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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후1: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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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4년 2월 22일 주일2부설교 |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서론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쿠션이 없는 삶’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날은 뉴스를 보는 것이 겁이 납니다. 너무나 몰인정하고 끔찍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또 자식이 부모를 죽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죽입니다. 납치하고, 강간하고, 자살하는 것이 너무나 쉽게 일어납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랑과 불쌍히 여김이 사라져 버리고 있습니다. 왜 삶이 이렇게 몰인정하게 되어 갑니까? 언젠가 본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큰 빌딩에 불이 났습니다. 엘리베이터도 섰습니다. 계단은 연기가 꽉찬 굴뚝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창문에 매달려 구원을 요청하다가 낙엽처럼 떨어져 갔습니다. 소방당국에서는 건물밑에 대형 쿠션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떨어지는 사람들이 운좋게 쿠션위에 떨어진 사람은 놀라기는 했으나 상처없이 생명을 구출했습니다만 쿠션에 떨어지지 않고 아스팔트에 떨어진 사람들은 박살이 나고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인생도 한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쿠션이 없는 인생을 살면 부딪히고 상처입고 부러지고 비참하게 됩니다. 그러나 삶에 쿠션이 있으면 여간 충격을 받고 상처를 입어도 그것을 견뎌낼수 있는 것입니다.
본론
1. 죄책으로 좌절할 때
첫째로, 우리는 죄책에서의 쿠션이 필요합니다. 최근에 유명인사가 뇌물사건으로 투옥하게 되고 심적인 모욕감과 좌절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사건을 여러분께서 매스컴을 통해서 듣고, 보고 마음에 큰 충격을 함께 느꼈습니다. 비록 저명한 정치가 뿐만 아닌 것입니다. 한국에 저명한 기업인도 그 마음속에 얻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투신자살했습니다. 여러분 작년 우리 한국에 자살자수가 하루 평균 36명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삶에 충격을 견디지 못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가오는 외적인 충격을 극복할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일 예수님을 알았더라면 예수님은 그들의 충격을 완화 시킬수 있는 쿠션이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이땅에 오셔서 그 자신 말로 다할수 없는 모욕과 좌절과 절망을 극복하신 분이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 당하신 모욕과 좌절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손으로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 그가 지은 인생들이 그를 욕하고 침뱉고 때리고 벌거벗겨서 십자가에 못박는 그 처참한 멸시와 천대와 모욕을 주님께서는 극복하시고 그 고난을 통해서 인류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시는 놀라운 모습을 보십시오.
히브리서 12장 2절로 3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2절로 23절에는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같이 모욕과 좌절과 절망과 고통을 극복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형편과 사정을 다 아시므로 이 예수께서 우리속에 계시면 우리가 어떠한 좌절과 절망과 모욕을 당해도 이를 능히 극복할수 있는 큰 위로의 쿠션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위로의 쿠션이 되어 주시면 어떠한 충격도 이겨낼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용서와 사랑의 쿠션이 되어 주시기 위해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주님은 멸망의 세력도 막아 주시고 절망의 세력도 막아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아무리 죄악의 수렁에 빠지고 죄책이 무겁게 누룰지라도 견딜수 없는 고통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예수께서 계시면 그 모든 죄책을 이기고 능히 하나님의 용서와 의와 영광을 얻어 승리할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7절 말씀대로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어떠한 죄인도 하나님 앞에서는 새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죄가 없는 의인이 누가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이라. 어떠한 사람의 죄는 가슴속에 감추어졌고 다른 사람의 죄는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모두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하나도 죄를 숨길수가 없습니다. 그 죄책과 고통에 몸부림친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이 가슴속에 계시면 그리스도는 죄로 벌거벗은 우리를 입혀 주시고 상처입은 마음을 치료하여 주시고 더러워진 우리 심성을 씻어 주시고 주님은 추수려서 일으켜 세워 주는 놀라운 위로의 쿠션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죄인도 하나님 앞에서는 새사람이 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으로 갈아 입을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옛 사람을 몸에 걸치고 탄식하고 울지만은 주님은 말합니다.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에게 결단을 내려서 옛사람은 던져 버리고 새사람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8절에도 보면은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벨마 바필드는 1984년 미국에서 사형이 집행된 여죄수였습니다. 그녀는 자기 어머니와 약혼자와 그리고 다른 두 사람을 쏘아 죽이는 끔찍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벨마가 사형언도를 받고 감옥에 있는 동안 독실한 크리스챤인 빌리그라함 목사의 맏딸인 엔 그라함 르쯔 부인의 전도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형집행 시간이 가까워지자 벨마 바필드는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하여 매우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자신이 지은죄는 너무나 크고 끔찍한 죄라서 도저히 용서 받을수 없다는 심적인 고통과 괴로움으로 잠을 이룰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전도한 르찌 부인에게 자신의 심경을 털어 놓았습니다. 한참동안 그 이야기를 듣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르쯔 부인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벨마, 바닷가를 거니면서 게들이 들락날락하는 적은 구멍을 모래밭에 뚫은 것을 보았지?” "네. 본적있습니다.” "그럼 어린애가 모래성을 쌓으려고 파서 생긴 구멍을 본일이 있나요?” "그것도 보았습니다.” 벨마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면 수로를 넓히기 위해서 기중기로 바닷속 깊이 파놓은 움푹한 구릉도 보았나요?” "예, 그런데 그것은 왜 물으시죠?” 그러자 르쯔 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벨마, 물이 밀려오면 그 구멍들은 어떻게 되나요?” "적은 구멍만 없어지고 큰 구멍은 그대로 남나요? 아니지요. 적은 구멍, 어린 아이가 모래성을 만들기 위해서 파놓은 구멍, 기중기로써 파헤친 큰 구멍도 다 막혀 버리고 맙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의 보혈의 파도가 한번 처오면 적은 자의 중간죄, 큰죄 다 없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물론 당신은 중죄인입니다. 어머니를 죽이고, 약혼자를 죽이고, 두 사람을 죽인 중죄인이지만은 그 죄도 예수님의 보혈의 파도가 지나가면 모두다 씻어져 버리고 마는 것이니 안심하고 먼저 떠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당신은 이미 하나님 앞에 깨끗한 사람이 되었다. 죄를 찾을래야 찾을수 없이 정결하게 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영광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죄의 정도가 크던 적던 관계없이 모든 죄는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사함을 받습니다. 어떤 죄인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새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죄책으로 말미암아 번민하고 고통하고 몸부림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모시면 용서와 의와 영광의 위대한 위로의 쿠션이 마음을 받쳐 주기 때문에 능히 극복하고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았더라면 오늘날 죄책으로 말미암아 좌절과 낙심속에 자살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2. 견딜 수 없는 시련을 통할 때
둘째로, 삶의 견딜수 없는 시련을 통할 때 이것을 이길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올까요?
