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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3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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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기동 자매 |
참고 : | 2008.06.22 새길교회 주일설교 |
출애굽기 32 : 1~5, 마태복음 26 : 36~40]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편50:15)
‘네가 나를 부르면, 내가 너에게 응답하겠고, 네가 모르는 크고 놀라운 비밀을 너에게 알려 주겠다’(렙33:3)
이 두 구절은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 신앙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된 것은 사실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였습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에 보면 야곱의 12아들의 가족 70인이 에집트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왕성한 생산 활동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사실 ‘히브리’라는 말은 민족적 개념이 아니라, 계층적 개념, 아마도 노예를 뜻할 것이라는 것은 이미 들어 아실 겁니다. 이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 되는 그 첫 시작은 고역에서의 탄식과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출 2:23-25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고된 일 때문에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고된 일 때문에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이르렀다. 하나님이 그들의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자손의 종살이를 보시고,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셨다’
하나님은 언약을 잊으셨던 것일까요? 아니면 잠이라고 주무셨던 것일까요? 여하튼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이 있은 다음에야 응답하셨고, 구원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은 어떤 면에서는 참 행복했었을 것 같습니다. 비록 약소국가로서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으로 강대국의 지배에 시달리기는 했어도, 부르면 즉각 몸소 대답하시는 하나님, 직접 그의 뜻을 밝혀주시는 하나님이 함께 했으니까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나는 무쇠팔, 무쇠 다리, 로켓트 주먹의 마징가와 같지 않냐고 하면 너무 우스운 비유일까요?
이스라엘에 보여준 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를 믿고,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역사에 대한 성서의 증언을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고통과 고난에서 부르짖는 소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건만, 어디서고 하나님께서 직접 응답하시는 긍휼의 소리는 들을 수 없다는데 우리는 당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악은 더 이상 하늘을 무서워하지 않고, 전쟁은 자비라는 말조차 잃어버린 양 무자비한 잔혹성을 드러내고 있고, 그런가 하면 실로 죄 없는 자들은 지진과 홍수로 일시에 죽음으로 내몰리고, 6월 이 땅의 정국은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내몰려져 있는 이 때,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한단 말입니까? 악한 사람을 벌주진 못한다 해도, 선하고 긍휼하신 하나님이라면 적어도 악이라고는 알 수 없을 것 같은 갓난아이를 지진과 홍수로 죽이지는 말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참 많아요. 기독교인이 아니래도, 절대자에 대한 신앙으로 사는 이들이 많은 이 때, 처처에서 우리는 그 신앙이 죽임의 신념으로 변해가는 처참하고 어이없는 일들을 목도합니다. 그런가 하면 죽음의 골짜기를 지난다 해도 주의 지팡이가 나만은 지켜주시리라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등에 업고 자신의 신념을 하나님의 뜻인 양 착각하는 이들을 보면서는 허탈과 분노가 겹쳐지는 감정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직접 나타나서 해결하지도 못하고, 그의 신앙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지도 못하는 무기력한 하나님, 이사야는 이러한 당혹스러움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구원자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진실로 주님께서는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사45:15)
숨어계신 하나님(deus absconditus) - 하나님이 존재를 드러내지 않을 때 하나님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어쩌면 가장 쉬운 방법일텐데, 하나님 신앙 안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말하려 할 때. 우리는 어떻게 그 하나님을 느끼고, 알 수 있다고 담대히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오늘의 설교 제목은 사실 제 말이 아니고 본회퍼가 한 유명한 말입니다. 히틀러의 독재에 몸으로 항거하며 옥고와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사형당한 본회퍼의 옥중서간을 이 6월에 다시 읽었습니다.
