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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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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경미 교수 |
참고 : |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2008.07.20 새길교회 주일설교 |
아무래도 이 나라 위정자들은 국민들을 너무 유식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노무현 정권 시절에도 황우석 사태가 터졌을 때 온 국민이 배아줄기세포니 체세포니 핵이식이니 하는 복잡한 생물학 용어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유식해졌었는데,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이번에는 광우병 쇠고기 논란입니다. 프리온 단백질이 어떻고, vCJD니 CJD니 하는 생경한 용어들이 머릿속에서 날아다닙니다. 한반도대운하도 이 정권이 절대 포기한 것이 아니니, 아마 운하 공부까지 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정부가 왜 이렇게 국민을 귀찮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10여 년간 우리 사회는 이른바 ‘절차적 민주주의’를 달성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90년대 이후, 소위 ‘민주화 이후 시대’를 겪으면서 점점 확실해지는 생각은 중앙집권적인 강력한 국가나 거대 자본은 절대 민중을 위해 유익하게 사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과정에서 국가의 축소를 한때 운운한 적도 있지만, 오히려 거대 자본과 결탁한 국가의 힘이 나날이 커지는 것을 실감합니다. 국가는 나쁜 쪽으로 더 커졌습니다. 거대자본은 실리를 챙기고, 권력은 자본에 유리하게 쇼를 해준 대가로 무대 뒤에서 출연료를 챙깁니다. 우리는 이번 삼성 재판결과에서도 그 쇼를 똑똑히 보았습니다. 독점자본과 소수 지배집단의 이익강화 앞에서 ‘절차적 민주주의의 완성’이란 참으로 무력한 것이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제도정치에 국한된 민주화만으로는 지역개발과 같은 거대 프로젝트들로 인해 발생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과 광범위한 소외현상을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 거대한 개발의 희생양이 되는 것은 언제나 농민과 노동자, 아이들과 노인들, 주부들이었습니다.
지난 5-6월을 뜨겁게 달궜던 촛불도 결국은 그 동안 우리가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형식적 민주주의와 대다수 보통 사람들의 실제 삶 사이의 괴리로 인해 누적되었던 모순이 어느 순간 놀라운 폭발력을 가지고 분출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쇠고기 문제는 사실 마지막 임계점을 건드린 것일 뿐이고, 실제로는 사람들 마음속에 퍼져 있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한꺼번에 놀라운 폭발력으로 터져나온 것 같습니다. 그 동안은 어떻게든 애를 쓰면 이 사회 한구석에 몸붙여 살 수 있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는데 점입가경에 이르는 이 정권의 행태를 보면서 이제 그 희망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리고 미련을 접고 기대를 포기하자 사람들은 용감해졌습니다.
실제로 늘 희생만 당하고 한번도 세력화 되지 못했던 아이들과 노인들, 주부들이 이번 촛불시위를 맨처음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이 정권이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는 끔찍하게 경쟁적인 교육정책과 공기업민영화 정책, 공공정책의 피해를 직접 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구보다 삶의 바닥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삶의 토대에 균열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그 피해를 보고,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쇠고기 문제를 계기로 ‘광장’에 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광장으로, 거리로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광장’과 ‘거리’로 쏟아져나왔을 때 그들은 더 이상 얕잡아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이 두려워해야 할 이른바 ‘불온한’ 집단이 되었습니다. 광장에서 사람들은 갑자기 똑똑해집니다. 두 개의 광장, 즉 인터넷 광장 아고라와 거리의 광장은 민주주의의 탁월한 교육장이자 훈련장이었습니다. 광장에서 서로 소통하게 된 사람들은 그 동안 각자 괴로워했었지만, 실은 모두가 괴로워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광장은 추상적인 관념이나 고정된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를 구체적인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친밀함과 다정함, 선의의 문제로 바꿔놓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저마다 손에 든 촛불은 태초부터 존재했던 빛의 힘으로 사람들 안에서 선한 에너지를 이끌어내는 것 같습니다. 손에 촛불을 들고 그 넘실대는 노란 물결의 일부가 되어본 사람은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촛불은 선해지고 싶게 만들고, 곁에 있는 사람의 선의를 믿고 싶게 만듭니다. 옆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고 싶게 만들고, 우리 모두의 선을 믿고 싶게 만듭니다. 촛불은 민주주의를 딱딱하고 고정된 제도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 도덕의 문제로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이 점은 6월 말 사제들의 극적인 개입에서 너무나 분명해졌습니다.
