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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1월 29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홍순훈 (칼럼니스트, 아하출판사 대표)
http://columnist.org/hsh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지난 9월 6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이 법은 봉건제도의 개혁과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 수호를 위한 동학농민혁명참여자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 이를 계승 발전시켜 민족 정기를 선양하며, 동학농민혁명참여자와 그 유족의 명예를 회복함을 목적으로 한다'(법 1조)는 것이다.
이 동학혁명법(아래도 같이 씀)은 이른바 '과거사 진상 규명' 또는 '역사 바로세우기'를 위해 만들었다는 여러 개의 법들 중 하나일 것이다. 역사가 무슨 작대기도 아니고 한번 지나갔으면 그만이지 어떻게 바로세우겠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법은 그 내용에 다음과 같은 잘못들이 담겨 있어 즉시 폐기해야만 될 악법이다.
먼저 이 법을 만든 목적을 설명하기 좋게 나눠 써 놓는다.
1. 동학농민혁명참여자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린다.
2.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민족 정기를 선양한다.
3. 혁명참여자와 그 유족의 명예를 회복한다.
1번과 2번에 쓴 '애국애족'(愛國愛族)은 110년 전의 개념을 나타낸 것이다. 이 '애국'은, 일부 학자들이 동학혁명의 성격을 말할 때 상투적으로 쓰는 반봉건[봉건제도의 개혁]과 반침략[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 수호]을 아울러 압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대부분 학자들은 조선 사회를 '봉건제도(체재)'라고 규정하지 않고 있다. 있지도 않았던 체재에 '반'(反)이니 '개혁'이니를 붙일 수 없음은 당연하다. 사실 혁명참여자들의 나라[國]는,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을 정점으로 한 관료통치체재의 왕조(王朝)였다. 그들 주장은 이 왕조를 폐지하자는 것이 아니고, 부패한 관료들을 몰아내고 외세를 배척하여 보다 좋은 왕조[輔國]를 만들자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혁명참여자들의 애족(愛族)은 '사람 사랑'이다. 그 사람은, 관료들 착취와 가혹한 세금에 시달리는 일반 백성 그리고 백정, 노비, 청춘과부 등 사회적 약자다. 애족이라 하여 요즘들 말하는 '민족'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민족은 '같은 사람'이란 동질성을 나타낸 말이다. 양반과 상놈, 지배층과 피지배층이란 이질적 신분으로 철저히 분리됐던 110년 전 조선 사회에서, 혁명참여자들이 한반도에 거주하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애족' 바꿔 표현하면 요즘의 '민족애' 정신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들이 외세를 배척한 것도 마찬가진데, 양반, 지배층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착취 세력으로 왜놈(또는 양놈)을 인식했을 뿐이다. 동학혁명을 '민족 운동'이라 규정하는 것은 민족의 개념을 잘못 설정한 결과다.
이와 같이 '애국애족'이란 낱말의 뜻이 동학혁명 당시와 요즘은 분명히 다르다. 그럼에도 강제력을 갖고 획일화를 추구하는 법으로,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 그를 '계승 발전시켜', '민족 정기를 선양'한다는 것은 맹목적인 국수주의를 드러낸 것일 뿐이다. 헌법에 밝혀 놨듯, 대한민국의 뿌리든 애국애족 이념이든 1919년 3.1운동 이전의 사물에서 찾으면 안 된다. 이 원칙을 어긴 동학혁명법은 왕조 부활 또는 건국을 합법화시킨 의미도 있으며, 민주공화국인 한국을 부정하는 반역의 뜻도 들어 있다. 한반도에 독립국가가 없던 일제 때의 '항일 정신'을 기리고 계승 발전시킨다는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 때는 대한민국의 잉태기(孕胎期)였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위에 3번으로 쓴 '혁명참여자와 그 유족의 명예를 회복한다'가 동학혁명법을 만든 제일 목적일 것이다. 법 2조에, 동학농민혁명참여자는 '1894년 3월에 봉건체제의 개혁을 위하여 1차로 봉기하고, 같은해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자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참여자'라 규정했다. 그리고 그 유족은 '혁명참여자의 자녀 및 손자녀'라는 것이다.
