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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자 가운데서

요한복음 이재철............... 조회 수 2365 추천 수 0 2009.04.22 17:01:20
.........
성경본문 : 요21:1∼14 
설교자 : 이재철 목사 
참고 : 주일 설교말씀 / 1998년 / 4월 5일 고난주일(주님의교회) 

 태어남이 시작이라면 죽음이란 끝남을 의미합니다. 태어남이 생성을 뜻한다면 죽음이란 소멸입니다. 한 인간의 태어남이 주위 사람들에게 기쁨과 소망을 가져다준다면, 죽음이란 남은 자들에게 슬픔과 절망을 안겨 줍니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 태어남과 죽음이란 완전히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인간의 태어남과 죽음 이란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 동일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무소유의 의미에서 태어남과 죽음은 동일합니다. 태어날 때 아무 것도 가져오지 못하는 인간은 죽을 때에도 무엇하나 가져 갈 수가 없습니다. 철저하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갈 뿐입니다. 설령 누군가가 태어날 때에나 죽을 때에 두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가 쥔 것은 허공 이상 일수는 없습니다. 둘째 고통의 관점에서 동일합니다. 모든 인간은 울음과 더불어 태어납니다. 그것은 환희의 울음이 아니라 고통의 울부짖음입니다. 좁디좁은 태문을 통하여서만 태어나야 한다는 것은 산모나 태아나 모두에게 고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죽음 역시 고통입니다. 생명인 호흡이 끊어진다는 것 자체가 육체의 크나큰 고통입니다. 셋째 도움의 측면에서 동일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반드시 필요로 합니다. 누군가가 받아 주어야 하고 누군가가 탯줄을 끊어주어야만 하고 누군가가 젖을 물려 주어야만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 치고 누구도 그 일을 스스로 해결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죽을 때에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합니다. 누군가가 시체의 눈을 감겨 주어야 하고 누군가가 시체를 닦아 주어야만하고 누군가가 시체에 수의를 입혀 주어야만 하고 누군가가 장례식을 치루어 주어야만 합니다. 인류의 역사이래 이 땅에 태어났다가 죽은 사람 중 자신의 장례식을 직접 치른 사람 역시 아무도 없습니다. 넷째 고독이란 의미에서 동일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에나 죽을 때에나 벌거벗은 자신의 육체를 송두리째 남의 손에 맡겨야만 합니다. 거기에는 체면이나 자존심이 게재될 틈이 없습니다. 오직 그곳에는 벌거벗은 채로 남의 도움 없이는 태어날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유한한 자기 존재에 대한 절대적이고도 본능적인 고독감이 있을 뿐입니다. 인간이 군중 속에서도 때로 고독감을 씹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다섯째 허물을 벗는다는 관점에서 동일합니다. 인간이 태어난다는 것은 자궁이란 허물을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아무리 산일이 지나가도 태아가 자궁이란 허물을 벗기 전까지는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자궁이란 허물을 완전히 벗어난 시간이 바로 출생 시간이 됩니다. 이처럼 죽음 역시 인간의 영혼이 육체의 허물을 벗는 의식입니다. 인간의 태어남과 죽음보다 더 장엄한 의식이 있을 수 없음은 둘다 새로운 존재를 위한 옷갈아 입기인 까닭입니다. 마지막으로 삶의 확장이란 측면에서 동일합니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남으로 인간은 좁디좁은 자궁에서 벗어나 이 대명천지에로 그 삶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삶의 영역이 확장되고 사람과의 관계가 확장되고 연륜이 확장됩니다. 자궁 속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확장입니다. 죽음 역시 이 유한한 세상으로부터 영원으로 그 삶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로 삶이 확장되는 것이요, 이 땅을 먼저 떠난 믿음의 선진들과의 관계가 확장되는 것이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영원토록 확장되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태어남과 죽음이란 서로 상반된 개념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일치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끝이 아니라 태어남과 같이 새로운 시작이요, 소멸이 아닌 생성이요, 절망과 슬픔이 아닌 새로운 차원에서의 소망과 기쁨인것입니다.


