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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1:1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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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재철 목사 |
참고 : | 1998. 5. 10./ 주님의교회 주일 낮 예배 |
우리가 어떤 사람을 부를 때, 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호칭이 언제나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 호칭은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이를테면 우리 자녀들을 부를 때 이름을 사용할수도있고, `애야'라고 말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놈'하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호칭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실은 우리의 인격과 성품, 나아가 생각과 철학까지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의 베드로에 대한 호칭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을 처음 만난 주님께서 게바라는 새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게바란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아람어로 `반석'이란 뜻이었습니다. 아람어란 앗수르 제국의 언어로써, 앗수르의 지배를 오래도록 받았던 이스라엘은 그때까지 아람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여태껏 중국의 한자를 병용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반석이란 의미의 새 이름을 주셨던 것은, 시몬이 반석과도 같은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반석이란 뜻을 지닌 헬라어가 `petros'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베드로라고 더 잘 알려진 이 이름은 본래 시몬의 본명이 아니라, 주님께서 시몬에게 지어주신 게바란 이름의 헬라식 표기인 것입니다.
평소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시몬이란 유대식 이름의 호칭을 가장 즐겨 사용하셨습니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있다.(눅7:40)' `시몬아 자느냐? 네가 잠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막14:37)' ―주님께서 평소에 베드로를 베드로가 가장 친근감을 느낄 유대식 이름 시몬으로 불러주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베드로를 단순한 제자가 아닌 때로는 자식으로, 때로는 친구로, 때로는 형제로 여기고 계셨음을 의미합니다.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최초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을 밝히셨던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며 주님의 말을 가로막고 나서자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사단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마16:23)'―그렇다고 이 이후로 주님께서 베드로를 계속 사단으로 취급하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때 베드로를 사단이라 호칭하시므로,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생각을 더 중시하는 것은 결국엔 사단일 수밖에 없음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주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가지신 직후였습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예수님께서 잡혀가시게 될 최후의 순간이었습니다. 그 절대 절명의 순간에 제자들은 서로 누가 더 높은지 또다시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침통하게 보시던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극히 이례적으로 베드로라고 헬라식으로 부르셨습니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눅22:34)'- 베드로란 이름의 뜻은 반석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전혀 반석 같잖게 행동하는 그 한심한 순간에 오히려 반석이라 부르시므로, 어떤 경우에도 반석이어야만 할 베드로의 정체성을 역설적으로 강조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대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매우 특이한 호칭을 사용하고 계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 15절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15a)"
평소 베드로를 시몬이라 부르시던 주님께서 이번에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 부르신 것입니다. 본래 족보를 중시하던 유대인들은 제3자를 소개하거나 혹은 자기 자신을 소개할 때 누구의 자식인지를 밝히는 관습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저 사람은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 혹은 `나는 누구의 아들 누구입니다'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나 2인칭 상대에 대한 호격으로 이와 같은 호칭이 사용되는 예는 흔치 않았습니다. 굳이 사용한다면 상대에 대하여 격식을 갖추어 예의를 표할 때였습니다. 말하자면 상대를 존중히 여기는 표현인 셈이었습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예의를 갖추어 `요한의 아들 시몬아'하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물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와 같은 호칭을 사용하신 것이 이번이 처음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호칭을 예전에 딱 한번 사용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도대체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을 때에 베드로가 주님을 향해 거침없이 고백하였습니다.―`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주님을 향한 인간의 고백 중에서 가장 위대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극찬하시면서, 베드로를 `바요나 시몬아'라고 부르셨습니다. 바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와 같은 말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주님께서 베드로를 칭찬하실 때에도 베드로에게 최고의 예의를 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 한번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런대 오늘 본문에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을 한 번만 부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16절에서도 그리고 17절에서도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베드로를 향해 같은 자리에서 연거푸 세 번씩이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는 호칭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모든 호칭에 의미가 있었음을 상기할 때 여기에는 필히 더 깊은 의미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의미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일깨워 주시기 위하여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는 호칭을 세 번씩이나 되풀이하셨겠습니까?
