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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린양, 내 양, 내

요한복음 이재철............... 조회 수 2197 추천 수 0 2009.05.05 20:25:58
.........
성경본문 : 요21:15∼17 
설교자 : 이재철 목사 
참고 : 1998. 5. 17./ 주님의교회 / 주일 낮 예배 

작은 도시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젊은 목회자로부터 상담 전화를 받았습니다.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교회를 섬기는 남자 집사님이 있습니다. 그의 헌신적인 신앙 생활을 목사님은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몇 해 전 목사님의 부임당시, 누군가가 그를 가리켜 `천사를 가장한 악마'라 말했을 때에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숨겨지겠습니까? 그 남자 집사님이 교회 밖에서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인지를 목사님이 뒤늦게 알게 된 것입니다. 그로부터 오래 토록 육체적으로 유린 당해왔던 한 여인이 자살을 결심하고 죽기 전, 목사님을 찾아와 하소연하므로 모든 것이 밝혀지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집사님으로부터 피해 당한 여인은 그 한 명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사업장에 있는 여인들을 야비한 수법으로 벌써 몇 명이나 짓밟았음이 밝혀진 것입니다. 처음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만 모든 것이 사실로 확인되자 목사님의 충격은 참으로 컸습니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정작 그 남자 집사님은 타인이 자기의 비행을 알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이 유린한 여인들에게, 만약 사실을 누구에게든 누설하기만 하면 반드시 죽여 버리겠노라고 단단히 협박해 둔 터라 누구도 알 리가 없으리라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이면 어김없이 교회에 나와 태연하게 봉사를 다하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교회를 섬기는 집사님이고 보면 젊은 목회자가 그로 인해 인간에 대해 느낄 배신감과 절망감, 그리고 목회자로서 자기 자신에 대해 통감할 무력감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처참한 상황 속에서 저에게 상담을 청해 온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 까지는 소수에 불과하지만 머지않아 백일하에 공개될 것이고, 그때에는 작은 도시 전체가 떠들썩함은 물론 교회가 큰 시험에 빠지게 될 터인데 자신이 목회자로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 나름대로 생각되는 방도를 밝힌 뒤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었습니다. `목사님 보기에 그처럼 위선적인 집사님은 목사님 교회의 교인이요 목사님은 그 교회의 목회자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다시 말해 그 분이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이 땅의 수없이 많은 교회 중에서 하필 목사님이 목회 하는 교회의 교인이 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집사님을 목사님에게 맡기셨음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사님을 통해 그 분을 바로 세우시기를 원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분에 관한 한 하나님께서는 목사님을 믿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목사님은 변함없이 목회자로서 그 분을 대할 수 있고, 사람을 함부로 포기하거나 버리는 실수를 범치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목회자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 이란 자신의 삶 속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을, 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믿으시고 자신에게 맡겨주시거나 보내주신 사람이라 인식하며 살아가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이란 모든 인간의 만남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믿는 자들일 뿐만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처럼 명령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새벽이 동터오는 갈릴리 바닷가―그 새벽의 정적을 깨트리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때마다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셨고, 베드로 역시 자신의 주님에 대한 사랑을 세 번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고백이 끝날 때마다 주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주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베드로를 향해 이처럼 당신의 양을 치고 먹이라는 말씀을 세 번 되풀이 하시므로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주님의 양들을 돌보는 것임을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주님의 양들을 돌봄이 없이 주님을 사랑한다 함은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을 사랑하는 증거로써 우리가 돌보아야 할 주님의 양떼란 구체적으로 누구입니까?

