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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빌4: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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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2001. 5. 20 |
마음은 인생의 주인이요, 운명의 운전수이며 생활의 지배자입니다. 똑같은 환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칼이 의사의 손에 쥐어지면 사람의 생명을 건지는 수술도가 되지만 도둑놈의 손에 쥐어지면 흉기로 전락하고 맙니다. 즉 그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가 결정됩니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것을 똑같은 장소에서 보아도 마음가짐에 따라 다 다릅니다. 예를 들면 같은 저수지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보더라도 강태공은 고기 잡을 것을 생각하고, 수영선수는 헤엄칠 것을 생각하고, 보트선수는 보트탈 것을, 농부는 논에 물댈 것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하나는 긍정적인 마음이고 또 하나는 부정적인 마음입니다. 오늘날 건강한 신앙을 위해서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 중의 하나는 긍정적인 마음과 자세입니다. 창조적이고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있는 공통적인 것은 바로 긍정적인 마음자세입니다.
한 부인이 시장에 나와 작은 물고기만 골라 사길래 상인이 물어 보았더니 "우리 집 프라이팬이 작아서"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러자 그 상인은 "부인, 물고기를 사기전에 프라이팬을 바꾸세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마음과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그러면 긍정적인 마음자세와 관련한 몇 가지 원리를 한번 살펴볼까요?
1. 긍정적인 마음자세란 매사에 희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희망이라는 두레박과 절망이라는 두레박이 있었습니다. 희망의 두레박은 항상 낙천적이었고 절망의 두레박은 항상 염세적이었습니다. 빈 두레박이 우물 속으로 내려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만큼 실망스럽게 사는 놈은 없을 거야. 우물에서 나올 때에는 언제나 가득 차서 나오지만 들어갈 때는 항상 텅 비어 있단 말야”
그러자 이번에는 꽉 찬 두레박이 우물에서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난 언제나 텅 빈 상태로 우물에 들어가는데 나올 때는 언제나 가득 차서 나온단 말야”
어느 두레박이 희망의 두레박이며 어느 두레박이 절망의 두레박일까요. 희망, 믿음, 사랑, 살려는 의지, 즐거움, 유머, 창의성, 활동성, 확신, 큰 기대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삶의 가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긍정적인 생각은 언제나 치유를 위한 출발점이 되는 중요한 덕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긍정적인 생각은 매번 성공을 불러옵니다.
뇌는 한 가지 부정적인 말을 중화하는데 40개의 긍정적인 말을 필요로 합니다. 그만큼 상처를 주기는 쉬우나 상처를 치료하는 데는 비용부담이 커집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의 가슴에 상처를 남기고 의욕을 꺾어놓고 용기를 잃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감과 자기긍정, 의욕을 심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궁극적으로 상처 입은 마음이 치료를 받게 됩니다. 의사인 어빙 오일은 이렇게 말합니다.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생각은 몸에 유익한 호르몬을 생성시키고 이 호르몬은 병을 치유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어느 대기업에서 아프리카 진출을 위한 시장조사를 위해 2명의 사원을 현지에 보냈습니다. 그것은 아프리카에 신발을 수출하기 위한 사전 조사였습니다. 그들은 모든 조사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사장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한 사람도 신발을 신은 사람이 없습니다. 무한한 시장성을 갖고 있습니다."라는 긍정적인 보고와 "아프리카 사람들은 한 사람도 신발을 신고 다니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 켤레의 신발도 팔 수 없습니다."라는 부정적인 보고였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보내졌던 12명의 정탐꾼들은 똑같은 것을 보고 왔습니다. 그런데 열 명은 부정적인 사람이었고,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현실뿐만이 아니라 현실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본 긍정의 사람이었습니다.(민13장) 하나님은 바로 이 긍정적인 두 사람 곧 여호수아와 갈렙을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를 유지시켰습니다.
술이 반쯤 들어있는 컵을 보고 어떤 사람은 반 밖에 안 남았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아직도 반이나 남았다고 말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 어려움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미래의 희망을 예견하고 말하고 사는 자세가 바로 긍정적인 자세입니다. 그래서 긍정적인 사람은 항상 좋은 것을 보고, 장점을 봅니다.
