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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1:18∼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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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재철 목사 |
참고 : | 주님의교회 주일낮 예배 설교말씀/1998. 6. 14 |
몇 해전 집안에서 애완용 개를 키울 때입니다. 이 개가 오줌을 가리지를 못해 아무데나 싸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식구들이 무심코 지나가다가 개의 오줌을 밟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첫째 아이가 개오줌에 양말을 적시는 횟수가 제일 많았습니다. 그날도 무심결에 개오줌을 밟아 젖은 양말을 벗는 첫째 아이를 향해 제가 말했습니다.
`본래 마음씨가 착한 사람들이 개 오줌과 친하다더라'
그것은 순전히 속상해 하는 첫째 아이를 위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당시 유치원생이던 셋째 아이가 토라진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그럼 우리 집에서 제가 제일 못됐단 말이예요?'
희안하게도 우리 집 식구 중에서 개오줌을 거의 밟지 않는 사람이 셋째였습니다. 용케도 개오줌을 피해 다녔습니다. 그러므로 큰 형아가 마음씨가 착해 개오줌과 가깝다면, 개오줌을 거의 밟지 않는 자기는 제일 못됐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반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첫째 아이가 착하다고 했지 셋째 아이가 못됐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개오줌에 또 양말을 적셔 속상해 하는 첫째를 위로하기 위함이었지 셋째를 비판하거나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날 해프닝은 해프닝으로 끝났기에 망정이지, 만약 셋째 아이가 아빠의 중심을 계속 외면한 채, 우리 아빠는 나를 못된 아이 취급하고 날 제일 미워한다고 말하며 다닌다면 가족 관계가 얼마나 뒤틀려 지겠습니까?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이 실은 우리의 삶 속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콜라가 치아에 좋지 않다고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 단적인 예로 사람의 치아를 콜라 속에 넣어 두면 몇 일 이내에 녹기 시작해 결국엔 형체도 없어져 버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 아이들에게서 뽑아 낸 젖니로 콜라의 유해성을 아이들에게 직접 실험해 보이기로 했습니다. 아이들로 하여금 치아를 해친다는 콜라를 마시지 않도록 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동안 귀동냥으로 들었던 대로 유리컵 속에 콜라를 가득 붓고는 아이의 젖니를 그 속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 젖니가 어떻게 삭아 없어지는지를 아이들과 함께 매일 관찰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사흘 나흘은 물론이요 일주일 열흘 보름이 지나도 컵 속의 치아는 멀쩡하였습니다. 콜라를 새것으로 교체하여 한 달이 지나도 전혀 녹지 않았습니다. 50여일이 되어 썩은 콜라 위에 곰팡이가 끼이는 것을 보고서 실험을 중단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콜라 속에 치아를 넣어 두면 형체도 없이 녹는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식품위생국(FDA)이 얼마나 까다로운 곳입니까? 전 미국인이 매일 즐겨 마시는 콜라가 정말 사람의 치아에 그토록 치명적이라면 식품위생국이 가만히 내버려둘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세계에서 가장 송사가 많은 나라가 미국입니다. 최근에는 흡연으로 인하여 건강을 해친 사람들의 집단소송에 의해 미국의 담배회사들이 천문학적인 금액의 배상금을 물어주고 있는 판입니다. 그러나 콜라로 인해 치아가 상했다며 콜라 제조사를 상대로 소송이 벌어졌다는 이야기를 그때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날부터 도가 지나치지 않는 한 아이들이 콜라 마시는 것을 금하지 않습니다. 물론 저도 즐거이 마십니다. 콜라가 치아에 치명적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님을 저가 직접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믿고 있거나 전하고 있는 말 가운데 진실과는 동떨어진 말, 전혀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은 무책임한 말들이 얼마나 많을지 모릅니다.