자책과 버림받은 두려움과 파멸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숨이 막히고 절망할 때 사람들은 삶을 포기하고 맙니다. 오늘 한국국민의 80%가 삶에 희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희망을 잃었기 때문에 요사이 소주를 먹는 횟수가 그렇게 많아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편 23편 4절 보십시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주님은 제해 주지는 아니하실지라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내가 통할 때 주님이 함께 통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는 전부 음침한 골짜기를 재해서 평안이 있으라는 말은 안합니다. 내가 잘못했으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통하고 시련도 당하고 고통도 당하지요. 그러나 그때에 주님은 우리를 손잡고 우리와 함께 걸어가면서 어두움을 빛으로 사망을 생명으로 도와 주시고 건져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의 시련속에서 크나큰 위로의 쿠션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위로해 주시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쓰러지고 일어나지 못해도 우리는 그것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웃으며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마음속에 위로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시편 17편 8절에는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라고 말했습니다.
이사야 41장 10절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의 생애속에 당하는 크고 작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체험속에는 여러분 혼자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항상 함께 걸어 가시며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시편 91편 1절로 7절을 외우고 이 말씀을 늘 마음속에 큰 위로로 삼습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여러분 이 말씀은 주님께서 얼마나 우리에게 큰 위로의 쿠션이 되어 준다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리고 내 앞길이 칠흑같이 어두워도 거기에 나와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시는 주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젊은 나이에 성공의 길에 들어선 영국의 한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는 영국 의사당에서 비중 높은 변호를 하기로 되었는데 너무나 그일에 지나친 부담감과 긴장 때문에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에 출세 가도를 달리던 그의 인생은 점차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정신착란증세를 일으켜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수 없었습니다. 급기야 그는 자신이 더럽고 추하고 무가치한 존재라 자악하며 자살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변에서 그를 불쌍히 여긴 많은 크리스챤들이 간절히 기도해 주고 그에게 예수님을 전도해서 그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쓸모없다 여기며 자살하려 했던 그는 이제 주님께서 자신의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더럽고 추한 자신의 삶이 새롭게 변화된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큰 자부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저 도적 회개하고서 이 샘에 씻었네. 저 도적같은 이 몸도 죄씻기 원하네. 이 찬송가 192장이 바로 윌리암 카우퍼 이 변호사가 지은 찬송인 것입니다. 그는 훗날에 영국 문학사에 있어서 고증 문학가로 손꼽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 자신을 짓누르는 삶의 무게로 인해 두려움과 파멸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숨이 막히고 절망했을 때 자신을 건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예수님을 의지하자 예수님은 절망의 수렁에서 건져내 주시고 아름다운 찬송가를 작사하게 하시고 그로 하여금 가치있는 문학가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삶의 견딜수 없는 시련을 통과할 때 주님의 은총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 마음속에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긍정적인 사고로 잘 알려진 로만 빈센트 필 박사님은 항상 무엇인가 종이 쪽지에 적어서 일어설때나 앉을때나 시간만 있으면 그것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종이가 나들나들 해지면 새 종이에 그것을 또 옮겨 적어서 그것을 늘 몸에 지니고 다니며 읽었습니다. 그 무슨말을 그렇게 읽었느냐 보니까. 그의 종이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나를 둘러싼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감싼다. 하나님의 힘이 나를 둘러싼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나를 지켜 보신다. 내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은 거기 계신다.” 이런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말씀을 종이에 적어서 항상 그것을 읽고 시인하고 다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만 빈센트 필 박사는 자기 일생을 모든 흑암을 이기고 승리할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에게 긍정적인 삶의 은혜를 허락해 줄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심한 고통에서 위로의 쿠션으로 채워 주셔서 일으켜 주시고 다시한번 꿈을 갖고 믿음을 갖고 소망차고 긍정적인 삶을 살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위험한 병으로 생명이 위태할 때
셋째로, 위험한 병에 걸려 생명이 위태할 때 누가 우리에게 위로의 쿠션이 될 수 있습니까? 병보다 더 무서운 것이 마음의 낙심입니다. 우리가 중대한 병에 들면 그만 나는 이제 죽는다. 절망이나 낙심을 하기 때문에 병앞에 타월을 던져 버리고 포기하고 항복해 버립니다. 제기불능이 되는 것입니다.
잠언서 15장 13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얼굴에 광채를 잃어 버리고 얼굴이 캄캄하게 되버리고 맙니다.
