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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1:15-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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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기동 자매 |
참고 : | 2008.02.10 새길교회 주일설교 |
요한복음 21장 15-22절
요한복음을 읽다보면 실제로는 20:30-31에서 책이 끝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표징.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 믿음, 생명 등 요한복음에서의 중요한 용어들이 연이어 나오면서 이 책을 쓴 목적을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그저 짧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예수가 많은 표징으로 자신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됨을 보여주셨다. 믿고, 생명에 이르라!”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 예수는 결코 실패자가 아니었습니다. 표징으로서 그의 삶, 십자가 고난, 그리고 부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었고, 그에 대한 우리 독자, 내지 신앙인의 역할은 오직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또한 영생을 얻는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그 절에 뒤따르는 21장은 조금 다릅니다. 더 이상 믿음이 강조되지 않고, 게다가 베드로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또 20장까지는 나오지 않는 단어들이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21장은 편집상 덧붙여진 것으로 사실상 요한복음의 의미에는 별 중요하지 않은, 더 나아가 요한복음의 저자라 여겨진 ‘예수가 사랑하던 제자’의 죽음에 대한 설명 정도의 부가적인 것으로 치부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여러분과 이 21장을 통해 예수의 제자였고, 우리의 신앙선조인 베드로의 신앙여정을 함께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베드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가 처음으로 부른 제자, 그 신앙고백으로 예수의 칭찬과 신뢰를 한 몸에 받은 수제자, 교회의 기초이자 반석, 탁월한 설교가, 급한 성격, 눈물 흘리며 회개할 줄 아는 사람, 로마에서 박해 중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한 사람 등등........
그런데 사실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베드로의 모습은 이러한 것과는 다름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강권에 의해 제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먼저 예수를 만나고 예수의 메시아성을 간파한 그의 형제 안드레에 의해 이끌려서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1:41) 또 확신에 찬 소리로 ‘예수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고백하는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6:68-69에서 그의 고백은 그저 제자들의 소리를 대변하는 소리로 들립니다.(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알았습니다) 이 고백 이후, 최후의 만찬에서 발을 씻기시는 예수에게 말하기까지 베드로는 사실 존재감조차 없습니다. 예수가 잡힐 때 대제사장 종의 귀를 칼로 자른 이가 바로 베드로라고 요한복음만이 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어찌 보면 흠집내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4복음서에서 공통적으로 전하는 베드로의 가장 큰 약점, 그러면서 우리가 가장 많이 기억하는 내용은 예수가 잡혔을 때 예수가 예언한 대로 3번이나 예수를 부인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에서는 모두 그 결말에서 닭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 예수의 예언을 기억해내고 눈물(후회의 눈물이었겠지요)을 흘렸다고 보도하는데, 요한복음은 이상하게도 그저 닭 울음소리에 대해서만 언급할 뿐, 베드로가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사실 그 기록으로만 보자면 베드로가 그 소리를 들었는지조차 불분명합니다.
베드로는 그리고 또 사라집니다. 예수가 재판받고 십자가에 처형받기까지 어디에서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는 예수의 십자가 아래서 예수와 대화하기까지 하는데 말입니다. 어디 꼭꼭 숨었든지, 아니면 요한복음기자에게 별로 중요치 않게 여겨졌든지 중 하나일 것입니다. 베드로가 다시 등장하는 것은 예수가 죽고 3일째였습니다.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와 함께 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막달라 마리아의 빈무덤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뛰어 갔다고 하니 말입니다.
빈무덤을 목격하는 사건을 잘 살펴보면, 막달라 마리아의 소식을 듣고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가 먼저 달려갔지만, 빈무덤을 최초로 확인하는 자는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믿음’의 몫은 베드로의 것의 아니었습니다. 보고 믿었다의 주체는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였습니다. 베드로는 보고 뭘 생각했을까요? 20:9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도 시체가 없어진 것에 대해 놀란 것이었지, 부활을 깨달은 것은 아니었고,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 또한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저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평화를 기원하는 사건들에서도 베드로는 또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20:31에 결론부분까지 말입니다. 요한복음과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 사이의 긴밀한 관계에 대해 말하면서 신학자들은 그의 리더쉽과 예루살렘 교회의 베드로 리더쉽과 묘한 갈등을 암시하고 있고, 베드로의 리더쉽을 격하시키려는 의도가 있다고들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20장까지만 볼 때 그렇습니다. 21장에서는 있으나 마나 하거나, 문제를 일으키기 일쑤인 베드로가 전면에 등장합니다.
