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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후3:1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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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완상 교수 |
참고 : | 2008.03.23 새길교회 주일설교 |
부활절은 기독교의 3대 절기 중 하나로, 한국교회는 해마다 의례적인 잔치의 날로 이날을 보냅니다. 부활사건이 갖는 해석학적 깊은 의미를 되씹거나, 그 실천적 의미를 다시 다짐하는 일은 별로 없는 듯합니다. 대체로 현재 우리의 몸이 예수 부활 신앙을 통해 영원히 존속하기를 바라는 천박한 종교적 탐욕, 곧 영생욕심이 팽창해지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정통복음주의 신학에서는 예수부활사건을 사실적(factual) 사건으로 믿고 그것을 인과론적으로 증명해 보려는 움직임이 강합니다. 이를테면 <빈 무덤>과 <예수의 현현> 사건을 예수 부활의 충분조건으로 주장합니다. 예수의 무덤이 사흘 후 비어졌고, 그 후 부활의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이 예수의 부활을 사실로 증명한다는 주장이지요.
그런가 하면 역사적 예수 탐구에 관심 있는 신학자들은 예수 부활에 대한 서술 양식, 곧 그것이 사실적 서술이냐 아니면 은유적 상징 서술이냐 하는 서술 양식의 문제는 일단 접어두고, 그 사건이 갖는 해석학적 의미를 천착해 보려고 합니다. 이 천년 전에 일어났던 그 부활이 오늘 21세기에 사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특히 어떤 실천적 중요성을 던져주는가에 주목합니다. 그래서 저도 오늘 예수 부활이 갖는 해석학적 의미와 중요성을 하나하나 짚어 보고 싶습니다. 특히 그 실체적 중요성(physicality)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빈 무덤>과 <현현>이 오늘 우리 그리스도 따르미에게 주는 실체적 의미를 깊이 되씹어 보면서 새로운 깨달음과 결단에 이르고 싶습니다.
첫째, 예수 부활은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시동을 건 하나님나라운동의 한 차원 높은 지속과 실천을 의미합니다. 갈릴리라는 절망과 고통의 땅, 막강한 로마제국의 폭력에 의해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겪었던 로마의 변방식민지 땅에서 예수가 펼친 사랑과 해방운동, 평화와 정의의 프로젝트는 로마의 실정법에 의해 무참하게 저지되고 파괴되었습니다. 그 운동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처형당한 것이지요. 그런데 처형당한지 사흘 만에 예수가 부활했음을 제자들은 체험했습니다. 그의 부활은 그러기에 그 어떤 제국의 물리적 힘도 예수의 갈릴리 운동을 중단시킬 수 없음을 감동적으로 증언합니다. 로마제국과 그 부역세력들(예루살렘의 성전세력)이 죽여 놓은 사랑과 평화의 운동을 하나님이 되살려 놓은 것이지요. 그 운동은 되살아났을 뿐 아니라, 더욱 활기차게 그 엄혹한 제국현실 속에서도 추진되었음을 뜻합니다. 당시 막강했던 로마당국이 no한 것을 하나님이 yes라고 단호하게 선언한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종말적 운동, 곧 하나님의 역사적 대청소작업의 획기적 시작을 의미합니다. 時空宇宙의 끝장내기가 아니라, 로마제국 같은 時空的 惡의 존속을 끝내려는 운동의 시작을 알려줍니다. 그러기에 예수부활은 역사적 실체성과 실천성을 지니는 역동적 사건입니다.