잠언서 17장 22절에는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에 즐거움이 있으면 마음속에서 약공장이 가동을 해서 엔돌핀이 넘쳐 나므로 고통도 사라지고 즐거움이 생기고 암세포를 박멸하는 세포가 활기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근심이 있어 짓눌리면 노르드 아드레날린이라는 독소가 생겨나서 모든 육체를 파괴합니다. 약공장 가동이 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의 뿌리가 마음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수 있다는 희망이 마음속에 있으면 이것이 굉장한 위로와 쿠션이 되어서 승리를 가져올수 있는 것입니다. 치료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그 사실을 우리가 확실히 알 때 굉장한 마음에 위로가 됩니다. 병원에서 의사가 사형선고를 내렸을지라도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치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이것이 용기와 믿음을 가져오는 쿠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4절로 5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여기에 치료는 하나님의 뜻인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십니다. 2천년전에 이미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대로라면 실제로 여러분 우리는 2천년전에 이미 고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그의 3분의 2가 치료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하시고 난 다음에 곧장 치료하기 시작하셔서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말구유의 귀를 베드로가 칼로써 쳐서 떨어뜨렸을 때 그 귀를 주워서 도로 치료해서 붙여준 끝까지 치료의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하셨으므로 이 예수는 이 자리에 계시며 지금도 치료의 사역을 베풀고 계신 것입니다. 마음에 희망의 쿠션을 안고 있으면 맹렬히 기도하고 싸울수 있습니다. 내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희망을 향하여 전력을 투구해서 싸울수가 있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다면 포기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7절로 18절에"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은 낫는다고 말했지 죽는다고 말하지 안았습니다.
야고보서 5장 15절로 16절에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 복음에는 구원과 함께 항상 치료가 같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하시고 병을 고치라고 말했습니다. 천국의 임재는 치료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치료는 천국의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나라에는 병이 없지요. 오늘 이땅에 천국이 우리속에 임하면 치료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와 예배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치료의 역사가 나타나야만 진실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출석하는 한 자매님의 간증을 들어 보세요. 이 자매님은 결혼 하자마자 첫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들 소식에 친정, 시집할 것 없이 모두 기뻐 박수를 쳤습니다. 그런데 아기가 6개월이 지나면서 감기가 들거나 채하면 경끼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좀더 자라면서 괜찮을줄 알았는데 5살이 지나면서부터는 경끼가 간질로 바뀌어졌습니다. 한달에 몇차례 발작을 일으키는 아들을 볼때마다 자매님의 마음은 칼로 도려내는 것같이 아팠습니다. 아들의 간질병을 고치기 위하여 유명하다는 병원은 다 다녀봤지만 의사들은 아들이 뇌에 상처를 입고 있기 때문에 평생 고칠수가 없다는 절망적인 말만 했습니다. 요란한 싸이렌 소리만 들려도 간질을 하고 잘못했다고 야단만쳐도 영낙없이 발작을 했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한 대만 얻어 맞아도 발작을 했습니다. 자매는 이 아들이 한평생 이렇게 간질로 발작을 하고 살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좋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들과 함께 죽어버릴 작정을 하고 자매님은 많은 수면제를 가지고 와서 다량의 수면제를 자기가 먼저 먹고 그리고 아들에게 수면제를 감기약이라고 속이고 먹이려고 하는데 아들이 팔꿈치로 뚝쳐버리니까 약이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것을 보자 다시 약을 주어서 아들에게 먹일수 있는 용기가 없었습니다. 자매님 혼자 쓰러졌습니다.조금 후 식구들은 자매님이 수면제를 먹은 사실을 알았고 서둘러 자매님을 병원으로 옮겨 입원을 시켰습니다. 입원해 있는동안 자매님은 꿈을 꾸었는데 꿈에 하얀옷을 입은 분이 나타나서 자매님에게 묻는 것입니다. "네 아들의 병을 고칠수 있다면 똥 한바가지라도 먹을수가 있겠느냐?” 그말은 들은 자매님은 "네~ 정말 똥 한바가지를 먹고 병이 낫는다면 기꺼이 먹겠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흰옷입은 분이 다시 "정말 네 아들이 낫는다면 똥을 먹겠느냐? 아들을 위해 한 드럼의 똥이라도 먹으라면 먹겠느냐?” 그렇게 묻자 자매님은 "네. 아들의 병만 낫는다면 똥을 먹다 죽더라도 먹겠습니다. 결사적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좋다. 네가 아들을 위해 그만한 각오를 했다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고 사라졌습니다. 그 꿈을 깨고 나자 자매님은 마음에 아이의 간질병을 고칠수 있다는 큰 희망이 생겨났습니다. 병원을 퇴원한 자매님은 주일이 되자 곧장 교회를 찾아 갔는데 그 교회가 바로 여의도순복음교회였습니다. 예배에 출석한 자매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의 모든 저주와 질병을 청산하였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마친후에 제가 그러더랍니다. ”오늘 간질병을 앓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온 자매님이 있는데 이 시간에 하나님이 긍휼이 여기사 그 간질병을 고쳤습니다." 그는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하고 하나님 앞에 그것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뇌파 검사를 했더니 뇌의 이상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때후로부터 시작해서 어린아이는 간질병에서 깨끗이 고침을 받게 된것입니다. 희망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가 절망에 처해서 죽으려고 다량의 수면제를 먹었지만 꿈속에 주님이 나타나서 그 자매에게 희망을 준것입니다. 아들을 위해서라면 똥을 한드럼통이라도 마시겠다. 평생 똥을 먹다가 죽어도 아들을 위해서 희생하겠다. 그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절절합니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몸을 찢고 피흘린 예수님께서는 이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사랑보다 수천, 수만배로 더 강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치료에 대한 희망을 가질수 있고 이 희망이 우리에게 놀라운 위로의 쿠션이 되어서 어떠한 병이라도 끝까지 싸워 이길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4. 죽음이 다가올 때
넷째로, 죽음이 다가올 때 우리는 정말 쿠션이 필요한 것입니다.