21장 전반부는 7명의 제자가 부활한 예수를 만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 그리고 익명의 다른 두 사람은 디베라 바다에 함께 했고, 베드로는 예수를 만나기 전 어부였듯이 고기를 잡으러 나갑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는 것인가요? 이제 예수도 없으니까, 이때까지 예수와 함께 했던 모든 것을 잊고 전의 생활로 돌아가겠다는 것인가요? 베드로는 그렇다손쳐도 예수의 못박힌 손자욱까지 만졌던 도마마저도, 그리고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까지, 고기를 잡겠다고 그를 따라 나섭니다.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하던 그들 앞에 누군가 나타났고, 그가 던지라는 곳에 그물을 던지니까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그 때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가 예수를 알아봅니다. ‘저분은 주님이시다’라고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베드로는 그 말을 듣고 걸쳤던 겉옷을 추스르고 바다로 뛰어 듭니다. 하지만 다른 제자들은 침착하게 배를 타고, 그물을 끌고 육지로 와서 예수를 만납니다. 숯불위에 생선이 구워져 있고, 빵도 있습니다. 그런데 ‘생선을 조금 가져오라’는 소리에 베드로는 또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배로 다시 올라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꺼냅니다. 153마리(누가 셌을까요?) 와서 먹으라는 소리에 제자들은 아무 말도 못합니다. 분명 이전에 부활한 예수를 보았다는 보도가 있는데, 마치 처음 겪는 것인 양 말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사건이 이제 등장합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3번 되물었고, 베드로는 그 말에 네라는 짧은 대답과 함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는 긴 말을 덧붙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3번 모두 ‘내 양을 먹이라’라고 명령하십니다. 18-19절에서 베드로의 죽음을 예언하시는 말씀과 함께 마지막에 또 하나의 단호한 명령을 덧붙입니다. ‘나를 따르라’ 그런데 이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장면이 뒤를 잇습니다. 대답하지 않은 베드로는 뒤돌아보다가, 예수가 사랑하는 제자를 보고 묻습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느냐’ 그리고 예수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
23절 이하를 함께 읽으면 이것은 오히려 예수가 다시 오실 때까지 죽지 않으리라 믿었던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가 죽은 후, 요한 공동체가 흔들리는 것에 대해 새로운 해석과 믿음의 확신을 주기 위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제자의 증언은 예수가 오지 않았는데도 죽는 것을 제외하곤 모두 참되다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변증적 이유만으로 이 장면을 설명한다면 예수와 베드로의 긴 대화를 이해하는데 충분치 않은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왜 여기서 등장하는 것일까요? 예수의 명령은 어떤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닐까요? 요한복음이 예수에 대한 신앙과 앎을 강조하는 책이라고 볼 때 왠지 이 베드로와 연관된 장면들은 한편으로는 결론되지 않는 듯한 인상, 그러기에 독자의 상상력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를 만난 자들의 거의 한결같은 반응은 예수를 믿게 되든지, 아니면 예수를 미워하게 되든지 거의 이 두 부류로 나뉩니다. 그런데 베드로에 관한 한 그렇지 않습니다.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세 번의 부인 후 베드로의 반응에 대해서도, 빈 무덤을 접한 이후의 반응에 대해서도, 배에서 뛰어 내린 다음에 어떤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침묵합니다.
그리고 21장의 긴 대화에서 예수는 베드로의 믿음, 앎 혹은 불신앙에 대해 질문하지 않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에서 예수는 두 번은 아가파오, 마지막 한번은 필레오 단어를 사용합니다. 아가페는 무조건적 사랑, 필로스는 우정과 같은 사랑, 등의 구분과 차이는 별로 드러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단지 이 3번의 질문 앞에서 점점 드러나는 것은 베드로가 속마음을 털어놓는 확답을 피한다는 느낌입니다. ‘예’라고 대답하긴 하지만 베드로는 바로 무슨 변명을 늘어놓기라도 하는 양, 당신이 그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예수에게 화살을 돌립니다. 그건 바로 이 의미지요. ‘알면서 왜 물으십니까?’
