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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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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최현섭 형제 |
참고 : | 2008.01.13 새길교회 주일설교 |
마태복음 28장 20절, 이사야 41장 10절
자매 형제 여러분, 안녕하시지요?
뒤 늦은 감이 있지만 새해에는 주안에서 더욱 강건하시고 복된 나날 되시기 기원 드립니다. 어떻습니까? 새해 첫 주를 지나보시니 금년에는 여러분과 가족 모두가 강건하고 복된 나날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드시는가요? 우리나라는 어떨 것 같은가요? 나라의 경제를 살리고 희망 세상을 만들겠다고 약속한 분이 새 대통령에 뽑히셨으니 올해는 무엇인가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드시나요? 제발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기도해야겠지요? 이렇게 새해를 맞이하거나 정권이 바뀔 때 또는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 있거나 어렵고 힘든 일에 부딪쳤을 때, 우리 기독인들이 가장 많이 좋아하고 의지하는 성경 말씀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오늘 손경호 형제가 읽은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이 아닐까 합니다. 개역성경으로 제가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얼마나 좋은 말씀입니까? 절로 마음이 평안해지고 힘이 생기는 말씀이지요? 저도 이 구절을 참 좋아하고 필요할 때마다 되새겨, 많은 위로와 은혜를 받곤 한답니다. 여러분가운데에도 그런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대통령 당선인께서도 장로님이니 이 성경구절을 가슴에 품고 다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확실히 ‘하나님의 함께 계심’은 믿는 이들에게는 축복 가운데 축복이요, 은혜 가운데 은혜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세상에 두려워 할 일이 없고 힘이 절로 솟아나는 나날이 된다면, 그보다 더한 축복과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끔 그 귀한 축복과 은혜를 깨닫지 못하거나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과 나누지도 못하지 않나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축복과 은혜를 제대로 깨닫고 바르게 누리며 나눌 수 있을까요? 이제 그 방법에 대해 생각해봄으로써 은혜를 나눌까 합니다.
첫째로 그 ‘하나님의 함께 계심’은 우리가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체험해야만 존재가치가 드러나고 효험도 커진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함께 계심’은 하나님께서 먼저 하신 약속이며, 이미 실천하고 계시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승천하시기 전에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20)고 약속하셨잖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함께 계심’은 우리가 느끼거나 체험하지 않아도 본래 존재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그것은 내가 느끼거나 체험하지 않으면, 존재가치가 드러나지도 않고 나에게 미치는 영향도 희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 버스를 타고 가다가 문득 스피커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들은 경험 이 있으신가요? 작은 희열까지 느끼면서 집중을 했더니 그만 곡이 끝나 버려 너무나 아쉬웠던 기억 말입니다. 학창시절 수업 시간에 딴 생각을 하다가 선생님께서 무슨 질문을 했는지 몰라서 혼 줄이 난 경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본래부터 있는 것이라도 우리가 몸과 마음으로 느끼거나 체험하지 못하면 지나가버리고 소용이 없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승천 직후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항상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처음에는 그것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체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두려움에 떨고 다락방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성령 강림을 통해 ‘하나님의 함께 계심’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게 되었고, 그 후부터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앞의 두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함께 계심’은 저절로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우선 내가 그것을 얼마나 좋아하고 원하고 있느냐가 중요할 것입니다. 좋아하는 음악이 아니었으면 그 음악은 그에게는 없는 것이었을 것이고, 제자들이 간절히 원하지 않았으면 성령이 임하지 않았을 것 아니겠습니까? 감각의 민감성과 생각의 집중력도 중요해 보입니다. 그것이 부족하거나 발휘되지 않으면, 있는 음악도 없는 것이 되고, 성령 강림도 스쳐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기도와 간구가 아닌가 합니다. 만약 제자들이 두려움과 절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애절하게 기도하고 간구하지 않았더라면, 성령 강림 사건은 역사에 파묻혀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둘째는 ‘하나님의 함께 계심’은 마음껏 누려야 하는 일이지만, 일정한 덕목과 도리를 지키며 누리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계심’은 물리적인 동석이나 동반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보살피고 에너지를 공급해주며 문제를 해결해주는 실제적인 도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전인격적이고 총체적인 도움’이 ‘하나님의 함께 계심’의 요체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 누군가 곁에 있기만 해도 든든하고 두려움이 사라지는 경험을 해보셨는지요? 그가 사랑하는 이라면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정서 불안이나 발달 장애 아동들을 치유하는 방법 가운데, 부모나 형제 또는 그가 신뢰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주는 방법이 상당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와 같이 물리적인 동석과 동반도 나름대로의 상당한 효험을 갖는 것 같습니다.