남이 죽는 것을 볼 때 ‘아~ 죽었구나. 훌륭한 사람이 죽어 신문에 광고가 나도 살만큼 살고 죽었구나.’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여러분 이 죽음이 주관적인 체험이 될 때는 극단적인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죽음이 내게 다가오면 그때는 부귀도 영화도 공명도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자기가 직면한 것은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죽음에 직면한 사람이 천국도 모르고 지옥도 모르고 죽어서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다고 할 때 좌절과 절망은 형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요사이 책을 한권 읽고 있습니다. 호스피스에서 지은책인데 많은 죽어가는 사람의 머리맡에서 마지막 임종을 도와주는 그 작업을 하시는 자매님이 기록한 책인 것입니다. 그 책에 보니까 하나님을 모르고 내세를 모르는 사람은 끝까지 이 땅에 매달려 있으려고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안돼~ 안돼~”하면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이 안된다고 고함친다고 죽음이 물러 가지 않습니다. 마지막 이땅에 매달려 있는 사람은 이땅을 잃어 버릴 때 아쉬워서 눈물을 펑펑 쏟으며 몸부림치고 발버둥치면서 죽어가고 그러나 내세를 아는 사람들은 죽음을 한 여행으로 생각하고 가족들 다 모아놓고 "나 먼저 가니 뒤에 오라. 먼저가서 기다리겠다.” 또 보내는 사람도 "먼저 가시라고. 안심하고 먼저 가시라고 우리 뒤에 곧장 따라 가겠다.” 서로 잘있거라. 잘가거라. 이와같은 대화를 나누고 편안히 눈을 감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구주시오, 우리와 함께 한다는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음올 때 굉장한 위로의 쿠션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로 4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누가 이런말을 해줄수가 있습니까? 죽는 우리에게 누가 이런 담대한 말을 할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위해서 저 건너편 세상에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와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우리를 너무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서 몸찢고 피흘려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인 것입니다.이런 언약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은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얼마나 큰 위로의 쿠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죽음을 이길수 있지 않습니까? 천국의 소망이 죽음을 당하는 우리에게 큰 위로의 쿠션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말했습니다.
이 장막집은 무너져요. 앞서거니 뒷서거니 무너진다고요. 그러나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이 있기 때문에 낡은집 무너지고 더 좋은 영원한 새집으로 들어가는데 얼마나 기쁨이 충만하겠습니까?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8절로 9절에 말하기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빌립보서 1장 23절에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라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체험을 한 이후에 죽음은 그에게 하나의 통과하는 과정에 불과했습니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이땅에서 고생하느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이 더 좋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먼저 앞서 보내는 가족이나 친지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떠나는 부모님을 바라볼 때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소망이 얼마나 큰 위로의 쿠션이 되는지 모릅니다. 지금 떠나면 이제 영원한 이별이라고 생각할 때 마음이 슬픔니다.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앞서 떠나고 다시는 만나볼수 없다고 생각할 때 그 마음에 고통과 괴로움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하늘나라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지금 잠시 떠나나 영원히 만날것이라는 위로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마음에 쿠션이 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로 14절에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소망없는 다른이들과 같이 슬퍼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데리고 우리를 마중하러 오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날 소망의 쿠션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대 전도자였던 무디 선생이 죽음의 날이 임박한 것이 예감하고 자신곁에 모인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느날 신문에 노스필드의 무디가 죽었다고 하는 기사를 읽거든 그 사실을 믿지 마십시오. 그때는 지금의 나보다 더 확실하게 살아 있을 것입니다. 흙으로 지은 옛집에서 나와서 더 높고 영원한 집, 죄악이 접근하지 못하고 더럽힐수 없는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더 높은 곳에 있을 것입니다. 내 육신은 1837년에 태어났고 영혼은 1856년에 거듭났습니다. 육신은 죽을것이나 성령으로 난 것은 영원히 살것입니다." 무디 선생은 소천하기 전에 잠깐 천국의 영광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잠에서 깨어나며 말하기를 ‘세상을 떠나지만 천국이 내 앞에 열립니다. 이것이 죽음이라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십니다. 나는 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말을 들은 자녀들이 ”아닙니다. 아버지. 아니에요. 아버지는 꿈을 꾸고 계신 것입니다."라고 했더니 무디 선생은 ”아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천국문에 들어서고 있단다."라고 말한뒤에 ”이것이 나의 승리, 오늘이 나의 대관식 날이다. 아~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후~욱 숨을 내쉬고 이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평생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한 디엘 무디답게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무디 선생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바라보며 이땅을 떠났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합니다. 육신의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에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크리스챤은 육신을 벗어날 때 당하는 불안과 공포와 좌절과 슬픔을 능히 이길수 있는 은혜의 쿠션이 있습니다. 이 위로의 쿠션 때문에 죽음조차도 우리는 담대하게 맞이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들의 삶의 형형색색의 고난 중에서 예수님은 항상 삶의 위로의 쿠션이 되어 주십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믿고 말씀속에 살면 예수님이 주시는 위로의 힘으로 모든 고난을 이기고 나갈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고난이 안다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안믿는 사람과 똑같이 우리는 모든 시련과 환난과 고난을 당합니다만 우리는 그 고난을 이길수 있는 쿠션이 있습니다. 여간한 충격이 와도 그를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쿠션이 우리속에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싸임을 당하여도 쌓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핍박을 받아도 버림바 되지 아니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는 놀라운 그리스도의 쿠션과 위로가 우리속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당당하게 우리는 현실을 극복하고 이겨 나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없이 인생을 산다는 것은 아무런 쿠션없이 맨땅에 내동댕이 치는것과 같사옵니다.
