사회가 필요 없다고 판단하면 문을 닫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은 그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투명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마 5:14)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산위에 있는 동네란 교회라 생각합니다. 산 위에 동네니까 멀리까지 그 동네의 움직임이 들어납니다. 교회는 또한 산위에서 어두움을 밝혀야 합니다. 등경 위에 둔 불처럼 오늘날 교회는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눅 11:33). 좋은 면만 알려졌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한 면도 널리 알려지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조사에 따르면 기독교가 다른 종교보다 더 사랑이 많으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응답한 사람의 수가 더 많았습니다. 사랑의 종교가 아니란 말이지요. 얼마나 충격적입니까? 우리가 정말 사랑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하고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교회의 담을 넘지 못하고 우리끼리의 사랑으로 끝나는 낮은 수준의 사랑이 아닌가 두려워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들끼리의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끼리 주고받는 사랑이 아니며, 을 것을 기대하고 주는 사랑이 아닙니다. 겉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속옷까지 주어버리는 사랑입니다. “잔치를 배설하거든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해서 그들이 갚지 못하도록 하라”(눅 14:13-14)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교회의 사랑이 교회 담을 넘어가도록 그 사랑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이와 함께 우리의 참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교회가 투명해져야 합니다. 왜 교회가 투명해지지 못 합니까? 재정문제인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재정에 관해서는 목사님이 주도적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돈 만지는 문제는 일체 손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힘이 들고 번거롭다 하더라도 재정의 절차를 지켜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예산과 결산을 교인들에게 공표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게 하면 교인들은 자기가 낸 헌금이 하나님 나라에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게 되고 헌금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투명한 헌금내용 때문에 헌금에 더 힘쓰게 될 것입니다.


5. 양질의 제품인가?


기업에서는 생산되는 제품의 품질(quality)을 대단히 중시합니다. 품질은 그 제품뿐만 아니라 그 기업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교 특히 장로교에서는 많은 교인들은 목사님이 제조한 제품 즉, 설교말씀을 들으려 교회에 옵니다. 실제는 설교말씀이 교인들이 일주일동안 살아가는 영의 양식입니다. 그런데 영양가가 적고 품질불량인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과일 주스는 원액이 10%도 채 안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입에는 달콤하고 목을 시원하게 할지는 몰라도 몸에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오늘날 목사님의 설교들이 너무 달콤하고 시원하기만 한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성경본문은 양념으로 읽혀지고 내용은 성경본문과 전혀 관계없는 미사여구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말씀은 예리하게 성도들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어 그들을 변화시키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어 낸 말은 성도들을 간지럽게 할 뿐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뜻에 복종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설교의 또 다른 한 측면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말한 바와 같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율법주의입니다. 아무도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행함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마르틴 루터의 말처럼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성경입니다.


그러나 한국 강단에서 울려 퍼지는 설교 중에는 수많은 율법주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헌금을 강조하면서, 교회신축 헌금을 부탁하면서, 교회출석을 독려하면서, 전도할 것을 당부하면서 율법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왜곡하여 전파되는 말씀이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고 저는 믿지 않습니다.


6. 불루 오션을 찾고 있는가?


우리의 사회는 급변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사회는 농경사회, 산업사회, 서비스 사회를 거쳐 지식사회로 진입했습니다. 농경사회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농사짓는 일에 종사했지만 산업사회로 바뀌자 농사를 짓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조업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서비스산업으로 몰려들었고 2000년 접어들어서부터는 지식사회가 우리 앞에 전개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우리의 삶의 방식이 달라지고 삶의 수단이 달라지며 우리의 사고도 달라집니다. 교회도 달라져야 할 것입니까? 그냥 그대로 변하지 않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떤 교역자들은 온 세상이 다 변할지라도 교회는 변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은 영원불변하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은 맞지 않습니다. 초대교회와 같은 교회가 현대에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지역에 따라, 시대에 따라 교회도 변합니다. 아니 변해야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로고스경영학을 나름대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로고스 경영을 공부할 때 구약시대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에도 적용될 수 있는가? 농경시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신약의 말씀이 21세기에도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명제와 부딪히게 됩니다. 오늘날의 기업개념이라든가 다양한 사업들이 신구약시대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들이 오늘날의 기업에 적용될 수 있는가? 우리의 삶의 기준으로 적용될 수 있는가?


