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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는 자가 없더라

요한복음 이재철............... 조회 수 1846 추천 수 0 2009.04.22 16:55:56
.........
성경본문 : 요21:1∼14 
설교자 : 이재철 목사 
참고 : 주일 설교말씀 / 1998년 / 3월 29일 사순절 다섯째 주일(주님의교회) 

삼성그룹의 창업주였던 고 이병철 회장님이 생전에 각 공장의 공터에마다 나무를 심게 했던 것은 잘 알려진 일화입니다. 그분이 각공장을 시찰할때면 공장장 사무실에서 서류보고를 받거나 생산라인을 점검해보기전에 반드시 그 공장에 심겨진 나무를 먼저 살폈다고 합니다. 나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으면 그 공장의 공장장을 신뢰하였고, 만약 나무에 이상이 있으면 그 공장의 서류보고가 아무리 훌륭해도 공장장에게 100% 신뢰를 주지않았다고 합니다. 그분은 거대한 공장을 책임지는 공장장의 손길이 공장밖 나무에까지 미친다면 그 공장장은 공장안 괸리는 두말할것도없이 잘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고, 그 반대 경우의 공장장이라면 공장 자체의 관리마저 버거울 것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실제로 공장에 심겨진 나무로 공장장의 역량을 가늠하는 그분의 판정은 거의 정확했다고 합니다.

한 구도자가 유명한 선사를 친견하기 위하여 그 선사가 기거하는 산사를 찾았습니다. 깊은 산 속의 산사 아래에 막 당도했을 때에 산사를 끼고 도는 계곡 물 속에 산사에서 버려진 콩나물 대가리와 밥알이 흐르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순간 구도자는 발길을 돌려 하산해버리고 말 았습니다. 저처럼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이면 선사가 아니라 신령이라 할지라도 만나볼 가치가 없 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불교에 귀의하여 스님이 되고자 하는 모든 불자는 먼저 밥짓는 일부터 하 게 됩니다. 구도란 섬김과 봉사로부터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때 갓 귀의한 불자에게 스님이 첫날 첫 번째로 들려주는 이야기가 방금 말씀드린 이야기라고 합니다. 산사의 참됨의 정도는 그 산사를 끼고 흐르는 계곡의 물속을 들여다 보면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눈은 밖을 향하여있기에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합니다. 자기자신에 관한 한 우리는 거 의 눈먼 자와 진배없습니다. 오죽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하라하 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 에서 티를 빼리라(마 7:3∼5)"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은 보면서도 자기 눈 속의 들보 있음은 보지 못하는 형편이니,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얼마나 눈먼지 두말해 무었하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당연시 하며 살 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절망감과 무력함 그리고 교만과 과오 등이 다 우리자신을 보지 못함 으로 인하여 비롯되고있는 까닭입니다. 고 이병철 회장님이 공장의 나무를 보고 공장 전체를 알 수 있었다면, 불가의 구도자들이 산사를 끼고 도는 계곡의 물을 보고 산사를 바르게 알 수 있다 면, 그렇다면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나 자신을, 나의 상태를, 나의 상황을 환히 들여다 볼 수 있겠습니까?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는 주님의 말씀을 까맣게 잊어버린 제자들은 갈릴리바다로 고기잡이 에 나서고 말았습니다. 아무 의미 없이 헛 그물질만 게속하느라 하룻밤을 허망하게 버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바닷가에 서 계셨지만 아무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순간 주님의 말씀을 좇아 그물을 배 오른편에 한번 더 던지면서도 그 말씀의 주인공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누구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던진 그물에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물고기가 잡 힌 것을 확인하고서도 그것이 주님의 역사임을 알았던 것은 요한뿐이요, 요한의 말을 듣고 물 속 으로 뛰어든 사람은 베드로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제자들은 그물을 배위로 끌어올리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육지에 당도하였을 때에 숯불 위에 생선도 놓였고 떡도 준비되어있었으나, 그들은 그 음식의 용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 오늘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줄 아는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 히 묻는 자가 없더라(12)"

