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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예수를 기다리며

이사야 나무............... 조회 수 2089 추천 수 0 2009.04.17 15: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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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9:6-7 
설교자 : 김기동 자매 
참고 : 2007.12.2 새길교회 주일설교 

이사야 9:6-7; 누가복음 2:39-40, 51-52

오늘은 대림절 첫 주입니다. 대강절이라고도 하지요. Advent, 즉 하나님이 강림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탄절까지 4주간 동안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교회의 절기 중 하나입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은 왜 하필 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을까요? 다니엘이 본 환상처럼 하늘 구름을 타고 나타난다든지(단 7:13), 아니면 엘리야가 승천할 때처럼 불말과 불병거 타고 장엄하게 오면(왕하 2:11) 그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다’라고 믿었을텐데요.

4복음서는 일종의 위인전기와 같은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그 주인공은 예수이고, 때는 초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하던 때였고, 공간적 배경은 로마 변방의 보잘것없는 식민지 유대 땅입니다. 그런데 네 복음서는 같은 주인공 예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그 내용이 조금씩 다릅니다. 마태와 누가복음이 마가복음과 요한복음보다는 전기적 성향을 띕니다. 그 이유가 바로 탄생으로부터 죽음까지, 일생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 예수의 탄생 이야기가 없고, 바울서신에서도 한 번도 예수의 탄생과 관련된 내용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각각의 서로 다른 신학적 관심의 결과입니다. 이 땅에 살았다는 것은 당연히 출생이라는 사건을 전제하지만 이들은 예수에게 출생은 별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보지 않은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들의 관심은 예수의 일생사가 아니라, 예수에서의 하나님의 현존, 즉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었고, 그것은 예수의 탄생과는 상관없이, 예수 스스로 혹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이 언제, 어떻게 그렇게 인식하게 되었는가라는 것만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마가에서의 예수 이야기가 예수가 요한으로부터 세례받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은 결국 마가는 예수가 이 세례사건 즉 세례받음과 동시에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그 경험에서부터 하나님의 현존이 예수 안에서 체험되었다고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가 하면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라는 첫 일성과 더불어 예수와 하나님의 동일성을 아예 태초의 사건, 즉 예수는 원래 하나님이요, 그 아들이라는 주장으로 시작합니다.

이와는 달리 마태와 누가는 탄생 이야기를 통해 예수는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라는 것은 사건 자체만으로는 형성되지 못합니다. 이야기는 파편적 사건들을 일련의 연속되는 사건으로 배열하여 지속성을 갖게 함으로써 하나의 의미를 발생시키고 부여하는 틀입니다. 그렇게 형성된 틀은 듣는 자들로 하여금 그 이야기가 내포하는 의미를 동일하게 발견하고 인지하도록 인도합니다. 이런 점에서 마태와 누가가 각각 전해주는 탄생이야기는 이 이야기를 접하는 자들로 하여금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도록 하기 위해 아주 치밀한 계획 안에서 짜여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어떻게 다른지 이야기해볼까요?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접하는 크리스마스 그림을 상상해 보면 어떻습니까? 사실 우리가 익히 본 그림들은 사실 마태와 누가가 각각 전하는 그 장면들을 서로 혼합시켜 놓은 것에다가 화가의 상상력까지 첨가한 것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공통적으로 전하는 내용은 예수는 성령에 의해 잉태되었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으며, 나사렛에서 성장했다는 정도입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 어디에서 태어났습니까? - 마태복음에 보면 집(2;11)이지 마구간이 아닙니다. 그 집에 찾아와서 경배하는 자들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었습니다. 헤롯대왕과의 해프닝(왕이 태어나다니)은 결국 예수의 가족이 이집트로 도망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고, 헤롯이 죽은 후 요셉은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가 왕이 되었기 때문에(아켈라오에게 헤롯이 꼭 유대인의 왕을 없애야 한다고 유언하기라도 했을까요?) 해코지 할 것을 두려워하여 왕의 고향 베들레헴이 아닌 멀리 변방 지역 갈릴리 나사렛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는 그 모든 여정들이 히브리 성서에서 이미 예언하신 대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구구절절이 성서 본문을 가지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사뭇 다릅니다. 예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는 애초부터 나사렛에 살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호적을 등록하라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굳이 배부른 약혼녀를 대동하여 떠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 여관에는 방이 없었다는 것에서 마구간에서 아이를 낳았다고 생각 하지만, 성서 어디에서 그곳이 바로 마구간이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단지 편히 누울 ‘방’은 아니었다는 것만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들에 있던 목자들이 천사들의 전언을 듣고(마태복음에서는 별을 따라 오지요) 아기를 찾아와서 경배합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그림에는 양떼들도 함께 경배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그것 또한 성서에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왜 이리 다를까요? 마태는 동방박사 사건만을 기억하고, 누가는 목자들의 사건만을 기억하는 차이일까요? 아니면 두 저자는 다 들었고 또 다 알긴 하지만 중요하다고 여기는 내용만 발췌한 것일까요? 하지만 그렇게 단순히 해결하기에는 이야기 자체의 배경이나 진행이 너무 다릅니다. 게다가 마태와 누가 이전 저술된 것으로 전해지는 바울 서신이나 마가복음에는 이러한 탄생의 세세한 비화들이 언급조차 되지 않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까요? 혹 바울은 부활 사건에서, 마가는 세례 사건에서 예수의 하나님 아들됨이 확정되는 것을 보느라고 일부러 이러한 탄생 이야기 전승은 탈락시키기라고 했다는 것일까요?