촛불 민주주의는 각자 고민했던 개인들이 광장으로 나오면서 가능해졌습니다. 광장이 촛불 민주주의의 핵심입니다. 원래 아고라라는 말은 “함께 모인다”는 뜻의 그리스어 ‘아게이로’(αγειρω), 또는 “사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아고라조’(αγοραζω)에서 나온 말인데 아게이로와 관련해서 사용되면 “광장”이라는 뜻이 되고, 아고라조와 관련해서 사용되면 “시장”이라는 뜻이 됩니다. 물론 고대 그리스에서 아고라는 한 장소였습니다. 아고라는 광장이면서 시장이었고, 시장이면서 광장이었습니다. 자기가 지은 농산물이나 손으로 만든 물건을 내다 팔거나 살 수 있는 장소였으면서 동시에 생각을 교환할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말하자면 물질과 정신이 함께 소통하는 자리였습니다. 고대 세계에 사람들은 함께 모이면 물질만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도, 마음도 소통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고파는 교환행위, 경제행위가 합리성과 효율성이라는 그 자체만의 논리에 의해 독자적으로 작동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도덕적 삶과 관련해서 작동했던 근대 이전 사회의 특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인간이 물질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자연과 자신의 동료들에게 의존하면서 그들과 함께 상호작용하는 것을 경제라고 생각했던 때입니다. 그러나 근대 산업사회에서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물질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성질이 있다고 가정합니다. 물질적 이익추구는 인간의 본성이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은 끝없이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가정하는 것이고, 이러한 개인주의에 입각해서 모든 경제현상과 경제행위가 평가되고 결정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개인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이며 사회는 각자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이 약육강식의 각축을 벌이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근대 자본주의 경제학이 전제하는 인간학은 근본적으로 불경(不敬)스럽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로 볼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기적인 존재라고 가정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도, 타인에 대해 책임적인 존재로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경제문제를 생각할 때 물질적 동기만이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라고 생각하고, 정신적 동기나 정치적 동기는 무의식중에 평가절하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경제행위에서는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또 자신이 살아갈 자연의 터전에 대해 가져야 할 책임을 회복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경제행위에서 시장합리주의적인 측면보다 정치적인 측면, 민주주의가 훨씬 더 중요하게 고려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촛불민주주의는 혼자 날뛰는 미친 경제를 삶의 바닥에, 먹고 일하고 사랑하는 삶의 전체성에 매어두려는 행위이며, 물질과 정신이 함께 소통되는 장소로 광장을 회복하는 행위입니다. 물질만이 아니라 생각과 마음이 통하는 장소로 잃어버렸던 광장을 되찾는 행위인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것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편적이고 추상화 된 수치가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효율성과 생산성, GNP, 또는 GDP와 같은 추상적인 사회 경제적 지표들이 경제에서 결정적인 요소가 되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구체적인 인간, 공동체의 실제 성원이 얼마나 경제적인 독립성과 자율성을 확보하는가가 결정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추상적인 수치가 아닌 삶의 풍성함과 만족감이 경제의 기본 척도가 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는 이윤획득보다 삶의 필요를 충족하는 것이 경제행위의 실질적인 목표가 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어떻게 끝없이 주식투자를 하거나 부동산투기를 하면서 살 수 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그런 일을 안 하면 손해보는 느낌으로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지금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시스템은 인간을 너무 치사하게 만들고, 선해지기가 너무 어렵게 만듭니다.