반면에 부정적인 사람은 환경을 원망하고 불평하며, 자기 자신의 미래를 비관하고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이 결정됩니다. 일반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긍정적인 사람이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거의 긍정적인 사람입니다.
반면에 부정적인 사람은 세상 살기가 힘듭니다. 대개 불행하고, 가정생활이 원만하지 못하고, 대인관계도 원만하지 못해서 언제나 그 사람이 들어가면 어두워집니다.
2. 우리의 생애에서 긍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축복입니다.
어느 유명한 대학에 목발을 짚고 다니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평범한 성격의 그 학생은 아주 쾌활하며 동시에 낙관적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부도 잘해 많은 상을 타기도 했고, 동료 친구들로부터 존경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친구가 어떻게 해서 그러한 불구의 몸이 되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소아마비 때문에" 그는 이와 같이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자신감 있는 네 행동의 비밀을 말해줄 수 있겠니?" 친구는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별 것 아니라구. 병이 내 마음까지 파고든 것은 아니였기 때문이지" 세상만사는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집니다. 유대인들은 자녀교육을 할 때 긍정적인 사고와 비전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성경에 등장하는 다윗 소년과 거인 골리앗의 싸움을 종종 인용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골리앗을 물리치기에는 너무 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두려움에 떨며 감히 저항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윗은 돌팔매가 빗나가기에는 골리앗의 몸집이 너무 크다며 자신만만하게 덤볐다. 의식의 출발점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
부정적인 사람은 매사에 할 수 없다고 하고, 비판합니다. 그런데 이런 부정적인 사람의 영향을 받으면 같이 부정적으로 됩니다. 부부도 닮아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부 중에 한 사람이라도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부부간의 관계에서는 긍정과 부정이 대립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경우에 긍정이 부정을 이기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3. 우리가 예수님 믿는 것은 긍정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부정적 장소가 긍정적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긍정적인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만나는 사람이 거의 불행한 사람이었는데 그들에게 가장 먼저 주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 자체가 긍정적 자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4. 긍정적인 사람이 되면 충성하고 헌신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사회생활과 신앙생활과 인간관계를 자세히 보십시오. 긍정적인 사람은 대개 충성을 알고 헌신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생활도 보면 긍정적인 사람이 교회에서도 충성합니다. 그리고 덕을 세우고, 그래서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갑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사람은 매사에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똑같은 설교를 들어도 긍정적인 사람은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사람은 거기서도 하나 흠잡을 것을 생각하다가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여기는 그 하나의 흠 때문에 전체가 은혜를 다 망각하는 망각의 장에 빠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 잘 믿어서 누가 복을 받았다고 말하면 부정적인 사람은 "아무개는 예수 잘 믿더니 사업 망했다."고 말합니다.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잘 믿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한가지 잘못된 것을 보려는 마음 때문에 은혜가 주어질 공간이 없습니다. 목사가 "아무개는 열심히 기도해서 축복 받았다."고 하면 부정적인 사람은 새벽기도 나가서 어려움 당한 얘기부터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개는 새벽기도 나갔다가 넘어져 다리 부러졌다"고 합니다. 꼭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 보는 마음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긍정과 부정은 체질이요 습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처럼 긍정적인 자세와 부정적인 자세가 체질이고 습관이라는 것을 알기 쉽게 표현하기 위해서 어떤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도 팔자야. 자기 팔자지...." 그렇게 얘기하면 부정적인 사람은 또 이렇게 트집을 잡습니다. "목사가 팔자란 소리를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우리나라 언어에서는 이미 '팔자'란 말이 '사주팔자'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보다는 '자기에게 주어진 복'이라는 의미로 보편적으로 전용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어 하나로 모든 것을 부정하는 부정적 자세는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5. 부정적인 자세는 결국 자기를 수렁에 빠뜨리고 어렵게 만듭니다.
