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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마17: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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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석기현 목사 |
참고 : | 경향교회 |
요즘 자라는 어린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들 중에 ‘변형 로봇’(transformer)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분명히 로봇 모양이었는데 이리저리 접고 펴고 끼우고 빼고 하면 비행기가 되기도 했다가 공룡이 되기도 하고 탱크로도 둔갑하는데, 저는 애들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하는 것조차 안 됩니다. 분명히 물체는 하나인데 모양은 서너 개씩으로 바뀔 수 있다고 해서 ‘변형 로봇’이라고 불리는데, 도대체 어떤 상상력으로 그렇게 만들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저로서는 참 신기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와 비슷한 놀라움을 겪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의 모습이 어느 날 갑자기 바뀌어졌을 때였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형체 자체가 전혀 엉뚱한 모양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고 그저 용모가 변화했을 뿐이므로, 우리는 이것을 엄밀히 말할 때 ‘변형(transformation)’이라 하지 않고 ‘변모(transfiguration)’라고 합니다.
하여튼 예수님의 모습이 전혀 다르게 바뀐 그 변모의 사건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매우 인상 깊은 사건이었음에 분명합니다. 본문 마태복음 17장 1절 말씀에 「엿새 후에」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입니다. 즉 16장에 기록된 베드로의 신앙고백 사건이 있은 지 엿새 후에 이 변모 사건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사복음서에서 한 사건과 그 다음에 이어지는 사건 사이에 경과한 시간을 이처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이것은 그 사건이 그만큼 제자들의 기억 속에 인상 깊게 남아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변화산상에서의 사건이 그들에게 그처럼 인상 깊게 남겨 준 교훈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예수님의 변모 사건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전해 주고 있는 교훈은 또한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 대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1. 신자는 ‘오직 예수’만으로 현세를 완전히 만족하는 생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마태복음 17장 1절부터 4절에 말씀에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 세 제자들만 데리고 어느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시던 중에 갑자기 그 모습이 바뀌어졌습니다. 얼굴은 해같이 빛나게 되고 그 옷 역시 빛과 같이 희어졌는데, 마가복음의 기록에 따르면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희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무슨 석양빛에 예수님의 모습이 반사되어 멋있게 보였다는 따위의 말이 결코 아니라, 분명히 초자연적인 광채가 예수님의 모습에서 발하게 되었음을 묘사하는 말씀임에 분명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 변모된 예수님 곁에 문득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 대화 내용은, 누가복음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한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즉 그날 예수님께서는 장차 당신의 구속 사역이 끝난 후에 받으시게 될 영광을 미리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면서, 또 한편 당신께서 이제 곧 맞이하시게 될 가장 중요한 사명을 스스로 재확인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베드로의 반응입니다. 그는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초막은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만든 임시 거처를 두고 한 말인데 물론 그 산에서 밤을 지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런 초막을 세 개 짓겠다고 했으니 자기네들 것은 아예 계산에 넣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때 얼마나 마음이 기뻐 흥분하고 있었는지를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 이 두 사람이 그들과 함께 있게 된 상태가 너무나 좋았던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로 말하자면 당시 유대인들이 그야말로 ‘하나님 다음 가는 사람’이라 할 만큼 떠받들고 있던 ‘구약의 양대 선지자’였습니다. 자기네 온 민족이 그토록 흠모하고 떠받들고 있는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바로 눈앞에 나타나자 베드로는 정말 정신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흥분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멋진 일이 우리에게 벌어지다니! 우리 예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서 있다니 정말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그저 이 상태로 영원히 살 수 있으면 원이 없겠다.”라는 생각에 가득 찼던 나머지 그는 바로 그 자리에 초막 셋을 짓겠다고 예수님께 청했던 것입니다.