사람이 먹고 사는 문제가 그 자체로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체성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먹고사는 문제가 결국은 민주주의의 문제임을 말해줍니다. 인간이 먹고 사는 일에서 도덕을 실천하고 민주주의를 세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분배와 나눔의 문제일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와 인간에 대해 오로지 공학적으로, 기술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분배와 나눔이라는 민주주의나 절제의 원칙보다는 절대적인 생산량의 증가를 통해 먹고 사는 데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려 합니다. 민주주의가 아니라 경제성장을 통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해결책을 따르려면 현재 생산량 수준의 몇 배가 필요하게 되고, 그것은 지구의 수용능력을 훨씬 넘어서게 됩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인류는 시장이 무한대로 확장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시장은 지구 안에 있고, 지구는 유한합니다. 그러므로 먹고사는 문제와 관련한 인간의 모든 활동과 계산에는 한 가지 한계가 그어져야 하는데, 그것은 하느님이 지구를 유한하게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밥은 자꾸 늘어나지 않으며, 늘어나서도 안 됩니다. 밥이 한정된 것이라면, 밥은 나누어 먹어야 하고 아껴 먹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 먹고사는 데서 민주주의를 세우는 일은 실은 성장에 한계를 설정하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번 광우병 쇠고기 문제에 내재되어 있는 잔혹함을 똑바로 보아야 합니다. 광우병 쇠고기 문제는 단순히 우리 밥상을 지킨다는 차원을 넘어서 궁극적으로는 생명의 문제로서, 민주주의가 생명의 문제와 결정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삶의 문제를 민주주의의 원리가 아니라 오로지 경제적 합리주의에 의해서 해결하려 했을 때 일어나는 생명의 철저한 파괴현상을 이번 광우병 사태는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꼭 집어서 말은 못해도 지구상에 한 생명체로서 소라는 종이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는 적정수준이라는 게 있을 것입니다. 그 한도 안에서 소들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 나고 자라고 번식하고 죽고 하면서 지구라는 한 행성 위에 종으로서 존재할 것입니다. 그 순환적인 과정에서 유지되는 어떤 적정수준이라는 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장형 축산업은 그러한 생태적 적정수준과 소의 자연스러운 생애주기를 철저하게 무시한 위에서 존속하고 유지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소가 하나의 생명체라는 사실을 근본적으로, 깡그리 무시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출생과 성장, 죽음에 이르기까지 소는 철저하게 경제적 효율성과 합리성에 입각해서, 자본의 논리에 따라 관리되고 처리됩니다. 그 지옥같은 과정에서 소들이 겪는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고, 소는 죽어서만이 아니라 살아서도 쇠고기로 취급됩니다.
제레미 리프킨은 일찍이 1992년에 《쇠고기를 넘어서-축산문화의 번영과 쇠퇴》라는 책에서 오늘날 미국 축산업의 문제를 철저하게 파헤쳤습니다. 거기서 그는 당시 지구상에 존재하는 12억 8천만 마리의 소가 전세계 곡물의 3분의 1을 먹어치우며, 이를 절약하면 전세계 가난한 나라 10억의 인구가 굶주리지 않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축산업은 세계의 굶주림과 오염과 삼림벌채와 사막화를 일으키는 주요 원인이며, 야생 생물의 멸종에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축산업은 지구의 장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글에서 무엇보다도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축산업이 소에게 가하는 끔찍한 폭력이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어떤 사육장에서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마분지와 신문지와 톱밥을 먹이에 첨가하는 실험을 하고 있고, 또 닭집과 돼지우리에서 거름을 긁어모아서 그것을 바로 소먹이에 첨가하기도 합니다. 소의 몸무게를 최대한으로 확보하기 위해 소의 삶의 모든 국면을 하나하나씩 감시 통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상적인 체중인 1,100파운드까지 살이 찐 다음에 소들은 거대한 트레일러트럭에 무리지어 실려가게 되는데, 트럭에서 소들은 조금도 움직일 공간도 없이 서로 부대끼며 참아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소들은 트럭 안에서 쓰러지고, 그러고서는 짓밟혀서 다리와 목과 등과 골반이 깨어지는 일이 허다하다. 흔히 소들은 몇 시간 혹은 며칠에 걸쳐 아무런 휴식도 먹을 것도 없이, 대개는 물도 먹지 못하고 고속도로를 따라 수송된다....도중에 쓰러진 소들은 엄청난 고통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안락사나 마취제가 주어지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그들의 시체는 쓸모가 없어지고, 따라서 이윤에 손실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일어서거나 걷지 못하고 대개 트레일러의 바닥에 큰대자로 드러누인 채로 이 불운한 동물들은 목이나 부러진 다리에 쇠사슬이 걸려 끌려서 트럭으로부터 램프로 옮겨져서, 도살장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그 도중에 죽는 동물들은 ‘시체더미’에 집어던져져서 쌓이게 된다.” 우리가 지난 PD수첩에서 본 것이 아마 이러한 장면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만하고 싶지만, 이야기는 더 있습니다. “소들은 일렬로 도살장으로 들어간다. 들어가자마자 공기총을 맞고 소들은 기절한다. 동물이 주저앉을 때 도살장 노동자가 재빨리 뒷다리의 발굽에 쇠사슬 하나를 건다. 그리고 동물은 기계적으로 마루에서 들어 올려지게 되고, 몸이 뒤집혀진 채 걸려있게 된다. 피에 흠뻑 젖은 사람들이 기다란 칼을 가지고 황소의 목을 베는데, 칼날을 후두 속으로 깊이 1, 2초 동안 들이밀었다가 재빨리 칼을 거두면서 그 과정에 경동맥과 경정맥을 절단하는 것이다. 피가 용솟음치듯 터져 나와 노동자들이나 장비가 피칠갑이 된다.”
