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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갈5:2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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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최만자 자매 |
참고 : | 2008.01.06 새길교회 주일설교 |
2008년 새 해를 맞으면서 다시 생각나는 것은 2000년을 맞았을 때 새 천년에 들어섰다고 모두들 희망에 가득 차서 여러 가지 소망들을 쏟아 놓던 때가 회상됩니다. 새로운 세기의 시작보다 더 큰 한 천년의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는 때 사람들은 2천 년간 인류를 짓눌러 온 모든 불의와 갈등과 폭력 등의 세력이 종식되고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감에 차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비록 지구화와 신자유주의 경제구조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우려하는 소리도 있었고 문명충돌로 인한 갈등과 전쟁, 폭력의 사태에 대한 우려도 있긴 하였지만 관용, 치유, 화해, 생명, 그리고 평화를 갈망하는 소리가 높았고 그러한 가치들이 실현되는 세상을 향하여 나가고자 하는 비젼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8년이 지난 지금 그러한 희망들과 기대들은 점차 사라져 가고 새천년 역시 인간 세상에 산적한 문제들을 그대로 안고 살아가야 하는 시간과 공간임을 다시 절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20세기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인류는 현대 문명사회가 많이 잘 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심각히 깨닫고 더 이상 인류가 이 상태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각성을 하였습니다. 지금껏 살아온 가치의 중심을 모두 바꾸는 패러다임 전환을 이루어야 함을 깨달았지요. 인간중심주의로부터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삶으로, 서구 백인 중심 가치기준으로부터 제3세계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와 진리들의 공존으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구조로부터 양성평등의 삶으로, 엘리트, 영웅, 지배자 중심의 계급주의로부터 민중의 문화와 역사 창조에의 참여사회로 바뀌어져야 함을 절감하였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간중심주의에 의해 인간의 편의를 위해 무한정 개발되고 착취된 생태계 파괴는 가장 큰 위기로 다가왔습니다. 성장과 개발 우선의 논리는 온 지구를 지배하였고 기술개발이 계속되면서 자연은 파괴됨은 물론 자연스러운 것 까지 파괴되었습니다. 무한성장을 위해 속도에 가속화가 붙고 성장신화, 성공신화가 생겨났습니다. 산업발달과 기술개발, 그 위에 자본주의 발달로 모든 것은 상품화되고 물질은 풍요로워졌으나 인간은 효율성에 의해 평가되고 무한 경쟁의 사회로 달음질 쳤습니다. 대량생산은 소비욕을 촉진시키고 인간은 소유의 노예가 되어버렸지요. 소유욕이 극대화되면서 인간은 쉼, 휴식이 없이 살면서 탐욕을 위해 줄달음을 치고 물질만능에 사로잡혀버렸습니다. 그리고 새것을 향해 살면서 새 차, 새 옷, 최신형 상품, 새 집, 등을 가지려 애를 쓰고 소비가 곧 행복이 되었습니다. 더 많은 소유가 더 큰 행복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고, 돈 못 벌고, 좋은 직장이 없고 승진이 늦고, 고급 차가 없고, 큰 집이 없으면 불행한 사람으로 되었습니다. 물질 기준의 지배가 우리 삶 깊이 만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가치들을 거부하고 참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사회적 전망을 제시해야 할 교회들도 이 성장신화의 대열에 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앞장서기까지 하였습니다. 대형 교회들이 줄줄이 세워지고 기독교는 확장에 여념이 없어졌고 신앙의 평가도 물질, 소유를 기준으로 되고 목회의 성공 여부도 물질적 크기에 따라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에 대한 반성도 많이 생겼습니다. 성장신화를 멈추어야 하고 개발을 중단해야 한다는 의식들이 솟았습니다. 세계 환경 회의에서는 지속가능한 개발을 주문하고 사는 방식이 친환경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소리들이 높아지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소유욕을 벗어나야 함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단순한 삶 살기 운동도 펼쳐지고, 청빈의 가치가 회복됨을 말했습니다. 자발적 가난, 우리의 전통에서 선비적 삶의 방식을 선택하여 살아야 함이 주창되기도 했습니다. 속도 늦추기도 삶의 방식을 전환시키는 중요한 모습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천천히, 자기를 깊이 성찰하고, 깊은 명상을 시간을 갖고, 외적인 물량의 증대 보다 내면 깨우기에 열심하고, 쉼과 휴식을 가지는 삶의 모습들이 우선적 삶의 방식으로 생각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린이 동화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도 재해석 되었지요. 