아버지 아무 보호장막없이 내동댕이 치면 상처가 되고 피투성이가 되고 뼈가 부러지고 죽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영육간에 쿠션이 되어 주셔서 위로의 큰 은혜로 감싸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내동댕이 쳐도 일어나고 짓밟혀도 일어나고 버림을 받아도 일어납니다. 그리스도가 주는 위로로 우리는 모든 일을 이길수 있사오니 감사합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나 죽음이냐 칼이랴. 이 모든일에 우리를 사랑하신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말씀하신 것을 알게 도와 주시옵시고 이 예수를 품에 품고 우리가 주님의 위로로 살고 또 위로가 없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전달할수 있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서론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쿠션이 없는 삶’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날은 뉴스를 보는 것이 겁이 납니다. 너무나 몰인정하고 끔찍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또 자식이 부모를 죽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죽입니다. 납치하고, 강간하고, 자살하는 것이 너무나 쉽게 일어납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랑과 불쌍히 여김이 사라져 버리고 있습니다. 왜 삶이 이렇게 몰인정하게 되어 갑니까? 언젠가 본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큰 빌딩에 불이 났습니다. 엘리베이터도 섰습니다. 계단은 연기가 꽉찬 굴뚝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창문에 매달려 구원을 요청하다가 낙엽처럼 떨어져 갔습니다. 소방당국에서는 건물밑에 대형 쿠션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떨어지는 사람들이 운좋게 쿠션위에 떨어진 사람은 놀라기는 했으나 상처없이 생명을 구출했습니다만 쿠션에 떨어지지 않고 아스팔트에 떨어진 사람들은 박살이 나고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인생도 한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쿠션이 없는 인생을 살면 부딪히고 상처입고 부러지고 비참하게 됩니다. 그러나 삶에 쿠션이 있으면 여간 충격을 받고 상처를 입어도 그것을 견뎌낼수 있는 것입니다.
본론
1. 죄책으로 좌절할 때
첫째로, 우리는 죄책에서의 쿠션이 필요합니다. 최근에 유명인사가 뇌물사건으로 투옥하게 되고 심적인 모욕감과 좌절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사건을 여러분께서 매스컴을 통해서 듣고, 보고 마음에 큰 충격을 함께 느꼈습니다. 비록 저명한 정치가 뿐만 아닌 것입니다. 한국에 저명한 기업인도 그 마음속에 얻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투신자살했습니다. 여러분 작년 우리 한국에 자살자수가 하루 평균 36명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삶에 충격을 견디지 못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가오는 외적인 충격을 극복할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일 예수님을 알았더라면 예수님은 그들의 충격을 완화 시킬수 있는 쿠션이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이땅에 오셔서 그 자신 말로 다할수 없는 모욕과 좌절과 절망을 극복하신 분이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 당하신 모욕과 좌절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손으로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 그가 지은 인생들이 그를 욕하고 침뱉고 때리고 벌거벗겨서 십자가에 못박는 그 처참한 멸시와 천대와 모욕을 주님께서는 극복하시고 그 고난을 통해서 인류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시는 놀라운 모습을 보십시오.
히브리서 12장 2절로 3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2절로 23절에는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같이 모욕과 좌절과 절망과 고통을 극복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형편과 사정을 다 아시므로 이 예수께서 우리속에 계시면 우리가 어떠한 좌절과 절망과 모욕을 당해도 이를 능히 극복할수 있는 큰 위로의 쿠션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위로의 쿠션이 되어 주시면 어떠한 충격도 이겨낼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용서와 사랑의 쿠션이 되어 주시기 위해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주님은 멸망의 세력도 막아 주시고 절망의 세력도 막아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아무리 죄악의 수렁에 빠지고 죄책이 무겁게 누룰지라도 견딜수 없는 고통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예수께서 계시면 그 모든 죄책을 이기고 능히 하나님의 용서와 의와 영광을 얻어 승리할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7절 말씀대로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어떠한 죄인도 하나님 앞에서는 새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죄가 없는 의인이 누가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이라. 어떠한 사람의 죄는 가슴속에 감추어졌고 다른 사람의 죄는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모두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하나도 죄를 숨길수가 없습니다. 그 죄책과 고통에 몸부림친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이 가슴속에 계시면 그리스도는 죄로 벌거벗은 우리를 입혀 주시고 상처입은 마음을 치료하여 주시고 더러워진 우리 심성을 씻어 주시고 주님은 추수려서 일으켜 세워 주는 놀라운 위로의 쿠션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죄인도 하나님 앞에서는 새사람이 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으로 갈아 입을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옛 사람을 몸에 걸치고 탄식하고 울지만은 주님은 말합니다.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에게 결단을 내려서 옛사람은 던져 버리고 새사람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8절에도 보면은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벨마 바필드는 1984년 미국에서 사형이 집행된 여죄수였습니다. 그녀는 자기 어머니와 약혼자와 그리고 다른 두 사람을 쏘아 죽이는 끔찍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벨마가 사형언도를 받고 감옥에 있는 동안 독실한 크리스챤인 빌리그라함 목사의 맏딸인 엔 그라함 르쯔 부인의 전도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형집행 시간이 가까워지자 벨마 바필드는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하여 매우 고통스러워 했습니다. 자신이 지은죄는 너무나 크고 끔찍한 죄라서 도저히 용서 받을수 없다는 심적인 고통과 괴로움으로 잠을 이룰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전도한 르찌 부인에게 자신의 심경을 털어 놓았습니다. 한참동안 그 이야기를 듣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르쯔 부인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벨마, 바닷가를 거니면서 게들이 들락날락하는 적은 구멍을 모래밭에 뚫은 것을 보았지?” "네. 본적있습니다.” "그럼 어린애가 모래성을 쌓으려고 파서 생긴 구멍을 본일이 있나요?” "그것도 보았습니다.” 벨마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면 수로를 넓히기 위해서 기중기로 바닷속 깊이 파놓은 움푹한 구릉도 보았나요?” "예, 그런데 그것은 왜 물으시죠?” 그러자 르쯔 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벨마, 물이 밀려오면 그 구멍들은 어떻게 되나요?” "적은 구멍만 없어지고 큰 구멍은 그대로 남나요? 아니지요. 적은 구멍, 어린 아이가 모래성을 만들기 위해서 파놓은 구멍, 기중기로써 파헤친 큰 구멍도 다 막혀 버리고 맙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의 보혈의 파도가 한번 처오면 적은 자의 중간죄, 큰죄 다 없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물론 당신은 중죄인입니다. 어머니를 죽이고, 약혼자를 죽이고, 두 사람을 죽인 중죄인이지만은 그 죄도 예수님의 보혈의 파도가 지나가면 모두다 씻어져 버리고 마는 것이니 안심하고 먼저 떠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당신은 이미 하나님 앞에 깨끗한 사람이 되었다. 죄를 찾을래야 찾을수 없이 정결하게 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영광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죄의 정도가 크던 적던 관계없이 모든 죄는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사함을 받습니다. 어떤 죄인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새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죄책으로 말미암아 번민하고 고통하고 몸부림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모시면 용서와 의와 영광의 위대한 위로의 쿠션이 마음을 받쳐 주기 때문에 능히 극복하고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알았더라면 오늘날 죄책으로 말미암아 좌절과 낙심속에 자살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2. 견딜 수 없는 시련을 통할 때
둘째로, 삶의 견딜수 없는 시련을 통할 때 이것을 이길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올까요?
