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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을 먹으라

요한복음 이재철............... 조회 수 2300 추천 수 0 2009.04.22 16:5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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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21:1∼14 
설교자 : 이재철 목사 
참고 : 주일 설교말씀 / 1998년 / 3월 22일 사순절 넷째 주일(주님의교회) 

 저희 집 2층 한쪽 벽에는 세로로 된 긴 액자가 걸려있습니다. 액자의 한 가운데에는 `빛을 발하라'는 큰 글자가 쓰여있고, 그 양옆으로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는 이사야 60장 1절의 말씀이 아주 작은 글씨로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왼쪽 아래에는 `홍성사 이재철 사장 위해, 묵농'이란 서명과 함께 낙관이 찍혀있습니다. 묵농이란 젊은 서예가가 20년 전 사업을 하던 저를 위해 써준 작품이었습니다. 우연한 자리에서 친구의 소개로 통성명을 하게 된 그를 그 이후 공식석상에서 한 두 차례 더 스쳤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전 연락도 없이 느닷없이 제 회사를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저를 위해 썼다는 그 작품을 화선지 채로 동그랗게 말아 손에 쥐고서 말입니다. 이유인즉은 같은 젊은 사람끼리 사귀고 싶어서라고 했습니다. 개인적인 친분이 전혀 없던 그의 예기치 않은 호의에, 저는 그를 고급식당으로 인도하여 극진하게 식사 대접하는 것으로 보답하였습니다. 그 뒤 그로부터 따로 연락이 없는 가운데 몇 개월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묵농을 저에게 소개 시켜 주었던 친구로부터 묵농이 죽었다는 뜻밖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간경화증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가슴아픈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년의 그는 경제력을 완전 상실한 채 조금이라고 안면이 있는 사람이기만 하면 무조건 글씨를 써서 가져다주곤, 혹 몇 푼이라도 받게되면 그 돈으로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며 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저를 위해 쓴 글씨를 들고 느닷없이 저를 찾았던 것도 그의 말대로 저와 사귀고 싶어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저를 존경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직 돈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날 그가 필요로 했던 것은 제가 고급식당에서 베푸는 거창한 식탁이 아니라 돈이었습니다. 엄청난 사업자금이 아니라 그저 며칠을 더 연명하는데 필요한 최저 생계비 였을것입니다. 만약 제가 그날 그를 대접하느라 지불한 돈을 그에게 현금으로 주었더라면 그는 그 돈을 며칠동안 훨씬 더 요긴하게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가 정말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 우둔한 자였습니다. 그가 저를 만나 단지 단 한 번의 끼니만을 해결하고 돌아설 때 그의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그의 가슴은 또 얼마나 아렸겠습니까? 저는 그때까지 책상서랍 속에 아무렇게나 넣어두었던 묵농의 작품을 찾아 표구를 한 뒤 사무실 벽에 걸었습니다. 첫째로 저로 인해 잠시나마 가슴아팠을 묵농에게 속죄하기 위함이요, 두 번째는 같은 어리석음을 두 번 다시 범치 말자는 의미에서였습니다. 그것이, 지난 20년동안 많은 액자를 처분하는 가운데에서도 상대적으로 질이 떨어지는 그의 작품만은 아직까지 남아있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그 액자를 계속 벽 위에 걸어둔다고 해서 같은 잘못을 전혀 되풀이 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닙니다. 지나온 20년 동안 묵농에게 저질렀던 것과 똑같은 실수를 수도 없이 범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모두의 고백일 것입니다. 상대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막상 필요한 것은 주지 않고 필요치도 않는 것을 인심쓰듯 안겨주는 실수를 얼마나 자주 저질러 왔습니까? 설령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았다 할지라도 때로는 능력이 없어서, 혹은 능력이 있다할지라도 웬지 싫어서 그 필요를 외면한 적은 또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것은 부모 자식간이나 부부사이라고 해서 예외인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의 진정한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에 대한 기대가 크면 클수록 실망감만 더 커질 뿐입니다. 마치 제게 기대를 걸고 왔다가 그저 밥한 끼 얻어먹고 무거운 발길로 되돌아서던 묵농처럼 말입니다.