어쨌든 마지막에 우리는 깨끗하게 진공 포장되어 수퍼마켓에 진열된 쇠고기를 맞게 됩니다. 광우병 쇠고기 문제는 사실은 이처럼 소를 생명이 아니라 쇠고기로밖에 보지 못하는 근대 산업주의와 자본주의의 잔혹함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진실한 것이라면, 어떻게 이 잔혹함을 용인할 수 있습니까? 이 모든 과정을 용인하면서 아우슈비츠를 비난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21세기 일상화된 아우슈비츠에서 우리는 어느 편입니까? 희생자입니까? 나치입니까? 우리는 이번 광우병 쇠고기 문제와 관련해서 이 질문 앞에 우리 자신을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제레미 리프킨은 쇠고기 먹는 일을 포기하거나 줄이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결정이지만 혁명적인 행위라고 말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습니까? 그의 말대로 전세계 가난한 나라의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이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축산업으로 인한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해서, 그리고 소를 위해서 혁명적인 행위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소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깡그리 무시하고, 쇠고기로밖에 소를 보지 않는 공장형 축산업의 종말을 위해, 그리고 인간과 자연생명을 모두 죽은 수치로 환원해버리고야 마는 근대 산업주의, 자본주의의 야만을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결단의 표현으로서 쇠고기 소비를 줄이거나 포기하는 일은 절실합니다.
동물을 죽여서 제사지내는 희생제사의 기원에 대해 종교학자들은 흥미로운 설명을 한 가지 내놓고 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기르던 가축을 잡을 때 사람들은 식구중 하나로 정이 들대로 든 동물의 영을 위해 도살 행위 자체를 의례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새끼때부터 들로 산으로 끌고나가 풀을 먹이고 때로는 털을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눈을 맞추며 장난질을 치기도 했던 동물과의 일종의 이별의식으로, 그들의 영을 좋은 곳으로 보낸다는 뜻에서 그 동물의 죽음 자체를 의례화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희생제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가설이라는 것이 입증이 어렵다는 점이 흠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이야기는 동물을 함께 땅위에 살아가는 인간의 친구로 여기고 그 생명을 존중할 줄 알았던 고대인들의 삶과 자연에 대한 고상한 태도에 경의를 표하게 만듭니다. 생명의 존엄성을 상실한 이 시대는 문명을 가장하고 있지만 사실 그 어느 시대보다도 야만적입니다.
광우병의 원인이 아직 확실히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초식동물에게 동물성 사료를 먹이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광우병 예방을 위한 일차적인 조치도 동물성 사료를 금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가 도축에서 광우병 인자가 들어 있을 수 있는 특정 부위를 제거하는 것이고, 또 그 다음 단계가 검역에서 광우병 위험물질이 들어 있을 수 있는 부위의 수입을 금지하는 것입니다. 이번 촛불시위를 불러일으킨 광우병 쇠고기 문제는 이 세 단계의 조처를 모두 국민을 위해 철저하게 규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허용한 정부의 무능함과 오만함에서 기인했고, 그 배후에는 미국 축산업계의 거의 조폭적인 로비가 있었습니다.