우리는 본문의 상황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주님깨서는 새벽이 동트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을 물으심으로, 베드로로 하여금 주님에 대한 사랑을 세 번 고백하게 해주셨습니다. 주님 잡히시던 밤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속죄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말해 베드로가 주님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는 기회를 부여키 위함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무조건적인 아가페의 사랑을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두 번씩이나 조건적인 필리아의 사랑으로 응답하였습니다.그러나 주님께서는 세 번째 질문을 통하여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가 주심으로, 주님을 조건에 따라 제한적으로밖에 사랑하지 못한 베드로를 온전히 품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베드로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시고 필리아의 수준에 있는 베드로를 온전히 품어 주시므로, 주님을 배신했던 베드로의 모든 죄와 허물과 잘못을 깨끗이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에 대한 주님 사랑의 실체는 바로 용서였던 것입니다. 이 이후 만약 베드로가 본문 속의 갈릴리를 일평생 잊지 못했다면, 새벽이 동터 오는 이 갈릴리야말로 베드로 자신을 향한 주님의 위대한 용서의 선포식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용서를 선포하시는 이 극적인 순간에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예의를 갖추어 `요한의 아들 시몬아'하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제 우리는 두 가지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참된 사랑은 참된 용서요, 참된 용서는 반드시 상대에 대한 예의로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 참된 용서는 상대에 대한 존중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용서한다면 그에게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아서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귀하고 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의 잘못을 용서할 때 큰 은혜를 베푸는 시혜자가 됩니다. 시혜자가 된다는 것은 높은 곳에서 용서의 대상을 내려다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용서를 베푼 내가 언제나 그보다 우월하다는 교만한 마음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용서를 하고서도 그 대상을 존중하거나 그에게 예의를 표할수가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용서가 상대를 변화 시키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상대를 없수이 여기는 교만한 마음으로 행하는 용서는 용서가 아니라 자기 과시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자기 과시적 용서는 조건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철회되거나 상대에 대한 굴종을 강요하기에, 그곳에는 참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십시오. 진리의 배신자였던 우리를 구원하시고 더러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 누구도 아닌 당신의 독생자를 친히 우리에게 보내어 주셨다는 것 자체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예의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죄값을 치루어 주시기 위해 성자 하나님께서 친히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것 자체가 우리를 향한 더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예의 아닙니까?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하찮은 우리와 날마다 함께 해주신다는 것 자체가 우리를 지극히 존중히 여기고 계심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벌레만도 못한 우리에게 왜 이처럼 하나님의 예의를 다하시면서 우리를 존중히 여겨 주십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은 용서며, 용서는 예의이고, 예의는 존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는 겸손한 용서이고, 그 겸손한 용서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담겨지고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깨닫는다면 우리는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참된 용서의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내가 예의와 존중으로 귀결되는 참된 용서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곧 내가 하나님 앞에서 참된 사랑의 사람으로 바로 서는 것을 의미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시는 주님 호칭 속에서 우리가 두 번째로 발견할 수 있는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즉 주님의 용서를 믿는 자란 먼저 자기가 자신을 용서하는 자요, 용서 받은 자신을 스스로 존중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말하기는 하면서도 스스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죄를 회개하긴 하지만 죄의식에서부터 벗어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난 안된 다고, 어쩔 수 없다고 자포자기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자신을 용서 할 수 없는 자는 자신을 존중할 수 없고, 자신을 존중할 수 없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설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믿지 못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본래 그리스도인들 을 잡아죽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고백대로 그는 죄인 중의 괴수였습니다. 그런대 그가 어느 날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용서하심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하루아침에 성인 군자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시각각 엄습하는 죄의 유혹 앞에서 아직 정죄감에 사로잡혀 있던 그는 수없이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탄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2∼24)"
바울의 이 실패의 탄식은 자신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정죄감의 노예 되었을 때 바울은 도저히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보다 과거의 죄가 더 크게 보였고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신의 죄성이 더 중하게 여겨 셨던 까닭이 였습니다. 자신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때 자신은 도저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였고, 당연한 결과로 그는 자신을 형편없는 자로 자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대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자포자기하던 사도바울이 마침내 자신을 향해 이렇게 선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여기에서 너란 두말 할것도없이 바울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바로 바울의 자기 자신에 대한 용서의 선포였습니다. 그 용서의 근거는 재론할 것도 없이 주님의 용서였습니다. 주님께서 먹물보다 더 더럽던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셨음을 믿지못할 때 그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채 자포자기하며 탄식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용서를 확신할 때 바울은 주저 없이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용서해 주셨거늘 자기가 자신을 용서치 못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니 주님께서 용서해 주셨기에 자기 또한 자기를 용서함이 마땅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저는 성경에서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있는 힘을 다해 외치는 바울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감격적인 외침입니까? 그것은 타인을 향한 외침이기 이전에 바울 자신을 향한 외침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이 주님의 용서하심을 믿으므로 자기가 자신을 용서하고 자신도 주님 안에서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 됨을 믿고 인정했을 때, 그는 평생 자기 자신에 대하여 예의를 다하며 자신을 존중하는 삶으로 일관했으니 곧 주님께 예의를 다하고 주님을 존중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 예의와 존중을 다 바치는 것이야말로 주님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된 자기 자신에 대한 최고의 예의요,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최상의 행위였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면전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뛰어나가 땅을 치고 통곡했지만 그러나 자신에 대한 정죄 감으로부터 자유할 수는 없었습니다. 간밤만 하더라도 주님을 까마득하게 잊고 허망한 헛그물질만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다시 찾아 오신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베드로의 자신에 대한 절망감이 얼마나 커 겠습니까? 난 안된 다고, 난 어쩔 수 없다고 자포자기하며 정죄 감에 몸서리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배신자였던 베드로를 용서하시면서 예의를 다해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불러주셨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불러주신 것입니다. 내가 너를 이만큼 존중하니 내가 존중하는 너를 너 자신도 용서하라는 의미였습니다.