한 가지 예를 들어 봅시다. 어떤 신앙심 깊은 크리스천 사업가가 자기 회사의 제품을 광고를 하려고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TV, 신문, 인터넷 등 참으로 여러 가지 매체가 있습니다. 어느 매체에, 어떻게, 언제, 누구를 통해 광고해야 할지 알기 위해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답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제품광고에 대항 어떠한 직접적인 도움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기업의 문제 뿐 아니라 모든 일에서 그렇습니다. 배가 고프십니까? 점심으로 무엇을 먹어야 될지 성경에서 찾아보십시오. 거기에 아무런 답이 없습니다. 우리 집 애를 어느 대학에 무슨 학과에 보내야 할지에 관한 정보도 전혀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무용지물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방법과 수단을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어떤 큰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가진 경험과 재능과 지식과 읽거나 들은 말씀과 믿음의 선배들이 보여준 모범들을 모두 동원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기도가 필요하고 목사님들과 상담도 필요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직접 말씀하시지 않았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 5:10)”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기업들은 피비린내 나는 무한 경쟁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 전투장을 우리는 레드 오션(red ocean)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어떤 기업들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어 경쟁 없는 독자적인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나갑니다. 이 시장을 불루 오션(blue ocean)이라 부릅니다. 교회도 이런 블루 오션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아니 예수님께서는 이미 불루 오션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 그러면 오늘의 지식사회에서 불루 오션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마지막 때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다니엘은 마지막 때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단 12:4)


여기에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한다고 했으니 대량 교통수단이 발달될 것을, 그리고 “지식이 더 한다”고 했으니 바로 지식사회의 도래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으로 판단한다면 지금이 그 마지막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이 말씀의 뜻을 오래 생각해 보았습니다. 영어로는 이 구절을 해석해 보면 “지식을 얻기 위해 사람이 빨리 왕래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빨리 왕래한다고 지식이 더 해니까? 저의 경험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 곳에 오래 있어야 그 곳에서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구절은 무엇을 말합니까? 빨리 왕래하는 것은 교통수단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서입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이곳에서 저곳으로 얼마든지 빨리 왕래할 수 있고 세상 곳곳의 지식을 다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마지막 때에는 인터넷을 통해 지식을 얻는 시대란 뜻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사이버 시대가 닥쳐온 것입니다.


저는 우리 앞에 나타난 사이버 공간이 새로운 땅 끝이라 생각합니다. 이 땅 끝까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교회가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사이버 공간과 이를 통한 선교에 관해서는 제가 쓴 책 “사이버 교회, 어떻게 할 것인가?”(정충영, 겨자씨 출판사, 2004)를 참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사이버 공간은 하나님 복음을 전해야 할 새로운 땅 끝이며 동시에 우리가 선교전략을 펼칠 수 있는 불루 오션이라고.


7. 윤리적 행동강령은 무엇인가?


기업은 요즘 윤리헌장을 발표하고 윤리적 경영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윤리란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옳은 것을 선택하여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옳고 그럼이 기준이 무엇인가가 중요합니다. 이 기준을 성경에서 찾으면 그것은 성경적 윤리 혹은 기독교 윤리가 될 것입니다. 고위공직자 중에 부정과 비리에 연루된 사람 중에 그리스도인들이 많다는 것은 대단히 부끄러운 일입니다. 신앙심이 깊다는 교인들도 그들 중에 있습니다. 삶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교회와 삶의 현장 간의 거리가 너무나 멀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들은 설교말씀들을 삶의 현장에 적응하려고 할 때 너무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성경지식이 약하고 믿음이 어린 신자들에게는 말씀을 어떻게 적용하여야 할 것인지 모를 것입니다. 수많은 직장과 수많은 사업, 그리고 수많은 일들을 경험하고 있는 교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다 가르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떤 지침이랄까 그리스도인들이 직장에서 사업에서 어떻게 일할 것인가를 가르쳐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크리스천 직장인의 행동지침과 같은 것을 교회가 연구해서 가르쳐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하나의 대안으로 십계명의 의미를 삶의 기준으로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1계명: 하나님 이외의 어떠한 것도 섬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하는 일들은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지 않아야 한다.

제2계명: 그 어떠한 것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 우리가 하는 선한 생각이나 행동, 물질은 물론 존경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된다.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수단으로만 존재해야 한다.

제3계명: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 지금 내가 하고 있거나 하려는 일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살펴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아야 한다.