분명 검역주권의 문제가 걸려 있고, 식탁의 안전문제가 걸려 있으니 시위대는 확실히 정부에게서 얻어내야 할 것이 있었고, 정부로서는 주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지난 6월 말 시위대와 공권력의 극단적인 대결 이후 그냥 이렇게 끝나나보다 생각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었고, 사실 지쳤습니다. 그러나 사제단의 시국미사로 시작된 종교계의 개입은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시국미사와 이어진 집회들에서는 분노와 대결보다는 알 수 없는 기쁨과 흥겨움, 승리의 분위기가 넘쳤습니다. 정부로부터 받아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그날 밤 분위기로는 확실히 이미 고지를 넘은듯 했습니다. 별이 없는 하늘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지만 사람들의 손에 쥐어진 촛불은 하나하나가 별이 되어 나를 비추고 세상을 비추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이 사회가 작동하는 표면적인 구조 아래서, 정당구조나 시민단체의 표면 아래서 사람들은 이미 인터넷 카페나 지역의 소모임 등을 통해서 삶의 정치적인 흐름을 정확히 파악해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정당정치나 시민운동의 차원에서, 제도상에서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언론과 지식인들이 이를 담론화해내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우리는 이번 촛불집회를 통해 그동안 사람들이 물밑에서 생각하고 느꼈던 것이 특정 사안을 계기로 광장에 나왔을 때 얼마나 큰 폭발력을 지닐 수 있는지 경험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신약성서 안에서 매우 특이한 책입니다. 아마 신약성서 저자들 중 가장 예민한 사람이 요한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오늘날에는 정통 기독교 신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 요한신학이지만,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요한복음서는 그 과격한 그리스도 이해 때문에 이단이라는 의심을 받아서 신약성서 문헌들 중 가장 늦게 정경에 포함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을 탄생시킨 요한공동체는 그리스도에 대한 독특한 이해 때문에 유대교로부터 지독한 박해를 받았고, 동료 기독교 집단 안에서조차 어느 정도 따돌림을 당했던 것 같습니다. 요한공동체는 세상이 자신들을 향해 보이는 증오에 대해 도무지 그 까닭을 알 수 없다고 느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 했던 동료들이 하나 둘 배신하고 떠나가는 것을 괴로움과 절망 가운데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요한공동체는 지는 싸움을 계속 했습니다. 비록 지는 싸움이지만 싸움 자체를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요한 15:18-16:2) 그래서 적어도 자기들끼리는 그리스도라는 포도나무에 속한 가지들로서 친구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완전한 사랑의 이상을 실현했던 것 같습니다.(요한 15:1-17)
아마도 유대인들 집단의 주변부에서 출발했을 요한공동체가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데까지 이르자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여졌고, 이것은 박해의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요한공동체는 기원후 80년 경 유대공동체로부터 쫓겨났던 것으로 보이며, 종교적으로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고립되었고, 때로는 살해의 위협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요한이 그리는 신비와 상징들이 나직한 슬픔의 색조를 지니는 것은 사실 이러한 뼈아픈 박해의 경험 때문일 수 있습니다. 단순하고도 불가사의한 요한의 언어는 오랜 고통스런 의식의 단련 속에서 연마된 결정체입니다. 요한은 두 세계 즉,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신적 세계와 인간적 세계, 사회학적으로 말하자면 요한공동체와 적대적인 외부세계 사이의 대립과 단절을 누구보다도 뼈아프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둘 사이에는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소리 없는 침묵의 벽이 가로놓여 있고, 요한은 아무리 아름다운 말을 전해주어도 쓰디쓴 비난의 메아리로 되돌아오는 이 벽을 뼈저리게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좀 극단적인 데가 있습니다. 가령 요한복음 10장에서 요한의 목자는 양들을 위해 죽습니다. 이것은 실제 현실 속에서 목자의 행태와는 맞지 않습니다. 목자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지도 않으며, 당위적이 될 수도 없습니다. 설령 양들이 목자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소유물에 불과한 양들을 위해 주인인 목자가 목숨을 버리기까지 해야 합니까? 양들의 생명보다는 목자 자신의 생명이 더 귀중하지 않습니까? 분명 여기에는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 상황을 과격하고 극단적으로 이해하는 요한적인 사고의 경향이 나타납니다. 어째서 요한의 목자는 죽음을 무릅써야만 양들을 지킬 수 있습니까? 어째서 요한은 이렇게 비장합니까?
