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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과 응전

베드로전 조용기............... 조회 수 2289 추천 수 0 2009.05.14 13:4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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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벧전5:8~9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4년 8월 1일 성찬주일 2부설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도전과 응전’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끊임없이 삶의 모든 면에서 도전을 당하고 그 도전에 대하여 응전하면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린아기는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잘 보호받고 두려움없이 편안하게 지냅니다. 뱃속의 태아는 모체와 탯줄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속에 연결된 혈관을 통해서 영양소와 산소를 공급받고 숨쉬며 노폐물을 내어 놓습니다. 태아는 양수속에 떠있는데 양수는 외부충격과 온도변화로부터 태아를 보호하고 몸을 고루 발달시키도록 둥실둥실 떠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수는 태아의 감염을 줄이는 항균작용과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어느날 세상에 태어나 어머니의 보호에 연결된 탯줄이 끊어질 때 이제는 독립된 생명체로 존재해야만 합니다. 뱃속의 따뜻한 보호막을 벗어나 병균이 득실거리는 세상에 노출되고 자기 힘으로 숨쉬고 먹고 배설하며 병균과 싸워 생존하기 위한 사투를 해야만 합니다. 이 생존의 도전에 응전하여 이기면 살게 되고 지면 죽게 됩니다. 이와같은 삶의 싸움의 끝없는 투쟁이 계속되고 죽는날까지 연속되는 것입니다.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연구에서 문명의 성장은 계속되는 도전에 성공적 응전으로 이루어지며 이것은 역사 및 한 개인의 발전에 원동력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예로 중국 황하문명은 도전과 응전의 살아있는 역사적 교훈입니다. 황하강은 여름에 살인적인 더위와 홍수로 겨울은 혹한으로 시련과 절망의 강입니다. 사람들은 이 황하의 절망적인 도전에 응전해서 승리했기 때문에 황하문화를 이룩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도 원래 풀한포기 없는 언덕과 돌자갈밭, 열병이 들끊는 황야였지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국을 건설한 것은 그것을 사람들이 극복하고 이겼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르도토스는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다. 해마다 나일강이 범람하기 때문에 태양력, 기하학, 천문학이 발달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론]
1. 삶의 도전에 진 아담

첫째로, 우리의 조상 아담은 삶의 도전에 응전하지 못하고 패배한 전형적인 인물인 것입니다.
삶의 도전에 응전하지 못하면 종이됩니다. 아담은 에덴에서 마귀의 도전에 짐으로 처참한 종이 되고 말은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절에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와가 말하기를 “동산 모든 실과를 따먹되 선악을 아는 실과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죽을까 하노라” 그러니까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
그 뱀의 유혹과 아내의 권면에 응전하지 못했습니다. 그 도전에 순순히 항복해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마귀의 종이 되어 버리고 3중형벌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과 단절되고 영광을 상실했으며 육체는 질병과 약함과 죽음의 노예가 되고 환경적으로는 간음과 저주와 실패의 종이 되어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부부애에 도전을 받고 비참하게 실패했습니다.
창세기 3장 11절로 12절에 보면“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기에서 부부애의 도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왜 그 실과를 먹었느냐 하니까 하나님이 지어주신 그 여자가 내게 먹으라고 꾀임으로 먹었다는 책임감없는 말을 했습니다. 그는 아내를 사랑했으면 내가 아내를 잘못 인도했습니다. 잘못 가르쳤습니다. 나의 잘못입니다. 책임은 내게 있습니다. 그렇게 했더라면 그 부부애의 도전에 그는 응전하고 성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덴에서 벌써 아담과 하와의 사이에 깊은 불신의 골이 만들어지고 말은 것입니다. 서로 사랑대신에 의심하고 미워하는 비참한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 오늘날까지 인류는 부부애의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들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 도전에 저서 처참한 결과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부부란 영원히 남남끼리 모인것이므로 서로 이해하고 동정하고 인내하고 사랑하며 상대방을 인정하고 보조를 맞추며 살아야 되는데 요사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자기중심으로 살고 자기 책임을 짊어지지 아니하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그러한 일들로 말미암아 가정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점점 높아져서 2003년 총 이혼건수가 16만 7천건으로 2002년에 비해 15%나 급증했고 매일 평균 458쌍이 이혼하고 있습니다. 부부는 남남이 만나서 살기 때문에 살다보면 부부애 도전을 받는일이 허다합니다. 그러나 이 도전에 응전하지 못하고 비참하게 실패하기 때문에 결국 이혼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형제애에 도전을 받고 실패하여 살인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첫째아들 가인과 둘째아들 아벨은 형제애의 도전을 받았을 때 거기에 응전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형제간이 살상을 저지른 것입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재물을 드리고 아벨은 양의 첫새끼와 기름으로 드렸는데 야웨께서 아벨과 그 재물은 열납했으나 가인과 그 재물은 열납하지 않았습니다.그래서 가인이 마음속에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그러다가 창세기 4장 8절로 9절에 보면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결국 가인과 아벨은 시기와 질투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가인이 아벨을 죽이므로 형제애 도전에 실패하고 말은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형제애에 도전을 받고 실패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형제가 형제를 때려 감옥에 가기도 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재산 때문에 형제끼리 고소하는 일은 쉽게 찾아볼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부모님의 유산상속을 둘러싼 소송이 2001년에는 11,340여건으로 이는 하루 평균 60가구 이상이 돈 때문에 형제간에 법정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형제애도 도전을 받으면 형편없이 무너지고 있는 것은 탐욕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2. 삶의 도전에 이긴 예수님
둘째로, 삶의 도전에 이긴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다.
