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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제자와 베드로

요한복음 이재철............... 조회 수 2043 추천 수 0 2009.04.22 16:4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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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21:1∼14 
설교자 : 이재철 목사 
참고 : 주일 설교말씀 / 1998년 / 3월 1일 사순절 첫째 주일(주님의교회) 

중국 송대(宋代)의 선종(禪宗)을 대표하는 벽암록(碧巖錄)에 '줄탁동기( 啄同機)'라는 말이 나옵니다. 계란이 부화하여 병아리로 태어날 때, 이제는 모든 것이 충분히 자라 밖으로 나 갈 때가 되었음을 병아리가 안에서 알을 톡톡 쳐서 어미 닭에게 알리는 것을 '줄( )'이라 합니 다. 그리고 바로 이때를 놓치지 않고 어미 닭이 밖에서 알을 쪼아 껍질을 깨트려 주는 것이 '탁 (啄)'입니다. 바로 이 '줄( )'과 '탁(啄)'이 '동기(同機)'―'한가지 동(同)'과 '때 기(機)'―즉 '줄'과 '탁'이 정확하게 같은 때, 같은 시각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쪼아 주는 것이 안에서 두드려 알리는 것보다 빨라도, 그렇다고 해서 늦어서도 않됩니다. 안팎의 타이밍이 맞아떨어질 때 비로소 튼튼한 병아리가 태어난다는 것이 바로 '줄탁동기'의 문자적 의미입니다. 세상 이치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새로운 시대를 일구어 가거나 매사를 처리하는 데에도 적절한 '때(時機)' 적절한 행동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선각자 혹은 선구자 그리고 지도자들의 행 동이 이 '때'를 앞지르면 많은 희생이 뒤따르고, 반대로 이 '때'를 놓쳐 버리면 그것은 기필코 민족적 비극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줄탁동기'의 함축적 뜻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결코 닭이나 병아리보다 나을 것이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하찮은 닭과 병아리의 세계에서는 오늘도 줄탁동기가 어김없이 이루어 지고 있는 반면, 인간세계에서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줄탁동기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 시 지각력과 행동력이 동시에 수반되어야만 합니다. 알속에 있는 병아리는 더 이상 알속에 있어 서는 않된다는 것을 깨닫는 지각력과, 알을 두드려 그 때를 밖으로 알리는 행동력을 동시에 지니 고 있어야 합니다. 만약 둘 중에 어느 것 하나를 놓쳐도 그것은 정상적으로 부화될 수는 없습니 다. 밖에 있는 어미 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들을 수 없는, 알속의 새끼가 보내는 신호를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는 지각력과 함께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알을 쪼아 주는 행 동력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한가지라도 결여된다면 그 어미 닭은 정상적인 새끼를 얻을 수는 없 습니다.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기에 헤아릴 수조차 없는, 이 지구상의 모든 닭들이 한결같이 '줄탁동기'의 결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입니까? 이처럼 정확한 지각력과 행동력이 동시에 수반되어야 하는 줄탁동기의 원칙과 법칙 위에서 태어나고 살아가기에, 닭과 병 아리의 세계에는 부조리나 불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왜 인간 세상에는 혼돈과 혼란이 끊어지지 않으며, 정의의 이름으로 그릇된 과거가 반복되는 비극이 중단되지 않습니까? 인간은 줄탁동기의 원칙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 다. 바른 지각력과 행동력을 동시에 지녀야 한다는 줄탁동기의 법칙을 소홀히 여기고 있기 때문 입니다. 지각력을 지녔다는 사람들은 한발 물러서 비판만 할뿐 행동하려 하지 않는 반면, 행동이 앞서는 사람들은 바른 지각력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예로부터 인간 세상의 특징입니다. 지각력을 상실한 행동력이란 모두 부질없는 짓이며, 행동력이 결여된 지각력이란 헛된 망상에 지 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지각력과 행동력이 함께 가지 않을 때 인간의 생각과 삶은 늘 분 리될 수밖에 없고, 그 당연한 결과로 인간사회는 악순환의 반복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됩니다. 신앙의 세계 또한 이와 똑 같습니다.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주님의 명령을 좇아 갈릴리로 되돌아간 제자들― 그러나 그들은 갈릴리 에 도착한 뒤론 그만 주님을 잊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욕구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충동적으로 물고기잡이에 나서고 말았습니다. 물고기 잡는 일이라면 언제 든 자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온 열심을 다해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들이 만나 뵈어야 할 주 님께서 바닷가에 서 계셨으나 그들 중 아무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그들은 고기잡이에만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밤이 맞도록 쉬지 않고 그물을 던졌건만 웬일인지 단 한 마리의 물 고기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이미 새벽이 되었건만 그들은 여전히 빈손, 빈 그물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바닷가에서 사람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낯익은 음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 음성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려고 하지 않았습 니다. 