미국의 어느 철도회사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 회사에서는 늘 냉동차가 역에서 정차하고 있는 동안 그 차안을 청소하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냉동차 안에서 청소를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누군가가 문을 잠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다시 이 냉동차의 문을 열었을 때는 이 냉동차에 갇혀 있었던 그 사람은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회사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사건경위를 추적하는 가운데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냉동차는 청소하느라고 스위치를 뽑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 안에 갇힌 사람이 얼어죽을 만큼 기온이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산소가 부족해서 질식할 정도로 그 냉동차가 적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얼어죽을 만큼 기온이 떨어진 것도 아니요, 산소도 충분했다고 하면 청소하던 그 사람은 무슨 이유로 하루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을 까요?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갇혔던 청소부는 자기가 갇혔다는 것을 안 순간 그는 절망에 빠지게 되었고 자신은 냉동차 안에서 동태처럼 꽁꽁 얼어죽게 되었다고 굳게 믿었고, 이 생각 때문에 사실은 죽어야 할 아무런 객관적인 이유가 없는 그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고 만 것입니다. 성경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하였습니다.
부정적인 것만 보는 사람은 남의 부정적인 것만 봅니다. 그러면 남의 부정적인 것을 보면서 자기는 좋은 삶을 영위하게 됩니까? 아닙니다. 남의 부정적인 것을 보다가 자기도 망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정적인 것만을 보니까 긍정적인 삶이 주어질 수 없습니다. 남의 장점을 보는 사람은 남의 장점을 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자기의 단점도 장점으로 바꾸어집니다. 자세히 보면 남의 장점을 발견한 사람이 성공한 사람들이 됩니다.
그들은 "어떻게 저 사람이 성공했을까? 어떻게 저렇게 남들로부터 저 사람은 존경을 받았을까?" 이런 장점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 장점을 사모하게 되고 결국 그 장점이 생겨서 그 장점 때문에 성공적인 인생으로 변합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부정적인 사람은 성공도 못하고, 출세도 못하고, 불행해집니다. 보십시오. 불평한 사람 중에서 정상적으로 출세한 사람이 있습니까? 불평하는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자꾸 좌천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무도 그 사람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항상 사장님을 칭찬하고, 동료를 세워주면 그 사람은 자연적으로 출세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성경에 대표적인 긍정적인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인생을 개척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을 보십시오. 그는 가난했고, 가정도 없어 위로 받을 사람도 없었고, 항상 나그네로 지냈고 거의 반생을 굶고 헐벗고, 감옥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답답한 현실 속에서도 현실을 원망하거나 탄식한 흔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희망적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전 삶을 언제나 환경에 매이지 아니하고 가장 좋은 것으로 바꾸어 살았습니다. 감옥을 별장으로, 고난을 영광으로, 슬픔의 눈물을 찬란한 진주로 만들며 사도 바울은 언제나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만들어가며 살았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부족한 환경 속에서도 언제나 좋은 것을 누렸으니 얼마나 축복된 존재입니까? 이 은혜가 여러분들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2001. 5. 20, 21일(토, 주일)
등대교회 중고등부, 청량고등학교 기독윤리반 한 태 완 목사 설교 내용 요약
한 부인이 시장에 나와 작은 물고기만 골라 사길래 상인이 물어 보았더니 "우리 집 프라이팬이 작아서"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러자 그 상인은 "부인, 물고기를 사기전에 프라이팬을 바꾸세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마음과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그러면 긍정적인 마음자세와 관련한 몇 가지 원리를 한번 살펴볼까요?
1. 긍정적인 마음자세란 매사에 희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희망이라는 두레박과 절망이라는 두레박이 있었습니다. 희망의 두레박은 항상 낙천적이었고 절망의 두레박은 항상 염세적이었습니다. 빈 두레박이 우물 속으로 내려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만큼 실망스럽게 사는 놈은 없을 거야. 우물에서 나올 때에는 언제나 가득 차서 나오지만 들어갈 때는 항상 텅 비어 있단 말야”
그러자 이번에는 꽉 찬 두레박이 우물에서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난 언제나 텅 빈 상태로 우물에 들어가는데 나올 때는 언제나 가득 차서 나온단 말야”
어느 두레박이 희망의 두레박이며 어느 두레박이 절망의 두레박일까요. 희망, 믿음, 사랑, 살려는 의지, 즐거움, 유머, 창의성, 활동성, 확신, 큰 기대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삶의 가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긍정적인 생각은 언제나 치유를 위한 출발점이 되는 중요한 덕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긍정적인 생각은 매번 성공을 불러옵니다.