그 같은 베드로의 흥분된 요청에 대한 응답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오직 예수님’만 그들 곁에 남게 된 것이었습니다. 5절로 8절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그런 요청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구름 가운데 나타나셔서 “베드로, 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 너는 이제 모세나 엘리야 같은 사람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내 사랑하는 아들, 내가 가장 기뻐하는 자를 너희들에게 보내 주었는데 이 예수 외에 너희들에게 더 필요한 사람이 도대체 누가 될 수 있다는 말이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실로 베드로가 저지르고 있던 잘못의 정곡을 정확히 찔러 주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 그 자신이 바로 엿새 전에 예수님이야말로 온 백성이 기다리고 있던 메시야이실 뿐 아니라 바로 성자 하나님이신 것까지 고백했었습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베드로는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최고최대의 인물을 바로 그 자신이 만나고 있었음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변화산상에서 한 가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것은 그 위대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서도 거기에다 ‘모세와 엘리야도 덧붙일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잘못을 지적해 주시면서, “너희들은 이제 다른 어떤 사람이나 무엇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저 예수의 말씀만 잘 들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필요충분한 때가 너희들에게 임했다.”라고 깨우쳐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베드로와 같은 착각을 자주 범합니다. 우리가 일단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도, 예수님 영접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이 흠모하던 모세나 엘리야를 그 예수님 옆에 세워 두기를 좋아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물론 좋지만 그 예수님 외에도, 불신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 할만한 다른 이런 저런 것이 함께 붙어 있으면 훨씬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모시고 사는 것보다는 예수님도 믿고 내 불신 친구하고 함께 술도 마시고 하면서 어떻게 삼각관계를 유지해 나가려 하는, 소위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살려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만 믿고 사는 것보다는 그 예수님과 함께 석가모니나 공자나 마호메트도 나란히 모셔 놓고 함께 믿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소위 기독교인이라는 자들 가운데서도 아주 많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같은 망상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어떻게 예수님만으로는 모자라서 술친구도 같이 있어 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예수님 곁에다가 소위 다른 성인들을 나란히 세워 놓고 무슨 ‘사대 성인’이니 하면서 거기 초막 네 개를 지어 놓고 이 네 사람과 함께 영원히 있으면 좋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런 소리를 성부 하나님, 당신의 사랑하고 기뻐하시는 성자를 이 땅에 보내 주신 그 하나님께서 들으실 때 얼마나 노여우시겠습니까? 그런 소리야말로 유일한 구세주 되신 예수님께 대한 엄청난 모욕이며, 또한 그 귀한 독생자까지 보내어 주신 하나님께 더할 수 없는 배은망덕인 것입니다. 정말 말도 되지 않을 소리들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내 곁에 모시는 이것 하나만 가지고도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완전히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예수님이야말로 세상의 다른 어떤 것과 비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가장 귀한 보배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오늘 거하는 곳이 초막이든지 궁궐이든지 그 주님 예수 모신 바로 그 곳이 그야말로 천국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보내어 주신 이 가장 귀한 예수님 한 분만으로 자신의 현세에 대하여 완전히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자는 ‘오직 예수’만으로 내세를 철저히 준비하는 생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마태복음 17장 9절로 13절에 기록하기를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날 있었던 사건을 당분간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세 제자들에게 명하셨습니다. 이것은 당시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기대감에 들떠 있던 백성들에게 쓸데없는 충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나중에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는 실로 중대한 선언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은 참 엉뚱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그런 의미심장한 선언을 듣고 나서 그들이 한다는 말이 “그러면 왜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동문서답과도 같은 말이 그들에게서 튀어나왔던 것입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물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엘리야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말라기서에 예언된 대로라면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와야 하는데, 아직 엘리야가 오지 않았으니 예수님은 결코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대로 이미 왔었습니다. 누가복음 1장 17절에서 천사가 세례요한의 탄생을 예언하면서 「저가 또 엘리야의 능력과 심령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고 예언한 그대로입니다. 즉 세례요한이 ‘엘리야와 같은 심령과 능력으로써’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역을 행함으로써 그 예언은 완벽하게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죽었던 엘리야가 다시 부활해서 돌아올 것으로만 기대하고 있었고, 그런 까닭에 세례 요한도 자기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즉 다시 ‘육체적으로 부활하여 재림한 엘리야’는 아니라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서기관들은 이 점을 깨닫지 못하고서, 벌써 오신 메시아를 알아차리기보다는, 그전에 있어야 할 사건 즉 엘리야의 재림 사건에만 쓸데없는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바로 그와 같은 잘못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변화산상에서 예수님께서 장차 받으시게 될 놀라운 영광을 직접 목도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장차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과 또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주님의 이 놀라운 예언을 막 들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신앙 고백한 제자들이니 이들은 당연히 이 구세주께서 미래에 행하실 위대한 구속사역에 그들의 모든 주의가 기울여져야 마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은 ‘엘리야의 재림’이라는 사소한 문제에만 오히려 쏠려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역사적 장소는 어떤 위치입니까? 