사형 집행장에서 사형수들의 마지막 모습을 여러차례 지켜본 현 서울 구치소 경비 교도대 대대장인 동시에 <하나님이 고치지 못할 사람은 없다>의 저자이기도 한 박효진 장로님은, 타종교와 기독교의 차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은 자와 건성으로 믿은 자의 차이가 여실히 드러나는 곳이 바로 사형 집행장 이라고 말합니다. 사형집행장이란 죽음이 집행되는 곳입니다. 사형수 치고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형수중 주님안에서 거듭난 참된 그리스도인들만 일말의 두려움이나 주저함 없이 죽음을 담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죽음이 아닌 허물벗기로, 새로운 삶의 확장으로 믿는 까닭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14) 예수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친숙한 구절입니다. 기회있을 때마다 사도신경을 통하여 고백하는 내용인 까닭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 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이처럼 사도신경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음'을 매번 고백하고 있기에 우리는 이 고백 속에 나타나 있는 `죽은 자'란 의미를 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 의미를 무의식중에 과소평가하고 있거나 혹은 평가절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란 참 의미가 무엇입니까? 본문에 사용된 단어 nekros의 뜻은 시체란 말입니다. 시체란 결코 친근감을 주는 대상이 아닙니다. 낭만적이거나 희망적인 대상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처절하리 만치 처참하고 단절적인 대상입니다. 오죽하면 한 가족이라 할지라도 일단 시체란 딱지가 붙기만 하면 그 순간부터 같은 방에 조차도 두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낭만적으로 죽은 자처럼 되신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온몸이 찢기운채 처참한 시체가 되셨습니다. 왜 하나님의 독생자가 비참한 시체가 되셨습니까? 우리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모든 죄인은 다 하나님 앞에서 죽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죄의 노예된 인간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시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죄값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대신 치루어 주시므로 그분이 시체가 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그저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시체 되게까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절대로 그저 이루어 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시체 되시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별다른 의미를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우리 역시 언젠가는 시체가 될 것이요 시체란 모든 것의 종결과 소멸의 의미 이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경우라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시기 위하여 시체가 되었다 한들, 감사의 대상은 될지언정 영원한 구원자가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살아나다'는 동사 egiro'는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시체는 일어 날수가 없습니다. 움직일 수조차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체는 시체가 되는 순간부터 모든 순환이 멈추어져 썩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체가, 시체가 된 예수님이 일어나신 것입니다. 다른 시체들도 다 일어나기에 일어나신 것이 아니라, 다른 시체들은 모두 시체로 썩어 가고 있는 중에 예수님의 시체만 일어나신 것입니다. 한 번 벌떡 일어났다 다시 넘어진 것이 아니라 영원히 일어나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시체 되게까지 하셨던 하나님께서 시체된 예수님을 시체 가운데서 영원히 일으켜 세우신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시체 되셨던 예수님의 시체가 하나님에 의해 영원히 일어나셨기에 그분의 시체 되셨음이 비로소 참된 의미를 갖게 되었고, 그분은 우리의 진정한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그분이 시체 되셨다가 영원히 일어나셨기에 그분 안에 있기만 하면, 우리의 년수가 다하여 이 땅에서 우리의 호흡이 멎고 우리가 시체 되는 죽음의 순간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의 허물을 벗는 순간이요, 영원한 생명을 향해 삶이 확장되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박효진 장로님이 만났던 사형수들은 이 사실을 확신하였기에, 죽음 앞에서 오히려 살아 있는 자들을 감동시키면서 죽음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고난 주일입니다. 이번 금요일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날이기에 그날을 기념하기 위한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히셨던 십자가와 관련하여 캐톨릭에는 다음과 같은 전승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역사상 최초로 기독교를 공인했던 로마제국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는 열렬한 기독교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녀가 79세 되던 해인 AD325년 예루살렘을 방문한 헬레나는 예수님의 무덤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곳을 발굴하다가 땅속에서 십자가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곁에 있던 한 다리를 절던 여인이 그 십자가에 손을 대자 다리가 깨끗하게 회복되어 그 십자가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믿게 된 헬레나는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십자가의 주요 부분을 교회 안에 보관케 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중 일부분은 비잔티움에 세워진 아들 콘스탄틴 황제의 입상 속에 넣게 하였고, 또 다른 부분은 로마에 세워진 `성 십자가 교회'에 보관토록 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부유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 십자가의 조각을 구입하려는 열풍이 불면서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예수님의 진짜 십자가에서 나왔다는 수많은 나무 조각들이 금과 보석으로 장식되어 비싼 값에 유통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많은 나무 조각들을 다 합친다면 십자가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만들 수 있는 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캐톨릭에서는 그 나무 조각들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대신 그것을 기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치 떡 다섯 조각과 물고기 두 토막으로 수천명의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는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하나의 진정한 십자가로부터 많은 십자가가 가능케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전승의 신빙성 여부는 오늘의 주제가 아니기에 논하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나무 조각 그 자체에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못 박히셨던 진짜 십자가의 나무 조각을 구할 길이 없는 우리에게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자격이 없지 않겠습니까? 십자가의 참된 의미와 가치는 예수님의 시체 되심과 시체로부터 일어나심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로 인한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시체 되셨다가 사흘만에 시체 가운데서 영원히 일어나셨기에 십자가는 구원의 표징이요, 소망의 상징이요, 영원한 생명의 증표요, 그리스도인들의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 된 우리가 십자가를 붙잡는다는 것, 십자가를 추구하는 삶을 산다는 것, 주님께서 명령하신 바 날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죽은자'가 되셨다는 것은 시체가 되셨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용된 nekros는 시체 이외에 또 다른 의미가 있으니 곧 `헛것'이란 뜻입니다. 시체가 무엇입니까? 시체란 헛것의 총체적인 표현입니다. 시체란 총체적으로 헛것일 뿐이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므로 총체적으로 헛것인 시체가 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시체인 채로 그냥 썩어 버린 것이 아닙니다. 시체에서 일어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헛것의 종속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헛것을 깨트리시고 헛것의 허물을 벗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문을 꼭꼭 걸어 잠근 채 숨어 있는 마가의 다락방 한 가운데에 문을 열지 않고 나타나신 것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으로 그 삶을 확장 시키신 것―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참된 의미요 가치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십자가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어제의 헛것으로부터 헛것의 허물을 벗는 것입니다. 눈이 있다면 돌이켜 인류의 역사를 보십시오. 인간이 기를 쓰고 추구하던 것중 진리 이외에 헛것 아닌 것이 어디 있었습니까? 영원치 아니한 것, 나를 영원하게 만들어 줄 수 없는 것은 모두 헛것일 뿐입니다. 그 헛것의 허물을 날마다 그리스도안에서 벗어 던지므로, 그리스도에 의하여 내 삶의 영역이 진리를 향해 계속 확장되어 나아가는 것―이것이 십자가의 삶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삶을 가리켜 새 생명의 삶이라 일컫는 것입니다. 주님을 등졌을 때 제자들은 허망한 갈릴리 바다 위에서 참으로 헛것일 수밖에 없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뵙고 그 모든 헛것의 허물을 벗어 던졌을 때에 영원한 십자가의 증인들로 그 삶이 확장되었던 연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고난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무엇을 회개해야 하겠습니까? 아직까지 헛것의 허물을 벗지 못하고 있음을, 헛것 속에 헛되이 안주하려는 헛된 어리석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시체 되셨음과 시체로부터 일어나셨음의 의미를 알지도 믿지도 않음을 뜻하기에, 그 삶의 결국은 총체적 헛것인 시체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바르게 알고 따르는 자에게만, 육체가 시체되는 죽음이란 육체의 허물을 벗고 영원 속으로 그 삶을 확장시키는 지상 최대의 축제요, 의식이 되는 것입니다.