6월은 민족상잔 전쟁의 기억이 있는 달이고, 올해에는 또한 21년 전 있었던 항쟁의 소리를 다시 듣기도 합니다. 87년의 6월 항쟁은 완전치는 못해도 시민정신의 승리를 맛보게 했지요. 하지만 그것이 있기까지, 여기 계신 선생님들도 고초를 당하기도 했지만, 민초들 또한 시위와 폭압이 하나의 트라우마로 남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번 여선교회 성경공부 때 어느 자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함께 수긍했습니다. 이야기인즉슨 그 자매가 촛불집회에 연일 참석하면서도 군중 속에 자리 잡고 앉을 때 가운데로 나가지 못하고 가장자리에 앉게 되더라는 거예요. 옛날 학생 때 시위할 때와 같은 공권력의 폭력적 진압을 잊지 못하더라는 것이예요. 왠지 무슨 일이 벌어지면 빨리 빠져나가야 할 것 같은 강박감이 작용하더라는 것이지요. 많은 토론이 이루어지고, 대통령은 진심이든 임시방책이든 대국민 사과의 제스처를 하고, 국내 국외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노력은 분분하지만, 얽히고 설킨 이해관계들 앞에서 정답은커녕 차선책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며칠 있으면 오는 625을 앞두고, 또 다시 이 땅에 색깔논쟁을 통한 분열의 소용돌이가 치지 않을까 우려되기까지 합니다.
‘아아 잊으라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이 노래를 얼마나 불렀는지, 전쟁을 체험하지 못한 전후세대이면서도 꼭 625를 몸으로 겪은 착각에 빠지는 전쟁의 기억을 한편으로 가지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 바로 내 앞에서 침노하는 물결과 같은 촛불행렬을 목도하면서, 거대한 국가 권력의 폭력 앞에서 연약한 개인일 수밖에 없으나 결코 굴복하지 않고 신앙의 승리를 일구어낸 본회퍼를 다시 한 번 기억하게 됩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본회퍼는 이 말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요? 본회퍼가 겪은 그 때, 그 땅의 고통이 어찌 지금 우리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만은 본회퍼를 통해 그 시대의 문제를 껴안고 씨름하며 그리스도인의 책임성을 통각 하는 모습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책임과 관련하여 본회퍼는 종교적 인간과 그리스도인을 구별합니다. 그에 의하면 종교적 인간은 인간의 인식이 막다른 골목에 부딪칠 때, 인간의 모든 능력이 쓸데없게 될 때 신에 대해 말하는 자라고 합니다. 인간이 어쩔 수 없는 한계상황과 실패, 곤경에 부딪쳤을 때,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이지요. 그는 이러한 신을 ‘기계장치의 신’(deus ex machina)라고 불렀습니다. 이 ‘기계장치의 신’은 원래 그리스의 연극에서 무대에 장치된 기계인데, 어느 순간 갑자기 튀어나와 연극에 감추어져 있던 수수께끼 등을 단번에 기적적으로 풀어주는 데서 비롯한 말입니다. 이 신은 아무 때나 나오지 않습니다. 기계장치가 작동할 때, 연극 감독이 정해놓은 극적인 순간, 그 때에만 나와서 그 몫을 다합니다. 그리고 사라지지요. ‘신’이라고 불리지만 진정한 ‘신’은 아니지요.
사실 성서에서도 그와 같은 ‘기계장치의 신’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읽은 출애굽기 32장입니다. 기적과 같은 출애굽을 겪은 후, 탈출한 히브리 백성들은 가나안땅을 향해 나아가던 중 시내산 아래 다다랐고, 그곳에서 이미 하나님과의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이었고, 백성의 지도자였던 모세는 하나님의 계명을 받고자 시내산에 올라갔습니다. 아론과 홀에게 백성들을 부탁하곤 말입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광야에 머물던 백성들이 아론에게 요구합니다.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달라고요. 사실 광야라는 곳은 오늘의 삶이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현재 광야의 삶을 벗어나도록 무엇인가 확실한 길을 보여주고 인도할 자가 부재하다는 두려움에 휩싸였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손쳐도 신을 보여 달라, 확신을 갖게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신을 ‘만들어 달라’ 한다는 것은 사실 그 이야기가 단순한 백성의 요구를 넘어 그 안에 이미 내재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담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성서에서 신은 인간을 만들고 세상만물을 만드는 주체일 망정, 만들어지는 대상인 적은 없으니까요. 그리고 구약성서에서 그와 같이 만들어진 신상은 하나님 신앙을 배신하는 ‘우상’이라는 의미에서 금지됩니다.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이지요. 너희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아론은 참 주저함도 없이 그 요구에 응답하여(동요하는 민심을 잡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백성들로부터 금덩이들을 모아 송아지를 만들어, 그들 앞에 세워 외칩니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신이다’ 왜 송아지 상인가, 그 광야에서 갑자기 그렇게 금상을 만들 수 있는 거푸집이 있었는가, 등등의 역사성과 관련된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19절에 보면 모세가 와서 보니까 백성들이 그 ‘수송아지’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고 있었고, 모세는 화가 난 나머지 우상 금지가 쓰여진 십계명 판을 던져서 깨뜨리고 말았으며, 그들이 만든 ‘수송아지’는 불에 태워 가루를 만들어서 백성들이 물에 타서 마시게 했다고 합니다. 금은 불에 녹을 뿐이지 어떤 화학적 변화도 없다는데, 어떻게 태워서 가루를 만들어서 마셨는지도 의문입니다.
