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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과 순명이 축복이다.

창세기 배현철............... 조회 수 2017 추천 수 0 2009.04.19 22:4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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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12:1-3 
설교자 : 배철현 교수 
참고 : 2008.01.20 새길교회 주일설교 

야웨께서 명령하셨다: “너 자신을 위해서, 네 고향, 즉 네 친척, 네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를 위대한 나라로 만들고, 너를 축복하고 너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 것이다. 그 결과 축복이 있을 것이다. 창세기 12장 1절-2절
그(스데반)가 말하였다: "부형 여러분,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영광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스스로 드러내셨습니다. 그(아브라함)가 하란에 정착하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일입니다.
그가 그(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 땅과 네 친척을 떠나서, 내가 너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사도행전 7장 2-3절

위에서 제가 읽어드린 해석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번역하고는 다소 다를지 모릅니다. 영어번역이나 한글번역이, 그 원래의 의미를 잘 전달하지 못하는 것 같아 제가 번역해 보았습니다. 느닷없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야웨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야웨께서는 왜 아브람을 선택하셨는가? 그 이유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특히 그 상황이 중요하면 할수록, 성서는 그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 히브리 문학의 특징을 “침묵 속에 웅변”이라고 합니다. 히브리 문헌의 특징은 마로 이 침목의 웅변에 귀를 기우릴 때 그 의미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야웨는 아브람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명령합니다. 아브람은 당대 최고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당시 아브람의 고향, 우르는 고대 근동의 최고의 메트로폴리스로 기원전 2100년대 고대 오리엔트 세계의 최대 도시 중에 하나였습니다. 더구나, 그의 아버지 테라는 신전에서 사용하는 우상을 만드는 수공업자라고 했습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이 수공업자는 최고의 부자에 속했습니다. 특히 신의 형상은 고대 오리엔트 세계에서, 비가시적인 신을 대치하는 가시적인 물건이기에, 그 신상을 만드는 자는 귀족 중에 귀족이었습니다. 아마도 지금의 뉴욕과 같은 도시의 최고의 부잣집 아들로 아버지 테라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인물이었다. 야웨는 오늘날 도날드 트럼프에서 재산을 다 버리고 전혀 알 수 없는 장소 예를 들어 아프리카 오지로 가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 재산, 그 기득권을 성서는 ‘고향’이라고 표시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고향을 떠나는 일은 곧 죽음이다. 특히 유목사회에서 자기가 사는 지역을 벗어나는 일은 자살행위나 마찬 가지였습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살인과 같은 중범죄를 저질렀을 때 내리는 형벌이 바로 그 사회로부터 추방하는 것이라고 함무라비법전은 전하고 있습니다.  야웨는 왜 그러한 엄청난 요구를 아브람에게 하시는 것입니까? 야웨가 원하는 신앙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그런 터무니  없는 요구를 하십니까?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아브람 자신을 위해서”라고 야웨는 말씀하십니다. 히브리 본문에서 간과하기 쉬는 구절이 바로 ‘레크 러카’라는 표현입니다. 지금까지 고전히브리어 문법에서는 이 구절의 해석을 피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잘 모는 경우는 대개, ‘관용적인 표현’formulaic expression, 혹은 잘 맞지도 않는 그리스어 문법의 용어를 빌어 ethical dative, 즉 “윤리적 여격”이라는 모호한 용어로 이 구절의 의미를 전혀 추적하지 않았습니다. 전통적으로 성서학자들은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을 등한이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레크-러카’를 축자적으로 번역하지면, “너 자신을 위해서 떠나라”입니다.

여기에서 야웨께서 우리의 믿음, 우리의 삶에 대한 시각을 살펴보시려고 합니다. 그는 우리가 일생을 통해 일구어 놓은 우리의 소중한 재산, 특히 우리의 부동산, 우리의 사랑하는 일가친척들, 우리의 게젤샤프트와 게마인샤프트, 우리의 기득권을 과감히 버리고 하나님과 동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시험하십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한 목적, 즉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때로 우리가 가진 것 때문에 생명의 본질이며 삶의 의미이며 목적이 되신 야웨를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버림은 야웨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아브람 자신’을 위한 길이며 우리 삶의 최상의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에겐 자신이 가진 것이 우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재산이, 자식이, 사회가 부여한 지위나 명예, 권력이 아브람에겐 우상이 되어 더 이상 야웨를 따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너무 급한 나머지 야웨께서 갑자기 나타나 아무런 이유 없이 명령하신 것입니다. 자기가 편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머무는 행위는 바로 죽음일수 있기 때문이다.

천사는 [창세기] 19장 16-17절에, 롯에게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라고 요구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6 그런데도 롯이 꾸물거리자, 그 두 사람은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아  끌어서, 성 바깥으로 안전하게 대피시켰다. 주께서 롯의 가족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이다.
17 그 두 사람이 롯의 가족을 성 바깥으로 이끌어내자마자,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롯의 가족에게 말하였다. "어서 피하여 목숨을 건지시오. 뒤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저 산으로 도피하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고 말 것이오."

