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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요14:1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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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재철 목사 |
참고 : | 주님의교회 주일 설교말씀 / 1998년 / 2월 15일 |
4년전 안식년때 미국 몬타나주의 옐로우스톤(Yellow Stone)강에서 낚시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배경이기도 한 실제의 몬타나와 옐로우스톤강은 영화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그림이었습니다. 그 환상적인 강 위에서 배를 타고 강물이 흐르는 대로 흘러가며 낚시 를 했습니다. 쇠붙이로 만들어진 미끼를 멀리 던졌다가 릴(reel)을 감아 올리면서 고기를 잡는 캐스팅(Casting)낚시 였습니다. 배의 노를 잡고 우리 일행을 안내하던 사람은 폴(Paul)이란 이름 의 젊은이 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그 강과 더불어 자랐습니다. 대학에 서 건축을 전공한 그는 한때 건축업에 종사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옐로우스톤 강을 잊을 수 없어 사표를 던지고 낙향하여 낚시 안내원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가는 젊은이 였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옐로우스톤강의 낚시에 관한 한 자타가 공인하는 제1인자였습니다. 배를 타고 드디어 낚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고기는 쉽사리 잡히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모조 미끼를 던지고 쉴새없이 릴을 감아 올렸지만 번번히 허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배의 노를 잡고 있는 폴은 우리 일행에게 아무런 도움말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기를 수십분여―옐로우스 톤에서 고기 잡기가 쉽지않다는 것, 아무 데나 낚시를 던져서는 아무 것도 건져올릴수 없다는 것 을 터득했을 때, 마치 그때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그제서야 폴은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폴이 손가락으로 지시하는곳을 향해, 그가 던지라 할 때 낚시를 던지고 감아 올리면 열번 중 일곱번은 어김없이 팔뚝만한 송어가 잡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물살의 속도, 흐름의 방향 그 리고 지형에 따라 고기가 어디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여러시간이 지나 낚시가 끝나갈 무렵이였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고기를 잡았다가 놓아 주었는지 헤아릴 수도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마침 그때 다른 배 한척을 만났습니다.엘로우스톤에 관광차 왔다가 홀로 낚시 나온 미국 관광객의 배였습니다. 일행중 한사람이 그 미국인을 향해 고기를 얼마나 잡았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그의 대답은 아침부터 시작했건만 그때까지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똑같은 강 위에서 똑같은 시간 동안 똑같이 낚시줄을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일행이 셀수없을 만큼 많은 고기를 잡는 동안 그 사람은 단 한 마리도 건져 올 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에게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옐로우스톤강에 능통한 폴이 우리와 함께 하였기 때문입니다. 온종일토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미국인 관광객이 홀로 배를 빌려 타고 낚시에 나선 것을 보면, 그 역시 낚시에 일가견이 있 는 사람임에 분명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관광지에서 감히 홀로 보트 낚시 나설 엄두를 내지 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고향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낚시꾼이었는지 는 모르나 낯선 관광지에서의 그는 철저하게 빈손이었습니다. 그것은 초행지 관광객에게는 얼마 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옐로우스톤에서 태어나 그 강에서 40년 가까이 낚시만 하며 살아온 폴이 고기잡이를 나서지 않으면 모르되 일단 나선 이상, 그 관광객처럼 온종일 피라 미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채 허탕만 친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 갈리리 바다에서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진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가 초행길인 관광객들 이 아닙니다. 그들은 갈릴리에서 태어나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입니다. 갈릴리 바 다의 물결 흐름, 파도 모양만 보아도 고기가 어디에 있을는지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갈릴리 최고 의 어부들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하나같이 옐로우스톤의 폴과 같은 전문인들이었습니다. 그들 이 혼자도 아닌 떼거리로 나가 밤새도록 그물을 던지고서도 단 한마리도 잡지 못한다는 것은, 적 어도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최악의 경우라 할지라도 고기잡이에 나선 이상 그들중 누군가는 송사리 한 마리라도 건져 올리는 것이 상식적으로 타당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날 밤 완전무결한 실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많은 어부들중 한 마리라도 잡은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이변 중의 이변이었습니다. 그때 바닷가에 서 계시던 예수님께서 본문 6절 상반절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제자들은 밤이 맞도록 수도 없이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어찌 한 쪽으로만 그물을 던졌겠습니까? 깊은 곳, 얕은 곳, 오른쪽, 왼쪽, 전후 사방 - 그물을 던지지 않 은 곳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새삼스럽게 그물을 오른편에 한번 더 던져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바닷가 출생이 아니셨습니다. 바닷가에서 잔 뼈가 굵은 바다의 사람이 아니셨습니다. 