둘째로, 예수부활은 빈 무덤 소식과 현현 체험을 통해 그 실체적 의미를 구체적으로 제자들에게 깨닫게 해줍니다. 여성제자들이 예수 무덤이 비었음을 목도했다는 증언을 접했을 때 잠시 남성제자들은 두려움과 혼란에 빠졌습니다. <누가 우리 선생님의 시신을 훔쳐갔나>하고 당혹해하다가도 <정말 다시 살아나신 것이 아닌가>하고 놀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빈 무덤 얘기가 흘러나온 뒤 곧 이 곳 저 곳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를 직접 만나게 되는 사건들이 연이어 터져 나옵니다. 현현사건으로 빈 무덤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아하, 말씀하신대로 죽은 지 사흘 안에 정말 살아나셨구나!> <예수님이 진짜 우리의 메시아로구나!>하는 새로운 깨달음에 이르게 되지요. 이 깨달음의 감동이 폭포수처럼 제자들에게 쏟아져 내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그 감동이 갖는 실체성에 대해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깨달음이 개인의 한낱 심리변화에 불과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의 존재양식의 변화, 그것도 총체적, 근본적 변화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곧 그들의 실체적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지요. 그들의 그 아둔함, 그 비겁함, 그 탐욕스러움, 그 미련함, 그 절망(예수처형 직후)이 이제 빈 무덤과 현현의 잇단 체험을 거치면서 그 결연함, 그 용기, 그 눈뜸, 그 순교의 열정과 헌신으로 돌변했습니다. 이 같은 질적 비상을 경험하면서 제자들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부활의 환상을 보고, 낭만적 변신이나, 일시적 심리적 변화를 경험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새로운 존재로 확 달라져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견디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변화를 통해 역사적 예수의 갈릴리 프로젝트는 이제 부활의 그리스도 사역으로 이어집니다. 육체의 예수 없이도 갈릴리 계획과 운동은 한 차원 높게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갈릴리에서의 식탁공동체 운동은 한편 성만찬 형식으로, 다른 한편 나눔의 평등공동체 운동으로 더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 뿐이겠습니까! 갈릴리에서 예수가 실천하셨던 무상의 치료사역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제자들에 의해 지속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그 이름,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절름발이를 벌떡 일어나게 합니다. 비록 베드로는 금과 은은 없으나, 갈릴리의 예수 곧 나사렛 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 이름을 함께 부르며 그 이름의 능력으로 치유선교를 뜨겁게 펼쳤습니다. 이 치유의 효과는 결코 환상이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벌어진 역사적 실체였습니다. 흥미롭게도 예수 이름은 그저 간판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명목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실체적 힘이었습니다. 그러니 갈릴리 예수의 프로젝트는 이제 여러 제자들에 의해 힘 있게 실체적으로 실천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비록 로마제국의 제도폭력이 더욱 기승을 부리며 제자들, 사도들, 예수따르미들의 용기 있는 새 질서 선포와 실천을 억눌렀지만, 그들은 굽히지 않고,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부활을 증언하며 로마의 폭력과 탐욕과 독선, 특히 로마의 신학적 이데올로기(로마황제만이 신이며 메시아라는 로마지배 이데올로기)를 끝장내고 대안의 질서 곧 사랑과 해방, 평화와 정의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선포하며 실천하려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 부활의 살아있는 구체적 증거였습니다.
셋째로, 부활의 실체성의 신학적 의미 가운데, 예수와 그리스도 간에 설치된 신학적 장벽을 허무는 일의 중요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간 여러 신학자들이 역사적 예수 탐구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취해 왔습니다. 불트만(Bultmann)은 4복음서의 예수도 초대교회의 케리그마로 이해했고, 역사적 예수를 찾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하기에 사도바울에도 이 같은 단절에는 일말의 책임이 없다하기 어렵겠습니다만, 그간 혈육의 예수 곧 나사렛 예수(또는 갈릴리 예수)는 대체로 신학자들의 관심 밖에 있었지요. 역사학자들이 탐구해야할 과제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예수가 부활의 그리스도에서 결코 떨어져 나갈 수 없다는 뜻이 예수부활사건 속에 깊이 스며있음을 우리는 새삼 깨닫게 됩니다. 성서가 증언하는 몇 가지 단서에 주목해 봅시다.