본문을 다시 보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명령하실 때 처음에는 `내 어린양을 먹이라' 말씀하셨고, 두 번째와 세 번째에는 `내 양'이라 언급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첫 번째의 언급에서 `어린'이란 형용사를 제쳐놓고 보면, 세 번 다 `양'으로 표기 되어 있어 아무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많은 헬라어 사본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세 번 다 양을 각각 다른 단어로 표현하시므로 분명히 구별하고 계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처음 명령하실 때 주님께서는 arnion이란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arnion이란 양 중에서도 특별히 어린양을 가리키는 areen의 `지소어'입니다. 전문용어 diminutive를 직역한 `지소어'란 우리말에는 없는 문법적 형태로써, 어떤 단어로부터 그 단어가 갖고 있는 본래의 의미보다 훨씬 작은 개념을 나타내기 위하여 파생된 말을 뜻합니다. 이를테면 악기 비올라(Viola) 중에 가장 작은 비올라에 `in'이란 접사를 붙여 바이올린(Violin)이라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즉 바이올린이란 비올라의 지소어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바이올린이란 처음부터 독립적인 악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비올라를 계속 작게 만들다 보니 그 이름이 비올라의 지소어인 바이올린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어린양을 가리키는 areen의 지소어인 arnion을 말씀하셨음은 어린 양 중에서도 가장 어리고 작은 양, 이제 갓 태어난 양을 의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두 번째 `내 양을 치라'고 명령하실 때에는 probation이란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은 장성한 양의 통칭인 probaton의 지소어입니다. arnion보다는 크지만 그러나 장성한 양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태의 양을 뜻합니다. 사람으로 말한다면 청소년기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발육이 끝나 정상적인 상태에 있는 양을 의미하는 probaton을 사용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당신의 양을 돌보라고 명령하시되 어떤 특정상태의 양만을 국한하여 지칭하신 것이 아니라, 갓 태어난 양에서부터 중간치를 거쳐 발육이 끝난 양에 이르기까지 모든 양들을 구별 없이 돌보라 명령하신 것입니다. 즉 어떤 장소 어떤 상황 어떤 시간에 상관없이 만나는 모든 양들을 돌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만나는 모든 사람을 주님께서 나에게 믿고 맡겨주신 주님의 양으로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갓 태어난 아이처럼 짐 덩어리일 뿐이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사춘기에 처한 청소년처럼 매사에 반항적이고 심사가 꼬여 있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중심으로만 살아온 어른처럼 지배자와 같이 군림하려고만 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 어떤 경우의 사람이든 상관없이 일단 내 곁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 모두를 구별 없이, 주님께서 나를 믿으시고 맡겨주신 주님의 양들로 생각하고 돌보라시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이런 명령을 내리시고 계십니까? 우리 모두가 다 베드로이처럼 주님 앞에서 때로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arnion아니었습니까? 매사에 반항적인 probation아니었습니까? 주님을 배신하고 주님을 지배하려는 probaton아니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단 한 번도 우리를 향해 너는 내 양이 아니라고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변함없이 끝까지 책임져 주셨기에 오늘 우리가 이처럼 주님과 함께 영적인 갈릴리 바닷가에 거하는 거듭난 베드로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을 믿는 우리 역시 주님을 본받아 살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모든 변덕과 배신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변함없이 우리를 당신의 양떼로 인정하시고 품어주신 결과로 오늘의 우리가 있을 수 있었기에, 우리 역시 만나게 되는 모든 사람을 주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사람으로 인정하며 사는 것이 주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임을 깨닫고 나면, 우리는 이제 비로소 주님께서 마태복음 13장을 통해 말씀하신 `가라지 비유'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좋은 곡식의 씨를 뿌렸습니다. 그런데 못된 원수가 밤에 와서 몰래 나쁜 가라지 씨앗을 덧뿌리고 도망쳤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밭에는 좋은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게 되었습니다. 가라지를 발견한 종들이 알곡을 보호하기 위하여 가라지를 뽑아 버리려 하자 주인이 종들을 제지합니다.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도리어 알곡까지 잘못 건드릴 수 있으므로 가만히 두었다가, 추수 때에 가라지를 따로 뽑아 불에 태우자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좋은 곡식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라지는 악의 자식들을, 그리고 밭 주인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살아가는 밭에 악한 자들이 가라지를 뿌리는 것을 허락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아예 처음부터 가라지를 뿌리지 못하게 막아 주셨다면 알곡들은 더 편안하지 않았겠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가라지를 용인하시고 추수 때까지 알곡들이 가라지와 함께 살지 않을 수 없도록 하셨습니까?