제자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님을 망각하고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언제 주님을 알았던가 싶을 정도로 오직 헛그물질에만 혈안이 되어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중 누구도 감히 주님을 향해 당신이 누구시냐고 묻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주님을 주님으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더 이상의 질문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이 단지 주 님의 정체성에대한 확고한 인식만을, 다시 말해 주님의 정체성에대한 더 이상의 질문 없음만을 의미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을 주님으로 확고히 인식하므로 자기 자신들에 대한 여러 모양의 의문이나 혼돈이 해소되었음을 의미하고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를 향하면서도 왜 가야하 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갈릴리에 가서 무었을 해야할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밤새도록 헛그물질만 하면서도 그 실패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순간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 를 잡았지만 그 성공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주님으로 인식하는 순간 그 모든 의문들이 해소된 것입니다. 자신들의 삶속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확연하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의 질문이 필요치 않게 된 것입니다. 그 증거는 무엇입니까? 이 이후 주님의 승천을 거쳐 사도행전이 끝나기까지 이들이 다시는 헛그물질과 같은 어리석음을 반복치 않고 걸어야 할 길을 바르게 걸어간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주님과 자신들에 대한 질문이 동시에 해소되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습니 까? 이에 대하여 본문12절 하반절은 이렇게 대답하고있습니다.

"제자들이 주신줄 아는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그들의 질문이 해소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안다'는 동사 'eido'는 본다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은 더 이상 공허한 갈릴리바다를 보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물고기만을 본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눈을 들어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저 한 번 스치듯 본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응시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시선을 주님께 고정시켰습니다. 주님을 외면했 을 때 주님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들 자신도 오리무중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불분명하고 불확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응시하였을 때 주님도, 그들 자신도, 확연히 보였습니다. 현재의 그들 실상과 되어져야 할 미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무엇을 취하고 버려야 할지가 확연히 보였습니 다. 그들의 삶이 어디에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가 뚜렷이 보였습니다. 왜 살아야하며 무엇을 추구하며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할지가 분명히 보였습니다. 자신들의 거듭되는 배신에도 불구하 고 결코 중단 없이 계속되는 주님의 사랑이, 사랑의 주님이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이병철회장님이 나무를 통해 전체를 보듯, 구도자가 계곡 물을 통해 산사의 모두를 보듯, 제 자들은 주님을 응시하므로 써 주님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을 비로소 알게 되었고, 그 이후로부터 사도행전의 막이 오르게 된 것은 사필귀정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여리고 성을 나서실 때, 소경 바디매오가 주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씀을 듣고 주님을 향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신 주 님께서 바디매오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바디매오가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주님께서 바디매오를 긍휼히 여기시사 보게 해주셨습니다. 평생 장님이었던 자가 보게 되었 다면 얼마나 볼것이 많겠습니까? 온 천지를 두루 다니며 보고싶은 것 마구 보고 다녀야 하지 않 겠습니까? 그러나 바디매오는 보게되는 즉시 주님을 좇아갔다고 마가복음 10장 52절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눈이 열리는 즉시 세상을 본 것이 아니라 주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사랑이요 생 명이요 진리이신 주님을 똑바로 응시했던 것입니다. 그 주님의 거울 속에서 자신을 보았습니다. 육신의 눈 뿐만 아니라 영혼의 눈마저 멀어있던 자신의 추한 몰골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추구해 야할 삶이 무엇인지가 보였습니다. 그는 감사하며 주님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리고성의 세리장 삭개오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들었으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키작은 삭개오는 예수님을 뵐 도리가 없었습니다. 생각 끝에 삭 개오는 뽕나무위로 올라갔습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예수님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삭개오의 심정을 아신 주님께서 삭개오의 집으로 들어가시매 삭개오는 주님을 더 가까이에서 뵐 수 있었습 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삭개오는 부정축재한 자신의 재산중 절반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남의 것을 토색한 것은 4배로 갚아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을 응시하므로써 돈의 노예 로 추악하고 불의하게 살았던 자신을 바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신과 함께 하시는 주님 의 사랑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구원을 받은 자로써 어떻게 사는 것이 합당한 삶인지를 확연히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본대로 실천하는 용기를 발휘했습니다. 그가 응시한 주님 이 그 용기의 원천이 되어 주셨던 것입니다.