뇌는 한 가지 부정적인 말을 중화하는데 40개의 긍정적인 말을 필요로 합니다. 그만큼 상처를 주기는 쉬우나 상처를 치료하는 데는 비용부담이 커집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의 가슴에 상처를 남기고 의욕을 꺾어놓고 용기를 잃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감과 자기긍정, 의욕을 심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궁극적으로 상처 입은 마음이 치료를 받게 됩니다. 의사인 어빙 오일은 이렇게 말합니다.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생각은 몸에 유익한 호르몬을 생성시키고 이 호르몬은 병을 치유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어느 대기업에서 아프리카 진출을 위한 시장조사를 위해 2명의 사원을 현지에 보냈습니다. 그것은 아프리카에 신발을 수출하기 위한 사전 조사였습니다. 그들은 모든 조사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사장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한 사람도 신발을 신은 사람이 없습니다. 무한한 시장성을 갖고 있습니다."라는 긍정적인 보고와 "아프리카 사람들은 한 사람도 신발을 신고 다니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 켤레의 신발도 팔 수 없습니다."라는 부정적인 보고였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보내졌던 12명의 정탐꾼들은 똑같은 것을 보고 왔습니다. 그런데 열 명은 부정적인 사람이었고,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현실뿐만이 아니라 현실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본 긍정의 사람이었습니다.(민13장) 하나님은 바로 이 긍정적인 두 사람 곧 여호수아와 갈렙을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를 유지시켰습니다.
술이 반쯤 들어있는 컵을 보고 어떤 사람은 반 밖에 안 남았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아직도 반이나 남았다고 말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 어려움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미래의 희망을 예견하고 말하고 사는 자세가 바로 긍정적인 자세입니다. 그래서 긍정적인 사람은 항상 좋은 것을 보고, 장점을 봅니다.
반면에 부정적인 사람은 환경을 원망하고 불평하며, 자기 자신의 미래를 비관하고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이 결정됩니다. 일반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긍정적인 사람이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거의 긍정적인 사람입니다.
반면에 부정적인 사람은 세상 살기가 힘듭니다. 대개 불행하고, 가정생활이 원만하지 못하고, 대인관계도 원만하지 못해서 언제나 그 사람이 들어가면 어두워집니다.
2. 우리의 생애에서 긍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축복입니다.
어느 유명한 대학에 목발을 짚고 다니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평범한 성격의 그 학생은 아주 쾌활하며 동시에 낙관적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부도 잘해 많은 상을 타기도 했고, 동료 친구들로부터 존경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친구가 어떻게 해서 그러한 불구의 몸이 되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소아마비 때문에" 그는 이와 같이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자신감 있는 네 행동의 비밀을 말해줄 수 있겠니?" 친구는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별 것 아니라구. 병이 내 마음까지 파고든 것은 아니였기 때문이지" 세상만사는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집니다. 유대인들은 자녀교육을 할 때 긍정적인 사고와 비전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성경에 등장하는 다윗 소년과 거인 골리앗의 싸움을 종종 인용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골리앗을 물리치기에는 너무 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두려움에 떨며 감히 저항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윗은 돌팔매가 빗나가기에는 골리앗의 몸집이 너무 크다며 자신만만하게 덤볐다. 의식의 출발점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
부정적인 사람은 매사에 할 수 없다고 하고, 비판합니다. 그런데 이런 부정적인 사람의 영향을 받으면 같이 부정적으로 됩니다. 부부도 닮아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부 중에 한 사람이라도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부부간의 관계에서는 긍정과 부정이 대립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경우에 긍정이 부정을 이기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3. 우리가 예수님 믿는 것은 긍정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부정적 장소가 긍정적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긍정적인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만나는 사람이 거의 불행한 사람이었는데 그들에게 가장 먼저 주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 자체가 긍정적 자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4. 긍정적인 사람이 되면 충성하고 헌신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사회생활과 신앙생활과 인간관계를 자세히 보십시오. 긍정적인 사람은 대개 충성을 알고 헌신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생활도 보면 긍정적인 사람이 교회에서도 충성합니다. 그리고 덕을 세우고, 그래서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갑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사람은 매사에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똑같은 설교를 들어도 긍정적인 사람은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사람은 거기서도 하나 흠잡을 것을 생각하다가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여기는 그 하나의 흠 때문에 전체가 은혜를 다 망각하는 망각의 장에 빠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 잘 믿어서 누가 복을 받았다고 말하면 부정적인 사람은 "아무개는 예수 잘 믿더니 사업 망했다."고 말합니다.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잘 믿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한가지 잘못된 것을 보려는 마음 때문에 은혜가 주어질 공간이 없습니다. 목사가 "아무개는 열심히 기도해서 축복 받았다."고 하면 부정적인 사람은 새벽기도 나가서 어려움 당한 얘기부터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개는 새벽기도 나갔다가 넘어져 다리 부러졌다"고 합니다. 꼭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 보는 마음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긍정과 부정은 체질이요 습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처럼 긍정적인 자세와 부정적인 자세가 체질이고 습관이라는 것을 알기 쉽게 표현하기 위해서 어떤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도 팔자야. 자기 팔자지...." 그렇게 얘기하면 부정적인 사람은 또 이렇게 트집을 잡습니다. "목사가 팔자란 소리를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우리나라 언어에서는 이미 '팔자'란 말이 '사주팔자'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보다는 '자기에게 주어진 복'이라는 의미로 보편적으로 전용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어 하나로 모든 것을 부정하는 부정적 자세는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5. 부정적인 자세는 결국 자기를 수렁에 빠뜨리고 어렵게 만듭니다.