최근에 명예 회복이란 말이 유행처럼 번졌다. 지난 시절, 자기 또는 친족 누가 압박과 설움을 받았으니 정부가 보상하라는 것이다. TV를 보면, 그런 잘못을 저지른 자들은 털끝 하나 안 다치고 호화주택에 호의호식하고 있는 반면, 애꿎은 국민들만 보상에 소요되는 세금 납부에 등골이 휘는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혁명참여자들에게 명예 회복이 필요하다면, 회복이 필요하게 만든 가해자인 조선왕조나 일본제국이 그런 조치를 했어야지, 왜 110년 후 한국 정부가 나서는가? 이 정부의 명예 회복 조치가 옳다고 주장한다면, 가깝게는 1862년 삼남의 농민 봉기나 1811년 평안지역 독립운동(홍경래 난)도 같은 법적 조치를 해 줘야 마땅하다. 결국에는 조선 5백년 동안의 모든 억울한 조선인의 명예를, 한국 정부가 한국인의 세금을 써 가며 회복시켜 줘야만 한다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더구나 '유족의 명예를 회복'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혁명참여자의 자녀 및 손자녀가 유족이라고 했다. '자녀'가 살아 있다면 110세가 최연소자로, 지금 단 1명도 이 땅에 없다. 이 죽은 자녀 명예를 왜 그리고 어떻게 정부가 회복시키는가?
'손자녀'로 내려오면 1명의 혁명참여자에 딸린 유족이 몇 10명 이상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들이 동학혁명에 참여한 할아버지로 말미암아 어떤 불명예나 불이익을 당했다는 얘기나 글을 듣고 본 적이 없다. 오히려 한국 정부 수립 후, '동학란'이 '동학혁명'으로 그 의의를 격상하는 재평가를 받으면서, 혁명에 관련된 인물 등 모든 사항이 크게 명예스러워졌으며, 각가지 기념 사업들이 수십년 동안 계속됐다. 이런 상황인데도 새삼스럽게 법을 만들고 정부가 나서서 유족의 명예를 회복하니 어쩌니 한다는 것은, 역사의 순수성보다는 권력의 음모만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명예 회복의 당위성도 납득할 수 없지만, 실제로 혁명참여자와 그 유족을 과연 공정하며 정확하게 심사하고 결정할 수 있는가도 의문이다. 이 작업을 위해, 명예회복심의위원회(국무총리 소속)와 실무위원회(특별시장, 광역시장, 도지사 소속)를 설치한다(법 3조-4조)고 되어 있다. 혁명참여자와 그 유족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자는, 이 심의(실무)위원회에 관계 서류를 제출하고, 여기서 그 서류를 심의하고, 의결하면 유족으로 등록된다(법 5조-7조)는 것이다.
동학혁명은 전국적인 대사건이었다. 1차 때는 전라, 충청 2 도의 거의 3분의 1 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2차 때는 전라도에서만 11만5천명이 참여했다고 기록돼 있으며, 전국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사망자만 해도, 1차 때 전주에서만 5백여명, 9월 이후 몇 개월 동안 각지에서 수십, 수백명씩 그리고 11월 충청도 공주 지역의 6-7일간 전투에서는 산을 덮을 정도로 전사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당시의 재판 기록, 동학 관계문서 등 신빙성 있는 자료는 얼마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이런 자료에 극소수의 혁명참여자들 이름만이 나온다. 사건의 규모에 비해 참여한 사람들 이름은 턱없이 적은데, 이렇게 된 까닭은 관군에게 붙잡히면 난적이니 역적이니 하여 자신이 살해됨은 물론 가족에게도 피해가 감으로 누구도 신분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들도 보복이 두려워 특히 전사자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 전개에서, 110년이 지난 이제 누가 '유족'이라 칭하고 무엇을 근거로 '관계 서류'를 꾸밀 수 있다는 것인지 의아하다. 겨우 25년 전 대명천지에 발생한 5.18민주화운동의 유족마저도 확실치 않아 계속 문제가 됐던 것 아닌가?