욥에게 느닷없는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처음에는 꿋꿋하게 견디는 것 같았으나 계속되는 고 난에 마침내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그같은 욥이 욥기 42장 5절∼6절에 이르러서는 이렇게 고백하고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 스로 한하고 티끝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자신의 의로움만 내세우며 주님을 원망하던 욥이 어떻게 티끌과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는 자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자신의 눈으로 주님을 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을 보았을 때 자신 에게 닥쳤던 시련이야말로 자신의 교만을 깨트리시고 더 온전한 의인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세워 주시기위한 사랑이었음이 보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잘못 생각하고 잘못 행동했던 자신의 어리석 은 모습이 보였습니다. 욥은 주님의 사랑 앞에서 재를 뒤집어쓰며 회개치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디매오도, 삭개오도, 욥도, 아니 갈릴리의 제자들도 주님을 응시하므로 비로소 자신들을 바로 보았습니다. 주님을 응시하므로 자신들과 함께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확인했습니다. 주님을 응시하므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불분명했던 것들이 모두 확연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질문이 해소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혹 시련을 당하고 있습니까? 혹 병들어 있습니까? 혹 궁핍하게 되었습니까? 왜 그런 일을 당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까?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습니까? 모든 것이 오리무중 속에 빠져 있습니까? 더 이상 여러분 자신을, 자신의 문제를 보지 마십시오. 그것은 보면 볼수록 더 큰 절 망과 근심을 안겨줄뿐 전혀 해결책을 제시해주지못합니다.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을 맞이하여 우 리와 함께 하신 주님을 보십시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응시하십시오. 주님 의 사랑을, 사랑의 주님을, 주님의 생명을, 생명의 주님을, 주님의 진리를, 진리의 주님을 응시 하십시오. 주님께 모든 해답이 있습니다. 주님을 응시하면 내게 주어진 연단의 뜻을 알게 됩니 다. 주님을 응시하면 지금 내가 왜 병들어 있는지 그 의미를 알게됩니다. 주님을 응시하면 내가 왜 지금 궁핍해야하는지 알게됩니다. 주님을 응시하면 지금 내가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를 알게됩니다. 주님을 응시하면 모든 의문이 해소됩니다. 주님을 응시하면 모든 것이 확연 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한한 힘을 얻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의 바탕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의 사랑임을 보는 까닭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주님을 만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지만, 참되고 성숙한 믿음은 중단없이 주님 을 응시하는 것으로 가능해집니다. 주님을 만난 제자들이 3년이나 주님을 따라다녔으나 그들의 시선이 주님을 떠나 있을때 그들은 공허한 갈릴리의 오리무중에 빠질 수밖에 없었지만, 주님을 응시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삶속에는 감동적인 사도행전이 펼쳐졌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응시 한다는 것은 나 자신과, 나 자신의 미래를 새로이 얻는 것을 의미하기에 우리에게 주님을 응시하 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시간에는 지난 수요일 세례를 받은 한 성도님의 신앙고백문을 읽어드리는 것으로 오늘의 기도를 대신하겠습니다. 우리는 이글을 통하여 한 인간이 주님을 응시할 때 그 삶이 얼마나 새로 워 질수 있는지를 확인할수 있을 것입니다.

