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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No.1050 ]비무장지대 향로봉 야생화 르포

무엇이든 이규섭............... 조회 수 1923 추천 수 0 2004.08.27 13:5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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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꽃이 살가운 '천상의 화원'

태백산맥의 허리이자 내륙의 지붕인 향로봉(1,296m)은 생태계의 보고(寶庫)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천연원시림엔 산양 등 야생동물이 뛰놀고, 살가운 우리 꽃이 무더기로 피어나는 '천상(天上)의 화원(花園)'이다. 향로봉은 금강산 길목인 건봉산(910m)과 함께 천연보호구역(1973년)으로 지정된 소중한 학술연구자원이다.

유난히 무덥던 지난 여름, 모 신문사 생태취재팀과 함께 향로봉을 찾았다. 육로로 금강산 관광을 가고, 남북의 교류가 활발해졌지만 비무장지대는 여전히 분단의 잔형이 짙게 드리워진 비극의 현장이다. 군 당국의 사전허가를 받고 을지부대 정훈장교의 안내를 받으며 향로봉의 야생화를 만났다.


* 사진 : 향로봉 부근에서 발견한 에델바이스 군락지.

산자락 부드럽게 감싸는 구름바다의 장관

꽃들과의 설레는 만남을 위해 새벽부터 서둘렀다. 향로봉에서 뻗어 내린 줄기가 설악산맥으로 이어지는 경계에 위치한 진부령(529m)이 출발점이다.

진부령에 위치한 군부대 위병소를 통과해 산으로 접어드니 초원지대가 펼쳐지고 길섶의 갈퀴나물과 물봉선꽃들이 아침인사를 하며 반긴다. 인적이 끊긴 비포장도로는 차가 겨우 비껴 갈 정도로 비좁다. 짚차를 타고 군사작전도로를 나선형으로 돌고 돌아도 정상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험준하고 먼 산길이다.

향로봉 중턱쯤에 오르자 동쪽하늘이 뿌옇게 밝아 오면서 구름바다(雲海)의 장관이 펼쳐져 탄성이 절로 나온다. 산자락을 부드럽게 감싸며 피어오른 광대한 구름이 높고 낮은 산봉우리를 솜이불처럼 덮는다. 때론 솟구치고 때론 유유히 흐르는 듯 피어오르는 구름바다에 선녀들이 내려와 장삼자락 휘날리며 너울너울 춤을 춘다. 초롱꽃, 송이풀꽃, 달맞이꽃도 아침이슬에 목을 추기며 구름바다의 조화를 바라본다.

산과 숲 사이로 이어지는 첩첩산중 외길목에는 50m 간격으로 일련번호가 매겨진 전봇대가 스쳐간다. 330여개쯤 된다고 하니 도로의 길이가 추정된다. 전봇대에 붙여놓은 반공시대의 이색구호들도 눈길을 끈다.

8부 능선쯤 이르자 향로봉 정상이 시야에 들어오고 마지막 경비초소를 통과한다. '미확인 지뢰지대'라는 역삼각형의 빨간 표지가 한국전쟁의 상흔처럼 곳곳에 남아있다. 진부령에서 짚차로 1시간 30여분 넘게 걸려 향로봉에 도착했다. 아침식사를 끝낸 사병들이 막사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휴식을 취한다.

식당에 들러 '짬밥'으로 허기를 채웠다. 30여년만에 먹어보는 짬밥이다. 군복무에 필요한 각종 수칙들이 게시판에 즐비하다. '소대장과 분대장 이외에는 명령을 하지도 말고 듣지도 맙시다'라는 문구가 눈에 뛴다. 고참이 신참에게 '얼차려'는 물론 식기 닦기나 심부름도 시키지 못한다. 얼차려를 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손 씻은 물을 담아 둔 세심수(洗心水) 물통도 이채롭다. 지난해 8월 육군이 발표한 '사고예방 종합대책' 이후 달라진 병영의 풍경이다.