자책과 버림받은 두려움과 파멸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숨이 막히고 절망할 때 사람들은 삶을 포기하고 맙니다. 오늘 한국국민의 80%가 삶에 희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희망을 잃었기 때문에 요사이 소주를 먹는 횟수가 그렇게 많아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편 23편 4절 보십시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주님은 제해 주지는 아니하실지라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내가 통할 때 주님이 함께 통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는 전부 음침한 골짜기를 재해서 평안이 있으라는 말은 안합니다. 내가 잘못했으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통하고 시련도 당하고 고통도 당하지요. 그러나 그때에 주님은 우리를 손잡고 우리와 함께 걸어가면서 어두움을 빛으로 사망을 생명으로 도와 주시고 건져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의 시련속에서 크나큰 위로의 쿠션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위로해 주시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쓰러지고 일어나지 못해도 우리는 그것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웃으며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마음속에 위로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시편 17편 8절에는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라고 말했습니다.
이사야 41장 10절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의 생애속에 당하는 크고 작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체험속에는 여러분 혼자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항상 함께 걸어 가시며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시편 91편 1절로 7절을 외우고 이 말씀을 늘 마음속에 큰 위로로 삼습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여러분 이 말씀은 주님께서 얼마나 우리에게 큰 위로의 쿠션이 되어 준다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리고 내 앞길이 칠흑같이 어두워도 거기에 나와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시는 주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젊은 나이에 성공의 길에 들어선 영국의 한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는 영국 의사당에서 비중 높은 변호를 하기로 되었는데 너무나 그일에 지나친 부담감과 긴장 때문에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에 출세 가도를 달리던 그의 인생은 점차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정신착란증세를 일으켜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수 없었습니다. 급기야 그는 자신이 더럽고 추하고 무가치한 존재라 자악하며 자살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변에서 그를 불쌍히 여긴 많은 크리스챤들이 간절히 기도해 주고 그에게 예수님을 전도해서 그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쓸모없다 여기며 자살하려 했던 그는 이제 주님께서 자신의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더럽고 추한 자신의 삶이 새롭게 변화된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큰 자부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저 도적 회개하고서 이 샘에 씻었네. 저 도적같은 이 몸도 죄씻기 원하네. 이 찬송가 192장이 바로 윌리암 카우퍼 이 변호사가 지은 찬송인 것입니다. 그는 훗날에 영국 문학사에 있어서 고증 문학가로 손꼽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 자신을 짓누르는 삶의 무게로 인해 두려움과 파멸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숨이 막히고 절망했을 때 자신을 건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예수님을 의지하자 예수님은 절망의 수렁에서 건져내 주시고 아름다운 찬송가를 작사하게 하시고 그로 하여금 가치있는 문학가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삶의 견딜수 없는 시련을 통과할 때 주님의 은총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 마음속에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긍정적인 사고로 잘 알려진 로만 빈센트 필 박사님은 항상 무엇인가 종이 쪽지에 적어서 일어설때나 앉을때나 시간만 있으면 그것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종이가 나들나들 해지면 새 종이에 그것을 또 옮겨 적어서 그것을 늘 몸에 지니고 다니며 읽었습니다. 그 무슨말을 그렇게 읽었느냐 보니까. 그의 종이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나를 둘러싼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감싼다. 하나님의 힘이 나를 둘러싼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나를 지켜 보신다. 내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은 거기 계신다.” 이런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말씀을 종이에 적어서 항상 그것을 읽고 시인하고 다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만 빈센트 필 박사는 자기 일생을 모든 흑암을 이기고 승리할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에게 긍정적인 삶의 은혜를 허락해 줄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심한 고통에서 위로의 쿠션으로 채워 주셔서 일으켜 주시고 다시한번 꿈을 갖고 믿음을 갖고 소망차고 긍정적인 삶을 살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위험한 병으로 생명이 위태할 때
셋째로, 위험한 병에 걸려 생명이 위태할 때 누가 우리에게 위로의 쿠션이 될 수 있습니까? 병보다 더 무서운 것이 마음의 낙심입니다. 우리가 중대한 병에 들면 그만 나는 이제 죽는다. 절망이나 낙심을 하기 때문에 병앞에 타월을 던져 버리고 포기하고 항복해 버립니다. 제기불능이 되는 것입니다.
잠언서 15장 13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얼굴에 광채를 잃어 버리고 얼굴이 캄캄하게 되버리고 맙니다.