옛날에는 부지런한 개미가 사는 방식을 좋은 교훈으로 생각하였지만 이제는 충분한 휴식을 갖고 여유를 가지면서 자신의 재능을 살리고 사람들에게 즐거운 음악을 제공하는 베짱이의 사는 방식이 새롭게 인정되어야 한다는 식의 해석입니다. 또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생태학적 감수성을 살려야 하며 자연과 인간이 유기체적 관계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깨닫게 되었고 보살핌의 윤리, 생명 중심의 윤리가 중요한 관계 맺음으로 제시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서 말씀 갈라디아서 5:22-23의 성령의 열매 이야기를 저는 21세기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 바꾸기에 대한 조명으로 해석하여 보았습니다. 사실 교회에서는 성령의 은사 이야기는 귀 아플 정도로 많이 합니다. 특히 예언이나 방언의 은사에 대하여 강조하고 심지어 방언 은사는 훈련까지 시켜 받게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 선생님은 천사의 소리를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여 성령의 은사를 우리 삶의 태도아래 두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바로 우리가 사는 삶의 태도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은사보다 성령의 열매를 더 우선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중요한 것으로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서 본문의 전체 맥락은 바울 선생님이 평생을 걸쳐 외친 율법과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논쟁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하면서 여전히 할례의 율법을 강조하는 일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간곡히 말하기를 그러한 태도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는 육체에 근거한 행위라고 비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면 육체의 행실로부터 벗어나 자유하게 되었고 오직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9-22절에 보면 육체의 행실은 음행, 더러움, 방탕, 우상숭배, 마술, 원수맺음, 다툼, 시기, 분노,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술 취함, 흥청거리는 연회, 그 비슷한 것들 이라고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비인간적 상태이며, 인간관계의 갈등과 분열, 고통의 상태이며 인간 욕망의 전형들로 드러나는 것들이며 모슨 인간관계의 깨어진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함, 신실, 온유, 절제이며 이는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라고 합니다. 바울 선생님은 그리스도인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을 육체 따라 사는 삶과 성령을 따라 사는 삶으로 대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인 된 사람의 사는 방식은 이전과 변화되었고 다른 차원으로 옮겨져야 함을 요구합니다. 26절에서 다시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허영에 들뜨거나, 서로 노엽게 하거나, 질투하거나 하지 않도록 하자고 권면합니다.
바울 선생님의 이러한 새 삶의 방식들은 사실 다른 한편으로는 퍽 도덕주의자 같이 여겨집니다. 그래서 좀 식상하게 들리고 너무 그리스도인들을 청교도적 모범생으로 편협하고 엄격하고 융통성 없는 답답한 사람들로 묶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새로운 방식이라기 보다는 고전적 윤리관으로 돌아가게 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실제로 바울 선생님의 말씀들은 이중적 평가를 받습니다. 그의 서신들 내용이 희랍 이원론적 사고를 기독교에 고착시키는 근거가 되었다고 보거나, 비록 그분이 율법과 대결하여 자유로운 그리스도인들을 제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교훈들이 도리어 기독교의 도그마를 만들어 내었다든가, 더욱이 예수의 사회 개혁적이고 역사적인 하나님나라 사건을 개인 윤리적 차원으로 내려 정신화 시켰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더 나아가 바울서신의 몇 구절들로 인하여 기독교 역사 안에 성차별이 정당화되어 여성들이 억압당했다는 비판은 기독교 가부장제 비판자들에 의해 크게 지적되고 있습니다.(물론 성차별 구절들이 있는 목회서신들은 바울 후기의 작품이 확실하고, 바울 서신 중의 성차별 구절들도 바울의 인용문이거나 후대의 삽입이고 바울 자신은 매우 개혁적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지향한 인물이라는 해석들도 강하게 주장되고 있습니다만). 저도 바울 옹호론적 태도를 별로 갖지 않았는데 오늘 이 본문 말씀을 다시 깊이 생각하면서 바울 선생님이 당시 교회들에게 이런 말을 한 콘텍스트를 곰곰이 살펴보면서 이전과 다른 깨달음을 가졌습니다.