을지부대(12사단)는 향로봉을 비롯, 동굴봉(1,330m), 칠절봉(1,172m) 등 해발 1000m가 넘는 백두대간 험한 준령의 경계를 책임지는 산악사단으로 유명하다. 6·25 전쟁이 치열하던 1952년 11월 창설됐다. 고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역사상 불멸의 전승을 거두어 민족의 자존을 드높인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진취적 기상을 계승하라"는 격려와 함께 직접 을지부대로 명명했다.

을지부대는 휴전 이후 변화하는 임무에 따라 10여차례 주둔 지역을 옮겼지만 1966년부터 강원도 원통에 주둔했다. 동부전선 가운데서도 향로봉은 최전선 고지다. 지난 4월에는 50㎝의 눈이 쌓여 4월 적설량으로 최고를 기록하는 등 겨울이 유난히 긴 곳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지은 불꽃교회

막사 옆 언덕에 위치한 불꽃교회 십자가가 작열하는 태양빛을 받아 유난히 반짝인다. 가장 높고 험하고 춥고 바람 센 향로봉에 근무하는 장병들의 예배처소지만,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고지 위에 세워놓았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크다. 적벽돌로 지은 불꽃교회는 전군(軍)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힌다. 거센 바람을 견디기 위해 교회 건물에 버팀목을 괴어 놓은 것도 인상적이다.

교회를 지나면 조금 높은 곳에 국방부에서 운영하는 군사시설이 있고 그 위쪽에 있는 경비초소가 향로봉의 최정상이다. 관측초소 앞에는 '통일기원백두대간종주기념비'와 '반쪽국토 종주를 마치고'라고 쓴 한 산악회의 기념비도 보인다. 처참하게 싸움터에서 쓰러진 전우들의 모습을 기리며 오덕준 3군단장이 친필로 써놓은 기념석 문구가 눈시울을 붉히게 한다. 그 옆엔 국토종주 종착점을 알리는 표지목(標識木)이 세월에 바랜 채 장승처럼 버티고 섰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시작한 남한 쪽 백두대간은 대청봉, 칠절봉을 거쳐 향로봉에서 휴지부를 찍고, 백두대간의 허리를 조이고 있는 철조망이 걷힐 날만 기다리고 있다. 향로봉∼고성재∼삼재령(三峙嶺)까지가 백두대간의 남한구역이고 철조망 너머로 금강산이 이어진다.

대부분의 명산들은 지리산 천왕봉, 소백산 비로봉과 같이 산 이름 뒤에 높은 봉우리가 따라붙지만, 향로봉엔 산 이름이 없다. 향로봉의 원래 이름은 마기라산(磨耆羅山)이라고 한다. 향로봉은 높고 험준한 산머리에 늘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구름이 걸쳐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의 지도에는 마기라산은 있어도 향로봉이란 이름은 없다. 일제 강점기 때 우리의 산맥들을 어지럽게 갈라붙이고 향로봉과 신선봉을 금강산권으로 묶으면서 향로봉이란 이름의 일개 봉우리로 작명한 것이 아닌가 추측할 따름이다.

5각형의 관측소에서 마주 바라다 보이는 곳이 금강산이다. 망원경으로 바라보니 쾌청한 날씨 덕에 비로봉과 월출봉, 집성봉이 손에 잡힐 듯 지척의 거리다. 위치와 상황설명을 해주던 병장의 고향은 전남 장흥. 전라도에서 강원도 오지에 와 복무하려면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라는 말이 실감나겠다고 했더니 "요즘은 물 맑고 산 좋은 곳에 인제 와서 원통하다"로 바뀌었다며 구김살 없이 웃는다. 도로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지난 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을지부대 인근은 오지중의 오지여서 유행하던 말이다.

보송보송한 솜털 뽐내는 왜솜다리 군락지

정훈장교의 안내를 받으며 본격적인 야생화 탐사에 나섰다. 초소와 마주 보이는 고성재까지 능선 길을 따라 양쪽으로 야생화가 군락을 이뤄 피어나는 지역이다. 산림청 임업연구원은 지난 1995년부터 2000년까지 6년간 비무장지대와 인근지역의 산림생태계를 조사한 결과 희귀 동식물 88종과 국내 미기록종 9종이 발견됐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백두산 야생화로 남한에서 거의 발견되지 않았던 부채붓꽃, 크기가 3m나 되는 분홍바늘꽃, 미기록종인 노란막광대버섯 등이 향로봉 일대에서 확인됐다고 한다.

