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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1:1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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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재철 목사 |
참고 : | 주님의교회 주일 설교 1998년/4월 19일 |
새벽이 동터오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은 주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친히 준비해 주신 조반을 소리 없이 나누었습니다. 누구 한 사람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들리는 것이라곤 바닷가에서 부서지는 파도소리 그리고 바람소리뿐이었습니다. 그 정적 속에서 요한복음 마지막장 마지막 단락의 막이 오르고있습니다. 만약 우리 자신들이라면 이 최후의 극적인 순간에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지, 우리 각자 이 상황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십시다.
내가 지난 3년 동안 밤잠을 설치면서까지 먹여 주고 입혀 주었으며, 나의 마지막 진액이 다하기까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전수해 주었던 나의 수하들이 나를 배신했습니다. 그것도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배신했습니다. 공개석상에서 나를 욕하고 저주하면서 나를 배신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배신이 내게 안겨 준 것은 처참하면서도 고독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살아난 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배신자를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배신자들이 내 앞에 앉아 있습니다. 누구 한 사람 감히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내 입에서 과연 무슨 말이 나올지 긴장하며 귀를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라면, 나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감정이 앞서는 사람이라면 나중에 후회할 망정 일단 배신자를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부터 휘두르고 볼 것입니다. 감정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그들에게 얼마나 잘해 주었는지 상기시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왜 나를 배신했는지 그 이유를 따지려 들것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면 지나간 과거는 모두 불문에 붙인 채 다시는 인간답잖게 배신자가 되지 말 것을 점잖게 그러나 따끔하게 훈계할 것입니다. 배신자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모르되 일단 찾아간 이상, 대게의 경우 우리는 이 세 가지 대응방법 중 한가지를 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택하신 방법은 우리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주님께서는 배신자들에게 보복을 가하시거나 배신의 원인을 규명하시려거나 훈계하시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대표 격인 베드로에게 단지 이렇게 물으셨을 뿐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먹으로 때린다고 해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유를 따지거나 훈계를 한다고 해서 다시 배신치 않는 것도 아닙니다. 한번 배신한 사람은 기회만 닿으면 몇 번이고 다시 배신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은 등을 돌리지 않습니다. 사랑은 배신하지 않습니다. 사랑엔 오직 따름과 좇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님을 배신했던 제자들을 향하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대상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춘향이가 변학도의 회유와 협박 그리고 모진 고문 속에서도 끝까지 정절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이 세상에서 이몽룡보다 더 귀한 사람이 적어도 그녀에게는 있을 수 없었던 까닭입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위하여 심청이가 인당수 물 속으로 꽃다운 자신의 청춘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생명보다는 아버지의 눈뜸을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조국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초개같이 버릴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그에게 있어서 사랑하는 조국의 독립보다 더 귀한 일은 없었음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면서 까지 이 땅에 오시어 인간의 구원자 되셨던 것은, 하늘의 보좌를 지키는 것보다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그분에게는 더 귀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배신의 전과자를 향해 주님께서는 본문 15절을 통하여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지금 주님 앞에 사람이라고는 11명의 제자들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이란 베드로를 제외한 10명의 나머지 제자들을 뜻하게 됩니다. 즉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다른 10명의 제자들보다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람들보다'란 단어 우측 상단에 `2'란 숫자가 붙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 아래쪽 주 난을 보면 2번에 `혹 것들보다'라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어떤 성경 사본에는 `이 사람들보다'가 `이것들보다'로 기록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말씀하셨더라도 거기에는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체포 당하셨을 때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베드로는 주님을 저주하기까지 하여 결과적으로 제자들 중 가장 큰 배신자가 되었었기에, 이제는 역으로 누구보다 더 앞장서서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기를 촉구하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더욱 의미심장한 말씀이 됩니다. 여기에서 사람이 아니라 사물을 가리키는 `이것들'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제자들의 삶의 터전인 갈릴리 바다를 의미합니다. 지금 제자들 앞에 놓여 있는, 방금 잡은 생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모든 것으로 여기며 살아 온 세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것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지를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은 바로 이런 말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밤이 맞도록 헛그물질만 하던 갈릴리를 가리키며 말씀하셨습니다. ― `네가 이 공허한 갈릴리보다 나를 더 귀하게 여기고 있느냐?'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주님과의 약속을 망각하면서까지 소유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었던 물고기를 가리키면서 말씀하셨습니다. ― `이제 곧 썩어질 이 소유보다 나를 더 귀하게 여기느냐?'