제4계명: 부지런히 일하고 적절한 휴식을 취해야 한다. 일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만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 일은 자체가 인간의 본분이며 사람은 일을 통하여 보람을 얻고 자신의 능력을 개발할 수 있고 남을 섬길 수 있다. 너무 많은 짓눌리거나 임금 때문에 일의 노예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일 때문에 가정에서의 즐거움과 힘을 재충전할 기회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

제5계명: 부모뿐 아니라 노인을 존경하고 사회의 건전한 전통을 중시해야 한다. 육체적으로 연약하거나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해서 다른 사람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 경제적인 약자와 소외된 사람간도 동일한 섬김을 받아야 한다.

제6계명: 어떠한 경우라도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과 권리를 파괴하지 않아야 한다. 안전성과 생명의 존엄성, 인간의 정당한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환경파괴나 오염은 자연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다.

제7계명: 성이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고 가정의 신성이 유지되어야 한다. 특히 직장에서 성차별이나 성폭행은 있어서 안 된다. 남자와 여자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을  뿐 우열관계를 갖지 않는다.

제8계명: 거짓된 모든 수단은 배격되어야 한다. 정당한 방법을 사용하지 하는 모든 행위는 남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 된다. 자원의 낭비를 중지하여야 하고 다른 사람을 적절하게 대우하고 공정한 관계를 형성하도록 해야 한다.

제9계명: 정직하고 성실해야 한다. 우리가 만나는 이웃은 섬김을 받아야 할 대상이며 내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내가 먼저 남을 대접해야 한다. 정당한 세금을 지불하고 법을 지켜야 한다.

제10계명: 탐심을 물리쳐야 한다. 다른 사람의 소유권을 인정하여야 하며 남의 것을 탐하여 부당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정당한 방법을 통하여 원하는 것을 획득하도록 하여야 한다. 경쟁자도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나의 지나친 축재가 다른 사람들에게 원성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남을 빈곤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살펴야 한다.


교회에는 수많은 사연의 감사헌금이 있습니다. 집을 샀다, 자가용을 샀다. 이사했다, 자녀를 나았다, 승진했다는 등. 그러나 승진하지 못했다. 돈을 벌지 못했다, 멸시를 당했다는 등의 사연으로 감사헌금 하는 것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그러한 것이 감사할 조건이 되지 안 된다할지 모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상사의 부정한 방법에 반대했다가 승진에서 제외되거나 속일 수 없어 바른 말을 했기 때문에 물건을 팔지 못해 돈을 벌지 못했다면 어떻겠습니까? 불의의 재물이나 불의의 승진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보다 더 감사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의를 위해 핍박을 받으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2)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부정한 방법으로 승진했다면 그것은 감사할 것이 아니라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물질적인 부가 늘어난 것에 대해 ‘성공했다’고 평가하거나 ‘감사하다’고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헛된 칭찬이 물량주의를 부채질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질적인 감사보다 말씀을 따르려다 물질에 손실을 입었음을 기쁨으로 감사드릴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8. 군사들은 지금 어디가 있는가?


엡 6:2에는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 전투장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회 모든 분야가 모두 전쟁터입니다. 전장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싸움터에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치열한 싸움터를 버리고 방주(교회당)에 들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찬양하며 기쁨에 도취해 있습니다. 목사님들은 망할 세상일에 너무 깊이 간여하지 말라고 설교합니다. 교회 일이 더 중요하다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일을 그렇게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시어 독생자까지 아끼시지 않은 세상이 그렇게 가치 없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이 세상을 그렇게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땅 끝까지 이르러 세상을 뒤엎어 놓으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으로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으로 가라하십니다. 우리가 변화시켜야 할 세상이 교회밖에 있고 우리가 사랑하여야 할 이웃이 세상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한 곳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모이고 또 흩어지고 그리고는 다시 모여야 합니다. 모여 죄로 더러워진 영과 육을 씻음 받고 하나님의 뜻을 다시 다짐하며 영적 능력으로 가득 채워져야 합니다. 그런 후에 충만해진 능력으로 세상으로 흩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더러워진 정맥피가 심장으로 돌아와 새로운 동맥피가 되어 온 몸에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듯 우리도 교회에 돌아와 새로워지고 충만하게 되어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분야에 사랑을 나누어주고 주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등지고 우리자신만을 바라보며 구원의 기쁨에 도취해서는 안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선교의 사명으로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삶의 현장에서 악과 싸워야 합니다.


9. 교회가 특권을 누리고 있는가?