우리는 이제 그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승천하셨던 자’가 다시 오실 재림의 날을 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 살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들의 미래 인생의 초점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맞추어야 마땅했다면, 오늘 우리들의 생은 예수님의 재림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교인들 역시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은 잘못을 자주 저지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하)는 엄청난 예언을 하고 계시는데, 사람들의 마음은 엉뚱하게 ‘그 전에 재림한다는 엘리야’ 같은 사소한 사건에 온 신경을 다 쏟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으면, 이제는 예수님 재림만 확실히 믿고 준비하면 간단할 것인데, 그 사이의 과정을 쓸데없이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진짜 중생 받은 사람이라면 방언을 해야 한다던데요?”라고, 예수님 영접한 후에 받게 되는 수많은 은사들 가운데서 사실 지극히 작은 은사에 속하는 것 하나만 붙잡고 날마다 골머리를 썩이며 사는 교인이 있습니다. “전천년설이 맞습니까, 후천년설이 맞습니까?”라고, 예수님 재림하신 후에도 천당 가는 것을 1000년이나 미루면서 그 동안 이 세상 사람들 위에서 왕노릇하게 될 것을 더 재미있어 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교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다가올 미래를 대비한다.’고 해서 소위 ‘다미 선교회’라고 이름 붙인 이단은 예수님 재림의 시각이 1992년 10월 28일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장림이라는 이단 교주가 그 재림 날짜를 산출한다면서 내세웠던 ‘무화과나무의 비유’(마 24:32)를 마치 ‘엘리야의 재림’처럼 여기고 귀가 솔깃해졌었습니까?
제가 대학생 시절에는 소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라는 것이 꽤나 센세이션을 일으켰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1999년(혹은 2000년) 7월이 되면 지구가 망한다.’는 예언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이미 그 예언이 맞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나 뻔하게 드러났지만, 당시에는 그 사람의 예언에 성경의 ‘곡과 마곡’ 따위의 지명들이 등장한다고 해서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벌벌 떠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습니다.
도대체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까? 예수님 믿으십니까? 예수님을 여러분의 구세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셨습니까? 그러면 이제 남은 순서는 지극히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하셨으니, 우리는 그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중간에 무슨 복잡한 순서들을 집어넣을 필요가 도무지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예수님은 분명히 다시 이 땅에 재림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장차 행하실 가장 중요한 사역이며 틀림없이 행하실 일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믿게 된 성도는 이제 이것 한 가지에만 분명하게 자신의 미래의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기만 하면 충분한 것입니다.
만에 하나 예수님 재림보다 ‘엘리야가 먼저 와서’ 무슨 징조를 보여 준다 손치더라도, 그것 가지고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평소에는 전도를 잘 받지 않던 불신자들도 그런 정보만 정확하게 전달해 주면 당장 회개하고 예수 믿게 될 것 같아서 그럽니까? 아니면, 그 날짜를 정확하게 계산해 둠으로써, 자기도 평소에는 마음대로 살다가 예수님 재림 날짜 하루 전에 한꺼번에 몰아서 회개하고 바짝 쪼아서 준비하겠다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얄팍한 계산하고 있는 자들을 깜짝 놀라게 하시려고 「내가 도적 같이 오겠다」(마 24:43)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예수님께서 오시든지, 밤에 오시든지 낮에 오시든지 조금도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고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항상 ‘슬기로운 처녀’ 같이 예비하며 ‘충성된 청지기’ 같이 열심히 살고 있어야 할 뿐입니다. 사람을 미혹하게 하는 ‘엘리야의 재림 사건’들에 정신을 빼앗기지 말고, 그저 반드시 오시마고 약속하신 예수님 한 분만 믿고 바라보며 소망하는 가운데 자신의 미래와 내세를 틀림없이 준비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잠시 동안 다른 것들에 눈길을 돌리고 다른 것들에 정신이 팔렸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생애 최고의 신앙고백을 드린 예수님을 바로 곁에 모시고 있으면서도, 베드로는 ‘예수님 곁에 서 있는 모세와 엘리야’를 좋아하기도 했고 ‘예수님보다 먼저 올 것이라고 예언되었던 엘리야’에 대하여 마음을 빼앗기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변화산을 내려왔을 때에는 이제 「오직 예수」 외에는 다른 아무도 다른 어떤 것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외로운 상태도 아니었고 결코 무엇이 부족한 자리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 모시게 된 것 하나만 가지고 만족하는 것, 오직 예수님께서 장차 행하실 구속사역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나가는 것 - 그것이야말로 그들로서는 최고로 행복하고 완전한 생애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시고 신앙고백하셨습니까? 그 주님의 십자가를 믿고 또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질 각오도 하셨습니까? 그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 없는 줄을 확실히 믿고 진심으로 만족하며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겨 주신 마지막 약속에만 자신의 인생 목적의 초점을 모으고 그 주님 다시 만날 날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만으로 현세를 만족하며 오직 예수만으로 미래를 예비하는 이 놀랍고도 완벽한 인생의 축복을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 /석기현 목사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와 비슷한 놀라움을 겪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의 모습이 어느 날 갑자기 바뀌어졌을 때였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형체 자체가 전혀 엉뚱한 모양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고 그저 용모가 변화했을 뿐이므로, 우리는 이것을 엄밀히 말할 때 ‘변형(transformation)’이라 하지 않고 ‘변모(transfiguration)’라고 합니다.