이기면 왕노릇합니다. 지면 종이 되지만 이기면 왕노릇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 나가서 시험을 당했습니다. 40주 40야 금식하고 사탄의 도전을 받게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1절로 2절에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마귀가 와서 육신의 정욕으로 그를 도전했습니다. 하나님보다 식욕을 먼저 채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해서라도 구복(?)을 먼저 채우는 것이 최고라고 유혹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4장 3절로 4절에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여기에 예수님은 단호하게 도전해서 거부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둘째 마귀는 안목의 정욕으로 시험했습니다. 하나님보다 명예를 더 중하게 여겨라.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라도 명예를 얻으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5절로 7절에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단호하게 마귀의 도전에 대해서 예수님은 응전하시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 세상 자랑을 가지고 도전을 했습니다. 하나님 보다도 부귀, 권력을 취하라. 하나님 보다도 부귀와 권력을 취하고 볼일이다.
마태복음 4장 8절로 11절에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단호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서서 마귀의 도전에 응전하기 때문에 마귀는 예수님을 종으로 삼지 못하고 떠나가고 예수님은 마귀를 다스리는 왕노릇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도전을 당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거부감의 도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가 33세 십자가에서 죄인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처참하게 죽을 것을 생각할 때 굉장한 마음의 고통을 겪지 아니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8절로 39절에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그는 심한 고통과 괴로움의 도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 도전에 대해서 그는 응전했습니다. 하나님께 순복하므로 그 도전을 극복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29절에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2절에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4절에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에 라고 말씀하신 것을 통해서 예수님은 그 육체적인 죽음의 고통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욕구가 있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하나님 뜻대로 자기를 헌신하므로 그 도전을 이기고 승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탐욕이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요. 탐욕은 우리 사람들을 지배해서 종으로 만듭니다. 탐욕의 도전에 응전해서 승리하지 못하면 탐욕의 종이 되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국제 투명성기구에서 조사한 국가부패지수에 따르면 한국은 42위를 차지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한국의 공직사회가 얼마나 부패했는가를 잘알수 있습니다. 이 부패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탐욕에서 오는 것입니다. 탐욕을 이기지 못하면 범죄하게 되고 이 범죄는 결국 파탄을 가져옵니다. 요사이 언론을 통해 뇌물을 주었거나 받은 공직자들이 쇠고랑을 차고 감옥에 가는 것을 볼때에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들이 탐욕에 대한 싸움에서 패배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탐욕의 그 달콤한 유혹을 이겼더라면 승리했을 것인데 그 탐욕의 도전에 응전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세상유혹과 탐욕에 대한 싸움입니다. 산다는 것 그 자체가 싸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순간도 방심하지 말고 지속적인 기도와 말씀으로 응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3. 우리 삶 자체가 도전의 연속
셋째로, 도전받는 것은 우리의 삶의 현실적인 방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산다는 그 자체가 싸움인 것입니다. 내게 왜 이런 고통이 다가오느냐. 내게 왜 이런 싸움이 다가오느냐 하는 질문은 할필요가 없습니다. 불티가 하늘로 올라감같이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태어났다고 말했습니다.