우리의 고향, 우리의 친척, 우리의 부모와 형제자매보다 소중한 것이 있을까? 그러나 야웨는 이것들이 우리 삶의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십니다. 신약성서 [누가복음] 14장 26절에 예수께서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다음과 행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25 많은 무리가 예수와 동행하였다.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6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그 집착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집착은 바로, 야웨를 향해야할 우리를 유혹하여, 세상을 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야웨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려는 그 일을 방해하는, 우리의 마음이 가는 것들을 과감히 우선순위에서 뒤로 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살되 그 안에 탐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배가 바다에 있어야 하지만, 물이 꼭 필요하지만 물이 배안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면 야웨께서 이런 여행을 떠나려는 우리에게 확실한 보상을 준비하셨습니까? 그러지 않다면 이 모든 소중한 것을 버린다는 것이 미친 짓 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불행히도 하나님께선 확신하게 보상에 대해선 말씀해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선 “이것이 내가 너에게 줄 땅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기서 아연질색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단순히 “내가 (지금은 보이질 않지만) 네게 (앞으로) 보여줄 땅으로 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땅이 그 보상이 무엇인지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만일 말씀하신다면 그 신은 거짓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인간에게 예측가능하고 인간의 그 결과를 조절할 수 있는 신이라면, 그 신은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를 산출할 수 있는 그런 신은 참신이 아니라 우상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행이도, 우리는 아무런 보장도 없이 신앙여정을 떠나야만 합니다. 그러기에 믿음이 필요한 가 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현재 기득권을 포기하는 고통이 미래에 대한 희망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라고 [로마서] 8장 24-25절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24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 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25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이 말은 다름 아닌, 우리는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시적인 것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길로 매일 걷고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라는 명령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삶을 사십니까?

창세기 12장 1절에서, 인생 전체를 요구하신 하나님은 아브람을 달래기 시작하십니다. 축복을 주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너무 황당한 약속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브람이 우르와 그 후에 정착한 하란을 다시 떠나라는 명령을 받아들입니다. 이 명령은 아브람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버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삶을 살기 위해, 영적인 여행을 떠날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요구인 것입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기 때문에, 그것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는 삶, 그 삶은 사실 과거로부터의 단절, 삶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의 변화를 통하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과감히 떠납니다. 여기서 떠났다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halak ‘할락’입니다. 이 단어는 ‘가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의미는 ‘매일 매일 그런 삶을 살았다’라는 의미입니다. 영어표현에 ‘walks of life'라는 표현이 있는데, 그 의미는 일상의 삶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의 성서해석은 크게 성서내용을 전달하는 하가다Haggadah와 그 내용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할라카Halakah가 있습니다. 아브람은,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져도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할 그 사람이 인류역사의 가장 위대한, 그리고 중요한 여행을 시작합니다. 아브람을 통해 인류의 가장 위대한 유산 중에 하나인 유일신 종교들, 유대교,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교가 창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사는 인생에서 수없이 살다간 사람들처럼 그렇게 살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젼을 듣고 그런 삶을 살려고 결단하여, 과감히 그 여행을 시작해야할 것입니다.

아브람의 순종이 성서에선 잘 드러나지 않지만, 사실 수많은 고민과 눈물과 가족회의의 결과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말렸습니다. 사람들은 적어도 그런 기득권을 버리기 위해선 가는 장소는 알아야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신약성서 [히브리서] 11장 8절에 히브리서 기자도 그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차 분깃으로 받을 땅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떠난 것입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 가야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여행을 떠난다고 하면, 제일 먼저 알려고 하는 점은  그 여행의 목적지입니다.  그러나 그 여행 목적지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하고 가느냐, 아니 그 여행을 누가 인솔하는가가 훨씬 중요합니다. 아브람은 이 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목적지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가라고 하는 곳을 가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떠났을 때 나이를 생각하면 정말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창세기 12장부터는 역사시대를 기록하기에, 창세기 1-11장까지 등장하는 과장된 나이표현하고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통해 인류역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인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내는 사건을 75세 노인에게 맡깁니다. 성서기자는 다시 한 번, 이 거룩한 역사의 시작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관하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은퇴해서 쉬고 싶을 때, 여생을 뒤 돌아보면 즐기고 싶을 때, 하나님은 벼락처럼 아브람은 이 거룩한 여행을 드러내십니다. 그것은 마치 75세 노인에게 올림픽 마라톤 경주를 위해 훈련을 시작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여행을 촉구하는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그 약속도 가만히 들여야 보면 좋아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애매모호한 약속들입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약속들입니다:

첫 번째, “내가 너를 위대한 나라로 만들겠다.”

하나님께서 그를 장차올 위대한 나라의 수장으로 만들겠다는 약속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아브람을 바빌로니아 제국의 왕으로 만들겠다고 하신다면 이해가 가지만, 전혀 알려지지 않은 나라의 통치자로 만들겠다는 약속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 약속은 아브람의 처지를 생각하면 혹할 수도 있는 약속입니다. 아브람이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자식을 허락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중을 읽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약속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외적인 조건들도 산재해 있습니다. 1) 그 당시 아브람은 75세였습니다. 2) 아브람 부인 사라 불임여성이었습니다.