'7형제중 막내이면서 유복자로 태어났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2학년을 마칠 무렵 까지 밥을 못 먹고 자랐습니다. 취학 적령기가 되었을 때 초등학교에 입학도 못하고 있던 어느 날, 셋째 형님이 저의 손을 이끌고 데려다 준 곳이 집에서 약1km 정도 거리에 위치한 조그마한 동산위 교회였고, 내부는 늘 컴컴하고 어두웠던 그 군용 대형 천막 속에서 초등학교 1학년 과정을 마친 후 2학년이 될 무렵, 공립학교로 전학을 가게되었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여전히 형편이 어려워 이번에도 정식으로 인가된 중학교엔 못 가고 길거리에서 학생모집 포스터를 보고 찾아가 입학등록한 곳이 전농동에있는, 역시 언덕 위의 작은 교회학교였습니다. 아침이면 콩나물로 끓인 죽을 먹고 미아동에서 전농동까지 걸어서 통학하였습 니다. 이후 오랜 삶을 살아오던 중 어느 날 불현듯, 여덟살 때 저의 손을 잡고 그 천막교회 학교로 인도해 주신 분은 형님이 아니라 주님이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형님의 눈에 띄게 어린이 모집 포스터를 친히 붙이시고 형님의 손길을 잠시 빌려 저를 천막교회 학교로 인도하셨음 을 알게되면서, 그 이후 제삶의 과정 속에 일어났던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크고 작은 사건들과 일들중 전능하신 주님의 은총과 역사 하심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었으며, 지금도 없으며, 미래에 도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확고하게 되었습니다. 신비하고도 오묘하며 감탄스러운 하나님 아버지의 기적과 은혜의 증거와 증거들의 연결이었 고 연속이었습니다. 늘 잠시 뒤면 그분께서 구출하여 주셨다고 깨닫게 되었던 수없이 많았던 위험한 순간들 꼭 필요한 것은 반드시 주신 일들 교회도 다니지 않던 그 옛날, 만 5년을 기도 드렸더니 정확하게 내가 원하던 현재의 아내를 만나게 해주신 그분 등산중 험한 산속오지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홀연히 그때 그 장소에 나타난 한 사 람으로부터 길을 안내 받게 해주셨던 일 굶고 자라 허약하게 될 것을 미리 예방하여 주시려고 중학교까지 먼 거리에 위치한 곳으로 정하여 주시사, 걸어서 통학토록 하시어 오늘날까지 건강을 유지하도록 배려해주신일―빠른 속도 로 많이 걷는 것이 최고의 운동이며, 일설에 의하면 사람의 수명은 자기가 걷는 거리 만큼이라고 하니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얼마나 심원하신지요 죄많고 허물 많으며 방탕했던 저를 끝까지 포기하지도 잊지도 않으시고 용서하여주시며 사랑 하여 주시사,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 울타리 안으로 인도하여 주신 주님 저를 선택하시고,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온전히 건강한 몸으로 이날까지 살아오도록 티 끌만큼의 오차도 없이 구체적이시고, 참으로 우리 곁에서 인격적으로 도와주시고, 늘 바른길로 인도하여 주시는 그분 이제 그분의 뜻을 바르게 살펴가면서 감사하기만 하는 나날들입니다. 과거라면 불평했을 일 들이 이제는 모두 감사의 조건들일 따름입니다. 집앞에 세워 놓았던, 아이에게 새로 사준 자전거를 누군가 도난 방지체인을 끊고 가져갔을 때에도,―'잘됐다. 꼭 갖고싶은 사람에게 선사하게 되었으니!' 어느 날 퇴근때 아파트 엘리베이트가 고장으로 서있어 11층까지 걸어서 올라가게 되었을 때 에도―'아! 요즈음 운동 부족한 줄 아시고 하나님께서 운동 좀 하라 그러시네!' '흥분치 말고 한 계단씩 천천히 밟고 오르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오늘 하루 일들을 반성하라시는구나. 감사합니 다.' 생활의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때에는―'아! 좀 겸손하라시는구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경계에서 너무 멀리 벗어났으니 가까이 오라시는구나. 감사합니다.' 때로 병으로 눕게될때에도―'너무 허덕이며 앞만 보고 달리면 욕심만 커지고 주님을 망각케 되니 잠시 쉬면서 들에 핀 꽃을 보라 하시네. 감사합니다.' '모두다 나의 잘못이니 주위의 모든 분들을 용서하라시는구나. 감사합니다.' 주님! 앞으로도 저의 소원은 아무 것도 없고, 오로지 주님의 소망만이 온전히 있게 하여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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