관측초소 옆 기념비부근에는 산오이풀꽃이 지천으로 피어 보랏빛 꽃술을 뽐낸다. 조금 내려가니 이동통로 부근에 왜솜다리가 무더기로 피어있다. 왜솜다리 군락지다. 에델바이스(고귀한 흰빛)로 더 많이 알려진 왜솜다리는 고산지대에만 자라는 세계적 희귀식물. 보송보송한 솜털을 드러낸 채 작열하는 태양아래 일광욕을 즐긴다. 높은 곳에 사는 만큼 햇볕을 좋아하고 햇볕을 좋아하는 만큼 갈증을 많이 느끼는 식물이어서 솜털 사이사이에 물을 보관했다가 수분을 공급한다. 솜털은 낙타등의 혹처럼 수분을 보관하는 일종의 물 창고다.

바위틈에 앙증맞게 피어있는 돌양지꽃이 발길을 잡는다.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구름 속에 섞여 있는 수분과 바위의 영양분을 섭취하며 자라는 돌양지꽃의 생명력이 놀랍다. 조금 더 내려가니 초원지대가 펼쳐진다. 드넓은 초원에 수많은 꽃들을 거느리며 인고의 세월에 속 살을 하얗게 드러낸 고사목은 한 폭의 그림이다. 길섶엔 야생의 상태에선 이미 희귀종이 되어 버린 참당귀가 밤색 꽃을 커다랗게 피웠다.

당귀의 연한 줄기는 식용으로 단오 무렵의 세시 먹거리였다. 줄기의 겉껍질을 벗겨내고 된장이나 고추장에 찍어먹으면 독특한 향기가 입안에 가득 퍼진다. 뻣뻣해진 잎을 뜯어 향기를 맡아보니 예전에 먹던 그 향기가 후각을 강하게 자극한다.

동그랗고 발그레한 꽃이 동자승의 얼굴을 닮은 동자꽃이 유난히 많다. 겨울채비를 하러 마을로 내려간 스님이 큰 눈에 길이 막혀 돌아오지 않자, 스님을 기다리던 동자승이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죽은 자리에 피어났다는 전설이 서려있어 애잔하다.

두메자운, 비로용담, 가솔송, 좀참꽃, 범꼬리, 개망초, 등 저마다 살가운 이름의 야생화들이 풀 섶 곳곳에서 얼굴을 내민다. 금매화가 은하수처럼 띠를 지어 펼쳐지고, 꽃잎을 손가락 사이에 놓고 비비면 노란 물이 금새 배어난다고 해서 이름 붙인 노란 똥풀도 녹색 잎 사이로 샛노란 꽃을 피우며 웃는다. 보라색 꽃이 예쁜 달구장풀도 보인다.

생명의 꽃 지키는 것은 우리 몫이다

초원지대를 지나니 울창한 숲길이다. 하늘도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침엽수와 활엽수가 어우러져 내뿜는 싱싱한 생명력이 도시에서 묻혀온 탁한 기운을 정화시켜준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이 길을 호젓하게 걷고 있다는 자체가 호사다. 숲 속 그늘에 누워 오수를 즐기던 산양이 인기척에 놀라 뛰쳐나올 것만 같은 울창한 숲길이 이어진다. 숲길 사이사이로 노란색 꼬깔모자를 연상시키는 노란물봉선화를 비롯, 당개지치와 홀아비꽃대, 꿩의 다리, 방아풀이 수줍은 듯 나뭇잎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다.

숲길을 빠져나오니 고지가 가로막는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작전지역이다. 뒤돌아보니 향로봉 정상의 관측초소가 아득하게 바라보인다. 프리드리히 실러가 말했던가. '꽃은 생명의 모든 것'이라고-. 생명을 지키듯 우리 꽃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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