알곡들이 가라지와 함께 살면서도 도태되지 않고 끝까지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가라지보다 더 크고 강한 생명령을 지니는 것입니다. 가라지 때문에 알곡들은 살아남기 위해 그 생명력이 강인해 지는 것입니다. 가라지가 아니라면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가라지야말로 하나님께서 알곡을 온상 속에서 자라는 연약한 생명이 아니라, 폭풍 속에서도 버틸 수 있는 강한 생명으로 세워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인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교훈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지 풍성하기만 한 수확이 아니라 내 곁에 있는 모든 자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강하고 큰, 바른 생명력입니다. 바른 생명이 아니고서 맺는 열매란 아무리 양이 많아도 참된 생명의 알곡일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만약 이 사실을 알곡이 바르게 이해했다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겠습니까? 적어도 알곡은 지금 자기 곁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가림 없이 모든 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훈련해야 합니다. 알곡이라면 더불어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어서 좋고, 가라지라면 자신의 생명력을 더욱 강인케 해주는 좋은 도구가 되어 줄 것이기에 배척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나를 믿고 내게 맡겨주신 사람 혹은 나를 위하여 내 곁에 두신 사람들로 인식하며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 곁에 있는 자가 설령 가라지와 같이 못된 자라 할지라도 그가 내 곁에 있는 한,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의 생명을 더 크고 강하게 가꾸어 주시기 위해 마련해 두신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살아갈 때에만 우리는 당신의 arnion을, 당신의 probaton을 구별 없이 치고 먹이라는 주님의 명령에 바르게 응답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지 못할 때 그리스도인의 수적증가는 늘 새로운 다툼과 분열의 시작일 뿐입니다.

지난 5월 8일 어버이날에 아이들로부터 감사 편지와 함께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셋째 아이의 선물이 좀 특이했습니다. 일본인 나카타니 아키히로가 쓴 책으로, 책 제목이 <20대에 운명을 바꾸는 50가지 작은 습관>이었습니다. 그런 제목의 책을 선사했다는 것이 그 아이가 아직까지 저를 20대의 젊은이로 보고 있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제게 바꾸어야 할 좋지 못한 습관이 50가지나 될 정도로 저를 한심하게 보고 있다는 의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여하튼 그 아이가 서점에서 저를 위해 생각 끝에 고른 책이라고 하니 아들을 사랑하는 아비로서 읽어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 책 속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습니다.

"직장 같은 곳에서 당신이 싫어하는 사람과 부딪힐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당신은 어째서 이 사람은 이렇게 배려가 없을까 하고 실망합니다. 이렇게 싫어하는 사람과 부딪히면, `나도 혹시 이 사람과 똑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까'하고 자신을 돌이켜 보도록 합시다. 싫어하는 사람은 신(神)이 대신 보낸 사람입니다. `때때로 너도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구. 어때, 언짢지?'하고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면 신이 보낸 사람이다 생각하고 감사하십시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이 진정 바뀌어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들을 둘러쌓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건, 그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믿으시고 맡기신 사람들이요 여러분을 위하여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총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들 모두와 더불어 살아가는 강하고 큰 그릇―그리스도 안에서 바른 생명이 되십시오. 이것 하나로 여러분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와 같은 사람이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요, 그 같은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한 사도행전의 새 역사가 시작되기 대문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언제나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여 우리의 삶 속에는 늘 분열과 다툼, 대립과 대결밖에 없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수적 증가가 오히려 이 사회의 혼란만 가중시켜 왔음을 회개 드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처럼 형편없는 우리를 향해 `너는 내 양이 아니다', 한 번도 거부치 않으시고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를 찾아와 주님의 양으로 품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란 열과 성을 다하는 헌신과 봉사 이전에, 내 곁에 있는 모든 사람과 먼저 더불어 사는 사람이어야 함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진정한 주님의 교회란 교회의 호칭이나, 예배당을 소유치 않고 헌금의 50%로 선교 구제하는 제도에 의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문턱을 너머서는 모든 부류의 사람을 주님의 양으로 알고 진심으로 영접하며 함께 조화를 이루는 삶에 의해 구축되는 것임을 늘 기억하게 하옵소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게 보내주신 모든 사람을 수용하는 강하고 바른 생명력을 지니는 것으로 증명됨을 망각치 말게 하옵소서.
그와 같은 우리의 삶을 통하여, 절망과 암울과 혼돈의 이 세상 속에 새로운 사도행전의 서막이 오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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