내륙지방인 베들레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께서는 에집트 를거쳐 바다와는 거리가 떨어진 산동네 나사렛에서 자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세속적 직업을 굳이 따지자면 고기잡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목수셨습니다. 한마디로 그분은 직업적이고 전 문적인 어부가 아니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밤새도록 갈릴리 바다를 샅샅이 뒤지고서도 실패한 제자들에게 오른편에 한번 더 그물을 던져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상식적으로는 가당치 도 않은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밤새 실패만 거듭했던 제자들은 한번 더 오른 편에 그물을 던졌 고, 본문 6절 하반절은 그 결과를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방금 전까지 물고기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던 바다, 물고기의 씨가 아예 말라버린 것 같 던 바로 그 바다에서 순식간에 그물을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잡힌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옐로우스톤에서 잔뼈가 굵은 폴이 하루종일 고기잡이에 실패하다가 낯선 관광객의 조언을 받고서야 고기통이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은,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상식을 뒤엎는 이 갈릴리 사건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상식과는 궤를 달리하는 주님의 상식, 진리의 순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만약 이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한 마리의 고기도 건져 올리지 못한 채 빈손으로 철수하였더라면 적어도 그들에게 있어 그날 하루는 아무 의미없이 버려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종 순간 주님의 말씀 안에서 고기를 건져 올리므로 비로소 그날의 의미가 살아난 것입니다. 새벽녘에 마지막으로 던진 그물에 잡혀 올라온 물고기가 가치롭 다면, 그것은 물고기의 많은 양 때문이 아닙니다. 그 물고기 때문에 제자들의 삶속에서 소멸될 뻔했던 그날의 의미가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관점에서 마지막 순간 건져 올린 물고기는 단 순한 물고기가 아닙니다. 바로 제자들이 그리스도안에서 얻은 삶의 의미요, 앞으로 계속 그리스 도안에서 추구해야 할 인생의 의미였습니다.
본문의 갈릴리 바다를 머리속에 그려보십시오. 제자들은 넓고 넓은 바다를 밤새도록 휘젓고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짓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 에 던지라'고 말씀하실 때 그 오른 편이란, 광할한 갈릴리 바다에 비하면 바늘구멍보다 더 작은 한 점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 안에서 그 한 점에 머물렀을 때에, 제자들은 바로 그 곳에서 삶의 의미를 건져올린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광활하고 거대하고 웅장한 것을 얻었다 할지 라도 주님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있을 수 없지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와 함 께라면 지극히 작은 것 속이라 할지라도 참된 의미가 있다는 것―바로 이것이 본문 속의 갈릴리 사건을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깨워 주시는 주님의 상식, 진리의 순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우리 인생의 왼편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왼편이란 우리 자신 속에서 우리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것입니다. 도대체 머지않아 공동묘지에서 흙으로 썩어져 버릴 우리 속에 허망함 외에 무슨 진정한 의미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참된 믿음이란 우리 인생의 오른편을 좇는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말씀 안에서 내 인생의 참된 의미를 추구하는 것입니 다. 주님께서 주님안에서 내 인생에 부여 해 주시기를 원하는 주님의 의미를 찾아나서는 것입니 다. 이 의미를 찾을 때 우리의 생이, 우리의 하는 일이, 비록 밀알 처럼 작다 할지라도 우리의 인생은 무한한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우리가 얻은 그 의미는 우리의 의미가 아니라 영원하신 예 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6월 셋째 주일로 저의 임기가 끝난 뒤 저의 거취에 대한 신문보도와 관련하여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시기에, 이 시간을 빌어 잠시 설명 드리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작년 가을 당회는 저의 퇴임 후에 5년동안 제가 해외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재 정을 지원한다는 결의를 해주었습니다. 목사란 일평생 공부해야 하기에 특별히 학생의 신분으로 되돌아가 공부한다는 계획을 가져 본 적이 없었지만, 그것이 또 다른 순종이요 겸손 일수 있겠다 는 생각과 아울러, 퇴임 후에 제가 서울에 있지 않는 것이 후임 목사님과 주님의교회에 덕이 될 것이라는 평소의 소신으로 인해 당회의 결의를 수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작년 11월부터 급습 한 IMF 태풍으로 급등하는 환율을 보면서 저 자신의 개인적인 일을 위해 교회로 하여금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게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금년 1월 6일 정기 당회때 저를 위한 당회의 결의사항을 사양하기로 하였음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한인교회로부터 장문의 팩스를 받게 되었습니다. 교민 4가정, 유학생 9명, 정부 파견 주재원 및 아이들을 포함하여 매주 60명∼70명이 모이는 그 교회에 목사로 와서 도와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온 팩스들과 전화 내용들을 종합하여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교회는 재정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교회이기 때문에 저희 가족이 다 가는 것은 감당할 수 없으므로 저 혼자 와서 목회를 해 달라는 것입니다. 저 혼자 가는 것도 주님의교회로부터 일부 재정지 원을 받아서 오라는 것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닌 최소한 3년간을 말입니다. 물론 그 곳의 사정이 워낙 열악해서 이겠지만, 자신들은 가족과 함께 살면서 가족을 둔 채 혼자 3년간이나 와 달라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주문이었습니다.