주님께서는 팔을 벌려 이 세상을 가리키시며 물으셨습니다. ― `네가 공동묘지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 덧없는 세상보다 나를 더 귀하게 여기느냐?'
주님께서는 이 아침 우리 앞에 서시어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기며 불끈 움켜쥐고 있는 그것을 가리키시면서 묻고 계십니다. ―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귀하게 여기느냐?' 주님의 이 질문에 응답하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참된 신앙은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과연 무엇이라 대답할 수 있습니까?
베드로는 마침내 침묵을 깨트리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15b)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였다'고 과거형으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지금 주를 사랑하고 있다'고 현재형으로 대답하였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베드로는 주님보다 허망한 갈릴리 바다를 더 귀하게 여겼었기 때문입니다. 곧 썩어질 생선에, 덧없는 세상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도 주님도 망각한 채 밤이 맞도록 헛그물질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내가 이제는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을 더 귀하게 여기고 있노라는 고백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이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베드로 앞에 계신 주님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셨기 때문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부활의 주님 앞에 다시 섰을 때 그가 밤이 맞도록 추구해 왔던, 갈릴리로 통칭되는 이 세상이 얼마나 공허하고 덧없는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던 것입니다. 주님 없는 세상을 목적으로 삼는 삶이 얼마나 어리석은 삶인지를 통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을 향하여 `내가 지금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내가 이제는 주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노라'고 고백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고백이 얼마나 진실 된 고백이었던지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단언할 정도였습니다. 자신이 이제 주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있음을 주님께서 이미 아신다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지, 이 세상에서 주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있는지의 여부는, 이 세상 사람은 아무도 모를지라도 그 당사자와 주님만은 정확하게 알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정녕 주님만을 귀하게 여기며 사는지 이 세상 것을 더 귀하게 여기며 사는지 나 자신은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아는 것을 왜 내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께서 모르시겠습니까? 숙달된 나의 위선으로 세상 사람은 속일 수 있을 지 언정 나 자신과 주님만은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베드로처럼 진정으로 `내가 주님을 가장 귀하게 여김을 주님께서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고백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베드로가 이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가 위대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배신자였던 베드로를 친히 찾아와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말입니다. 베드로가 한 것이라고는 단지 부활하신 주님 안에 있는 그 영원한 생명과 사랑을 확인한 것뿐이었습니다. 2천년전 베드로를 찾아 갈릴리로 향하셨던 그 부활의 주님께서 지금은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를 찾아오시어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그 분의 영원한 생명과 사랑을 확인할 차례입니다. 보십시오. 그 분의 생명, 그분의 사랑이 아니셨던들 어찌 우리 같은 죄인이, 나 같은 진리의 배신자가 감히 이 거룩한 자리에 거룩한 성도의 자격으로 나와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영원한 생명 속에, 그 사랑의 법칙 속에 거하는 자가 되십시오. 그 순간부터 여러분은 그 생명과 사랑의 영원한 가치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 가치를 알므로 세상을 더 귀하게 여기던 여러분의 어리석은 삶은 비로소 종식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과 사랑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삶보다 더 귀한 삶은 있을수 없기에, 여러분은 스스럼없이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한번만 물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16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것으로 그치신 것이 아닙니다. 17절 역시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왜 주님께서는 똑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되풀이하고 계십니까? 베드로의 대답이 미덥지 못했던 탓입니까? 베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셨던 까닭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말입니다. 그것도 불가항력적인 무력이나 강압의 위협 앞에서가 아니라 대제사장 집의 비천한 여종 앞에서 지레 겁을 먹고서 말입니다. 그 직후 베드로는 밖으로 뛰쳐나가 땅을 치며 통곡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통곡한들 한심한 자신에 대한 자괴심이 가셔졌겠습니까? 