미국의 어느 철도회사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 회사에서는 늘 냉동차가 역에서 정차하고 있는 동안 그 차안을 청소하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냉동차 안에서 청소를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누군가가 문을 잠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다시 이 냉동차의 문을 열었을 때는 이 냉동차에 갇혀 있었던 그 사람은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회사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사건경위를 추적하는 가운데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냉동차는 청소하느라고 스위치를 뽑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 안에 갇힌 사람이 얼어죽을 만큼 기온이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산소가 부족해서 질식할 정도로 그 냉동차가 적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얼어죽을 만큼 기온이 떨어진 것도 아니요, 산소도 충분했다고 하면 청소하던 그 사람은 무슨 이유로 하루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을 까요?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갇혔던 청소부는 자기가 갇혔다는 것을 안 순간 그는 절망에 빠지게 되었고 자신은 냉동차 안에서 동태처럼 꽁꽁 얼어죽게 되었다고 굳게 믿었고, 이 생각 때문에 사실은 죽어야 할 아무런 객관적인 이유가 없는 그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고 만 것입니다. 성경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하였습니다.
부정적인 것만 보는 사람은 남의 부정적인 것만 봅니다. 그러면 남의 부정적인 것을 보면서 자기는 좋은 삶을 영위하게 됩니까? 아닙니다. 남의 부정적인 것을 보다가 자기도 망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정적인 것만을 보니까 긍정적인 삶이 주어질 수 없습니다. 남의 장점을 보는 사람은 남의 장점을 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자기의 단점도 장점으로 바꾸어집니다. 자세히 보면 남의 장점을 발견한 사람이 성공한 사람들이 됩니다.
그들은 "어떻게 저 사람이 성공했을까? 어떻게 저렇게 남들로부터 저 사람은 존경을 받았을까?" 이런 장점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 장점을 사모하게 되고 결국 그 장점이 생겨서 그 장점 때문에 성공적인 인생으로 변합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부정적인 사람은 성공도 못하고, 출세도 못하고, 불행해집니다. 보십시오. 불평한 사람 중에서 정상적으로 출세한 사람이 있습니까? 불평하는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자꾸 좌천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무도 그 사람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항상 사장님을 칭찬하고, 동료를 세워주면 그 사람은 자연적으로 출세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성경에 대표적인 긍정적인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인생을 개척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을 보십시오. 그는 가난했고, 가정도 없어 위로 받을 사람도 없었고, 항상 나그네로 지냈고 거의 반생을 굶고 헐벗고, 감옥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답답한 현실 속에서도 현실을 원망하거나 탄식한 흔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희망적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전 삶을 언제나 환경에 매이지 아니하고 가장 좋은 것으로 바꾸어 살았습니다. 감옥을 별장으로, 고난을 영광으로, 슬픔의 눈물을 찬란한 진주로 만들며 사도 바울은 언제나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만들어가며 살았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부족한 환경 속에서도 언제나 좋은 것을 누렸으니 얼마나 축복된 존재입니까? 이 은혜가 여러분들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2001. 5. 20, 21일(토, 주일)
등대교회 중고등부, 청량고등학교 기독윤리반 한 태 완 목사 설교 내용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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