욥기 5장 6절로 7절에 “재앙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고난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불란서의 작가 빅토르 마르 위고는 ‘오늘의 문제는 무엇이냐, 싸우는 것이다. 내일의 문제는 무엇이냐, 이기는 것이다. 모든 나라의 문제는 무엇이냐, 죽는것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세가지 싸움이 늘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과 자연과의 싸움이요, 둘째는 인간과 사회와의 싸움이요, 셋째는 인간과 마음과의 싸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늘 도전을 당하고 싸우고 지면 종이 되고 이기면 왕노릇하는 그러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당하는 싸움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매일 죄의 도전을 받고 죄에 대한 싸움을 싸웁니다. 죄에 대한 도전을 안받는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시편 107편 17절에 “미련한 자는 저희 범과와 죄악의 연고로 곤난을 당하매”라고 말했습니다.
시편 38편 4절에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사야 64장 6절에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라고 탄식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끊임없는 죄가 우리들을 습격하고 우리에게 도적하는데 우리 죄에 대해서 응징하지 못하면 죄의 종이 되지요. 그리고 세상의 유혹과 탐욕은 쉬지 않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로 23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고 권면하고 있으며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소욕이 끊임없이 도전하고 우리속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서 싸워서 끊임없이 육체의 욕망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끝없는 죄악과 유혹과 욕심의 도전을 우리는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명심보감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생의 많은 문제들은 절제하지 못한데서 찾아온다.”
미국내 16만명 교도소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수감자의 92%가 절제하지 못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욕망에 대해서 절제하지 못하면 범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한이 없습니다. 욕망을 채움으로 기쁨이 오는 것이 아니라 욕망은 절제함으로 기쁨을 우리가 얻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다가오는 도전중에 가장 괴로운 것 중에 하나가 질병입니다. 여러분 병은 정말 괴로운 것입니다. 아무리 부귀, 영화, 공명이 다 있어도 몸이 약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돈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음은 꽤 많이 잃은 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모두다 잃어 버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병의 도전은 우리의 삶속에 항상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월스트리드저널에 의하면 지난 30년간 35가지 이상의 신종 전염병이 생겨나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중 대표적인 것이 에이즈인데 1981년 미국에서 처음 발견된 이래 지금 20여년 동안 전세계를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현재 지구상에 약 4천만명의 에이즈 감염자가 있고 그중에 2천만명이 이미 목숨을 잃어 버렸습니다. 재작년에는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했던 신종 질병인 사스가 발생해 작년 9월까지 8.098명의 환자가 발생했고 그중에 774명이 죽었습니다. 이외에도 인류를 위협하는 질병은 그 수를 헤아릴수 없는데 현재 그 질병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암입니다. 그런데 암의 발생도수는 점점 많이 집니다. 우리나라에도 국민 200명중 한명이 각종 암에 걸려있다고 말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200명중에 한 사람이 각종 암에 걸려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질병에 대한 싸움도 우리 평생에 끊이지 않고 도전에 대한 응전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전도서 5장 17절에 “일평생을 어두운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인간관계에 대한 싸움도 계속됩니다. 사람이 살면 항상 인간관계속에 살고 인간관계에 살기 때문에 서로 시기와 분노와 질투와 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시편 56편 1절로 3절에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히 치는 자 많사오니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과 사람 사이에 있는 끊임없는 시기, 분노와 질투 분쟁의 싸움도 우리가 그를 극복하면 왕이 되고 극복못하면 종이 되는 것입니다.
생활고에 대한 싸움도 계속되지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디에 살꼬. 이것도 끊임없는 도전입니다.