하여튼 예수님의 모습이 전혀 다르게 바뀐 그 변모의 사건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매우 인상 깊은 사건이었음에 분명합니다. 본문 마태복음 17장 1절 말씀에 「엿새 후에」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입니다. 즉 16장에 기록된 베드로의 신앙고백 사건이 있은 지 엿새 후에 이 변모 사건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사복음서에서 한 사건과 그 다음에 이어지는 사건 사이에 경과한 시간을 이처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이것은 그 사건이 그만큼 제자들의 기억 속에 인상 깊게 남아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변화산상에서의 사건이 그들에게 그처럼 인상 깊게 남겨 준 교훈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예수님의 변모 사건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전해 주고 있는 교훈은 또한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 대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1. 신자는 ‘오직 예수’만으로 현세를 완전히 만족하는 생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마태복음 17장 1절부터 4절에 말씀에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 세 제자들만 데리고 어느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시던 중에 갑자기 그 모습이 바뀌어졌습니다. 얼굴은 해같이 빛나게 되고 그 옷 역시 빛과 같이 희어졌는데, 마가복음의 기록에 따르면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희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무슨 석양빛에 예수님의 모습이 반사되어 멋있게 보였다는 따위의 말이 결코 아니라, 분명히 초자연적인 광채가 예수님의 모습에서 발하게 되었음을 묘사하는 말씀임에 분명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 변모된 예수님 곁에 문득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 대화 내용은, 누가복음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한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즉 그날 예수님께서는 장차 당신의 구속 사역이 끝난 후에 받으시게 될 영광을 미리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면서, 또 한편 당신께서 이제 곧 맞이하시게 될 가장 중요한 사명을 스스로 재확인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베드로의 반응입니다. 그는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초막은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만든 임시 거처를 두고 한 말인데 물론 그 산에서 밤을 지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런 초막을 세 개 짓겠다고 했으니 자기네들 것은 아예 계산에 넣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때 얼마나 마음이 기뻐 흥분하고 있었는지를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 이 두 사람이 그들과 함께 있게 된 상태가 너무나 좋았던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로 말하자면 당시 유대인들이 그야말로 ‘하나님 다음 가는 사람’이라 할 만큼 떠받들고 있던 ‘구약의 양대 선지자’였습니다. 자기네 온 민족이 그토록 흠모하고 떠받들고 있는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바로 눈앞에 나타나자 베드로는 정말 정신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흥분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멋진 일이 우리에게 벌어지다니! 우리 예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서 있다니 정말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그저 이 상태로 영원히 살 수 있으면 원이 없겠다.”라는 생각에 가득 찼던 나머지 그는 바로 그 자리에 초막 셋을 짓겠다고 예수님께 청했던 것입니다.