그리고 1, 2차 봉기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명예를 회복시킨다는, 법의 기준부터 잘못된 것이다. 1894년 혁명 후에도 계속 살아 남았던 사람들은, '만패가산(萬敗家産) 유리걸식' 즉 집안이 쫄딱 망해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비렁뱅이 생활을 했던 사람들, 항일 의병 활동에 가담했던 사람들, 화적이 되어 양민을 괴롭히던 사람들, 흑의단발(黑衣斷髮)을 솔선수범하고 국권을 일제에 넘기는 데 앞장섰던 사람들 ......다양하다. 이 다양함을 무시하고 반혁명적이며 반인륜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마저 혁명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명예를 회복시킨다는 것은, 진정한 혁명참여자들을 욕보이는 것이며 동학혁명을 먹칠하는 것이다. 혁명 이후 개인들 삶을 어찌 일일이 알 수 있는가 반문할 지경이면, 애시당초 법으로 역사를 재단할 생각을 말았어야 했다는 답이 돌아갈 것이다.
동학혁명법은 호남과 충청권을 중심으로 전국에 많은 혁명가 및 혁명가집안[家門]을 만들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북한의 '조선력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력사'는, 김일성의 증조부인 김응우의 지휘로 평양 군민들이 미국 '샤만'호를 침몰시킨 1866년을 근대사 시작의 해로 잡고 있다. 그리고 김일성이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한 1926년부터 현대사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이런 혁명가집안 출신 김정일이 1994년 대를 물려 권력을 쥔 것을 '력사'의 필연성이며 민족의 영광이라 적고 있다. 동학혁명법은 북한의 '력사'와 동조(同調) 현상을 일으켜 만들어진 것이라 볼 수 있으며, 이 땅에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신분 계급제 사회를 구축할 위험성이 있는 악법이다.
-2004.11.29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홍순훈 (칼럼니스트, 아하출판사 대표)
http://columnist.org/hsh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지난 9월 6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이 법은 봉건제도의 개혁과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 수호를 위한 동학농민혁명참여자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 이를 계승 발전시켜 민족 정기를 선양하며, 동학농민혁명참여자와 그 유족의 명예를 회복함을 목적으로 한다'(법 1조)는 것이다.
이 동학혁명법(아래도 같이 씀)은 이른바 '과거사 진상 규명' 또는 '역사 바로세우기'를 위해 만들었다는 여러 개의 법들 중 하나일 것이다. 역사가 무슨 작대기도 아니고 한번 지나갔으면 그만이지 어떻게 바로세우겠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법은 그 내용에 다음과 같은 잘못들이 담겨 있어 즉시 폐기해야만 될 악법이다.
먼저 이 법을 만든 목적을 설명하기 좋게 나눠 써 놓는다.
1. 동학농민혁명참여자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린다.
2.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민족 정기를 선양한다.
3. 혁명참여자와 그 유족의 명예를 회복한다.
1번과 2번에 쓴 '애국애족'(愛國愛族)은 110년 전의 개념을 나타낸 것이다. 이 '애국'은, 일부 학자들이 동학혁명의 성격을 말할 때 상투적으로 쓰는 반봉건[봉건제도의 개혁]과 반침략[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 수호]을 아울러 압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대부분 학자들은 조선 사회를 '봉건제도(체재)'라고 규정하지 않고 있다. 있지도 않았던 체재에 '반'(反)이니 '개혁'이니를 붙일 수 없음은 당연하다. 사실 혁명참여자들의 나라[國]는,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을 정점으로 한 관료통치체재의 왕조(王朝)였다. 그들 주장은 이 왕조를 폐지하자는 것이 아니고, 부패한 관료들을 몰아내고 외세를 배척하여 보다 좋은 왕조[輔國]를 만들자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혁명참여자들의 애족(愛族)은 '사람 사랑'이다. 그 사람은, 관료들 착취와 가혹한 세금에 시달리는 일반 백성 그리고 백정, 노비, 청춘과부 등 사회적 약자다. 애족이라 하여 요즘들 말하는 '민족'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민족은 '같은 사람'이란 동질성을 나타낸 말이다. 양반과 상놈, 지배층과 피지배층이란 이질적 신분으로 철저히 분리됐던 110년 전 조선 사회에서, 혁명참여자들이 한반도에 거주하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애족' 바꿔 표현하면 요즘의 '민족애' 정신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들이 외세를 배척한 것도 마찬가진데, 양반, 지배층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착취 세력으로 왜놈(또는 양놈)을 인식했을 뿐이다. 동학혁명을 '민족 운동'이라 규정하는 것은 민족의 개념을 잘못 설정한 결과다.