그들은 '없나이다'하고 기계적으로 대답했을 뿐이었습니다. 똑같은 음성이 다시 울렸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그 음성이 지닌,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다시 한번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면서도 자신들에게 그와 같은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분은 주님뿐이심을 아무도 깨달으려 하지를 않았습니다. 마치 상 가 집에 가서 목을 놓아 통곡하면서도 막상 누가 죽었는지 조차 모르는 것과 같은 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한 번 더 던진 그물을 들어올리려고 했을 때 제자들은 깜짝 놀라고 말 았습니다. 그물을 쉽게 끌어올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밤새도록 텅 비어 있던 갈릴리 바다였음 이 틀림없건만 마지막 던진 그물에 그물이 넘치도록 많은 고기가 잡힌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그 마지막 순간 전개된 대 역전극의 감격에 도취되어 있을 때, 그들과는 다른 두 제자의 모습을 본문 7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여기에서 말하는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란, 이미 오래 전 요한복음 13장 23절에서 살 펴본 바와 같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 사도 자신을 일컫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던 진 그물에 그물을 들어올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잡힌 것을 확인하는 순간, 요한은 지체없이 베드로를 향해 '주시라'고 외쳤습니다. 주님아니시고서는 공허하기만 하던 갈릴리에서 결코 그와 같은 역사가 일어날 수 없음을 요한만은 분명하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 의 외침을 들은 베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겉옷을 벗어둔채 그물을 잡고 있던 베드로는 '주시 라'는 요한의 말을 듣는 순간, 황급히 겉옷을 두른 후에 아예 바다 속으로 뛰어내리고 말았습니 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들은 이상 더 이상 배 위에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천년 전 갈릴리 바다에서 요한과 베드로가 보여주었던 대조적인 모습을 좀더 면 밀하게 관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잡힌 고기에만 얼이 빠져 그 고기의 배후에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지도, 알려 하지도 않을 때에, 요한만은 그것이 주님의 역사이심을 정확하 게 알았습니다. 이제 방금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라' 말씀하시던 그 음성의 주인공이 주님이심을 비로소 제대로 인식했습니다. 바닷가에 서시어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시는 주님을 그제서야 똑바로 알아보았습니다. 그 중요한 사실을 뒤늦게나마 분명하게 인식한 자는 요한 뿐이었습니다. 요한은 제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지각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주님께서 계심을 가장 먼저 깨달았을 뿐, '주시라'고 외치기만 했을 뿐, 자신이 주님을 향해 뛰쳐 나아갈 생각을 전혀 하지를 않았습니다. 마치 '주시라'고 외치는 것만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착각하고 말았습니다. 말하자면 요한의 지각력은 누구보다도 출중하였지만, 그러나 그에 상응하는 행동력 이 요한에게는 결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스스로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사랑 받는 자란 자부심을 평소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 그 자부심에 걸맞는 행동의 본을 보 여준 적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주시라'는 외침이 요한의 입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베드로는 겉옷을 걸치고 바다 속으로 뛰어 내렸습니다. 여기에서 '바다로 뛰어내리다'는 구절을 원문은, '베드로는 자기 자신 을 바다속으로 던졌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1초라도 더 빨리 주님에게 다다르고자 하는 베드 로의 급한 심정을 잘 묘사한 표현입니다. 게다가 베드로는 그 급한 와중에도 벗어 두었던 겉옷을 걸쳐 입을 정도로 예의를 갖추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베드로는 제자들 중에서 행동력이 가장 앞서는 인물이었습니다. 누구 하나 베드로의 행동을 흉내 낼 수조차 없을 정도로 그의 행동은 전광석화처럼 빨랐습니다. 이점에 관한 한 그는 분명히 요한보다 나았습니다. 