창세기 3장 18절로 19절에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라고 해서 벌써 고생과 수고가 운명지어져 있습니다. 이 도전에 응전하지 못하면 굶어 죽습니다. 응전하지 못하면 사회에 패배자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전도서 2장 22절로 23절에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 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고 말했습니다. 평생에 우리들은 생활로 말미암아 근심하고 수고하고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매일 당하는 싸움입니다. 이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과학문명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이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국제연합산하 기관인 세계식량계획의 발표에 따르면 세계기아인구가 8억 4천 2백만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해마다 1천 4백만명의 어린아이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이는 7초에 한명이 굶어서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생활고의 문제는 선진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세계의 강대국이라 불리는 미국의 경우에도 인구의 10%인 2천 6백만명이 극빈층에 처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로부터 생계비 지원을 받는 극빈층이 139만명이고 잠재적 극빈층이 320만명을 합하면 극빈층이 전체 인구의 70%에 달합니다. 65세 이상 노인의 경우에는 20% 정도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에 가나 어떤 나라에 가나 항상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림의 그림자가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류에 대한 도전입니다. 우리는 북한에 있는 동포들이 매일매일 기아선상에 허덕이고 있고 수많은 어린이와 노약자들이 굶어죽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가난과 굶주림은 우리에 대한 끊없는 도전입니다. 거기에다가 인간의 최후의 도전은 죽음의 공포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5절에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우리에게 다가온 최후의 도전이요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영원한 지옥의 종이 되고 이를 극복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고 도전당할 때 이상한 일 당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싸움과 도전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아무도 도전하지 않고 아무도 싸움을 걸어오지 않고 아무런 염려와 근심과 괴로움이 없은 삶이 있다고 한다면 거짓말입니다. 오직 그러한 곳은 오산리 무덤에 가면 찾아볼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찾아 볼수가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아~ 그것 이상하다. 왜 나에게 죄와 세상의 유혹이 다가오느냐. 왜 나에게 이와같은 고통이 다가오느냐. 염려, 근심이 다가오느냐.”
이상할 것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당하는 삶에 고난이요, 도전이요, 괴로움이요,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오직 응전하여 이길것이냐, 패배하여 종이 될 것이냐, 선택은 그길밖에 없습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1980년 3월 파리 부르쉐 병원에 폐수종으로 입원했는데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에 대한 공포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는 가족뿐 아니라 병문안을 온 사람들에게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히스테리를 부렸고 죽음에 대한 극도의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지조차 묻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증세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현대 철학의 큰 발자취를 남긴 위대한 철학자였지만 그의 마지막은 실로 비참했던 것입니다. 결국 사르트르는 1980년 4월 16일 입원한지 한달만에 고통가운데 세상을 떴습니다. 그는 생전에 뭐라고 큰 소리 했냐면 “만일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인간은 부자유하기 짝이 없다. 인간이 자유를 얻으려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말아야 되고 하나님은 쫓아내야 된다.” 그렇게 말한 그가 정작 그 자신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몸부림치다가 죽음의 종이 되어 비참하게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4. 어떻게 응전할 것인가?
그러면 넷째로, 우리는 어떻게 이 도전에 응전할 것입니까?
수없이 도전을 당하는데 응전하여 이겨야 우리는 왕노릇합니다. 도전에 실패하면 개인, 가정, 생활, 자녀 뿐 아니라 사회, 국가, 집단이 종노릇하게 되는 것입니다. 종노릇하고 행복할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왕노릇하면 행복할수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응전할 것입니까?