교회란 건물이나 제도가 아닙니다. 교회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교회입니다. 그렇기에 교회에서 가장 경계 해야 할 것이 있다면 중심에서 이탈하거나 진실에서 벗어난 공허한 말입니다. 공허한 말이 판을 친다는 것은 그 모임의 명칭과는 상관없이, 그것이 주님과는 상관없는 단순한 인간의 모임에 지나지 않음을 증명해 주는 증거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24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증거하고 이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요한복음이란 이름으로 이제껏 까지 증거된 내용들이 모두 진실 되고 참되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요한복음이 성경 속에 포함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가 요한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야 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호리만한 거짓도 없이 참된 증거인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 아니 4복음서의 마지막 결론장인 요한복음 21장의 마지막 단락은 도대체 어떤 사건으로 끝나고 있는지 본문 23절을 함께 살펴보십시다.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아니하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우리는 이것이 무슨 사건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이 사건의 전개 과정이 어떠한지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새벽이 소리 없이 동터오는 갈릴리 바닷가―그 새벽의 정적을 깨트리시고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의 양들을 구별 없이 치고 먹이는 구체적인 삶이어야 함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삶은 원치 아니하는 때에 원치아니하는 장소에서 원치아니하는 방법으로 느닷없이 들이닥치게 될 죽음과 죽음의 의미를 직시하며 살아가는 자에게만 가능함과, 결국 그와 같은 자의 삶과 죽음만이 하나님께 영광일 수 있음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런 연후에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온 중심으로 주님을 따르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영광된 삶도 죽음도 불가능함이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앞에 계신 주님을 향해 대답을 드리는 대신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등뒤에 서 있는 요한을 발견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요한을 가리키며 오히려 주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그때까지만 해도 베드로는 여전히 주님보다는 사람을 더 의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질문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이제 곧 승천하실 주님께서 언젠가 재림하실 때까지 요한을 설령 남겨 둔다 할지라도 ―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정법일 뿐이었습니다 ― 너와는 상관이 없으므로, 남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주님을 따르려 하지 말고, 절대 진리이신 주님을 절대적으로 따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대 주님의 이 말씀이 세월이 흘러가면서 형제들 사이에 엉뚱하게 와전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서 형제들이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라 초대 교회의 교인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마가의 다락방에서 초대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곳의 교인들은 한 분이신 하나님아버지의 자녀란 의미에서 서로 형제 자매로 불렀습니다. 그때는 아직까지 신약성경이 확정되기 전이었는데, 세월이 흘러가면서 교인들 사이에서는 엉뚱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즉 주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나시던 새벽, 주님께서 요한사도에게 너는 죽지 않는다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셨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거짓 소문이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의 말미에서 교인들의 그릇된 인식을 분명하게 교정해 주고 있습니다.―`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요한복음 마지막장의 가장 마지막절인 25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요한사도가 기록한 요한복음을 포함한 4복음서는 예수님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아니라, 추리고 추려진 결과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4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나 사건 중에서 의미 없거나 중요치 아니한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4복음서의 마지막 단락에서 초대교회에 만연되어 있던 거짓 소문을 요한이 교정하는 것으로 4복음서의 막이 내리고 있음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요한 사도는 왜 이 사건을 복음서의 맨 뒤에 기록하므로 요한복음을 끝맺고 있습니까? 교회란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정말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면, 자칫 중심과 진실에서 벗어난 공허한 말이 지배하는 추악한 인간의 집단, 건실해야 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뒤틀리는 균열의 시발점이 될 수밖에 없음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초대교인들 사이에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죽지 않겠다 말씀하셨다는 헛소문이 퍼졌을 때, 도대체 어떤 현상이 벌어졌을 것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교인들은 죽지 않을 것이라 믿는 요한을 마치 우상 섬기듯 하려 했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눈앞에 있는 불사조 요한의 말을 더 중요시했을 것입니다. 요한이 아닌 다른 사도들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요한과 주님의 관계, 요한과 사람의 관계는 심각하게 뒤틀려 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떠나, 그릇되고 거짓된 공허한 말이 판을 치는 교회는 결코 주님의 교회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4복음서의 막을 내리면서 주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라 천명하고 있습니다. 아니 주님께서 친히 요한 사도를 통하여 거짓 소문을 믿고 퍼트리는 교인들에게, 나는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한 것이라고 질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서가 끝나고 사도행전의 막이 오릅니다. 사도행전이란 곧 초대 교회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에 입각한 참되고 진실한 말을 하는자에 의해서만, 허물 많은 사람들의 모임이 진정한 주님의 교회일 수 있음을 본문은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저기에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 자신이 곧 교회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교회의 수준은 저기 건축 중인 정신여고 강당의 크기에 의해 결정되어지지 않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가 주고받는 말에 의해 판가름납니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요, 그리스도인들이란 진리이신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이기에 그들의 모든 말은 참되고 진실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입에서 매일 쉬임없이 발해지고 있는 그 숱한 말들은 얼마나 참되고 진실됩니까? 