잠언서 17장 22절에는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에 즐거움이 있으면 마음속에서 약공장이 가동을 해서 엔돌핀이 넘쳐 나므로 고통도 사라지고 즐거움이 생기고 암세포를 박멸하는 세포가 활기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근심이 있어 짓눌리면 노르드 아드레날린이라는 독소가 생겨나서 모든 육체를 파괴합니다. 약공장 가동이 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의 뿌리가 마음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수 있다는 희망이 마음속에 있으면 이것이 굉장한 위로와 쿠션이 되어서 승리를 가져올수 있는 것입니다. 치료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그 사실을 우리가 확실히 알 때 굉장한 마음에 위로가 됩니다. 병원에서 의사가 사형선고를 내렸을지라도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치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이것이 용기와 믿음을 가져오는 쿠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4절로 5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여기에 치료는 하나님의 뜻인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십니다. 2천년전에 이미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대로라면 실제로 여러분 우리는 2천년전에 이미 고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그의 3분의 2가 치료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하시고 난 다음에 곧장 치료하기 시작하셔서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말구유의 귀를 베드로가 칼로써 쳐서 떨어뜨렸을 때 그 귀를 주워서 도로 치료해서 붙여준 끝까지 치료의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하셨으므로 이 예수는 이 자리에 계시며 지금도 치료의 사역을 베풀고 계신 것입니다. 마음에 희망의 쿠션을 안고 있으면 맹렬히 기도하고 싸울수 있습니다. 내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희망을 향하여 전력을 투구해서 싸울수가 있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다면 포기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7절로 18절에"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은 낫는다고 말했지 죽는다고 말하지 안았습니다.
야고보서 5장 15절로 16절에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 복음에는 구원과 함께 항상 치료가 같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하시고 병을 고치라고 말했습니다. 천국의 임재는 치료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치료는 천국의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나라에는 병이 없지요. 오늘 이땅에 천국이 우리속에 임하면 치료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와 예배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치료의 역사가 나타나야만 진실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출석하는 한 자매님의 간증을 들어 보세요. 이 자매님은 결혼 하자마자 첫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들 소식에 친정, 시집할 것 없이 모두 기뻐 박수를 쳤습니다. 그런데 아기가 6개월이 지나면서 감기가 들거나 채하면 경끼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좀더 자라면서 괜찮을줄 알았는데 5살이 지나면서부터는 경끼가 간질로 바뀌어졌습니다. 한달에 몇차례 발작을 일으키는 아들을 볼때마다 자매님의 마음은 칼로 도려내는 것같이 아팠습니다. 아들의 간질병을 고치기 위하여 유명하다는 병원은 다 다녀봤지만 의사들은 아들이 뇌에 상처를 입고 있기 때문에 평생 고칠수가 없다는 절망적인 말만 했습니다. 요란한 싸이렌 소리만 들려도 간질을 하고 잘못했다고 야단만쳐도 영낙없이 발작을 했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한 대만 얻어 맞아도 발작을 했습니다. 자매는 이 아들이 한평생 이렇게 간질로 발작을 하고 살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좋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들과 함께 죽어버릴 작정을 하고 자매님은 많은 수면제를 가지고 와서 다량의 수면제를 자기가 먼저 먹고 그리고 아들에게 수면제를 감기약이라고 속이고 먹이려고 하는데 아들이 팔꿈치로 뚝쳐버리니까 약이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것을 보자 다시 약을 주어서 아들에게 먹일수 있는 용기가 없었습니다. 자매님 혼자 쓰러졌습니다.조금 후 식구들은 자매님이 수면제를 먹은 사실을 알았고 서둘러 자매님을 병원으로 옮겨 입원을 시켰습니다. 입원해 있는동안 자매님은 꿈을 꾸었는데 꿈에 하얀옷을 입은 분이 나타나서 자매님에게 묻는 것입니다. "네 아들의 병을 고칠수 있다면 똥 한바가지라도 먹을수가 있겠느냐?” 그말은 들은 자매님은 "네~ 정말 똥 한바가지를 먹고 병이 낫는다면 기꺼이 먹겠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흰옷입은 분이 다시 "정말 네 아들이 낫는다면 똥을 먹겠느냐? 아들을 위해 한 드럼의 똥이라도 먹으라면 먹겠느냐?” 그렇게 묻자 자매님은 "네. 아들의 병만 낫는다면 똥을 먹다 죽더라도 먹겠습니다. 결사적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좋다. 네가 아들을 위해 그만한 각오를 했다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고 사라졌습니다. 그 꿈을 깨고 나자 자매님은 마음에 아이의 간질병을 고칠수 있다는 큰 희망이 생겨났습니다. 병원을 퇴원한 자매님은 주일이 되자 곧장 교회를 찾아 갔는데 그 교회가 바로 여의도순복음교회였습니다. 예배에 출석한 자매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우리의 모든 저주와 질병을 청산하였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마친후에 제가 그러더랍니다. ”오늘 간질병을 앓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온 자매님이 있는데 이 시간에 하나님이 긍휼이 여기사 그 간질병을 고쳤습니다." 그는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하고 하나님 앞에 그것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뇌파 검사를 했더니 뇌의 이상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때후로부터 시작해서 어린아이는 간질병에서 깨끗이 고침을 받게 된것입니다. 희망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가 절망에 처해서 죽으려고 다량의 수면제를 먹었지만 꿈속에 주님이 나타나서 그 자매에게 희망을 준것입니다. 아들을 위해서라면 똥을 한드럼통이라도 마시겠다. 평생 똥을 먹다가 죽어도 아들을 위해서 희생하겠다. 그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절절합니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몸을 찢고 피흘린 예수님께서는 이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사랑보다 수천, 수만배로 더 강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치료에 대한 희망을 가질수 있고 이 희망이 우리에게 놀라운 위로의 쿠션이 되어서 어떠한 병이라도 끝까지 싸워 이길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4. 죽음이 다가올 때
넷째로, 죽음이 다가올 때 우리는 정말 쿠션이 필요한 것입니다.