이와 같이 '애국애족'이란 낱말의 뜻이 동학혁명 당시와 요즘은 분명히 다르다. 그럼에도 강제력을 갖고 획일화를 추구하는 법으로,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 그를 '계승 발전시켜', '민족 정기를 선양'한다는 것은 맹목적인 국수주의를 드러낸 것일 뿐이다. 헌법에 밝혀 놨듯, 대한민국의 뿌리든 애국애족 이념이든 1919년 3.1운동 이전의 사물에서 찾으면 안 된다. 이 원칙을 어긴 동학혁명법은 왕조 부활 또는 건국을 합법화시킨 의미도 있으며, 민주공화국인 한국을 부정하는 반역의 뜻도 들어 있다. 한반도에 독립국가가 없던 일제 때의 '항일 정신'을 기리고 계승 발전시킨다는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 때는 대한민국의 잉태기(孕胎期)였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위에 3번으로 쓴 '혁명참여자와 그 유족의 명예를 회복한다'가 동학혁명법을 만든 제일 목적일 것이다. 법 2조에, 동학농민혁명참여자는 '1894년 3월에 봉건체제의 개혁을 위하여 1차로 봉기하고, 같은해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자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참여자'라 규정했다. 그리고 그 유족은 '혁명참여자의 자녀 및 손자녀'라는 것이다.
최근에 명예 회복이란 말이 유행처럼 번졌다. 지난 시절, 자기 또는 친족 누가 압박과 설움을 받았으니 정부가 보상하라는 것이다. TV를 보면, 그런 잘못을 저지른 자들은 털끝 하나 안 다치고 호화주택에 호의호식하고 있는 반면, 애꿎은 국민들만 보상에 소요되는 세금 납부에 등골이 휘는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혁명참여자들에게 명예 회복이 필요하다면, 회복이 필요하게 만든 가해자인 조선왕조나 일본제국이 그런 조치를 했어야지, 왜 110년 후 한국 정부가 나서는가? 이 정부의 명예 회복 조치가 옳다고 주장한다면, 가깝게는 1862년 삼남의 농민 봉기나 1811년 평안지역 독립운동(홍경래 난)도 같은 법적 조치를 해 줘야 마땅하다. 결국에는 조선 5백년 동안의 모든 억울한 조선인의 명예를, 한국 정부가 한국인의 세금을 써 가며 회복시켜 줘야만 한다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더구나 '유족의 명예를 회복'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혁명참여자의 자녀 및 손자녀가 유족이라고 했다. '자녀'가 살아 있다면 110세가 최연소자로, 지금 단 1명도 이 땅에 없다. 이 죽은 자녀 명예를 왜 그리고 어떻게 정부가 회복시키는가?