베드로는 어떤 마음으로 이렇게 되묻는 말을 했을까요? 요한복음에서의 베드로의 모습은 그 침묵을 통해 회개하고, 깨닫고, 믿음에 이르는 과정으로 나아가는 것 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시간상 이 대화가 정말 있었다면 예수를 부인한 며칠 이후였을 것입니다. 설사 자신이 부인하든 안하든 예수는 죽었을 거라고, 스스로 위안을 한다 해도, 그 앞에 예수가 나타났을 때 그 마음은 어땠을까요? 공관복음서에서 말하듯 울고 회개했다 손쳐도 베드로는 그저 반가움으로 예수를 맞이할 수 있었을까요? 빈 무덤을 보았을 때에도, 배에서 예수를 보았을 때에도, 정말 그의 제자였다면 참 감격하며 예수를 안았을 것 같은데 그런 행동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무 일이 없는 척하는 듯한 행동은 혹 책망 받을지 모르기에 정말 피하고 싶은, 두려움과 경계심을 숨기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은 아십니다’라는 그 말속에 이러한 마음이 함축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을 배반하고, 부인하고, 죽고 없어지니까, 이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툴툴 털어 버리고자 하는, 그래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애써 잊고자 했던 그 내면의 두려움을 꼭꼭 숨기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런 베드로의 반응에 대해 예수는 안다, 모른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요한복음의 내용과는 오히려 생소한 명령을 합니다. 내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왜 하필 베드로에게 이러한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을까요? 이것은 이후 교회사에서의 베드로의 역할과 연관된 것 같습니다. 예수가 사랑하는 제자가 박해받는 소종파 요한공동체 안에서 믿음과 앎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다면, 베드로는 교회의 설립과 성장에서 사랑과 공동체적 섬김의 역할을 한 것과 연관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18-19절에서 베드로가 순교당하는 사건을 예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두려움, 떨림, 경계심, 도피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베드로가 예수의 진정한 제자가 되어 순교자의 길을 가기까지의 극적인 전환을 의도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나를 따르라’는 명령은 공관복음에서는 베드로가 처음 예수를 따라갈 때 주어지는 것으로 나오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비로소 여기서야 나오는데 그 이유도 바로 베드로의 신앙의 진정한 변화 시점을 이렇게 봤기 때문인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 첫 번째 명령에서 베드로는 또 침묵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되돌아보고,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를 보고 묻습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때 베드로의 눈이 예수를 향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일 베드로가 정말 확신에 찬 예수의 수제자였다면, 예수의 명령에 정말 귀 기울였었다면 그는 다른 것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향한 예수의 뜻과 명령에 관심이 없는 것인가요? 아니면 일부러 외면하고자 하는 것이었을까요? 명령에 대한 대답은 없이, 자기는 그렇다 해도, 저 사람은 어떤 운명을 갖느냐고 마치 엄마의 말을 피하려는 어린아이처럼 묻습니다.
예수와의 마지막 순간까지 베드로는 예수에게 집중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예수는 그 질문에 대해 즉각적으로 책망하는 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너는’ 이라는 주어입니다. 직접 명령에서 2인칭 주격은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강조하듯이 들어 있습니다. 나를 따라야 할 이는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너라고 말입니다.
이 장면에서 주인공은 베드로와 예수입니다. 다른 이들은 엑스트라에 불과합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명령에 집중해야 했고, 그 명령에 답해야 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여전히 여기서도 베드로의 반응과 답에 대해서는 무관심입니다. 하지만, 18-19절의 베드로의 순교에 관한 예언은 이미 암묵적으로 그 예언이 참이 되기 위해, 베드로가 어떻게 회개하고, 답을 했을지에 대해 암시합니다.
초대교회 역사는 베드로가 얼마나 예수를 사랑하며, 그 양을 돌보고,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았었는지에 대해 생생히 증언합니다. 비록 요한복음은 베드로의 회개, 결단에 대해서는 끝까지 침묵하지만, 사도행전12장까지에는 순교하기까지 예수의 질문과 명령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이 곧 그의 삶을 통해 드러나고 있음을 증언합니다. 무식한 어부는 능숙한 설교로 한번에 3000명의 회개를 불러 일으켰고, 앉은뱅이를 고치는 능력을 발휘했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사도행전12장에서 ‘다른 곳으로 갔다’는 언급 이후 사실 상 베드로는 신약성서의 기록에서 사라지지만, 그에 대한 수많은 전승들은 로마에까지 가서 그곳에서 순교하기까지 예수를 따랐던 길을 갔다 전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요한복음의 베드로는 꼭 우리의 모습 같지 않습니까? 예수와 함께 있다고 하면서도 딴청피우고, 집중하지 못하고, 남의 탓으로 돌리고, 핑계거리 찾고, 제는 어떤가, 얘는 어떤가, 등등 나와 혹은 우리 공동체와 예수의 관계에 집중하지 못한 채, 다른 것을 돌아보기에 열중하지는 않습니까?
직격탄과 같은 예수의 마지막 명령은 오늘 또한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든,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너는! 나를 따르라!’
우리의 눈, 귀, 입, 삶, 과연 예수를 향해 있는가, 예수 따르미라고 하면서 진정 예수가 가는 길을 따라가고 있는가? 우리의 많은 말, 부산함 속에서 혹 예수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지금 중요한 것은 너와 나의 관계란다. 다른 이들이 예수를 제대로 믿든, 그렇지 않든 그건 지금 너와 상관없어. 지금 중요한 것은 네가 나를 따라 산다는 것이지!’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의 고난을 기억하면서 예수께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공동체로서, 우리는 얼마나 예수를 사랑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사랑을 공동체 안에서, 이웃 안에서 얼마나 드러내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예수와 나 자신, 우리입니다. 예수 앞에서 과연 나는, 우리는 진정한 예수따르미인가? 즉각적인 대답은 없었어도, 그의 삶을 통해 진실한 답의 여정을 보여주었던 베드로를 보면서 나의, 그리고 우리 공동체의 진실된 삶의 모습을 찾아갈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예수의 마지막 명령 앞에서도 머뭇거렸던 베드로, 하지만 그 명령은 그의 삶을 변화시키고 사랑과 섬김으로 참된 제자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음을 기억합니다. 주님, 말만의 예수따르미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사랑과 섬김으로 진정한 예수의 길을 가는 자되게 도와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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