여하튼 이 수송아지 상의 출현은 전적으로 백성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기적과 같은 인도하심의 역사를 경험했음에도 ‘자신들을 인도할 신’, ‘삶의 터로 안내할 신’을 요구했습니다. 게다가 아론은 그 수송아지 상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낸 신’이라고 선언합니다. 광야에서 지도자가 없다고 생각할 때,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할 때, 백성이 선택한 방식은 자신의 요구와 입맛에 맞는 ‘신’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정착할 땅으로 인도할 신’, ‘안녕과 평안을 보장하는 신’ 말입니다.
그 신의 모습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계명을 주시는 야웨 하나님과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과연 진정으로 그들은 그 수송아지가 그들이 바라는대로 안녕과 평안을 보장한다고 믿기는 했을까 사실 의문이 들지만 그 신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에게 먼저 ‘요구’하거나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저 인간이 원하는 대로 주기만 하면 되지요. 그렇기에 그 신은 인간의 요구가 만족되면 용도 폐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신이야말로 눈에 보이는 상으로 ‘만들어진 신’이지요. 그게 신이라면, 분명 이 때, 고통의 부르짖음에 응답하는 음성을 들을 수 없을 때,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될 수밖에 없지요. 조롱거리되는 것이 당연하지요. 도킨슨이 신의 망령이라고 신랄하게 비난하는데 대해 이러한 신은 그 비난을 피할 방법이 없지요. 하지만 출애굽기의 이야기가 암시하듯, 그렇게 만들어진 신, 인간의 욕구와 필요에 따라 구획된 신은 절대 성서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본회퍼는 이러한 인간의 종교성에서 만들어진 신에 대비하여, 예수 안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전혀 다른 계시 방식에 대해 말합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은 전적 타자로서 고난과 고통의 해결자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생의 한 가운데서 함께 겪어 내십니다. 그 하나님은 해결자는커녕 무력하기 그지없고, 고난을 묵묵히 감내하는 모습에 전지하고 전능한 하나님을 기대하는 자들을 당황스럽게 합니다.
예수의 수난 가운데 물론 십자가의 고통이 그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겠지만, 육체적 고통 이전 피하고 싶은 욕망과 싸우며 그 길을 가는 겟세마네에서의 순간들이 정신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잡히시기 직전, 이제 잡히면 죽을 것이 분명한 이 때,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이 말보다 더 절절한 말이 있을까요? 그러면서도 예수는 결연하게 ‘그러나 내 뜻대로 하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고통이 덜할까요? 그런데 베드로와 세배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서 말하기를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예수가 그의 수제자들에게 요구한 것은 단 한가지였습니다. ‘나와 함께 깨어 있자’ 고통의 기도 가운데 또 다시 제자들에게 왔는데, 자고 있는 베드로를 보고는 ‘한 시간도 깨어 나와 함께 있을 수 없느냐?’라며 책망어린 또 한 번의 간곡한 청을 합니다. 물론 이 내용은 ‘기도하라’는 것으로 연결되지만, 예수가 여기서 진정으로 원한 것은 ‘나와 함께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본회퍼는 이 예수의 요청이야말로 인간이 신을 상실한 세계에서 하나님의 고난에 동참하도록 부름 받고 있는 것을 드러낸다고 선언합니다.