남이 죽는 것을 볼 때 ‘아~ 죽었구나. 훌륭한 사람이 죽어 신문에 광고가 나도 살만큼 살고 죽었구나.’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여러분 이 죽음이 주관적인 체험이 될 때는 극단적인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죽음이 내게 다가오면 그때는 부귀도 영화도 공명도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자기가 직면한 것은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죽음에 직면한 사람이 천국도 모르고 지옥도 모르고 죽어서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다고 할 때 좌절과 절망은 형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요사이 책을 한권 읽고 있습니다. 호스피스에서 지은책인데 많은 죽어가는 사람의 머리맡에서 마지막 임종을 도와주는 그 작업을 하시는 자매님이 기록한 책인 것입니다. 그 책에 보니까 하나님을 모르고 내세를 모르는 사람은 끝까지 이 땅에 매달려 있으려고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안돼~ 안돼~”하면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이 안된다고 고함친다고 죽음이 물러 가지 않습니다. 마지막 이땅에 매달려 있는 사람은 이땅을 잃어 버릴 때 아쉬워서 눈물을 펑펑 쏟으며 몸부림치고 발버둥치면서 죽어가고 그러나 내세를 아는 사람들은 죽음을 한 여행으로 생각하고 가족들 다 모아놓고 "나 먼저 가니 뒤에 오라. 먼저가서 기다리겠다.” 또 보내는 사람도 "먼저 가시라고. 안심하고 먼저 가시라고 우리 뒤에 곧장 따라 가겠다.” 서로 잘있거라. 잘가거라. 이와같은 대화를 나누고 편안히 눈을 감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구주시오, 우리와 함께 한다는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음올 때 굉장한 위로의 쿠션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로 4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누가 이런말을 해줄수가 있습니까? 죽는 우리에게 누가 이런 담대한 말을 할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위해서 저 건너편 세상에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와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우리를 너무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서 몸찢고 피흘려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인 것입니다.이런 언약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은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얼마나 큰 위로의 쿠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죽음을 이길수 있지 않습니까? 천국의 소망이 죽음을 당하는 우리에게 큰 위로의 쿠션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말했습니다.
이 장막집은 무너져요. 앞서거니 뒷서거니 무너진다고요. 그러나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이 있기 때문에 낡은집 무너지고 더 좋은 영원한 새집으로 들어가는데 얼마나 기쁨이 충만하겠습니까?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8절로 9절에 말하기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빌립보서 1장 23절에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라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체험을 한 이후에 죽음은 그에게 하나의 통과하는 과정에 불과했습니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이땅에서 고생하느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이 더 좋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먼저 앞서 보내는 가족이나 친지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떠나는 부모님을 바라볼 때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소망이 얼마나 큰 위로의 쿠션이 되는지 모릅니다. 지금 떠나면 이제 영원한 이별이라고 생각할 때 마음이 슬픔니다.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앞서 떠나고 다시는 만나볼수 없다고 생각할 때 그 마음에 고통과 괴로움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하늘나라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지금 잠시 떠나나 영원히 만날것이라는 위로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마음에 쿠션이 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로 14절에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소망없는 다른이들과 같이 슬퍼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데리고 우리를 마중하러 오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날 소망의 쿠션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대 전도자였던 무디 선생이 죽음의 날이 임박한 것이 예감하고 자신곁에 모인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느날 신문에 노스필드의 무디가 죽었다고 하는 기사를 읽거든 그 사실을 믿지 마십시오. 그때는 지금의 나보다 더 확실하게 살아 있을 것입니다. 흙으로 지은 옛집에서 나와서 더 높고 영원한 집, 죄악이 접근하지 못하고 더럽힐수 없는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더 높은 곳에 있을 것입니다. 내 육신은 1837년에 태어났고 영혼은 1856년에 거듭났습니다. 육신은 죽을것이나 성령으로 난 것은 영원히 살것입니다." 무디 선생은 소천하기 전에 잠깐 천국의 영광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잠에서 깨어나며 말하기를 ‘세상을 떠나지만 천국이 내 앞에 열립니다. 이것이 죽음이라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십니다. 나는 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말을 들은 자녀들이 ”아닙니다. 아버지. 아니에요. 아버지는 꿈을 꾸고 계신 것입니다."라고 했더니 무디 선생은 ”아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천국문에 들어서고 있단다."라고 말한뒤에 ”이것이 나의 승리, 오늘이 나의 대관식 날이다. 아~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후~욱 숨을 내쉬고 이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평생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한 디엘 무디답게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무디 선생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바라보며 이땅을 떠났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합니다. 육신의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에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크리스챤은 육신을 벗어날 때 당하는 불안과 공포와 좌절과 슬픔을 능히 이길수 있는 은혜의 쿠션이 있습니다. 이 위로의 쿠션 때문에 죽음조차도 우리는 담대하게 맞이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들의 삶의 형형색색의 고난 중에서 예수님은 항상 삶의 위로의 쿠션이 되어 주십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믿고 말씀속에 살면 예수님이 주시는 위로의 힘으로 모든 고난을 이기고 나갈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고난이 안다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안믿는 사람과 똑같이 우리는 모든 시련과 환난과 고난을 당합니다만 우리는 그 고난을 이길수 있는 쿠션이 있습니다. 여간한 충격이 와도 그를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쿠션이 우리속에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싸임을 당하여도 쌓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핍박을 받아도 버림바 되지 아니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는 놀라운 그리스도의 쿠션과 위로가 우리속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당당하게 우리는 현실을 극복하고 이겨 나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없이 인생을 산다는 것은 아무런 쿠션없이 맨땅에 내동댕이 치는것과 같사옵니다.
아버지 아무 보호장막없이 내동댕이 치면 상처가 되고 피투성이가 되고 뼈가 부러지고 죽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영육간에 쿠션이 되어 주셔서 위로의 큰 은혜로 감싸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내동댕이 쳐도 일어나고 짓밟혀도 일어나고 버림을 받아도 일어납니다. 그리스도가 주는 위로로 우리는 모든 일을 이길수 있사오니 감사합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나 죽음이냐 칼이랴. 이 모든일에 우리를 사랑하신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말씀하신 것을 알게 도와 주시옵시고 이 예수를 품에 품고 우리가 주님의 위로로 살고 또 위로가 없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전달할수 있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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