예수 무덤을 찾아왔던 여성제자들에게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가서 나의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여라. 거기에서 그들이 나를 만날 것이다“ (마태복음28:10)
왜 갈릴리입니까? 왜 부활의 그리스도가 역사의 예수가 활동했던 흑암과 절망의 땅 갈릴리로 먼저 가시겠다고 했겠습니까? 가장 억울한 인간 고통이 깊게, 넓게 뿌리내렸던 사망의 그늘진 로마식민지 땅이었기에, 거기에 사랑, 정의, 평화, 해방이 가장 절박하게 필요했기에, 부활의 그리스도께서 그곳으로 가신 것이 아닐까요? 더욱이 그곳이 예수의 하나님나라 프로젝트가 구체적으로 시작되고 실천된 곳이 아닙니까! 여성제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먼저 갈릴리로 가시어 제자들을 그곳에서 만날 것이라고 일렀을 때, 부활의 그리스도가 바로 갈릴리 예수임을 다시 한 번 뜨겁게 알려주신 것이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 기독교와 교회는 불행하게도 그리스도와 예수를 신학적으로 그리고 실제로 분리시켜온 잘못된 판단을 깊이 뉘우치며 고쳐나가야 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와 분열되면, 교회의 삶속에서 복음은 깨어진 불완전한 복음으로 남기 쉽습니다. 먼저 사도신경을 생각해 봅시다. 이 신앙고백에는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의 냄새가 너무나 짙습니다. 교회가 로마제국의 권력 속으로 편입되면서, 갈릴리 예수는 증발해버리고 맙니다. 그 신조에는 역사적 예수 특히 하나님나라운동을 펼쳤던 길릴리 예수는 그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습니다. 식탁평등공동체운동이나 무상의 치유운동을 감동스럽게 펼쳤던 예수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하나의 그리스도> <하나의 교회> <하나의 제국>이라는 통치이념에 봉사하는 교리화된 그리스도만이 남아 있지요. 해방된 이후 한국교회사를 되돌아보면, 그곳에서도 그리스도와 예수가 분리되면서 한국교회가 분열되었던 아픈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예수교장로교와 그리스도교장로교(기독교장로교)로 추악하게 갈라졌던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 분열이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우리는 또한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부끄러운 분열의 역사적 사실을 이제 늦게나마 가슴 치며 회개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예수는 결코 그리스도에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바로 그것을 뜨겁게 증언해 줍니다.
또 하나, 제자들의 체험에서 부활의 그리스도가 갈릴리 예수님을 증언해 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갔던 두 제자들은 부활의 예수와 동행했으나, 그가 예수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떡을 떼는 순간에야 비로소 두 제자들은 그가 바로 갈릴리에서 함께 떡을 떼며 평등공동체 운동을 펼쳤던 나사렛 예수임을 깨닫게 됩니다. 부활의 주님이 바로 갈릴리 예수님이었구나라고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절망의 여정을 끝내고 무시무시했던 예수처형 장소가 있는 예루살렘으로 용기 있게 다시 올라갔던 것입니다. 새 존재로 태어나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달려간 것이지요.
또 다른 사실에서 부활의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예수임을 증거해 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왜 막달라 마리아와 여성제자들이 예수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먼저 발견했을까요? 다르게 말하자면, 부활의 그리스도는 왜 당신의 부활 증거를 베드로를 위시한 남성제자들보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여주었을까요? 갈릴리 프로젝트에 성차별이 있었던가요? 예수의 밥상공동체운동에서 여성은 한낱 변두리에 내버려 두었던가요? 아닙니다. 갈릴리 예수는 여성을 남성보다 더 평등하게 대접했습니다. 꼴찌에 대해 항상 더 따뜻한 사랑의 배려를 하셨던 예수께서 여성 일반뿐만 아니라 남권사회에서 부당하게 차별받았던 더 딱한 여성들을 더 평등하게 대우하셨지요. 그러기에 부활의 주님은 온갖 악평에 시달렸던 여성들에게 부활의 증거를 확실하게 먼저 보여주신 것 아닐까요? 예수의 권위서열에서는 억울한 여성, 꼴찌의 여성들이 남성들 보다 더 높은 대접을 받은 것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지배의 아름다운 모습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로마제국의 남권중심주의 질서와 다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활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새 질서의 아름다운 모습을 여성들에게 먼저 보여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부활의 실체성을 다른 차원에서 조명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그 막강했던 로마당국의 힘으로도 막아낼 수 없었던 부활사건이 갈릴리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을 더 활기차게 더 새롭게 펼치도록 제자들을 고무시켰다는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는 기쁜 소식입니다. 