그러 나 전체적으로 볼 때 베드로가 요한보다 나을 것이 없는 것은, 행동력이 누구보다도 뛰어난 베드 로이긴 했지만 그러나 그에게는 요한과 같은 지각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처럼 급하게 뛰 어내리기 전에 요한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과연 주님이신지 아닌지, 주님이 맞다면 정확하게 어디에 계신지 자신이 직접 확인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확인한 것이 없었습니 다. 겉옷까지 다 두르고서 물속에 뛰어드는 것이 과연 주님앞에 더 빨리 당도할 수 있는 길인지 조차 생각해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뛰어내리기부터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다음과 같 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50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보니"(8~9a)

여기에서'50간'이란 지금의 단위로 100m에 달하는 거리입니다. 그 거리를 베드로가 가장 먼 저 건너왔다고 성경이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배를 타고 있던 다른 제자들의 도착 소식만 전하 고 있습니다. 그래서 Hoskyns같은 신학자는 겉옷까지 두른 베드로의 수영보다 다른 제자들이 탄 배가 더 빨랐다고 단정합니다. 수영한 베드로가 먼저였는지 아니면 배를 탄 다른 제자들이 먼저 도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황급히 물 속에 뛰어내렸다는 것 외에, 그 이후의 예수님께 당도하기까지의 과정을 철저하게 무시해 버림으로써, 성경은 베드로의 그와 같은 행동이 사려 깊지 못한 충동적인 해프닝에 불과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베드 로의 충동적인 행동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때까지 지각력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베드로의 행동은 매사에 충동적이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주님을 기다리다가 순간적인 충동을 이기 지 못해 물고기나 잡으러 가자며 제자들의 앞장을 선 것도 베드로였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 실 것을 예고하신 주님의 앞길을 가로막으며 주님을 꾸짖는 돌출 행동을 한 사람도 베드로였고, 예수님을 심문하는 대 제사장의 집 뜰에서 예수님을 욕하고 저주하면서 예수님을 알지 못하노라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장본인 역시 다른 사람 아닌 베드로 였습니다.

이처럼 지각력이 행동력을 수반하지 못하거나 반대로 행동력이 지각력을 앞설 때, 요한이나 베드로나 신앙과 삶이 궤리현상을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과의 사이에서 참된 줄탁동기가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들의 신앙은 공허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삶 은 욕구의 노예 상태를 벗어날 수 없었고, 그들의 무리는 추악한 이기 집단에 지나지 않았습니 다. 그러나 그들이 불완전한 자신을 벗어 던지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온전히 거하였을 때에, 성령의 조명 안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온전하심을 힘입었을 때에, 주님 안에 서 그들의 지각력과 행동력은 회복되고 통합되었습니다. 주님이시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을 향해, 지각력과 행동력의 완전일치 완전조화를 이루신 그리스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자 들은 그때부터 주님과 바른 줄탁동기의 관계를 맺으면서 비로소 진리의 부화, 생명의 부화, 사랑 의 부화, 공의의 부화, 구원의 부화, 빛의 부화를 이루어 가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지각력 과 행동력을 회복하고 통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바른 줄탁동기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으로써 그리스도인답게 바른 삶의 부화를 꾀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1919년 오늘은 일제에 항거하는 3.1만세 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났던 날입니다. 당시 3.1운동 의 주도 세력이 교회였음은 이미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때의 교회는 민족의 희망이었고, 그리스 도인들은 민족의 등불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당시의 그리스도인 수는 지금의 50분의 1에 불과 했 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분별하는 지각력과, 지각한 것을 실 천하는 행동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진리 안에서 참된 생명 과 빛을 부화해 내는 줄탁동기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79년이 지난 오늘, 이 땅의 전국 방방곡곡에는 십자가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교회와 교인들이 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음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진리안에서 지니고 실천해야 할 지각력과 행동 력―이 둘 중 하나를, 혹은 모두를 상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말입니다. 누가? 바로 우리가 말입니다. 누가? 나 자신이 말입니다. 