그런데 이러한 질문들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 모든 의문들은 그 근저에 예수의 탄생 이야기의 역사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위인전기의 진정성은 주인공의 생애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실제의 사건(fact)이라는 것에 기초합니다. 만일 그 이야기에서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던 사건을 첨가한 것이 밝혀진다면, 비록 그 외 다른 것들은 모두 사실이라 해도 그 전체 이야기의 진정성이 의심을 받기 마련입니다.

기억의 차이라고 보기에 마태, 누가 두 이야기는 너무 달라서 그 진정성을 의심하기에 충분하게 보입니다. 아무리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라고 해도,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어, 이거 혹시 만들어진 이야기 아니야? 라고 질문하기에 충분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만들어진 이야기 맞습니다.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창작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실제적 사건이 있었고, 그것이 입으로 전해져서 복음서로 형성된 것 즉 소위 말하는 ‘기억된 역사’(history remembered)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퐁 감독은 이 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믿었던 유태인들이 이런 현존 체험의 현실적 의미를 찾아 파악해 보려고 히브리 성서를 뒤져 그에 각각 상응하는 사건들을 창작하고 그것을 통하여 그 이야기를 만들었다면, 서구인들, 비 유태인, 이방인인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 설명 자체를 문자 그대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스퐁이나 보그와 같은 역사적 예수 연구 계열의 글을 읽어보면 탄생 이야기에 나오는 사건 하나하나가 모두 철저한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창작된 것들이라고 합니다. 요셉이나 마리아, 예수의 부모 이름까지도 철저한 기획에 따라 의도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사건 하나하나는 결국 예수의 의미에 관한 핵심적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 고대의 종교적 이미지를 사용한 은유라는 것이지요.

큰 일 났죠. 성탄의 이야기들을 모두 만들어진 것들이라니,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은 필요 없다고, 이젠 더 이상 거짓말 놀음에 놀아나지 않겠다고 하시겠습니까? 여기 우리 공동체도 대림절이라 명시하고 촛불을 밝히고 아기 예수를 기다리며 이 기간을 기도하며 지내자고 하는데, 이러한 것들 모두가 우스꽝스럽고 거짓을 은폐하는 행위들에 불과하다고 말하겠습니까?

역사적 예수 연구의 대가였던 불트만에 의하면 예수 이야기에서 실제로 남아 있는 역사성은 예수라는 사람이 살았고, 죽었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니, 구구절절이 설명하려고 애쓰는 복음서의 내용들이 아니라, 그저 살고 죽었다는 것만이 실제였다고 한다면 그토록 예수를 바라보고 그를 믿고 따르려는 우리들의 신앙은 어떻게 하라는 것이란 말입니까라고 질문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불트만은 그렇기 때문에 근본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제일 비난받는 신학자가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여러분과 생각하고자 합니다. 예수의 탄생이야기와 관련하여 볼 때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찾을 진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가 아기로 태어났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실제가 아닐까요? 이 땅에 살았던 한 인간으로서 예수는 아기로 태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로부터 내려온 슈퍼맨과 같은 이가 아닙니다. 예수는 우리와 똑같이 아기로서 이 땅에서 삶을 시작합니다. 그 누구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하기 그지없는 아기로 탄생이야기에 등장합니다. 오늘 읽은 구절은 지혜와 키가 자라서 하나님과 사람들의 사랑 받는 아기로서 예수도 똑같이 성장의 과정을 겪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탄생이야기야말로 예수 사건에서 가장 실제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 등을 포함하여 그 어떤 사건보다 성탄절 이야기야 말로 가장 그럴듯한 ‘fact’를 담고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라는 인간이 이 땅에 정말 살았었다면, 그는 실로 아기로 이 땅에 태어났을 것입니다.

아기로 이 땅에 온 예수는 성장의 과정을 거쳐 사람들 속에 섞여 희노애락 가운데 치열한 삶을 살았던 참된 인간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탄생이야기에는 그와 같은 인간 예수의 삶이 가졌던 의미, 진실이 무엇이었는지를 우리에게 암시하는 것이 또 하나 들어 있음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라는 이름 외에 또 다른 이름을 들려줍니다. ‘임마누엘’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에게서 이 이름은 어떤 의미일까요? 인간 예수가 드러내는 임마누엘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이 이름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복음인 것 같습니다. 임마누엘 예수는 우리와 같은 100% 인간이면서 그야말로 우리에게 참된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주고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바로 예수가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고통당하는 자들을 외면치 않고 그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웃는 자와 더불어 웃고, 그는 진정으로 더불어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기적사건들과 밥상공동체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가 우리와 다른 하나님의 아들이었기에 그렇게 산 것이 아니라, 그는 순수 인간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참된 삶의 가능성을 드러내 주신 것입니다. ‘임마누엘’ 그의 이름 가운데 그러한 삶을 살아갈 의무가 우리에게도 있음이 드러납니다. 바로 ‘임노엘’(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이 아니라,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이기 때문입니다.

대림절,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이 기간, 탄생이야기를 묵상하는 가운데 아기 예수가 주는 진정한 의미를 되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는 이렇게 우리에게 참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고, 인간이 하나님과 더불어, 이웃과 더불어 살아갈 참된 삶의 방식과 의미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이해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라 해도, 탄생이야기가 전해지는 한, 인간 예수의 삶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 함께 하셨던 것처럼 우리 안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삶을 기대하고 계실까, 이 질문 가지고 씨름하면서 이 대림절 그리고 성탄절에 아기 예수를 만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대림절입니다. 아기 예수를 기다리며 묵상할 수 있는 여유를 우리에게 주소서. 그리하여 아기 예수 가운데 참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하소서. 임마누엘의 은혜를 깨닫고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고, 당신과 더불어, 이웃과 더불어 온전한 삶을 이룰 수 있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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