여러분 삶에 여러 가지 도전이 다가올 때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 때문에 내가 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원망과 탄식, 해답이 없는 마음의 고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다른 사람은 안그런데 나는 이런 고통을 당하느냐, 왜 내게 이런 문제가 다가 오느냐.“ 그런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삶의 여러 가지 고통이 다가오고 도전이 다가올 때 이것을 수용해야 합니다. 저항하고 반발하면 고통은 더 심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5절로 16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통을 수용하라는 것입니다. 나의 몫의 태인 운명으로 받아 들여라. 이는 내 팔자다. 내 팔자니까 내가 누구에게 원망하겠는가. 받아 들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부부들이 서로 마음이 맞지 않고 고통스러워서 제게 신앙상담을 옵니다. 제가 굉장한 신앙상담으로 부부간의 알력과 문제를 해결해 줄줄 아는데 저는 그런 굉장한 것은 없고 간단한 해답이 있습니다. 남편이 “나는 이 여자에게 결혼해서 너무너무나 괴롭다.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어쩔수 없다. 어떻게 할까요?” “당신 팔자다” 부인도 똑같은 말을 하면 똑같이 대답합니다. “이 나쁜 남편에게 결혼해서 가정도 돌보지 않고 자녀도 돌보지 않고 나에게 고통을 주는데 내가 어떻게 합니까?” “당신 운명의 태인 팔자다! 당신에 주어진 십자가를 벗을수 없다. 그것을 왜 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고 내 몫의 태인 운명으로 받아 들여서 최선을 다하여 극복하려고 하라. 벗어 버릴려고 하지말라. 아무리 벗어 놓아도 내 운명이 그런 운명이면 또 다른 사람하고 결혼하면 또 다른 십자가 또 다가온다. 내 몫의 태인 십자가 내가 짊어지고 가야된다.” 할렐루야~ (아멘)
시편 34편 19절에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의인이라고 고난없나요? 의인에게도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고난을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극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벗어 버리려고 애써서는 안됩니다. 안벗어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우리가 고난받을 때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고난을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도와 주시므로 예수믿는 사람은 인생고난의 도전에 대해서 응전할 때 혼자 응전하는 것이 아니고 주와 함께 응전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9절에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약하면 약할수록 주님이 더 능력을 주셔서 그것을 이기게 해주시기 때문에 여러분 다가오는 고난을 원망과 불평, 탄식을 하시지 마시고 인생에 다가오는 도전을 벗으려고 몸부림치지 말고 내 몫의 태인 십자가, 내 운명, 내 팔자로 생각하고 끌어 안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도전은 끌어 안아야지 그를 밀쳐 내서 내가 원망한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끌어앉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 도전을 녹여 버리고 극복하고 승리할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은행장이었던 다우링이 상이용사들의 초청을 받아 특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가 특강하는 곳에 상이용사들이 전쟁에 나가서 눈도 잃어 버리고, 팔도 잃어 버리고, 절름발이도 되고 그리고 크래치를 집고, 혹은 휠체어에 앉아서 강당에 꽉차게 그의 강연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강의 도중에 상이용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들은 패배주의자에 남을 의지하고 국가의 연금이나 축내며 되는데로 살아가는 나쁜 사람들입니다. 왜 열심히 일하지 않고 남에게 의지하려고만 합니까?” 그러자 다우링의 말을 듣고 있던 상이용사들은 그를 향해 맥주병과 재떠리를 던지며 “이 개자식아 입닥쳐라!” 소리소리 쳤습니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고 “당신들의 사고방식이 잘못된 것입니다.” 계속 공격했습니다. 그러자 상의용사들이 미친 듯이 일어나서 그들은 강당으로 뛰어 올라와서 멱살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다우링이 자신의 한쪽 소매를 걷어 올렸습니다. 놀랍게도 팔이 있어야할 자리에 쇠갈고리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한쪽 소매도 걷어 올렸습니다. 그 역시 가짜 팔이었습니다. 그는 바지도 걷어 올렸는데 양쪽모두가 나무다리였습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습니다. “여러분 나는 12살 때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눈위에 10시간동안 버려져 있었습니다. 그 바람에 두팔과 두 다리를 모두 잘라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의욕을 갖고 그래도 최선을 다해 살리라. 남에게 신세지지 않고 살리라. 나는 성공할 것이다하고 마음에 각오하고 내 운명을 원망하지 않고 운명을 탄식하지 않고 내 운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양팔과 양다리가 없는 나도 노력해서 은행장이 되었는데 당신들은 나보다 낫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냥 놀고 먹기만 합니까?” 상이용사들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 고개만 숙일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삶의 고난을 만나면 그 고난에 대해 불평하고 원망하지 말아야 됩니다. 오히려 그것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그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 매섭게 응전해야 합니다. 이 삶의 도전에 이기면 삶에 왕이 되고 지면 패배의 종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브링클린이라는 미국의 뉴스 캐스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은 가끔 우리 앞에 빵 대신에 벽돌을 던져 놓기도 한다. 어떤 이는 원망에서 그 벽돌을 걷어 차다가 발가락이 부러지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이 벽돌을 주춧돌로 삼아 아름다운 집을 짓기도 한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러므로 도전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응전하는가에 따라서 우리 개인의 삶과 국가의 운명이 달라질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의 약속이 우리는 있기 때문에 도전당할 때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도와 주겠는가 그 약속의 말씀을 찾아야 됩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삶에 도전당할 때 거기에 응전할수 있는 무기인 하나님의 말씀을 찾습니다.