하물며 전인격적이고 총체적인 도우미가 있는데 그 이상 또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함께 계심’을 마음껏 누리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언제 어느 때나 위로와 평안, 용기와 희망, 보호와 문제 해결을 기대하고 만끽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라.(마 11:28)”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 본질을 마음껏 누리도록 하시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함께 계심’을 누리는 데에도 지켜야 할 덕목과 도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안티 기독교 운동’이라는 말 들어 보셨나요? 목사를 먹사, 신도를 현금 지급기, 기독교를 개독교, 성경을 똥경이라고 부르며 기독교 박멸을 주장하는 운동 말입니다. 이 운동은 2,000년부터 시작되었고 지난해 아프가니스탄 선교봉사자 피랍사건 이후로 인터넷을 중심으로 본격화되었다고 합니다.
이 운동을 주도하는 반기독교연대의 대표인 이찬경이라는 분은 한 토론회에 나와 목사들의 통정과 간통, 협박, 부패의 사례를 낱낱이 들면서, 교회는 자정능력이 아예 없거나 상실했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는 또 기독교는 자신들의 박해는 내세우면서, 아메리카와 오스트렐리아에서의 원주민 학살은 반성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고 합니다. 불상을 파괴하고 단군상을 부수고, 부산에 있는 모든 사찰이 무너지라고 수만 신도가 모여 통성기도를 한 것도 문제로 지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존중을 받기를 원하면 먼저 존중할 것을 촉구했다고 합니다.
안티 기독교인이 아닌 고은광순씨는 다른 토론회에 참석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선교를 하려면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그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파악하는게 중요하다. 가는 곳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며 시민들을 불편하게 하는데 문제가 있다. 남을 불편하게 하면서 자기주장만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다.”
라고 말입니다. 이 비판들이 다소 과장되고 왜곡된 면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운동이 기독교인의 언행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만은 분명해보입니다. ‘하나님 함께 계심’을 잘못 누린 셈이지요.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고맙고 놀라워’ 찬송가 부르며, 겸손하고 감사한 자세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함께 계심’을 오만과 독선의 신앙으로 변질시킨 이들이 있기에 그 운동의 불씨가 생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누리는 데만 빠져, 남들의 눈을 의식하지도 않고, 믿지 않는 이들을 업신여기기까지 하는 무례함과 배타가 그 운동에 기름을 부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고 공동체의 파괴도 불사하는 거짓 신앙과 패거리 화평이 그 불길을 치솟게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다행스런 것은 천만 기독교인이 모두 나서 씨를 말리자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몇몇 목사님과 기독교 방송을 중심으로 안티기독교 세력과 토론회도 벌이고 뼈아픈 회개와 갱신을 역설하였다고 하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여기에서 세 번째로 ‘하나님의 함께 계심’은 남들과 함께 나누어야 더 값지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나누는 전형적인 방법으로 전도와 봉사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이웃과 함께 있어주기’라는 방식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곁에 있어주고 도움을 주며 힘을 북돋우어 줌으로써 축복과 은혜를 나누는 방식 말입니다.
저는 스승의 날이 되면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곤 하였습니다.
“성공한 스승, 참된 스승은 스승의 날에 많은 제자들이 찾아오는 분이 아니다. 비록 찾아오는 제자는 없더라도, 실의에 빠지고 방황을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제자들이 그 분 생각만 하면 힘과 용기가 절로 생긴다면 그 스승이야말로 성공한 스승이요, 진짜 스승이다.”
라고 말입니다. 생각만 해도 용기가 나고 행복해지기까지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된다면 그가 스승이든, 친구이든, 부모이든 성공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얼핏 생각하면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한번 더 생각해보면 그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혹 여러분은 어디에서 저나 강원대학교 이야기를 접하면 관심이 더 가고 걱정이 될 때도 있으시지요?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 때로는 기도도 하시지요? 그것이 저와 함께 있어 준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 덕에 저는 힘을 얻고 일도 잘 풀리는 축복과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도 늘 교우 여러분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고 새길 공동체를 사랑합니다.