이 본문의 context는 율법주의로 돌아가려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 주의적 삶의 무의미함을 간곡히 설득하는 자리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온전한 삶이 단순히 할례를 받는 율법의 실행에서는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 인간됨의 삶은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새로운 유대관계 속에서 사는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참 삶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는 좋은 관계를 이루는 문제이지 율법의 실행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삶이 모든 인간관계의 왜곡과 파괴된 관계로 나타나는 갈등, 분노, 분열, 고통으로 욕망을 따라 사는 삶이며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 이런 덕목들은 참으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맺음에 필요하고 중요한 가치들이요 덕목들입니다. 나만의 삶이 아니라 관계맺음의 삶에서 우리는 성령의 인도로 아름답게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한번 깊이 자성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나는 얼마만큼 성령을 따라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는 성령이 우리의 삶의 행위 안에 있고 그 행위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즉, 우리의 선한 행위는 곧 성령이 우리 안에 체현되어 나타나는 성령의 현존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 선생님은 율법에 메인 삶을 벗어나와 사람과의 새로운 관계맺음 속에서 살아야 함 그것이 곧 성령으로 사는 삶임을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간곡히 알리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곧 바울 선생님은 그리스도인 된 이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과 그것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새 질서라는 것과 그것은 곧 사람들과의 온전한 관계 맺음의 삶이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앞에서 현대 기술문명의 관계 맺는 방식이 소유, 지배, 정복의 형태로 이루어졌음을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들은 인간 욕망의 방식, 바울선생님의 표현대로는 육체를 따라 사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21세기 탈 근대적인 오늘 우리의 삶의 방식은 그러한 소유와 지배, 정복의 관계가 아니라 연대와 협력과 상호교감의 관계를 형성하는 능력을 가지고 사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행복의 조건이 된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바르게 맺을 줄 아는데서 모든 행복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관계맺음은 삶의 안정, 평화, 인생의 기쁨과 행복의 판가름의 기본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님이 초기 교회 공동체에게 요구한 사는 방식의 변화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요청되는 같은 맥락을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관계 맺는 방식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붓글씨를 쓰는 분에게서 들은 말입니다. 자신이 쓴 작품 중에 애정이 가고 좋은 작품으로 판단되는 것은 그 첫 획을 실수하여 쓴 것이랍니다. 첫 획이 정석대로 되었을 때는 쉽게 작품을 끝낼 수 있으나 예술적 가치가 별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첫 획이 실수로 잘 못 그어 졌을 때는 다음 획들을 그 잘 못된 것들과 조화시켜 완성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한다는 것입니다. 한 획 한 획이 관계 속에서 그러진다는 것입니다. 관계 맺음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 사는 세상에는 온전한 것, 불완전한 것 등 다양한 존재들이 살고 있습니다. 불트만이라는 학자는 이를 공 존재성(mitmenschlichkeit)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사회는 이 공 존재성의 자리이고 이것이 우리의 실존 현장입니다. 다른 것들과의 조화 속에서 함께 어우러지는 삶을 위해 더불어 사는 관계적 존재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주의를 넘어선 공존재성의 실존들의 공동체의 원초적 윤리라 하겠습니다. 성령의 열매-사라,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함, 신실, 온유, 정제 등은 관계적 삶, 더불어 사는 삶의 구체적, 실천적 덕목들이라 하겠습니다.
소유와 욕망으로 채워진 현대적 인간 삶을 극복하고 더불어 사는 관계적 삶으로 사는 방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이 성령의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충실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덕목들은 어떤 도덕주의적 규범들로서가 아니라 깊은 인간사랑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울선생님이 많은 윤리적 규범들이나 성령의 여러 은사들 위에 사란을 최고의 윤리로 말하고 있는데서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고 한 말을 다시 기억합니다. 학자들 특히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크로산 같은 예외도 있지만)이 바울의 교훈이 역사적 예수와 무관하다는 논쟁들도 있습니다만 저는 만일 바울 선생이 역사적 예수를 몰랐다면 무엇이 그를 그토록 예수에게 미치게 하였을까 생각하면서 바울의 사랑의 윤리는 예수의 인간사랑 정신에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오직 요구는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며 이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행위로서의 사랑실행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라이 라마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애이다. 인간애가 없다면 진정한 행복을 성취할 수 없다. 더 행복한 삶, 더 행복한 가족, 더 행복한 사회, 더 행복한 나라를 갖고 싶다면 그 열쇠는 내적 질에서 찾아야 한다. 지구에 사는 60억 인구가 백만장자가 된다 해도 내적인 성장이 없다면 평화도 행복도 있을 수 없다’
우리 인간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 그것이 곧 관계적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바울 선생님이 말한 성령의 열매는 바로 이 사랑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령의 열매의 실천은 내가 실행해야 할 나의 의지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과연 내 의지로 얼마만큼 이것을 실천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는 우리는 한계적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부단한 나의 의지로서의 노력과 더불어 성령의 함께 하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나의 의지와 성령의 도우심의 긴장관계 속에서 이 덕목들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진정한 사랑의 관계적 삶을 살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의지는 이를 노력하는 나를 늘 깊이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개혁, 혁명, 이런 것들에 밀리거나 기술문명의 요구에 밀려 우리가 상실하였던 성령의 열매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함, 온유, 절제는 그동안 왜곡된 인류를 다시 참 인간성으로 회복시키는 구체적 덕목들입니다. 지금 이시대의 중요한, 우리가 회복시켜야 가치들입니다. 세상에 이런 것들을 금할 법은 없을 것입니다. 올 한 해 성령의 열매 맺으며 살아서 지금 사는 방식을 바꾸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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