선한 목자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면서 동시에 위험한 박해상황에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공동체를 구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과 관련된 경험이 예수를 선한 목자로 그리는 계기가 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선한 목자 예수가 보여준 사랑의 기억 속에 삽니다. 목숨을 바친 사랑의 기억은 박해와 죽음의 위협 속에서 서로를 배신하지 않고 살아 있게 하는 보루였을 것입니다. 위기 상황에서는 이리를 보고 달아나는 당연한 행동이 양들의 죽음을 초래하듯이 자기 목숨을 얻기 위한 작은 행동이 상대방의 죽음과 공동체의 해체라는 크나큰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을 넘어서는 비장함, 생명을 얻기 위해 생명을 버리는 결연함이 요한공동체와 그 지도자에게 요구됩니다. 선한 목자인 예수가 양들인 공동체를 위해 목숨을 버렸듯이, 그래서 공동체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듯이 지금 위기의 상황에서 요한공동체는 서로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가장 큰 사랑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입니다.(15: 13) 예수는 스스로 목숨을 버림으로써 목자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한공동체는 먼저 있었던 이 사랑의 기억 속에 삽니다.
요한공동체는 이러한 사랑의 기억 속에 살았기 때문에 그처럼 지는 싸움을 하고 패배와 실패의 한가운데서도 영광과 승리를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은 현실 속에서는 끝없이 지는 싸움을 했던 사람들의 책이고, 요한의 언어는 패배와 좌절을 아는 사람만이 구사할 수 있는 단순하면서도 풍부한 은유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요한의 언어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우며, 나직한 슬픔과 연민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번에 사제단이 인용한 요한복음 1장 5절도 그렇습니다. 원문을 보면 요한복음 1장 1-18절 전체가 한 편의 시로 되어 있고, 아마 요한공동체는 이 시를 예배 때마다 노래로 불렀을 것입니다. 밖에는 어둠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고통스런 현실 속에서 그들은 함께 둘러앉아 “빛이 어둠 가운데 비치고 있으니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했다”(1:5)는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이번 시국미사를 드릴 때 사제단은 요한복음 1장 5절을 전부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사제단이 인용한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는 말 앞에는 “빛이 어둠 가운데 비치고 있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장 5절을 온전히 인용한다면, “빛이 어둠 가운데 비치고 있으니,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했다”는 말이 됩니다. 여기서 사용된 동사 “파이네이”(φαινει)는 “빛이 비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동사 “파이노”(φαινω)의 현재형입니다. 그리스어에서 현재형 동사는 현재라는 시제보다는 동작의 지속성과 반복성을 나타냅니다. 빛은 계속 비치고 있고, 자꾸 비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요한복음서에서 빛은 그리스도의 계시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빛이 계속해서 비추고 있으니 아무 까닭없이 우리를 미워하는 세상은 결코 우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을 우리 식으로 오늘의 맥락에서 해석해본다면 그 빛은 촛불의 빛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촛불의 빛이 계속, 반복해서 우리 내면을 비추고 어둔 세상을 비추고 있는 한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아마도 이것이 실제로는 이명박으로부터 아무 것도 얻어내지 못했으면서 그날 우리가 이미 승리의 기쁨을 누린 이유였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두 손에 촛불을 들고 있으니 우리는 이미 승리한 것이고, 승리의 기쁨을 누려 마땅합니다.
이제 촛불의 열기도 어느 정도 잦아들었고, 소수의 남은 자들만이 마지막 대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공동체가 선한 목자 그리스도의 사랑의 기억 속에 살면서, 그 사랑을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사랑의 이행위를 통해 이어갔듯이, 자각한 사람들의 의식은 그대로 남아 이어질 것입니다. 그 자각의 불씨가 살아 있는 한 촛불은 언제고 횃불이 되어 다시 타오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촛불은 꺼지지 않았고 지금도 여전히 빛나고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촛불은 부드러우면서 활달했고, 도덕적이면서 관능적이었습니다. 엄격하고 순수하며 준엄한 동시에 관능적이었던 그 촛불은 우리 시대의 야만과 기형적인 사태들에 맞서 승패가 불확실한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으로 그 촛불은 참을 수 없이 터져나오는 그 발랄함과 유머를 통해 우리 시대의 한가운데 물신주의라는 황금송아지에 맞서는 도덕적 행동이 현존함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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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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