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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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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휴가, 자기를 찾아 나서는 시간
박연호
http://columnist.org/ynhp
8년전 쯤 여름이었다. 경북 포항에서 오랜 동안 직장생활을 하던 고교 선배가 명예퇴직이라는 덫에 치었다. 그 아픔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섣부른 몇 마디는 입에 발린 시시한 소리로 끝나기 십상이고, 아무리 적절한 표현을 하더라도 당사자 심정을 충분히 어루만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 역시 회사에 나다니고는 있지만 현실과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심신이 매우 고단할 때였다. 마치 악몽에서 덜 깬 듯한 나날이 거미줄처럼 달라붙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곰곰 생각한 끝에 여름 휴가를 그곳으로 갈테니 같이 지내자고 제안했다. 조건은 다음과 같이 했다. 기간은 3박4일, 포항에서 목포까지 남해안을 따라 갈 것, 승용차는 끌고 가지 말 것. 또 버스터미널에서 서쪽으로 가는 버스 중 가장 빨리 떠나는 것이면 아무 거나 타고 갔다가 그 종점에서 또 그런 식으로 갈아타고, 해가 지면 그 고장에서 숙박하는 방법을 제시하니 절대찬성이었다.
첫날 오후 3시쯤 둘이서 포항 터미널로 가니 마산행 버스가 막 떠나려고 했다. 그걸 탔다. 마산이 처음이라 거기서 좀 시간을 보낼까 했으나 더위와 도시의 번잡이 사람을 질리게 만들어 곧 다음 버스를 탔다. 남해행이었다.
남해로 들어가니 해가 설핏해져 그곳 남쪽 바닷가에 숙소를 정했다. 그리고 술을 한잔 하면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우리 자신을 점검하는 쪽으로 물꼬를 잡았다.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상당히 정밀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바둑 한 판을 복기하듯 지난 날들을 되짚어 보면서 많은 것을 발견하고 깨달았다. 과감하지 못했던 부분, 그릇 판단했던 점, 상대 의도를 제대로 읽지 못했던 대목, 기회를 포착해야 될 시점에서 우물거리다 오히려 실패를 불러왔던 미숙함 등을 꽤 고통스럽게 검토했다. 심한 몸살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는 대목, 부끄러운 부분이 더 많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 그런대로 드러났다.
반면 강점과 이점도 여러 가지로 조사했다. 여러 가지 능력에 대한 재고조사를 다각도로 실시한 것이다. 변변치 못한 선풍기 하나와 있으나마나 한 방충망 때문에 극성이던 모기와 더위도 이처럼 괴롭고 힘든 마음의 격렬한 여과과정 앞에서 무력해진 듯 했다. 그리고 가슴 속에는 가는 샘물이 미세하게 흘렀다. 매우 미약했지만 꽤 오랜만에 접해보는 자신감이었다.
이후 여정에도 더위, 모기, 무례한 이들의 심야 고성방가, 무작정 무계획 여행에 따른 부작용 등 피곤한 일들이 많았으나 마음은 훨씬 괜찮아졌다. 어깨를 짓누르며 숨통을 틀어쥐던 현실로 복귀하는 발걸음은 여행 출발 때보다 상당히 가벼워졌다. 지겹고 힘들게만 보이던 포항과 서울의 일상으로 돌아가면서 우리는 마주보며 웃을 수 있었다. 그 선배와 지금도 만나면 그것이 본래 의미에 그런대로 근접한 휴가여행이었음을 자부하며 기꺼이 입에 올린다.
숨막히도록 답답하고 좌우나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앞으로만 내몰리는 일상을 헤쳐 나가다 보면 내가 누구인지, 뭘하는 건지도 모를 때가 많다. 이처럼 자기마저도 내팽개친 자신을 찾아나서는 기간이 휴가라고 생각한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知彼知己 百戰不殆(지피지기 백전불태)'라는 말처럼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모든 싸움이 위태롭지 않다. 달리 말하면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를 사는 우리는 대부분 경쟁이라는 이름의 틀 속에 갇혀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결전에 나서는 일이 많다. 그 다음 승부는 뻔하지 않는가.
휴가 때는 그렇게 방치된 자신과 구석에 쳐박아두고 잊어버린 여러 가지 능력을 재발견하고 그 성능과 작동의 이상유무를 체크해야 한다. 그러면 직장과 일상생활에서 주체가 되어 능동적, 적극적으로 자기를 운용해 나갈 수 있다. 자기 장단점도 모르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파악하지 못하면 남에게 끌려가는 피동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 휴가문화는 70년대에 태동했다. 당시 정권이 우리도 휴가를 즐길 수 있을만큼 잘 살게 되었다고 대중조작을 하고, 언론이 이에 장단을 맞춰 순수하지 못한 점이 다분했지만 이제는 시민생활의 필수요소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 태생적 한계 때문에 휴가는 곧 여행인 것처럼 획일화되었다.