오만, 권력 숭배, 탐욕 등이 판치고 있는 이 때, 그 아래 항변하지도 못한 채 고통당하는 이들의 부르짖음에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방식일까요? 어찌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무력하냐고, 하나님이 있는 것이 맞기나 하냐고 불평하는 것이 최선의 방식일까요? 겟세마네에서의 제자들을 향한 예수의 요청은 오늘, 이 고통의 시간을 지나는 우리들의 이웃들에게 우리의 설 자리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밝혀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해결사 하나님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한 복판에서 세상의 고통에 함께 참여하였던 예수의 요청에 응답하여, 깨어 고통당하는 자들과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비록 동일한 마음까지는 아니라 해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포용성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함께 한다는 것의 가장 깊은 내적 의미는 이성의 작용을 넘어서 감성적 소통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는 이에게 가장 큰 위로는 무엇일까요? 달래고 어르는 말짓 몸짓일까요? 간단합니다. 함께 우는 것, 함께 울어주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과 피조물의 모든 고통을 그때마다 알아서 척척 해결해 주시다면, 인간은 과연 서로를 배려하고 보살피려는 사랑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아이는 자라면서 삶의 방식을 말로 배우지 않습니다. 자신은 바담이라고 발음해도 그 자식은 바람이라고 하길 바라는 마음은 단지 부모의 바람일 뿐입니다. 아이는 부모의 삶을 보고 체득하여 자유로운 성인이 됩니다. 하나님은 어쩌면 이 방식을 아셨던 것 같습니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부모가 아이를 보살피며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지만, 커서는 더 이상 부모의 그늘아래 놓일 수 없고, 아이는 자라면서 부모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자연스럽게 익혀 나간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은 어쩌면 몸으로 사랑의 방법, 배려의 방법을 보여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는지도 모릅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잘 곳 없이 떠도는 민중과 함께 길을 갔고, 결국 미움과 악에서 나오는 고통과 고난을 그대로 감수하여 죽음을 몸으로 떠안는 예수의 삶에서 진정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시몬 베이유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신은 인간들이 서로를 사랑할 마음을 품을 만큼만 당신을 알 수 있도록 허락하신 모양이다. 인간들이 하늘에 너무 매혹되어 이 땅의 삶에 흥미를 잃지 않도록.....’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바로 이것입니다. 고난과 고통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짊어지는 것입니다.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나와 함께 깨어 있자’라는 부르심의 음성으로 우리의 삶의 자리를 분명이 알려주시는 예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함께 하길 원하는 예수의 부르심의 음성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 이 시대에 고통당하고 고난 받는 자들의 희미한 신음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부재에 대한 당혹스러움은 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비난할 기재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서로 도우며 결국 우리 자신과 더 나아가 신까지도 도울 수 있다는 희망, 책임의 자리임을 자각할 단초가 아닐까요?
슬픔과 비탄의 땅 쓰찬성, 미얀마의 고통, 배고픔 당하는 북한의 이웃들, 그런가 하면 오늘도 촛불을 들고 거리를 다니며 정의와 인간다운 삶을 외치는 우리의 아이들, 형제자매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우리들에게는 함께 해야할 이웃이 너무 많습니다. 나를 부르는 이웃의 소리에 응답하고, 함께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오늘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닐까요.
본회퍼가 쓴 시 한편을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기독교인도 이교도도 - 본회퍼
1.
인간은 곤궁 속에서 신에게로 가고,
구원을 애원하고, 행복과 빵을 구한다.
병과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구한다.
인간은 누구나 기독교인도 이교도도 모두 그렇게 한다.
2.
인간은 곤궁 속에 있는 신에게로 가고,
가난하고, 욕을 보고, 몸 둘 곳 없고, 먹을 것 없는 신을 발견하고,
죄와 약함과 죽음에 삼켜진 신을 본다.
기독교인은 고난 속에 있는 신과 함께 있다.
3.
신은 곤궁 속에 있는 모든 인간에게 찾아오신다.
육신과 영혼을 그의 빵으로 배불리고,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죽고,
그들을 모두 용서하신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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