혹 무슨 일을 하기 위해 밤을 꼬박 새워 본 적이 있습니까? 시간이 깊어갈수록 점점 더 분명하게 찾아오는 것은 배고픔입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오후 7시경에 식사를 한 뒤 자정을 넘기고 새벽까지 버티고있는 데 어찌 허기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밤샘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밤참을 준비하기 마련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책상 앞에서 책을 읽거나 혹은 방안에서 가만히 묵상하느라 밤샘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갈릴리바다에서 계속 그물질을 하느라 밤을 꼬박 새운 것입니다. 그물을 던졌다 끌어올리고 다시 던지기를 반복한다는 것은 중노동중의 중노동입니디. 그런 만큼 날이 밝아올수록 그들의 허기는 더욱 심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밤 베드로의 선동에 의해 충동적으로 고기잡이에 나섰기에 밤참을 준비했을 리가 없었습니다. 새벽녘 그물을 거두고 각자 집으로 돌아간다 한들 빈민촌에 살고있는 그들의 집에 그 이른 시각, 그들을 위한 아침이 따로이 마련되어 있을리도 없었습니다. 모든 여건을 생각할수록 더 더욱 허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이 마지막 순간 주님의 도우심으로 그물 가득히 고기를 잡아 육지에 당도하고 보니, 거기에는 숯불 위에 생선과 떡이 놓여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준비해 두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음식의 용도가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본문12절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놀랍게도 그 음식들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한 조반으로 마련해 두신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망각한 채 허망한 갈릴리에서 의미 없이 헛그물질을 하고있는 동안, 주님께서는 그 한심한 제자들을 위하여 조반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주님의 이 짧은 한 마디야말로 주님께서 인간을 위한 진정한 구원자 되심의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첫째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순간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 중 누구도 배고픔을 호소한 자가 없었습니다. 제자 중 누구도 조반을 간구한 적도 없었습니다. 아니, 그들은 밤새워 헛그물질 하느라 너무나 허기졌기에 허기졌다는 사실자체를 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떨어져 육지에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 그 순간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둘째,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셨습니다. 아무리 제자들의 필요를 파악하고 계셨다 할지라도 그 필요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시지 않았더라면, 그 분은 우리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그물질하는 동안 친히 조반을 만들어 두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치 않으셨습니다. 육지에 막 당도한 제자들에게 이제 방금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주님께서 마지막 순간 제자들에게 그물이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은 고기를 허락하신 주된 목적중의 하나가 제자들에게 조반을 만들어 주시기 위함이었음을 분명히 밝혀주고 계십니다. 주님의 능력 아니었던들 그날 새벽 그 조반은 애시당초 불가능하였을 것이기에, 그 조반이야 말로 주님 능력의 결정체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셋째,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필요를 정확히 아시고 그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위하여 그 능력을 베푸시는 넉넉한 사랑을 갖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한마디로 배신자들 아닙니까? 정작 주님 곁을 지켜야할 때 도망가버렸던 배반자들 아닙니까? 지난밤만 할지라도 주님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오직 욕망의 헛그물질만 해대던 쓸모 없는 인간 인간쓰레기들 아닙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그들에게 꼭 줄것이 있다면 저주 이상은 아니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햐여 조반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한심한 인간들의 상태에 상관없이 그들을 위해 당신의 능력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셨습니다. 본문에서 사용된 `조반을 먹는다'는 동사 'aristao'는 오찬이나 만찬의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마련하신 음식들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간단한 아침이 아니라, 오찬이나 만찬처럼 성의를 다하여 준비된 풍성한 것이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배신자들을 위하여 그토록 온정성을 다해 조반을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본문 13절은 이렇게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자신들이 범한 죄과를 너무나도 잘 알기에 주님께서 친히 준비해 주신 음식에 감히 손을 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송구스러워 하기만 하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친히 음식을 나누어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분은 진정 넉넉한 사랑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이 짧은 한마디야말로 제자들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의 고백인 동시에, 당신이 누구 신지를 다시 밝히시는 주님의 자기 선언이었습니다. 