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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마태복음 김기동............... 조회 수 2087 추천 수 0 2009.04.30 17: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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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6:9~13 
설교자 : 김기동 자매 
참고 : 2008.04.13새길교회 주일설교 

 성서 안에는 먹는 이야기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인간을 창조하시고 이젠 잘 살아라하는 명령과 함께 주신 축복의 첫 마디는 ‘이 모든 것을 너희의 먹거리로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해서는 안 되는 첫 금지명령도 또한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

  아마도 이 명령이 잘 지켜졌다면, 그래서 첫 인간 남녀가 그것을 먹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잘 살았다고 한다면, 이 명령조차도 어쩌면 아무 의미가 없었을 겁니다. 아니 어쩜 그러한 명령이 주어졌다는 것조차 잊혀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 명령이 사단이 되었습니다. 명령을 받은 자는 그 명령을 마음에 잘 새겨야 합니다.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짝과 동산에서 다니면서 때론 달콤하고 때론 쌉싸한 열매들을 따먹으면서 선악과를 보았을 겁니다. 사실 뱀의 꾀임을 받은 후에 여자가 말하는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탐스러운 열매’라고 하는 느낌은 어쩌면 이미 이전에 그 선악과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었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면서 먹으면 죽을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경고 속에 그것을 먹고 싶다는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먹고 싶다는 유혹보다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더 컸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도 사실 아이러니입니다.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했는데, ‘죽음’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두려워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어쩌면 '먹지 말라, 먹으면 죽는다‘라는 하나님의 경고는 실제로 없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저 알지 못한 채, 눈에 띄지 않은 채, 동산 한 가운데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을 먹는 날에 죽는다‘라는 하나님의 경고도 사실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하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먹었기‘에 의미를 갖는 것 같습니다. 죽음도 없고, 다툼, 경쟁도 없이, 서로 함께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는 에덴에서의 평화의 삶은 그것으로 끝장났고, 집을 떠나면 죽음의 위협에 맞닥뜨리게 되는 위험한 세상으로 그들은 내쫒겼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역사는 이렇게 ’먹는 행위‘에서 비롯하였고, 그 ’먹는 행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먹지 않으면 사람은 살 수 없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어떤 생물도 외부로부터의 공급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식물들은 흙에든, 물에든 뿌리를 내리고, 물과 영양분을 공급받고, 공기중의 이산화탄소, 그리고 빛을 공급받아 합성작용을 일으키며 성장하며 살아갑니다. 동물이나 사람은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인간만큼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동물도 없습니다. 그리고  먹고 먹히는 관계, 먹이사슬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인간이 먹힌다는 것에 의문을 품을런지 모르지만, 인간은 어차피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서 ‘옥토’가 되게 하는 거름이 될 수 있다는 점, 그래서 다시 식물의 먹이가 되고, 그 식물은 동물과 인간의 먹이가 되고...... ‘먹는다는 것’은 어떤 모양이든 ‘관계’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생태적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먹음’에서 우리는 사랑의 관계를 배우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첫 욕구는 먹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기는 스스로 먹을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만일 아기에게 누군가가 먹을 것을 주지 않는다면 그 아기는 죽고 말 것입니다. 엄마의 보드랍고 따듯한 젖가슴에서 아기는 그 욕구를 충족하는 동시에 아주 평안한 잠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기에게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배고픔을 없애는 행위만인 것이 아니라, 돌봄, 따스함, 평안, 충만, 웃음, 등등 관계의 긍정성과 적극성을 몸으로 체득하는 중요한 경험이 됩니다.

  혼자 먹는다는 것은 참 재미없습니다. 혼자 먹는 이유는 단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함께 먹을 사람이 없어서이거나 먹을 것을 나누기 싫어서 이거나입니다. 홀로 있기 때문이거나,  욕심꾸러기, 욕심쟁이 더 나아가 탐욕스러움 때문이거나 입니다. 먹을 것을 독차지하려는 탐욕의 경계는 어디일까요? 어디까지가 용납할 수 있는 정도이고, 어디부터 탐욕스럽다고 욕할 정도일까요? 그건 상대적인 것 같습니다. 그 양이야 어떻든 ‘내 몫’을 넘어서 남의 몫까지 차지하려 할 때 탐욕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생명을 유지하는 중요한 행위인 ‘먹는 것’에서의 ‘몫’은 어느 정도라고 할 수 있을까요?

   6 : 1 ~ 18에서 예수님이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시는 장면은 ‘위선자’와 같이 하지 말라는 몇 가지 명령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의로운 일을 하고 자선을 베푸는 것, 기도하는 것, 금식하는 것, 예수님은 그 행위 자체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남에게 보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보이려 했다’면 그것은 일상적 삶의 경계를 넘어선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히려 극히 일상적인 것은 보여주기를 꺼려하지요. 누구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려 한다는 것은 반대로 보여주지 않는 것,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 보여줄 필요가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는 좋은 일을 하고, 기도하고, 금식하는 이 모든 것들이 신앙인으로서의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특별한’ 행위가 된다면 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위선일 뿐이라는 것을 간파한 것입니다.