그 같은 베드로의 흥분된 요청에 대한 응답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오직 예수님’만 그들 곁에 남게 된 것이었습니다. 5절로 8절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그런 요청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구름 가운데 나타나셔서 “베드로, 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 너는 이제 모세나 엘리야 같은 사람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내 사랑하는 아들, 내가 가장 기뻐하는 자를 너희들에게 보내 주었는데 이 예수 외에 너희들에게 더 필요한 사람이 도대체 누가 될 수 있다는 말이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실로 베드로가 저지르고 있던 잘못의 정곡을 정확히 찔러 주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 그 자신이 바로 엿새 전에 예수님이야말로 온 백성이 기다리고 있던 메시야이실 뿐 아니라 바로 성자 하나님이신 것까지 고백했었습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베드로는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최고최대의 인물을 바로 그 자신이 만나고 있었음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변화산상에서 한 가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것은 그 위대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서도 거기에다 ‘모세와 엘리야도 덧붙일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잘못을 지적해 주시면서, “너희들은 이제 다른 어떤 사람이나 무엇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저 예수의 말씀만 잘 들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필요충분한 때가 너희들에게 임했다.”라고 깨우쳐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베드로와 같은 착각을 자주 범합니다. 우리가 일단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도, 예수님 영접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이 흠모하던 모세나 엘리야를 그 예수님 옆에 세워 두기를 좋아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물론 좋지만 그 예수님 외에도, 불신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 할만한 다른 이런 저런 것이 함께 붙어 있으면 훨씬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모시고 사는 것보다는 예수님도 믿고 내 불신 친구하고 함께 술도 마시고 하면서 어떻게 삼각관계를 유지해 나가려 하는, 소위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살려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만 믿고 사는 것보다는 그 예수님과 함께 석가모니나 공자나 마호메트도 나란히 모셔 놓고 함께 믿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소위 기독교인이라는 자들 가운데서도 아주 많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같은 망상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어떻게 예수님만으로는 모자라서 술친구도 같이 있어 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예수님 곁에다가 소위 다른 성인들을 나란히 세워 놓고 무슨 ‘사대 성인’이니 하면서 거기 초막 네 개를 지어 놓고 이 네 사람과 함께 영원히 있으면 좋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런 소리를 성부 하나님, 당신의 사랑하고 기뻐하시는 성자를 이 땅에 보내 주신 그 하나님께서 들으실 때 얼마나 노여우시겠습니까? 그런 소리야말로 유일한 구세주 되신 예수님께 대한 엄청난 모욕이며, 또한 그 귀한 독생자까지 보내어 주신 하나님께 더할 수 없는 배은망덕인 것입니다. 정말 말도 되지 않을 소리들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내 곁에 모시는 이것 하나만 가지고도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완전히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예수님이야말로 세상의 다른 어떤 것과 비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가장 귀한 보배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오늘 거하는 곳이 초막이든지 궁궐이든지 그 주님 예수 모신 바로 그 곳이 그야말로 천국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보내어 주신 이 가장 귀한 예수님 한 분만으로 자신의 현세에 대하여 완전히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자는 ‘오직 예수’만으로 내세를 철저히 준비하는 생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마태복음 17장 9절로 13절에 기록하기를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날 있었던 사건을 당분간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세 제자들에게 명하셨습니다. 이것은 당시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기대감에 들떠 있던 백성들에게 쓸데없는 충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나중에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는 실로 중대한 선언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은 참 엉뚱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그런 의미심장한 선언을 듣고 나서 그들이 한다는 말이 “그러면 왜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동문서답과도 같은 말이 그들에게서 튀어나왔던 것입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물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엘리야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말라기서에 예언된 대로라면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와야 하는데, 아직 엘리야가 오지 않았으니 예수님은 결코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대로 이미 왔었습니다. 누가복음 1장 17절에서 천사가 세례요한의 탄생을 예언하면서 「저가 또 엘리야의 능력과 심령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고 예언한 그대로입니다. 즉 세례요한이 ‘엘리야와 같은 심령과 능력으로써’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역을 행함으로써 그 예언은 완벽하게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죽었던 엘리야가 다시 부활해서 돌아올 것으로만 기대하고 있었고, 그런 까닭에 세례 요한도 자기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즉 다시 ‘육체적으로 부활하여 재림한 엘리야’는 아니라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서기관들은 이 점을 깨닫지 못하고서, 벌써 오신 메시아를 알아차리기보다는, 그전에 있어야 할 사건 즉 엘리야의 재림 사건에만 쓸데없는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바로 그와 같은 잘못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변화산상에서 예수님께서 장차 받으시게 될 놀라운 영광을 직접 목도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장차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과 또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주님의 이 놀라운 예언을 막 들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신앙 고백한 제자들이니 이들은 당연히 이 구세주께서 미래에 행하실 위대한 구속사역에 그들의 모든 주의가 기울여져야 마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은 ‘엘리야의 재림’이라는 사소한 문제에만 오히려 쏠려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역사적 장소는 어떤 위치입니까? 우리는 이제 그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승천하셨던 자’가 다시 오실 재림의 날을 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 살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들의 미래 인생의 초점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맞추어야 마땅했다면, 오늘 우리들의 생은 예수님의 재림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교인들 역시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은 잘못을 자주 저지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하)는 엄청난 예언을 하고 계시는데, 사람들의 마음은 엉뚱하게 ‘그 전에 재림한다는 엘리야’ 같은 사소한 사건에 온 신경을 다 쏟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으면, 이제는 예수님 재림만 확실히 믿고 준비하면 간단할 것인데, 그 사이의 과정을 쓸데없이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진짜 중생 받은 사람이라면 방언을 해야 한다던데요?”라고, 예수님 영접한 후에 받게 되는 수많은 은사들 가운데서 사실 지극히 작은 은사에 속하는 것 하나만 붙잡고 날마다 골머리를 썩이며 사는 교인이 있습니다. “전천년설이 맞습니까, 후천년설이 맞습니까?”라고, 예수님 재림하신 후에도 천당 가는 것을 1000년이나 미루면서 그 동안 이 세상 사람들 위에서 왕노릇하게 될 것을 더 재미있어 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교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다가올 미래를 대비한다.’고 해서 소위 ‘다미 선교회’라고 이름 붙인 이단은 예수님 재림의 시각이 1992년 10월 28일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장림이라는 이단 교주가 그 재림 날짜를 산출한다면서 내세웠던 ‘무화과나무의 비유’(마 24:32)를 마치 ‘엘리야의 재림’처럼 여기고 귀가 솔깃해졌었습니까?