게다가 개인적으로는 정말 더 이상 목회를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었지만, 그 제의를 받은 지 엿새만에 가겠노라고 통보를 했습니다. 먼저는 그곳 제네바 한인교회의 딱한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임영수 목사님의 간곡한 권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이 저의 강청을 받아들여 주님의교회 강단에 서 주시기로 했는데 제가 그분의 권유를 거절한다면, 그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곳이야말로 제가 새로이 그물을 던져야 할 제 인생의 오른 편임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나이 들어 신학교에 다니면서 하나님께 기도 드리던 제목중 두 가지가 생각났습니다.
첫째는 제가 만약 목회를 하게 된다면 교회로부터 상처받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목회하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제네바 한인 교회는 세워진지 20년이나 지났지만 분열의 상처를 지닌 교회 였습니다. 목회자를 구할 형편이 되지 못해 제네바에서 기차로 2시간 떨어진 베른 한인 교회의 김도현 목사님이 주일 오후에 한 번 설교하는 것으로 교회의 명맥을 유지 해왔는데 그나마 불가능해지고 만 것입니다. 베른 교회의 목사님이 제네바 교회까지 설교하는 것은 입국 목적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작년 여름, 스위스 정부가 금년 2월 말일부로 김목사님의 제네바 교회 설교를 금지시켰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제네바 한인 교회는 작년부터 황급히 목회자를 찾아 나섰고 모 교회의 부목사님이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네바의 사정을 다 알게 된 그 분이 제네바행 을 포기해 버렸고, 달리 지원자가 나서지 않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제게 요청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저의 퇴임소문이 퍼지면서 저의 뜻과는 무관하게 국내외의 여러 교회와 기관들이 청빙제의를 해 올때마다 제가 부담없이 거절할 수 있었던 것은, 그곳들은 얼마든지 더 좋은 분을 모실만 한 규모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네바 한인교회의 경우 지원자가 없어 목회자를 모 실 수 없다면 그들은 소외된 자들이 분명했고, 옛날 제가 드렸던 기도를 기억하고 계시는 주님께 서 저를 그곳으로 부르시고 계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학교에서 드리던 기도 중 기억나는 두 번째 기도제목이 있었습니다. 37살에 신학교에 입학 한 저는 40살이 되는 해에 졸업하였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믿음이란 헛된 내뜻을 쫓던 허망한 바다―곧 내 인생의 왼편을 버리고,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내 인생의 오른편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리스도안에서 그들의 오른편을 추구했을 때, 의미 없이 그 공허하기만 하던 갈릴리 바다가 삽시간에 진리와 생명의 참된 의미로 충만하였음을 잊지마십시오.
물에 계신 주님께서 그들이 밤새도록 실패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셨음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이 오른편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바로 일깨워 주시기 위한 배려요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사상 유래 없는 경제 위기를 맞이하여 기업이 도산했습니까? 직장을 잃었습니까? 막대한 경제적 피해로 인한 고통속에 있습니까? 그러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인생의 오른편을 추구할 은총의 기회입니다. 지금 주어진 여러분의 상황을 여러분 인생의 오른편이 되게 하십시오. 오른편에만 참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주어진 상황의 의미를 찾으십시오. 그때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가 잡혀 올라오듯 전혀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에집트의 왕궁에서 왕자로 살던 모세가 하루아침에 미디안 광야의 양치기로 전락했습니다. 그것은 모세에게 있어서 절대절명의 경제적 위기요 정체성의 위기요 전 인생의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결코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그 상황을 주신 주님의 말씀 안에서 인생의 새로운 의미를 찾고 정립하였습니다.
그 결과 에집트 왕궁에 비한다 면 초라하기 짝이없는 미디안이란 볼품없는 그 한 지점은, 모세가 출애굽의 지도자로 거듭나는, 새로운 모세를 위한 모세 인생의 진정한 오른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느냐, 내가 현재 어디에 거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전 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내 인생의 오른편을 추구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인생의 오른편을 쫓는 사람, 그리스도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이 어떤 경우에도 주저 않지 않음은, 그리스도안에서 얻은 의미는 영원한 의미요, 영원한 것을 쓰러트릴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는 존재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허한 갈릴리 바다와 같은 이 세상 속에서, 우리의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의미 없이 인생의 빈 그물을 던지던 우리를 향하여 주님께서 오늘 아침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불과 세달 전 까지만 해도 우리는 만불 소득을 자랑했습니다.
주님보다 그것을 더 자랑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삶이었는지 지금 우리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아니 그런 삶의 의미 없음을 절감케 해주신 주님의 은총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까지 인내하며 기다려 주신 주님께서 이 아침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야 함을 깨우쳐 주심을 더욱 감사드립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진정한 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이 상황을 주신 주님 안에서 참된 삶의 의미를 되찾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말씀 안 에서 영원한 삶의 의미를 회복하게 하여주옵소서. 그리하여 오늘의 이 위기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두신 가나안을 향한 출애굽의 시발점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의미 없이 거대한 것 보다 의미 있는 작은 것의 참된 가치를 깨닫는 지혜와, 그 지혜를 실천하는 용기를 허락해 주옵 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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