대구 남산동 높은 구릉에는 천주교의 교구청이 있고, 그 안에는 성직자의 묘지가 있다고 합니다. 신부나 수녀로 평생을 봉직한 자들이 이 땅에서의 생을 마친 후에 그들의 시신을 매장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성직자 묘지 입구에는 `HODIE MIHI, CRAS TIBI'라는 라틴어로 된 팻말이 붙어 있다고 합니다. `오늘은 내차례, 내일은 네차례'라는 의미입니다. 만약 이 팻말이 일반 공동묘지에 붙어 있다면, `오늘은 내가 시체 되었기에 나를 매장해 주기 위하여 네가 여기와 있지만, 그러나 내일은 네가 시체 되어 누군가에 의해서 이곳에 매장될 것이다.'라는 뜻으로,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은 반드시 총체적 헛것인 시체되기 마련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팻말이 일평생 동안 그리스도를 위하여 헌신해 온 성직자들의 묘소 입구에 붙어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오늘의 묵상을 토대로 하여 전혀 다른 의미를 음미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내가 육체의 허물을 벗고 영원 속으로 나의 삶을 확장시켜 나아갑니다. 내일은 당신이 육신의 허물을 벗고 영원 속으로 나아 올 수 있도록 오늘을 십자가 앞에서 소중하게 가꾸기를 기원합니다.'―이런 심오한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은 내차례, 내일은 네차례'란 이 짧은 구절은 우리 모두에게 반드시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십자가의 삶을 사느냐 아니냐에 따라, 예수님께서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셨음을 믿느냐 아니냐에 따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시체 되셨음과 일어나셨음의 의미를 깨닫고 실천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 의미는 완전히 틀릴 수밖에 없다는 것―다시 말해 우리의 죽음이 완전한 헛것을 뜻할 수도 있고, 헛것의 허물을 벗는 새로운 옷입기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 이것이 오늘 고난 주일을 맞이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험한 십자가 능력 있네

 ―Willian J. Gaither―

목적도 없이 나는 방황했네
소망도 없이 나는 살았네
그때에 못 자국난 그 손길
나에게 새생명 주셨네
험한 십자가에 능력 있네
거기서 나의 삶이 변했네
찬양하리 그 이름 영원히
주의 십자가 능력 있네
나는 믿네 갈보리 언덕 십자가
나는 믿네 그 누가 뭐라 해도
이 세상 다 지나고 끝날이 와도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나는 믿네 십자가에서 못 박힌 주
오늘도 새 삶을 주시네
날 새롭게 하셨네
나는 새 피조물
십자가 잡고 살아가리
나는 믿네 갈보리 언덕 십자가
나는 믿네 그 누가 뭐라 해도
이 세상 다 지나고 끝날이 와도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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