다름 아니라 하나님과 부활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당신의 협력자로 초청해 주셨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최근 카톨릭 신학자 Crossan은 이것을 神人合同의 종말(collaborative eschaton)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바와 같이, 부활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주도하신 사건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노력이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부활사건은 전적으로 은총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깨달음과 감동으로 하나님나라운동이 새롭게 활기차게 펼쳐지면서 예수그리스도 따르미들은 그 운동의 공동주역으로 초대받게 되었습니다. 연약 했고 비겁했고 몽매했던 제자들이 감히 어떻게 부활의 그리스도와 함께 동역자로 사랑과 용서, 평화와 정의의 새 질서 운동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동역자의 능력과 자격이 전혀 없는데도 말입니다. 저는 여기서 두 가지 하나님의 선물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오순절 사건에서 연약한 신도들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선물을 확인하게 됩니다. 성령은 위로자요 힘주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인간과 함께 나눠주는데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막강한 힘을 연약한 인간과 나눌 때 더 뜨겁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성령의 힘입니다. 이 성령의 능력으로 제자들은 하나님운동의 동반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선물은 속죄신앙일 것입니다. 갈릴리 예수께서 로마의 벌거벗은 제도폭력으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것은 올곧은 일을 할 때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할 고난이요 고통이었습니다. 우리는 비겁하고 연약하여 그 고통을 피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의 고난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이 代苦는 따지고 보면 로마의 폭력이 두려워 그것에 항거하지 못한 우리의 잘못과 죄를 용서해주는 대속의 은총으로 이어집니다. 물론 속죄신앙이 지난 이천년 가까이 복음을 私事化시키고, 탈역사화 시킨 것이 사실입니다만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의한 뜨거운 신앙이,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 죄인으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로 일어살 수 있게 했다는 깨달음과 기쁨으로 이어졌습니다. 바로 이 같은 깨달음과 결단으로, 더 용기 있게 더 신나게 하나님지배운동에 온 존재를 던질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예수의 일 세대 제자들은 거의 모두 로마학정 밑에서 순교 당했습니다. 심지어 거꾸로 십자가에 처형되는 고통을 감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 같은 엄청난 용기는 예수그리스도 사랑에 대한 감동에서 나온 것이고, 그 사랑을 대고와 대속의 이해 속에서 더 실감나게 느낄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지난 주 Amazing Grace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이것은 찬송가 가사를 작성한 존 뉴턴 목사로부터 영감을 받았던 한 젊은 영국 정치인의 노예제도 폐지운동에 관한 영화입니다. 그는 노예를 팔아 치부했던 죄를 용서받고 새 삶을 살았던 분의 신앙을 본받아 더욱 힘차게 그 어려운 노예폐지운동을 펼쳤던 얘기였습니다. 속죄의 은총을 강하게 느낄수록 노예해방의 새 역사를 더욱 용기 있게 펼쳤습니다. 이 영화는 부활체험과 속죄신앙으로 새로운 깨달음에 이른 예수 제자들이 그 가혹한 로마당국의 핍박 속에서도 갈릴리 운동을 더욱 힘차게 펼쳐나갔던 사실을 연상시켰습니다. 神人合同의 끝내기운동에서 부활신앙과 속죄신앙이 소중한 신앙자원이 됨을 우리도 느끼고 그것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살리신 그 은총에 보답한다는 확신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여유 있게 웃으며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해줍니다. 