첫째 아이의 정직을 말하는 데 왜 자기를 못됐다고 하느냐는 셋째 아이 말처럼, 지극히 자기 중심적으로 왜곡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콜라 속에 치아를 넣어 두면 녹아 없어진다는 것처럼,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을 마치 자신이 직접 확인해 본 것처럼 퍼트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본문 속의 교인들처럼, 주님의 이름으로 거짓된 것을 믿고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참된 주님의 교회일 수는 없습니다. 한평생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주님을 위한다고 열심히 말하며 살다가 주님 앞에 섰을 때, 나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고, 너의 말은 모두 거짓되다고, 나는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한 것이라고 주님에 의해 전면 부정 당한다면, 그보다 더 낭패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요한처럼 우리의 말을 늘 스스로 점검하는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본문 24절 상반절을 통해 요한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24a)
요한은 자기를 가리켜 자신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장본인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증언은 다음과 같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24b)
여기에서 `우리'란 좁게는 요한 자신을 포함한 초대교회의 교인들을 의미할 수도 있고, 넓게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요한복음을 읽게 될 모든 사람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고 표현하므로써 요한이 자기 자신을 객관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3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모든 증언이 참됨을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요한이 자신을 객관화시켜 자신의 참됨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4복음서의 마지막장인 요한복음 21장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주제―
즉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의 양들, 곧 주님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이 하나의 주제를 위해 요한복음 21장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요한복음 21장 마지막 단락은 자신을 객관화 시켜 스스로를 점검하고 있는 요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의 기준으로 늘 자신을 객관화시키며 살아갈 때 요한의 모든 증언은 그릇되거나 거짓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자신을 객관화시켜 보십시다. 제3자의 입장에서 우리 자신을 사랑의 잣대로 냉정하게 평가해 보십시다. 우리는 정녕 우리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 속에는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참된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말은 참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진리 안에 거하는 자만 주님과 사람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으며, 진리 안에 있는 우리의 말이 공허한 거짓으로 채워질래야 채워 질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참된 말을 하는 우리들로 인해 우리의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주님의 교회는 더욱 든든해질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한 사진작가를 만났습니다. 카메라를 잡은지 10년이 넘었다는 그는 전혀 예상 밖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순발력을 절대로 요하는 스냅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말 훌륭한 작품은 필름의 양을 많이 쓴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피사체와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얻어진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정말 아름답거나 감동적인 풍경을 접했을 때, 그는 함부로 셔터를 누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 경우 사진은 십중팔구 실제의 풍경보다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같은 장소를 몇 번이나 찾아가, 그 풍경이 자신에게 하고자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고 했습니다. 때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은 가만히 만지면서 피사체의 숨결과 체온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와 같은 과정을 거쳐 피사체와 친밀한 일체감을 느끼게 될 때, 그는 완벽한 구도 완벽한 명암 완벽한 색상의 살아 있는 작품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사진작가와 피사체의 관계가 이러할진대, 하물며 사람과 주님의 관계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야 두말해 무엇하겠습니까?
10년전 어린아이를 합쳐 50여명으로 시작된 `주님의교회'가 10년만에 우리의 자녀들을 포함하여 2천 6백 여명이 출석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2천 6백명이야말로 서로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주님께서 한곳에 모아 주신 주님의 양들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주님의 양들인 우리 모두를 향한 우리의 사랑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우리 서로 영혼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십시다. 영혼의 숨결을 느껴 보십시다.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의 영혼을 감싸 보십시다.
우리를 한 우리에 모아 주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모두 일체감을 느껴 보십시다. 그때 우리의 입 속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은 주님과 사람을 향한 사랑의 언어, 참된 말들이 될 것입니다. 사랑은 진리요, 진리의 또 다른 이름이 사랑인 까닭입니다. 그리고 거짓 없는 참된 말을 하는 우리 자신이야말로 아름다운 주님의 교회, 아니 우리 주님의 살아 있는, 참된 작품이 될 것입니다. 참된 말이야말로, 주님의 참된 작품됨의 참된 증거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요한처럼 중단 없이 자신을 객관화시키며 사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께서 사랑하라 모아 주신 2천 6백 명의 교우들이 서로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법을 익혀가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우리가 주고받는 모든 말들이 참된 말이 되게 해 주옵소서. 우리의 말이 사람과의 관계를 뒤틀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뒤틀린 관계를 회복시키는 생명의 언어들이 되게 해 주소서.
말이 신뢰를 상실하여 총체적으로 불신의 사회가 된 이 시대에 참된 말을 행하므로 언어의 신뢰성을 되 세우는 자들이 되게 해 주옵소서. 우리가 어떤 말을 하며 살 것인지는 우리의 자유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어떤 말을 하며 사느냐에 따라 우리의 일평생이 결정됨을 잊지 말게 하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말을 하는 우리 자신이 바로 주님의 교회임을 자각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주님의 살아 있는 작품―곧 이 시대의 사도행전이 되게 해 주옵소서.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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