'손자녀'로 내려오면 1명의 혁명참여자에 딸린 유족이 몇 10명 이상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들이 동학혁명에 참여한 할아버지로 말미암아 어떤 불명예나 불이익을 당했다는 얘기나 글을 듣고 본 적이 없다. 오히려 한국 정부 수립 후, '동학란'이 '동학혁명'으로 그 의의를 격상하는 재평가를 받으면서, 혁명에 관련된 인물 등 모든 사항이 크게 명예스러워졌으며, 각가지 기념 사업들이 수십년 동안 계속됐다. 이런 상황인데도 새삼스럽게 법을 만들고 정부가 나서서 유족의 명예를 회복하니 어쩌니 한다는 것은, 역사의 순수성보다는 권력의 음모만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명예 회복의 당위성도 납득할 수 없지만, 실제로 혁명참여자와 그 유족을 과연 공정하며 정확하게 심사하고 결정할 수 있는가도 의문이다. 이 작업을 위해, 명예회복심의위원회(국무총리 소속)와 실무위원회(특별시장, 광역시장, 도지사 소속)를 설치한다(법 3조-4조)고 되어 있다. 혁명참여자와 그 유족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자는, 이 심의(실무)위원회에 관계 서류를 제출하고, 여기서 그 서류를 심의하고, 의결하면 유족으로 등록된다(법 5조-7조)는 것이다.
동학혁명은 전국적인 대사건이었다. 1차 때는 전라, 충청 2 도의 거의 3분의 1 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2차 때는 전라도에서만 11만5천명이 참여했다고 기록돼 있으며, 전국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사망자만 해도, 1차 때 전주에서만 5백여명, 9월 이후 몇 개월 동안 각지에서 수십, 수백명씩 그리고 11월 충청도 공주 지역의 6-7일간 전투에서는 산을 덮을 정도로 전사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당시의 재판 기록, 동학 관계문서 등 신빙성 있는 자료는 얼마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이런 자료에 극소수의 혁명참여자들 이름만이 나온다. 사건의 규모에 비해 참여한 사람들 이름은 턱없이 적은데, 이렇게 된 까닭은 관군에게 붙잡히면 난적이니 역적이니 하여 자신이 살해됨은 물론 가족에게도 피해가 감으로 누구도 신분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들도 보복이 두려워 특히 전사자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 전개에서, 110년이 지난 이제 누가 '유족'이라 칭하고 무엇을 근거로 '관계 서류'를 꾸밀 수 있다는 것인지 의아하다. 겨우 25년 전 대명천지에 발생한 5.18민주화운동의 유족마저도 확실치 않아 계속 문제가 됐던 것 아닌가?
그리고 1, 2차 봉기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명예를 회복시킨다는, 법의 기준부터 잘못된 것이다. 1894년 혁명 후에도 계속 살아 남았던 사람들은, '만패가산(萬敗家産) 유리걸식' 즉 집안이 쫄딱 망해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비렁뱅이 생활을 했던 사람들, 항일 의병 활동에 가담했던 사람들, 화적이 되어 양민을 괴롭히던 사람들, 흑의단발(黑衣斷髮)을 솔선수범하고 국권을 일제에 넘기는 데 앞장섰던 사람들 ......다양하다. 이 다양함을 무시하고 반혁명적이며 반인륜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마저 혁명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명예를 회복시킨다는 것은, 진정한 혁명참여자들을 욕보이는 것이며 동학혁명을 먹칠하는 것이다. 혁명 이후 개인들 삶을 어찌 일일이 알 수 있는가 반문할 지경이면, 애시당초 법으로 역사를 재단할 생각을 말았어야 했다는 답이 돌아갈 것이다.
동학혁명법은 호남과 충청권을 중심으로 전국에 많은 혁명가 및 혁명가집안[家門]을 만들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북한의 '조선력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력사'는, 김일성의 증조부인 김응우의 지휘로 평양 군민들이 미국 '샤만'호를 침몰시킨 1866년을 근대사 시작의 해로 잡고 있다. 그리고 김일성이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한 1926년부터 현대사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이런 혁명가집안 출신 김정일이 1994년 대를 물려 권력을 쥔 것을 '력사'의 필연성이며 민족의 영광이라 적고 있다. 동학혁명법은 북한의 '력사'와 동조(同調) 현상을 일으켜 만들어진 것이라 볼 수 있으며, 이 땅에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신분 계급제 사회를 구축할 위험성이 있는 악법이다.
-2004.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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