그가 느끼면 좋겠지만 못 느끼더라도 그를 위해 기도를 하고 그의 고통과 어려움을 아파하기만 해도 나는 그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느끼건 못 느끼건 항상 함께 계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가 슬프고 괴로울 때, 내 생각이 나면 힘이 솟고 용기가 난다면 그것은 성공한 함께 있어주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웃과 함께 있어주기는 아주 작은 노력과 투자로도 가능합니다. 여러분께서 감각의 민감성과 생각의 집중력을 조금만 더 높여 보십시오. 누가 처음 나왔는지, 그분의 낯설음과 불편함이 무엇인지가 보일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지하층에서부터 의자를 날라 오는 자매 형제, 조금이라도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정성을 다하는 자매님들의 사랑도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수고 하십니다.’ 하고 한마디 건네면, 나로 하여금 그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함께 있어주는 대상은 얼마든지 넓힐 수 있을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기도하고 설교하며 찬양하는 이들과 함께 있어주면, 그들의 언행 하나하나를 통해 은혜를 받게 되고, 혹 실수나 모자람이 있어도 은혜로 승화될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설교가 한창 진행되는 중에 아기가 갑자기 크게 울었답니다. 모든 교인들의 비난어린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고, 목사님도 설교를 중단하고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고 합니다. ‘이 거룩한 예배시간을 그렇게 훼방을 놓으면 어떻게 하느냐? 아기가 있는 사람은 아기 방에서 예배 보라고 말했는데 왜 말을 안 듣느냐?’ 그러나 만약 이때 신도들이나 목사님이 만약 그 아니 엄마와 함께 있어주려고 했다면 상황이 어땠을까요? 만약 목사님께서 ‘아기가 말씀에 감동을 받고 우는가 보군요. 여러분들도 우는 아기만 바라보지 마시고 제 설교 말씀에 집중하여 감동을 받아 보시지요?’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매주 고백하는 새길 신앙고백도 함께 있어주면, 단어 하나하나가 감동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고통 받는 이웃에 대한 사랑, 정의와 평화의 실현 의지와 열망도 더욱 뜨거워 질 것입니다. 운영위원장님이나 각 부서장님의 말씀과도 함께 있어주면, 새길 공동체는 축복과 은혜가 차고 넘칠 것입니다.
저는 나라와 역사도 우리가 함께 있어주어야 할 대상임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저는 가끔 찬송가 136장을 부르면 가슴이 메어집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가 십자가에 달릴 때…….”하는 가사가 정말 절절하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일제 압제시절 목숨 걸고 독립운동에 나섰던 선조들, 6.25 동란 때 산화한 청춘들, 7,80년대 민주화를 외치며 분신자살을 한 젊은이들까지 떠오르면 남아 있는 자, 살아 있는 자로서의 책무가 너무나 무겁게 느껴집니다. 정직과 정의와 정도가 거짓과 불의와 비도에 의해 설 땅을 잃어가는 오늘날의 가치전도 현상을 생각하면 비감에 휩싸입니다.
나라와 역사의 현장에 함께 있기란 무척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누군가 어떤 방식이든 있어주는 사람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현장에 있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라도 해야 하며, 그들의 숭고한 정신과 희생을 마음 깊이 새기고 감사한 마음을 갖기라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후손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면 더 귀중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야 고귀한 희생과 아픔들이 나라와 역사 발전의 밑거름이 되고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함께 있어주는 것은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하면 정말 어렵다는 것입니다.
억지로라도 자기를 얽매고 엮어 놓아야, 조금이나마 실행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소외받고 고통 받는 이웃과의 함께 있어주기는 더욱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이 부족해서 그런지, 저의 경우엔 마음 내키는 대로 두면, 어느덧 그들과 거리가 멀어지고 그들을 무시하게 되어서 깜짝깜짝 놀라곤 한답니다.
조금이라도 더 배운 사람, 더 잘 사는 사람, 더 높은 사람, 더 유명한 사람들이 억지로라도 그들의 어려움과 아픔을 떠올리고, 그들 편에 서주며 정책을 주장하고 가끔이라도 도움을 준다면, 사회는 훨씬 화평해지고 활력이 넘칠 것입니다. 그것은 요즈음 세간의 몰매를 맞고 있는 평준화도 아니고 좌파 이데올로기와도 무관합니다. ‘하나님의 함께 계심’의 축복과 은혜를 ‘이웃과 함께 있어주기’로 나누고 보답하는 작은 방법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새해에는 위로와 평안, 희망과 화평을 원하십니까? 우리 다같이 ‘하나님 함께 계심’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제대로 누리고, 제대로 나누 봅시다. 억지로라도 소외받고 고통 받는 이웃과 함께 있어주기에 더 열심히 나섭시다. 그리하여 새길 공동체와 세상을 좀 더 희망차고 활력 넘치게 만들어 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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