그렇다고 피서여행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말은 아니다. 여행의 질이 문제다. 휴가가 직장과 일상의 생활에 필요한 활기를 충전하고 재공급 받는 기간이라는 원래의 뜻을 실현하려면 그 질을 높여야 한다. 모든 사람의 개성이 다르듯 자기충전 방법도 그만큼 다양하다. 이를 살려서 휴가를 보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휴가에서 지치고 맥이 빠져 일상복귀가 더욱 힘든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남동발전(주) 사보 '한남전' 7월호 (2004 07)
휴가, 자기를 찾아 나서는 시간
박연호
http://columnist.org/ynhp
8년전 쯤 여름이었다. 경북 포항에서 오랜 동안 직장생활을 하던 고교 선배가 명예퇴직이라는 덫에 치었다. 그 아픔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섣부른 몇 마디는 입에 발린 시시한 소리로 끝나기 십상이고, 아무리 적절한 표현을 하더라도 당사자 심정을 충분히 어루만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 역시 회사에 나다니고는 있지만 현실과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심신이 매우 고단할 때였다. 마치 악몽에서 덜 깬 듯한 나날이 거미줄처럼 달라붙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곰곰 생각한 끝에 여름 휴가를 그곳으로 갈테니 같이 지내자고 제안했다. 조건은 다음과 같이 했다. 기간은 3박4일, 포항에서 목포까지 남해안을 따라 갈 것, 승용차는 끌고 가지 말 것. 또 버스터미널에서 서쪽으로 가는 버스 중 가장 빨리 떠나는 것이면 아무 거나 타고 갔다가 그 종점에서 또 그런 식으로 갈아타고, 해가 지면 그 고장에서 숙박하는 방법을 제시하니 절대찬성이었다.
첫날 오후 3시쯤 둘이서 포항 터미널로 가니 마산행 버스가 막 떠나려고 했다. 그걸 탔다. 마산이 처음이라 거기서 좀 시간을 보낼까 했으나 더위와 도시의 번잡이 사람을 질리게 만들어 곧 다음 버스를 탔다. 남해행이었다.
남해로 들어가니 해가 설핏해져 그곳 남쪽 바닷가에 숙소를 정했다. 그리고 술을 한잔 하면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우리 자신을 점검하는 쪽으로 물꼬를 잡았다.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상당히 정밀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바둑 한 판을 복기하듯 지난 날들을 되짚어 보면서 많은 것을 발견하고 깨달았다. 과감하지 못했던 부분, 그릇 판단했던 점, 상대 의도를 제대로 읽지 못했던 대목, 기회를 포착해야 될 시점에서 우물거리다 오히려 실패를 불러왔던 미숙함 등을 꽤 고통스럽게 검토했다. 심한 몸살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는 대목, 부끄러운 부분이 더 많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 그런대로 드러났다.
반면 강점과 이점도 여러 가지로 조사했다. 여러 가지 능력에 대한 재고조사를 다각도로 실시한 것이다. 변변치 못한 선풍기 하나와 있으나마나 한 방충망 때문에 극성이던 모기와 더위도 이처럼 괴롭고 힘든 마음의 격렬한 여과과정 앞에서 무력해진 듯 했다. 그리고 가슴 속에는 가는 샘물이 미세하게 흘렀다. 매우 미약했지만 꽤 오랜만에 접해보는 자신감이었다.
이후 여정에도 더위, 모기, 무례한 이들의 심야 고성방가, 무작정 무계획 여행에 따른 부작용 등 피곤한 일들이 많았으나 마음은 훨씬 괜찮아졌다. 어깨를 짓누르며 숨통을 틀어쥐던 현실로 복귀하는 발걸음은 여행 출발 때보다 상당히 가벼워졌다. 지겹고 힘들게만 보이던 포항과 서울의 일상으로 돌아가면서 우리는 마주보며 웃을 수 있었다. 그 선배와 지금도 만나면 그것이 본래 의미에 그런대로 근접한 휴가여행이었음을 자부하며 기꺼이 입에 올린다.
숨막히도록 답답하고 좌우나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앞으로만 내몰리는 일상을 헤쳐 나가다 보면 내가 누구인지, 뭘하는 건지도 모를 때가 많다. 이처럼 자기마저도 내팽개친 자신을 찾아나서는 기간이 휴가라고 생각한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知彼知己 百戰不殆(지피지기 백전불태)'라는 말처럼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모든 싸움이 위태롭지 않다. 달리 말하면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를 사는 우리는 대부분 경쟁이라는 이름의 틀 속에 갇혀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결전에 나서는 일이 많다. 그 다음 승부는 뻔하지 않는가.
휴가 때는 그렇게 방치된 자신과 구석에 쳐박아두고 잊어버린 여러 가지 능력을 재발견하고 그 성능과 작동의 이상유무를 체크해야 한다. 그러면 직장과 일상생활에서 주체가 되어 능동적, 적극적으로 자기를 운용해 나갈 수 있다. 자기 장단점도 모르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파악하지 못하면 남에게 끌려가는 피동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 휴가문화는 70년대에 태동했다. 당시 정권이 우리도 휴가를 즐길 수 있을만큼 잘 살게 되었다고 대중조작을 하고, 언론이 이에 장단을 맞춰 순수하지 못한 점이 다분했지만 이제는 시민생활의 필수요소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 태생적 한계 때문에 휴가는 곧 여행인 것처럼 획일화되었다.
그렇다고 피서여행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말은 아니다. 여행의 질이 문제다. 휴가가 직장과 일상의 생활에 필요한 활기를 충전하고 재공급 받는 기간이라는 원래의 뜻을 실현하려면 그 질을 높여야 한다. 모든 사람의 개성이 다르듯 자기충전 방법도 그만큼 다양하다. 이를 살려서 휴가를 보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휴가에서 지치고 맥이 빠져 일상복귀가 더욱 힘든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남동발전(주) 사보 '한남전' 7월호 (2004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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