제가 대학생 시절에는 소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라는 것이 꽤나 센세이션을 일으켰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1999년(혹은 2000년) 7월이 되면 지구가 망한다.’는 예언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이미 그 예언이 맞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나 뻔하게 드러났지만, 당시에는 그 사람의 예언에 성경의 ‘곡과 마곡’ 따위의 지명들이 등장한다고 해서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벌벌 떠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습니다.
도대체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까? 예수님 믿으십니까? 예수님을 여러분의 구세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셨습니까? 그러면 이제 남은 순서는 지극히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하셨으니, 우리는 그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중간에 무슨 복잡한 순서들을 집어넣을 필요가 도무지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예수님은 분명히 다시 이 땅에 재림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장차 행하실 가장 중요한 사역이며 틀림없이 행하실 일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믿게 된 성도는 이제 이것 한 가지에만 분명하게 자신의 미래의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기만 하면 충분한 것입니다.
만에 하나 예수님 재림보다 ‘엘리야가 먼저 와서’ 무슨 징조를 보여 준다 손치더라도, 그것 가지고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평소에는 전도를 잘 받지 않던 불신자들도 그런 정보만 정확하게 전달해 주면 당장 회개하고 예수 믿게 될 것 같아서 그럽니까? 아니면, 그 날짜를 정확하게 계산해 둠으로써, 자기도 평소에는 마음대로 살다가 예수님 재림 날짜 하루 전에 한꺼번에 몰아서 회개하고 바짝 쪼아서 준비하겠다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얄팍한 계산하고 있는 자들을 깜짝 놀라게 하시려고 「내가 도적 같이 오겠다」(마 24:43)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예수님께서 오시든지, 밤에 오시든지 낮에 오시든지 조금도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고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항상 ‘슬기로운 처녀’ 같이 예비하며 ‘충성된 청지기’ 같이 열심히 살고 있어야 할 뿐입니다. 사람을 미혹하게 하는 ‘엘리야의 재림 사건’들에 정신을 빼앗기지 말고, 그저 반드시 오시마고 약속하신 예수님 한 분만 믿고 바라보며 소망하는 가운데 자신의 미래와 내세를 틀림없이 준비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잠시 동안 다른 것들에 눈길을 돌리고 다른 것들에 정신이 팔렸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생애 최고의 신앙고백을 드린 예수님을 바로 곁에 모시고 있으면서도, 베드로는 ‘예수님 곁에 서 있는 모세와 엘리야’를 좋아하기도 했고 ‘예수님보다 먼저 올 것이라고 예언되었던 엘리야’에 대하여 마음을 빼앗기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변화산을 내려왔을 때에는 이제 「오직 예수」 외에는 다른 아무도 다른 어떤 것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외로운 상태도 아니었고 결코 무엇이 부족한 자리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 모시게 된 것 하나만 가지고 만족하는 것, 오직 예수님께서 장차 행하실 구속사역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나가는 것 - 그것이야말로 그들로서는 최고로 행복하고 완전한 생애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시고 신앙고백하셨습니까? 그 주님의 십자가를 믿고 또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질 각오도 하셨습니까? 그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 없는 줄을 확실히 믿고 진심으로 만족하며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겨 주신 마지막 약속에만 자신의 인생 목적의 초점을 모으고 그 주님 다시 만날 날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만으로 현세를 만족하며 오직 예수만으로 미래를 예비하는 이 놀랍고도 완벽한 인생의 축복을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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