오늘 날 한국교회의 위상은 대단히 높아졌습니다. 사회 각 분야에서의 실력자 중에 기독교인들이 많다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국회의원  290명 중 중 기독교인이 127명으로서 42%입니다. 정치에서 기독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뜻입니다. 정치에서뿐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서 그러합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것 때문에 우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유력한 것은 좋지만 교회가 가난하고 소외된 자의 편에 서지 않고 특권층에 서서 그 특권을 누리고 있지 않는가 하는 반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실제 한국교회가 이 사회에 참으로 많은 공헌을 하였다는데 대해서는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를 의롭게 만드는데 크게 이바지 하지는 못했다는 점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유력한 힘을 어디에 사용한 것입니까?


교회가 누리는 특권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어느 교회가 건축을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건축을 위해 여러 가지 어려운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번잡스럽고 많은 시간이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듭니다. 다행이도 교회에는 관공서 높은 직위에 앉아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힘을 빌려 모든 절차를 쉽게 해결해 나갑니다. 얼마나 편리하고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나 이것은 교회는 국민들이 당하는 어려움을 겪지 않고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가 특권을 누리며 감사하는 동안 교회는 어느 듯 특권층이 되어 버립니다.


특권층에 앉아 특권을 누리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편하게 전하는 것은 예수님의 방법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특권층에 속하는 왕으로 오시지 않고 천대와 비웃음과 명시를 당하는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버림받은 이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교회가 특권을 가진 것이 선교에 유리하다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성경을 바로 읽지 못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그 특권을 버리고 특권층에서 내려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 53:3절에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성장이 중지되었다면 그것은 한국교회가 그 만큼 특권을 누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선교사의 보고처럼 한국의 교회는 무식을 면했지만 옛날의 순수한 열정과 사랑을 잃어버리고 있지 않는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죄인의 친구가 되셨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고 인간들의 풍성한 삶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내 놓으셨습니다.



III. 글을 끝내며


이 글을 마치면서 저의 글 중에 혹시 저의 교만과 독선이 자리 잡고 있지나 않았는지 두려워합니다. 사람의 눈은 밖의 것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내부 속에 도사린 더 큰 들보를 보지 못하는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한 오류를 제가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는 장로님이나 집사님과 흉금을 터놓고 교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교회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만큼 한국교회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교회에 대해 바라는 것이 많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저 비텐베르크 대학의 게시판에 95개조의 항의문을 쓴 마르틴 루터와 같은 교역자도 신학자도 아닙니다. 저는 단지 장로로 교회를 섬기는 평신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맘몬이 지배하기 쉬운 기업경영을 연구하는 학자일 뿐이지만 교회를 향한 간절한 마음은 누구 못지않다고 생각하며 이 글을 썼습니다. “....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눅 16:8)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오늘의 기업경영은 많은 점에서 교회에 깨우침을 준다고 믿으며 기업경영의 일을 교회와 비교해 보았습니다.


아무리 부패한 교회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라는 것이 칼뱅의 신조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 세상에는 완전한 교회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날마다 새로워지고 갱신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회개신협회의 존재 가치가 들어난다 하겠습니다.


제가 쓴 글 중에는 일부 교회에만 해당될 뿐 대부부의 교회에는 해당되지 않는 문제를 지나치게 침소봉대해서 말했다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제가 전체를 보지 않고 부문만 보았다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날 한국교회는 전례 없는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마지막 때를 당해 한국교회가 담당할 사명은 더욱 커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를 갱신하는 일은 더욱 긴급하다고 생각합니다. 모쪼록 <교회갱신을 위한 대구경북목회자협의회> 여러 회원들께서 새로운 한국교회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는데 앞장 서 주실 것을 간절히 바라면 저의 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정충영 장로 소개

정충영 장로는 현재 경북대학교 명예교수이며 대구도시가스 사장이다. 설교은행(www.sermonbank.net) 운영자 및 남산편지(www.nsletter.net) 발행자로 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및 사랑의 집짓기에 참여하고 있으며 한국로고스경영학회 회장을 거쳐 현재는 고문이다. 경북대학교 경상대학 학장과 경영대학원 원장을 역임하였고 한국산업경영학회 회장, 한국의사결정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경영관리기능으로 분석한 주기도문의 구조” 등 100여 편의 논문과 “사이버교회 어떻게 할 것인가?” 등 30여권의 저서가 있다. 시무장로로 대구남산교회를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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