재벌들의 변칙적인 부의 세 습이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재벌이란 철저한 이익집단이기에 이익이 되기만 한다면 한국적인 상황속에서는, 변직적인 부의 세습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익집단이 아닙니다. 교회는 진리를 따르는 무리들의 집단으로 이해 관계를 초월해야만 합니다. 그런의미에서 적어도 교회에서 성직의 세습 이란 있을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목회자가 자신의 자식에게 목사직을 세습해 주는 일이 이땅의 도처에서 시행되었고, 또 시도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사유물로 여기지 않는 한 있을수 없는 일이기에 목사직의 세습은 교회타락의 극치가 아닐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교계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이에 대하여 철저하게 침묵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빛과 소금이어야 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처럼 썩었는데 사회를 탓해 무엇하겠습니까. 지각력을 지니고 있되 행동력을 결여한 요한, 지각력 없이 충동적인 행동력만으로 덤벙대는 베드로, 그들 모두를 상실 한 채 여전히 고기 그물만을 움켜쥐고 있는 나머지 제자들―이 삼자 중의 하나가 영락없는 나 자 신의 모습 아닙니까? 우리 각자 한사람 한사람이 진리 안에서 지각력과 행동력의 회복 및 통합을 이루었던들 어찌 이 땅의 교회가 비판의 대상이 되며, 천 만 명 이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산다는 이 나라가 어찌 이처럼 부실하고 불의하며, 오늘날과 같은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겠습니 까?

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이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주 님께서 구원자로서의 지각력과 행동력의 통합을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당하셨던 고난을 기리는 회개의 절기입니다. 십자가를 이루는 두 나무 중 하나가 지각력을 뜻한다면 나머지 하나 는 행동력이었고, 그 양자가 통합되는 그 위에 주님의 고난이 수반되었던 것입니다. 고통과 고난 없이 진리의 지각력과 행동력은 통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양자의 통합을 위하여 주님께서 고난을 피하지 않으셨을 때, 바로 그 십자가를 통하여 주님과 하나님 사이에 줄탁동기가 이루어 졌으니, 부활 곧 영원한 생명이 그 십자가 위에서 부화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화된 생명 속에서 우리가 이렇듯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하는 이 아침, 우리 속에 계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보십 시다. 우리 심령의 갈릴리 바닷가에서 밤이 맞도록 우리를 향해 서 계시는 주님께 우리의 시선을 맞추어 보십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우리가 무엇을 잘못 행하고 있는지, 우리로 하여금 늘 깨닫게 해주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우리의 영혼과 양심을 톡톡 두드리시면서 쉬임없이 '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 사실을 지각한다면, 때를 놓치지 말고 주님의 그 말씀을 좇아 이번에는 우리가 '탁(啄)'으로 응답해 드립시다. 그 과정을 통해 껍 질이 깨어지는 고통과 아픔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다. 그 고통을 주저하는 한 생명일 수 있는 병 아리는 알속에서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마십시다. 주님의 '줄'에 우리가 '탁'하는 것만이 우리 자신과 이 민족 그리고 나라를 살리는 길이요, 오직 줄탁동기가 있는 곳에서만 새 생명의 새 역사가 부화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와 '베드로' 는 별개의 둘이 아니라, 우리 속에서 통합되어야 할 하나의 양면인 것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지각없는 행동은 충동이요, 행동을 수반하지 못하는 지각이란 망상일 뿐임을 깨닫게 해주시 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모두 망상과 충동 속에서 살아온 결과가 오늘의 위기임을 깨닫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줄탁동기가 있는 곳에서만 생명의 부화가 있음을 깨닫게 해주신 것을 더더욱 감사드립니다. 사순절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 공허한 세상으로부터 주님을 향해 돌아서므로, 주님 과 우리 사이에, 우리와 우리 사이에, 우리와 세상 사이에, 참된 줄탁동기가 쉬임 없이 이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오늘날 경제적 위기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과 아픔이 떨쳐 버려 야 할 껍질을 깨는 과정이게 하시고, 마침내 우리의 삶 속에 새 생명의 새 역사가 부화되게 하옵 소서.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기의 중요성을 잊지 말게 해주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는다는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진리의 지각력과 행동력을 상실한채 살다가, 줄탁동기를 지금도 어김없이 실행하고 있는 닭이나 병아리보다 더 못한 존재가 되지 않게 도와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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