우아하게, 여유 있게 죽을 수 있는 용기, 그것이 있는 한, 세상의 그 어떤 악한 권력도 하나님나라운동을 중단시키거나 죽일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끝으로 빈 무덤과 현현의 의미를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서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결코 무덤 안에 갇혀 썩어버릴 수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를 폭력으로 죽인 로마제국의 권력이 정당할 뿐 아니라 그것이 계속 건재해야 하고 나아가 그것이 승리해야 한다면, 예수가 계속 무덤에 갇혀있어야 하고 거기서 썩어 없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기에 예수의 무덤은 반드시 비어 있어야 합니다. 또 비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그 어떤 국가와 체제의 폭력이 예수따르미들을 사망의 무덤 속에 가둬 썩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분의 묘소를 참배하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 묘소 앞에서 그 분의 숭고한 삶과 뜻을 기리고 따르려고 결단하는 바로 그 순간, 그 분의 존재는 되살아나 참배자의 존재 속에 들어오게 됩니다. 비록 그 분의 육신은 무덤 속에서 썩고 있지만, 그 분의 숭고한 존재와 그 삶과 그 뜻은 무덤에 갇힐 수 없습니다. 되살아나 참배자의 가슴 깊숙이 시리도록 스며들게 됩니다. 그 존재의 향기와 힘이 다시 살아 움직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무덤은 빈 무덤이 되는 것입니다. 무덤은 비워지면서 새로운 결단을 채워줍니다. 여기서 보다 밝고 맑은 새 역사가 채워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악인의 무덤은 어떠합니까? 악인의 무덤에는 찾아가지 않습니다만, 찾는다 하더라도 악인은 계속해서 그 무덤에 갇혀있기를 우리는 소망합니다. 영원히 그곳에 갇혀 있기를 바라기에 악인의 무덤은 결코 비어있어선 안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항상 비어있어야 하지요. 우리가 성지순례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빈 무덤에서 나와 우리를 격려하시는 분을 만나고 싶어 순례하는 것 아닙니까!
빈 무덤에서 나오시어 사람들에게 다시 그 영적 몸의 힘을 보여주신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응원이 우리 현실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결코 하나님 오른 편에 항상 편하게 앉아 계시지 않습니다. 교리의 그리스도는 항상 하나님 우편에 조용히 앉아 계시어 그 권위를 보여주시는 분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교리의 그리스도, 앉아 계시기만 하는 그리스도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부활승천 하셨지만, 오히려 항상 갈릴리로 달려가시는 사랑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억울하게 고통을 겪는 당신의 딸과 아들과 언제나 同苦하시는 同苦主를 저는 뜨겁게 믿습니다. 강도에게 폭행당해 죽어가는 인간에게 사마리아 사람처럼 다가가는 동고주, 사랑의 주님을 나는 믿습니다. 돌로 쳐 죽임을 당하기 직전, 스테반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는 벌떡 서 계시는 사랑의 주님이었고, 바로 그 동고주를 나는 믿습니다. 1980년 초여름 남산 정보부 지하 2층에서 고문당해 시커멓게 변한 얼굴로 초죽음이 된 L목사가 내가 찢어준 반쪽 성서를 받은 뒤 그의 얼굴이 조금씩 밝게 변화되는 모습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아, 부활의 그리스도가 저 형제에게 동고주로 나타나시는구나” 하고 속으로 외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2008년 오늘 이 시간에도 부활의 주님은 L목사와 같은 분들에게 사랑으로 응원하고 계심을 저는 확신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권세든, 그것이 네로의 폭력이든, 히틀러의 학살이든, 그것이 스탈린의 고문이든, 그 어떤 폭행도 하나님의 자유운동, 사랑운동, 평화운동, 정의운동을 중단시키고 죽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운동을 무덤에 묻어 가둘 수 없습니다. 그 운동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그것이 아름다운 완결점에 도달할 때까지 끊임없이 지속될 것입니다. 그 영광의 완결점을 향해 달렸던 믿음의 선배, 사도바울의 다음과 같은 고백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고후3:17-18)
바로 주님이 하시는 이 일에 우리가 동참할 때, 우리는 무덤을 힘차게 비우시고 나오신 응원자 주님을 닮아가는 그 분의 따르미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어둠의 역사, 절망과 증오의 역사를 끝장내고 사랑과 해방, 평화와 정의의 새 역사를 이 땅에 채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무덤은 비워지고 역사는 새롭게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의미입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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