주님이시야 말로 이 땅에 오신 진정한 구원자셨던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400년 동안이나 노예생활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침내 출애굽의 대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40년 동안이나 광야를 거쳐야만 했습니다. 3천5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이 살 수 없는, 풀 한 포기 물 한 방울 없는 광야에서 40년이란 긴 세월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책임져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셨습니다. 만나가 떡이라면 메추라기는 고기였습니다. 물이 없는 곳에서는 반석을 터트리기까지 하시면서 매일 필요한 물을 풍족하게 내려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게 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그들을 위하여 주시는 것은 그것이 모두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광야의 여정을 다 끝내고 마침내 가나안 땅 맞은편 요단강 동편에 도착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40년 동안 너희를 인도하여 광야를 통행케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헤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신29:5)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40년 동안 광야를 행진하는 동안 먹을 것과 마실것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까? 만약 옷이 없다면 광야의 그 불볕 태양을, 그리고 한밤중의 한기를 어찌 견딜수 있겠습니까? 만일 신이 없다면 그 거친 광야를 어찌 걸어서 횡단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옷과 신발이란 음식과 물처럼 필수불가결 한 것이었습니다. 400년 동안이나 노예로 살던 그들에게 옷이나 신발이 몇 벌이나 있었겠습니까? 있었다한들 광야생활에서 그 수명이 몇 년이나 가겠습니까? 상식적으로 따져본다면 매일 걸어야 하고 입은 옷채로 잠까지 자야하는 그들의 경우, 옷과 신발은 몇 년 지나지 않아 다 거덜나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40년이란 기나긴 세월이 경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옷은 전혀 낡지 않고 그대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신발 역시 어느 곳 하나 헤어진데 없이 말짱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 중 누구 하나 하나님께 의복이나 신발을 구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옷과 신임을 먼저 아시고 당신의 능력을 40년 동안 변함없이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매일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살아가면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등을 돌리던 배은망덕한 인간들이었습니다. 40년 동안 그들의 의복과 신이 낡지 않고 헤어지지 않음을 당연하듯 여길 뿐,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으려고 조차 하지 않던 우둔한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필요를 먼저 아시고 당신의 능력을 끊임없이 베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사랑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완전한 구원자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보내신 그분의 독생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온전한 메시야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참되고 성숙한 믿음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내개 없는 것으로 인해 절망하거나 좌절치 않은 것입니다. 지금 내게 없는 것을 나의 방법으로 무리하게 구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내게 있어야 할 것을 나보다도 더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 필요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나의 형편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을 베풀어주시는 완전하고 넉넉한 사랑이십니다. 따라서 지금 내게 있는 것이 정말 내게 필요한 것이요, 내게 지금없는 것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보시기에 불필요한 것이거나 혹은 해로운 것입니다. 정말 내게 필요한 것이라면, 때가 되면 주님께서 순리대로 반드시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이란 지금 내게 있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지금 있는 것을 족하게 여기며 감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권면 하고 있습니다.