내가 너에게 예의를 다할 정도로 너를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믿으라는 요청이었습니다. 내가 너를 이토록 사랑하는 만큼 내가 사랑하는 너 자신에 대해 너 스스로 예의와 존중을 다하라는 촉구였습니다. 이 이후 우리는 사도행전 속에서 전혀 다른 베드로를 만나게 됩니다. 사랑과 용서의 베드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예의와 존중을 다하는 베드로- 곧 거듭난 자기자신에 대해 예의와 존중을 다하는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베드로로 부터 우리는 참으로 귀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자신을 먼저 용서할 줄 아는 사람만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 된 자신에게 예의와 존중을 다 할줄 아는 자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예의를 다하며 존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용서하고 자신에게 예의를 다 할 줄 아는 사람만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진정으로 믿는 믿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사43:25)"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여호와께서)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103:12)"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10:15)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하신 것을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는 불신앙의 어리석음을 더 이상 범치 마십시오. 죄에 민감 하라는 말은 지금 죄와 맛서 싸우라는 것이지, 이미 회개한 것을 다시 기억하고 그로 인한 죄의식의 노예가 되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믿지 못함의 증거일 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가룟유다가 되지 마십시오. 가룟유다는 두가지의 큰 잘못을 범했습니다. 먼저는 우리가 잘 아는바와 같이 주님을 판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유익에 따라 늘 주님을 팔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룟유다의 더 큰 잘못은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가룟유다는 자살로 그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정죄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판 뒤에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에게서 받았던 은30냥을 되돌려 주었습니다. 그의 선한 양심이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채 정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만약 그가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을 믿음으로 자신을 정죄치 않았던들 그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그 누가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더 이상 죄의식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더 이상 자포자기 하지 마십시오. 이미 회개한 죄로 인해 더 이상 자신을 정죄치 마십시오. 하나님의 용서를 믿으므로 자신을 용서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내어주실 정도로 존중해주신 자신을 존중하십시오.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믿으십시오. 새로운 피조물답게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갈 수 있음을 확신하십시오.하나님과 사람을 향해 예의를 다하므로 거듭난 자신에 대해 예의를 갖추십시오. 날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주님을 은혜 속에서 우리 자신을 용서하며 존중하는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우리 역시 진리의 사람으로 굳건하게 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면전에서 배신한 베드로도 되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여 죽이던 바울도 되었는데, 남의 아내를 빼앗고 그 남편을 죽여버리기까지 했던 다윗도 되었는데 어찌 우린들 가능치 않겠습니까? 나로서는 불가능하지만 내게 하나님으로서의 예의를 다하시며 나를 존중해 주시는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므로 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우리의 복음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께서 용서해 주신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우를 범했습니다. 주님께서 존중해 주시는 나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자포자기하는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다면서도 우리의 삶은 늘 무기력했고, 무의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신자였던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 불러 주시고 용서해주신 주님께서, 하나님으로서의 예의를 다해 오늘 아침 우리를 다시 불러 주시고 품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용서케 하소서. 우리 자신을 용서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용서하신 주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시작됨을 잊지않게 하옵소서. 주님을 존중히 여기므로 새로운 피조물 된 나 자신을 존중히 여기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께 예의를 다하므로 거듭난 나 자신에 대한 예의를 갖추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사랑은 용서요, 용서란 예의요, 예의란 존중임이 이 세상에 보여지게 하옵소서. 그와 같은 삶을 통하여 우리 모두 사도행전 속의 베드로와 사도바울 되는 기쁨을 맛보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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