주님의 면전에서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의 배신은 베드로의 가슴속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새겨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되풀이 해 물으시사, 베드로로 하여금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세 번 반복하여 주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할 기회를 주시므로, 베드로의 가슴에 새겨진 상처를 치유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한심한 자신의 허물을 속죄할 수 있는 기회를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찾아오시어 베풀어주실 때 베드로의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주님께서 이날 아침 그 귀한 기회를 베드로에게 허락치 않으셨던들 베드로의 심령에 새겨졌던 상처는 치유되지 못했을 것이고, 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영적 억압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이후 베드로가 위대한 사도로서 그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날 아침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주님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는 기회를 베풀어 주셨던 결과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모든 것이 실은 기회로 설명됨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신 것이 구원입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또 한번의 기회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용서가 무엇입니까? 또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다시 기회를 허락하는 것입니다. 구제가 무엇입니까? 삶의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까? 왜 주님께서 죽음을 깨트리시고 영원히 부활하셨습니까? 인간답잖은 우리에게 참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에 의해 쓰임 받는 기회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어떤 의미에서건 기회를 주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후 베드로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새 삶의 기회를 주는 일에 자신의 전생애를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남에게 기회를 줄줄 모르는 삶, 오히려 남의 귀한 기회를 박탈하는 삶은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인의 삶일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기회를 주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삶일 수 없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나를 배신한 사람에게까지도 기회를 베푸는 자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생명이요 사랑이신 주님을 그 중심에 모신 자요, 주님께서 주님을 배신했던 나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시고 내 중심에 좌정하고 계신 것은, 나를 배신한 그 사람에게 나를 통하여 나에게 주셨던 것과 똑같은 기회를 주시기 위함임을 알고 있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인 까닭입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배신자였던 내게 새 삶의 기회를 주신 주님을 힘입어 그 분의 생명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가슴속에 배신의 못을 박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지금 여러분이 버리려고 작정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미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지워버린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늘 아침 주님께서는 바로 그 사람에 기회를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니 여러분을 통하여 그 사람에게 주님께서 친히 기회를 주기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오늘 하루가 주어졌다는 것은 또 하루의 기회가 더 주어졌음을 의미합니다. 무엇을 위한 또 하루의 기회이겠습니까?
내 마음속에서 버려 버리기로 작정한 바로 그 사람에게 기회를 주기 위한 또 한번의 기회인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철저하게 고독할수 있으나, 그러나 그 고독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배신한자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고독하면 할수록, 배신자였던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도록 고독하셨던 주님께서 더 더욱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실천할 때 우리는 비로소 경제논리에서 자유 하는, 사랑의 논리로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 ― 이 삭막한 세상을 밝히는 따스한 등불이 될 수 있습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경제논리가 아닌 오직 사랑의 논리로 당신 자신을 태우므로 배신자였던 우리에게 생명의 빛과 기회를 주신 주님께서, 오늘 아침 우리 심령의 갈릴리에서 이렇게 묻고 계시지 않습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우리는 모두 하루살이와 다를 바 없는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가치를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생명의 가치에 무지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게도 주님께 등을 돌린 채, 공허한 갈릴리를 귀하게 여기느라 정작 귀하신 주님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찾아와 주셨습니다. 한번이 아니라 연거퍼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시 새로운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도 구원도 자비도 용서도 모두 이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었음을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이 기회 주심은 경제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사랑의 논리에 의해서임을 잊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이 값진 기회를 다시는 의미 없이 상실해 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지금 외면하고픈 사람―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기회를 주시기를 원하는 사람―바로 그 사람에게 새로운 기회를 베푸는 주님의 도구가 기꺼이 되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기회의 의미를 극대화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또 하루의 기회를 주신 오늘의 가치를 바로 세우기를 원합니다. 그 사람에게 기회를 제공하므로 배신자였던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불가능하나 우리 속에 계신 주님의 생명과 사랑으로는 가능하오매,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간구 드립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그와 같은 삶을 통하여 우리 주위가 살만한 하나님의 나라로 일구어져가게 하시고, 우리 모두 주님 앞에서 베드로처럼 고백하게 해 주십시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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