"지족(知足)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득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6~8)

`지족'―`알 지(知), 족할족(足)'―즉 지금 내게 있는 것이 족함을 아는 마음만이 경건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내게 있는 것이 족함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불평과 불만 그리고 욕망과 불의의 노예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참된 싱앙과 경건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이 이후 사도행전에서 경건의 삶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형편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위해 조반을 만들어 주시는 주님을 바로 알게된 뒤부터, 있는 것으로 자족하는 삶을 살았던 까닭입니다. 온 나라에 불어닥친 경제적 한파 때문에 우리의 가계가 형편없이 위축되었습니다. 실직을 당하거나 도산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불안과 근심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가 일시적인 위기를 당했다고 해서 왜 염려하고 근심합니까? 예전의 삶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없어진 것에만 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으로 족한 줄을 안다면 불안해할 까닭이 없습니다. 오히려 남아 있는 것으로 인하여 감사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무엇을 갖고 왔습니까? 적수공권으로 오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 세상 떠날 때 역시 빈손으로 가야하지 않습니까? 이 땅위에 나의 것이라곤 본래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에게 입을 옷이 있습니다. 신을 신이 있습니다. 하루세끼 먹을 것이 있습니다. 가정이 있습니다. 가족이 있습니다. 친구가 있습니다. 교회가 있습니다. 믿음이 있습니다. 복음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호흡할 공기가 있습니다. 이 얼마나 족한 삶입니까? 내가 구하지 아니한 이 모든 것을 이처럼 아낌없이 주시는 주님이시라면, 주님 보시기에 내게 필요한 것을 왜 주님의 때에 허락치 않으시겠습니까? 목사인 저는 돈을 벌거나 모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왜 궁핍할 때가 없으며 곤궁할 때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1984년 8월 2일 이후,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근심하거나 염려해 본적이 없음을 고백드릴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7:7∼8)

우리 하나님께서는 내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또 그 필요를 채워 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시고, 그 능력을 베풀어 줄 사랑을 갖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내게 있어야 할 것은 당신의 방법으로 반드시 있게 하시고 필요치 않은 것은 절대로 허락치 않으심을 알게 되었으매, 있는 것을 족하게 여기며 감사함으로 살기에도 인생이란 턱없이 짧은데 왜 없는 것으로 인해 걱정하며 근심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경제 위기 속에서 무엇을 잃었습니까?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 잃은 것으로 인하여 더 이상 절망치 마십시다. 아직 남아 있는 것을 족하게 여깁시다. 오히려 잃은 것을 감사드립시다. 잃음으로 인해 생긴 빈 공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예비해두신 새로운 `조반'을 담을 그릇임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더 이상 사람으로 인해 절망하거나 실망치 말고, 지난 수요 예배시간에 시편 23편을 통하여 묵상했던 다윗의 고백을 모두 우리의 고백으로 삼읍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참으로 걸어 나아가리라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보십시요. 나의 필요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 나의 필요를 채워줄 능력을 가지신 주님, 그 능력을 무시로 베풀어 줄 수 있는 사랑이신 주님께서 지금 우리를 부르고 계시지 않습니까? "와서 조반을 먹으라"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우리는 이 세상에 적수공권으로 왔습니다. 아무 것도 가져온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옷이 있습니다. 신발이 있습니다. 세끼 양식이 있습니다. 가재도구가 있습니다. 가정이 있습니다. 가족이 있습니다. 친구가 있습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호흡할 공기가 있습니다. 교회가 있습니다. 믿음이 있습니다. 복음이 있습니다. 더불어 살아갈 나라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있는 것을 다 세려해도 너무 많아 셀 수조차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처럼 많은 것들에 대하여 자족 줄을 몰랐습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것 하나가 없음으로 인하여 원망과 불평과 절망을 터트리며 살아왔습니다. 사순절 네 번째 주일을 맞는 이 아침, 우리의 이 어리석은 죄를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필요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 그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니신 주님, 그 능력을 무시로 베푸시는 사랑의 주님을 온전히 믿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필요한 것은 반드시 주시는 분이시오 필요치 않은 것은 허락치 않는 분임을 확실히 알아, 지금 우리에게 있는 것을 족히 여기며 감사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꼭 필요하기에 이 경제위기를 주셨음도 감사케 하옵소서. 이 위기의 계곡을 통해서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새로운 조반을 얻을 수 있음을 믿어, 참으로 담대하게 나아가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하는 우리의 삶이 날로 경건을 이루어가게 하옵소서.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날 때 하나님 앞에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이땅에서의 소유가 아니라, 오직 우리의 경건한 삶뿐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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