이것들을 감안하면,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약속입니다. 아브람의 눈으로 본다면, 불가능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안 믿을 수도 없고 진퇴양난의 고민에 봉착하였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약속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아브람 신앙의 시련과 단련의 시작입니다.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렸다는 선포이며, 그것을 믿고 따르라는 명령입니다.

두 번째, “내가 너를 축복할 것이다”

“축복한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축복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이 구절은 성서의 역사상 가장 오역된 부분입니다. 특히 한국 개신교에서 이 구절은 마치 물질적인 축복을 의미하는 것처럼 오역되어왔고, 그것이 복음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먼저 “축복”이란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너를 축복하겠다.”라는 표현의 히브리 동사 어근은 b-r-k인데, 이 단어의 가장 근본적은 의미는 ‘베렉’, 즉 ‘무릎’입니다. 무릎하고 축복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축복’이란 말뜻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물질적인 축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보다 근본적인 축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추적하기 위해 먼저, ‘축복’아란 단어의 원뜻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축복’이란 명사는 위에서 언급한 어근에서 파생하여 ‘버러카’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무릎을 꿇고  신의 뜻에) 순명;
2) (1)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

축복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하시고자 하는 바를 깨닫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축복은 바로 ‘무릎’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무릎을 꿇고 깨달아 그러한 영적인 삶을 살겠다는 순종, 그 순명이 바로 축복입니다. 우리는 그 결과로 이루어지는 2)를 “blessing"이란 단어로, 축복이란 단어로 번역하는데, 그 단어에 숨겨진 본래의 의미는 순종입니다.

세 번째, “내가 너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 것이다”

아브람은 자신의 고향을 떠나는 순간 이름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무명씨가 된 거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경 쓰지 마라! 내가 너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겠다. 그리고 그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75세에 자식이 없는 아브람, 아내 사라가 불임여성인 아브람, 그의 이름은 곧 없어질 위기에 있었습니다. 더욱이, 고향을 떠난다는 사실은 이 사실에 확실히 못질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선 아브람에게 “더 이상 네가 지금까지 가진 이름을 잊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름”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름은 고대나 지금이나 개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고대 이집트인은 사람을 구성하는 5요소 가운데 이름을 의미하는 ‘렌’ren은 중요시했습니다. 그 사람의 존재, 인격, 명성이 그 이름에 다 담겨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셈족’이란 말씀이 바로 이 이름에서 왔습니다. 셈족인 들은 이름을 shem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유목민들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정체성은 ‘이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믿었습니다. 이 ‘이름’은 또한 ‘역사; 기억; 명성’으로도 번역이 됩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희망을 말씀해주시지만 동시에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아브람 자신의 이름이 없어질 절대 절명의 위기에 자신의 과거의 이름, 땅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새롭게 부여하실 이름을 받기 위해 인간이 보기에는 불가능한 무모한 여행지지만, 떠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네 번째, “축복이 (네게) 있을 것이다”

위의 과정을 거친 후, 하나님께서 아브람에서 축복은 선사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축복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순종하는 것이 축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짧은 인생에 있어서의 축복은 물질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축복이나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무릎을 꿇고 순종하는 삶,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이루시려는 뜻을 헤아려, 그 삶에 최선을 다하는 삶, 그 삶 자체가 바로 축복이라고 성서는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 삶을 추구하기 위해, 새로운 출발을 시도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출발을 과감히,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우리에게 선물한 책이 하나님의 그런 계시를 담긴 책이 성서라고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로 이 성서를 히브리어로 ‘토라’라고 말하는데, ‘토라’라는 단어의 어근은 ‘야라‘라는 히브리어 동사에서 왔습니다. “야라”라는 동사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활을 쏘아 과녁을 명중시키다”입니다. 화살은 화살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궁수의 의도대로 활을 떠나 거침없이 날라, 과녁에 명중되어야 합니다. 궁수는 그 활이 과녁에 지속하지 않고 날라갈수 있도록 가장 경제적인 모양으로 만듭니다. 앞에는 쇠를 달고, 몸통은 최대한 얇게, 그리고 괘도를 이탈하지 않도록 뒤에는 깃털을 매답니다. 이것은 모두 궁수가 의도한 대로 과녁을 명중하기 위해 궁수가 의도한 것입니다.

그 길은 한 가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길을 걷도록 우리에서 보여주신 분이 바로 청년 예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 길을 묵묵히 따라가는 삶, 그 순명이 바로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만일 그 순명을 이탈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고전 히브리어 표현에 바로 “화살이 과녁을 비껴나가다”라는 단어가 ‘하타’라는 단어입니다. 이 ‘하타’는 또한 ‘죄를 짓다’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신이 원하는 삶을 추구하지도 않고 살지도 않아 과녁을 빗나가는 삶이 우리들의 가장 근본적인 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이루시려는 계획을 감지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런 삶에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보여주신 청년 예수의 삶을 따르려고 시도하고 있습니까? 2008년도 거의 한 달이 지나가는 오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매일 매일 그 길을 감지하고 걸어 나가는 그런 축복에게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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