   이에 반해 예수가 가르쳐 주신 기도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우리의 영적인 삶이 결코 일상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특히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라는 간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고백적 간구를 전하는 주기도의 전반부가 끝나고 우리의 삶에 영역에서의 구체적인 간구를 이끄는 첫 기도입니다. 왜 예수는 이렇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를 먼저 하게 했을까요?

   예수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그 청중을 고려해 본다면, 이것은 정말 그 말 그대로 하루의 양식을 달라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 예수를 따라온 자들, 예수의 말에 귀 기울이는 무리들은 먹을 걱정 없이 좋은 말씀 들으러 다니는 여유 있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먼 곳으로부터 오면서도 먹거리를 준비해서 올 형편이 안 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 많은 무리들에게 있는 먹을 것이라고는 어느 작은 아이의 도시락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일 정도였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가난한 변방의 땅, 그들은 로마세와 성전세의 이중적 착취에서 고통당하는 기층민들이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를 먹는 사람들에게 그렇기에 이 기도는 가장 절실하고 긴박한 것이었을 겁니다. 간절함이 묻어 있는 기도였을 겁니다.

   그렇다면 일용할 양식을 걱정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이 기도가 필요 없는 것일까요? 매주, 아니 매일 기독교인이 모이는 곳마다 외우는 주기도에서 이 간구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그럼 어떤 이들에게는 의미 있고, 어떤 이들에게는 별 중요치 않은 그런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는 과연 그 당시, 가난한 민중들만을 위해 이 기도의 말씀을 가르쳐 주셨을까요? 우리는 이 기도를 드리면서 무엇을 간구하십니까?

   첫째, 하나님 앞에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겸손과 감사하는 삶의 출발입니다. 일용할 양식 그것은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만큼의 빵을 말합니다. 그 빵이 없으면 굶주리고, 결국 오늘 이 시간에서의 생명과 존재의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곧 지금 내가 여기 살아 있음, 나의 생명과 존재의 근원은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양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이 곧 나의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것이지요. 즉 당신이 주시지 않으면,  더 나아가 당신이 아니면, 나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고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은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고백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당연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감사의 제목이 됩니다. 겸손한 마음과 감사하는 삶이 그 고백의 진정성을 증거 합니다. 주기도를 매일 같이 외우면서 겸손할 줄 모르는 사람,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그냥 입으로만 외우는 사람입니다. 신앙과 삶이 입에서 구별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책망하신 바로 그 위선이지요.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기도 가운데 겸손과 감사의 삶을 회복하는 우리가 되길 기원합니다.

   둘째, 왜 풍성한 양식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는 것일까요? 일용할 양식은 지금 현재의 생명과 연관된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일용할 양식이 무엇인지 몸으로 경험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매일 매일 먹거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만나’가 실제로 무엇인지는 잘 모릅니다. 어떤 이들은 광야에 자라는 나무의 열매라고 말하지만, ‘이게 도대체 무엇이냐’라는 그 이름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음을 내포합니다. 만나는 걷으러 나갈 수 없는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을 제외하곤 하루를 넘겨 저장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만나는 곧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중요한 경험이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간구하는데, 주목할 것은 기도의 주체가 개인이 아니라,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 이것은 곧 나 혼자만이 아니라, 함께 하는 자들과 더불어 일용할 양식을 누리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실 때 누구에게나 똑같이 하루의 분량, 몫만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이 새롭게 드러납니다. 지난 번 한완상 선생님의 설교 중에 말씀 하신 신인합동의 역사(collaborative)가 다시 생각나는 부분입니다. 분명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돌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결코 하나님은 독단적으로 홀로 활동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세상을 다스리라’는 창조 때의 명령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그의 창조 사역의 동역자로 초대하였고,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자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로 자신의 구원 사역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용할 양식을 간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복수형에 주목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은 나의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것, 함께 하는 모든 이들이 누려야 하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함께 누린다는 것은 곧 나눔이며 관계성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조금 더 많은 가진 자는 일용할 양식을 누리게 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역자로 부름 받았음에 응답해야 합니다. 이 기도는 그런 의미에서 나의 것을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것을 간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적어도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 고통당하는 자들은 없이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겠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이 없습니다. 나눈다고 하지만,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살겠다고 하지만, 어디까지요? 예수를 따라간다고 하지만, 어디까지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라는 기도는 나는 풍족하게, 너는 일용할 양식 정도로의 구별이 있을 수 없음을 의미하는데, 내 몫과 네 몫을 똑같이, 균등하게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행복이라기보다는 고통이 아닐까 싶습니다. 할 말이 많을 것 같습니다. 나는 능력이 더 있고, 더 열심히 일했는데, 더 많이 갖는 것이 오히려 공평한 것이 아닌가라고 항변하고 싶을 것 같습니다. 마치 아침부터 와서 일한 일군이 늦게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자와 똑같은 임금을 주었다고 항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이 부분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생명은 모두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그 생명을 누릴 똑같은 권리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내 것을 주장하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이웃의 부족함, 결손, 그리고 아픔을 보고, 외면하지 않는 자라는 것입니다.

  영성을 회복하자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영성(spirituality)은 일상사와 구별된 종교적(spiritualized) 행위 안에 갇힐 때 생명력을 상실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이 기도는 먹는 일상이 곧 우리의 영적인 삶의 장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눔을 통해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인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기도가 입술의 기도가 아니라, 우리의 진정한 고백이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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