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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No.1073 ] 쪽빛 가을하늘이 그립다

무엇이든 이규섭............... 조회 수 1299 추천 수 0 2004.10.09 16: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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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강화도 말도에서 바라 본 쪽빛하늘. 말도는 강원도 고성까지 이어지는 DMZ의 시발점이다.

2004년 10월 2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이규섭 (칼럼니스트, 시인)
http://columnist.org/kyoos

푸른 물이 뚝뚝 뜯는 듯한 쪽빛 하늘이나 눈이 시리도록 푸른 쪽빛 바다는 서럽도록 아름답다. 쪽빛 하늘을 이고 출렁이는 황금들판을 바라보면 가진 것이 없어도 넉넉하고 푸근하다. 맑고 높고 푸른 가을하늘을 이고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는 마음을 솜털처럼 가볍게 한다.

흙에서 자란 정지용 시인이 '파아란 하늘빛이 그립다'고 노래했듯,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필자도 쪽빛 하늘이 그립기는 마찬가지다. 가을 운동회 때 펄럭이던 만국기 사이로 보이던 파란하늘은 펄럭이는 꿈의 색깔이었고, 들판에 누워 바라보던 쪽빛하늘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뭉게구름은 설렘이었다.

우리나라사람들은 가을하늘을 닮은 쪽빛을 유난히 좋아했다. 고려청자를 보라. 완만한 곡선의 아름다움과 자연과 조화를 이룬 서정적인 문양도 빼어나지만 부드럽고 은근한 푸른빛에 한국인의 심성이 스며있다.

조상들은 고려청자에 가을 색을 담아 완상(玩賞)했을 뿐 아니라 푸른색 계통의 옷을 즐겨 입었다. 조선시대 때 황색과 홍색은 권력과 부의 상징으로 사용이 제한됐지만 청색은 일반인에게도 허용되어 선비에서 평민까지 남색(藍色)옷으로 멋을 부렸다. 청빈한 선비의 표표히 휘날리는 남빛 도포자락은 물론, 어머니와 누이들이 즐겨 입었던 남치마도 쪽(藍) 물을 들였다.

쪽을 염색에 이용한 역사는 무척 오래됐다. 3,000여년 전 이집트의 투탕카멘 피라미드의 미라를 쌌던 천이 쪽 물을 들인 아마였고, 우리나라도 백제시대 때 쪽으로 염색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 벽화에도 쪽을 썼다고 한다.

쪽에서 뽑아낸 푸른 색깔은 부드럽고 아름답다. 노란색은 치자, 붉은 색은 홍화나 소목, 보라색은 야생지초를 이용해 옷감에 자연의 색을 입혔다. 6.25 한국전쟁이후 화학염료가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천연염색은 사라져버렸다.

몇 년 전 전라남도 나주 영산강언저리에서 쪽 물을 들이는 윤병운 할아버지를 취재한 적이 있다. 당시 여든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불구하고 쪽빛을 닮아 건강미가 넘쳤다. 삼대 째 가업으로 이어 온 남(藍)염이지만 화학염색에 밀려 생계를 꾸릴 수 없어 객지로 떠돌다가 1983년부터 다시 쪽 물을 들이기 시작했다.      

길고 곧은 줄기에 자줏빛 꽃이 피는 쪽은 대개 3월 중순 파종하여 두 달 후에 옮겨 심고, 꽃대가 올라오는 8월 하순, 그 것도 이른 새벽 이슬이 걷히기 전에 베어낸다. 베어낸 쪽은 줄기 째 독에 밟아 넣고 물을 부은 뒤 돌로 눌러 놓는다. 이때 물은 흐르는 냇물을 사용한다.

1주일쯤 지나 쪽을 건져내면 독에 파란 물이 출렁거린다. 여기에 꼬막껍질이나 굴 껍질을 구워 만든 석회를 뿌리고 휘저으면 거품이 일어난다. 처음에는 흰색이다가 청색으로, 다시 자줏빛으로 변하면서 가지 빛깔의 거품이 이는 데 이를 '꽃거품'이라고 한다. 색깔이 깨어났음을 기별해주는 반가운 거품이다.

꽃거품이 인 쪽 물에 무명을 담그면 연한 옥빛으로 변한다. 쪽 물은 들이는 횟수에 따라 옥색부터 남색, 짙은 감색까지 푸름의 정도가 다르다. 쪽빛을 들인 무명을 텃밭 빨랫줄에 길게 늘어놓으니 마음에도 파란 물이 드는 듯 했다.

화학염료로 물들인 옷은 화려하지만 천연염료로 물들인 옷은 색상이 부드러워 싱싱한 자연을 걸친 듯 은은한 멋이 풍긴다. 쪽은 방부·방충효과가 뛰어나고 좀이 쓸지 않아 미술품을 배접(종이를 겹쳐 붙임)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는 기록도 있다.

영산강지역에 쪽 물 염색이 성행했던 것은 비단 '나(羅)자'를 쓰는 나주엔 쪽 물을 들일 무명 옷감이 많이 생산되었고, 바다가 가까워 석회재료로 쓰이는 굴이 쉽게 채취되었을 뿐 아니라 밝은 햇빛에 건조하기 쉬운 조건을 고루 갖췄기 때문이다.

쪽 물을 들이는 윤병운 노인의 솜씨는 나라에서도 인정하여 200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15호 '염색장(染色匠)'으로 지정됐고, 쪽빛을 깨우는 작업은 4대로 이어져 가을하늘빛을 재현해내고 있다.

요즘은 지구온난화에 대기가 오염된 탓으로 가을이 되어도 서럽도록 아름다운 쪽빛 하늘을 보는 날이 흔치않다. 하늘만 흐려진 게 아니다. 살림살이는 경제불황으로 쪼들리고, 직장인들의 마음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뿌옇게 흐려져 푸른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 성인 10명 중 7명이 "희망이 없다"고 응답한 여론조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유난히 무덥고 짜증스럽던 여름도 소슬바람에 무릎을 꿇었다. 계절의 순환처럼 세상살이도 마음먹기 나름이다. 이 가을, '쪽에서 나온 푸른 물감이 쪽빛보다 더 푸르다'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의미를 되새기고 마음에라도 쪽 물을 들이며 희망의 끈을 놓지 말자.

- 전북은행 사보 '만남의 창' 가을호 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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