시편 119편 48절로 50절에 “또 나의 사랑하는바 주의 계명에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를 묵상하리이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나로 소망이 있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주의 말씀이 위로가 되고 살리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늘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므로 고난이 다가올 때 우리가 그 고난에 응전할 수 있는 말씀을 갖고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말씀없이는 우리는 고난에 대해서 응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고난이 다가올 때 매섭게 기도로 응전하십시오. 제가 매섭다는 말을 하는 것은 희미하게 부드럽게 응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이 내 살을 찢고 뼈를 갈그며 다가올 때 거기에 응전의 기도도 매섭게 하라는 것입니다. 독한 마음먹고 매섭게 열정적으로 자주자주 끈질기게 도전에 대해서 응전의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29절에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예레미야 33장 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약속이 있는 이상 우리는 도전이 올때마다 엎드려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인생에 다가오는 심하고 고통스러운 도전이 지나고 나면 큰 유익이 되는 것은 도전을 당하기 전에는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너전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큰 시련과 환난과 질병의 도전을 당하면 마음이 깨어지고 하나님께 몸부림치고 매섭게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열적으로 하나님을 찾게 되고 그리고 결국 도전은 극복되고 왕으로 승리하게 되고 그 자리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실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로 9절에도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귀의 도전에 대해서 응전하라.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고 울고 손들지 마라. 내게 다가온 십자가니 내몫의 태는 도전이니 내가 응전해서 극복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말씀에 서서 기도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길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 다니는 한 자매님 최옥자 집사님의 간증을 읽어본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초등학교 다니는 딸이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책가방을 안고 쓰러졌는데 자매님이 살펴보니 딸의 목이 심하게 부어 있었습니다. 놀란 자매님이 딸을 안고 병원에 갔더니 갑상선 기능저하증이라는 병명이 나왔습니다. 이 때문에 자매님의 딸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아에 성장이 멈추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의사는 오랜기간 약물치료를 한다해도 완치는 어렵다고 했습니다. 자매님은 딸의 병고침을 위해서 10년 넘게 꾸준히 기도했지만 딸이 대학이 들어간 후에도 초등학교 3학년 정도의 키밖에 자라지 않았습니다.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에 그 문제만을 놓고 집중적으로 작정기도를 하기로 했습니다. 하루에 2시간 이상 기도하고 1시간 이상 찬양하고 주기도문을 3백번이상 외웠습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믿음으로 끈질기게 기도한 결과 마침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병원에서 다시 검사해 보았더니 12년 동안 앓던 갑상선이 수술을 해도 이보다 더 완벽하게 고칠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게 나아 버리고 만것입니다. 자매님은 갑상선 기능저하라는 그 딸의 병의 도전에 담대하게 응전해서 하루 이틀도 아닙니다. 1년, 2년, 3년, 4년, 5년, 6년, 7년, 8년, 9년, 10년, 11년, 12년을 줄기차게 응전한 결과에 승리해 버리고 말은 것입니다. 만일 낙심하여 이 도전에 응전하지 못했더라면 그의 딸은 평생에 성장을 중지하고 처참한 일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도전 때문에 그 딸은 갑상선 기능저하에서 이기고 그 다음 키가 쑥쑥 자라서 보통 사람과 같은 정상인의 삶을 살수 잇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도는 아래에서 줄을 당겨 하나님의 귀밑에 있는 종을 울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한번 당기면 땡그랭하고 마니까 하나님 못들으실수도 있지요. 느슨하게 당기면 안울리수도 있지요. 계속 당겨여 해요. 땡그랭, 땡그랭, 땡그랭... 12년을 기도한다는 것은 여러분 마귀도 기절초풍을 하고 도망칠 노릇입니다. 그런 각오가 있고 그런 인내력이 있어야 도전에 대한 응전을 하고 승리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도전에 대해서 응전할 때 굳게 믿어야 됩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다는 바울선생처럼 결국에는 우리가 이깁니다. 왜, 예수께서 싸워 이겨 주셨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어떤 도전에도 종국에는 이깁니다. 그런 믿음을 굳세게 우리가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3절로 24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좋은 결과가 올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늘 마음속에 의심하고 불안에 떨면 되지 않지요. 승리의 꿈을 꾸고 고백을 해야 됩니다. 우리가 도전을 당할 때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서고 믿고 기도할 때 우리 마음속에 패배의 꿈을 가지면 안됩니다. 내가 이모든 것을 이기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어 나올것이라는 그런 꿈을 가지고 그런 입술로 고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꿈도 없고 고백도 안하면 패배자가 되고 말지요.
시편 30편 4절로 5절에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찌어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성경에 보십시오. 노여움은 잠깐이요, 은총은 평생이고 울음은 저녁 올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온다는 것입니다. 결국에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마침내 좋은 일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11절에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우리가 참고 이기면 이렇게 왕노릇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뒤로 물러가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미국의 권투선수 진 터니의 간증을 읽고 큰 감동을 받은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그가 국민적 권투 영웅이었던 잭 텐퍼스와 해비급 챔피언 타이틀을 놓고 시합을 벌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신문사에서 잭 텐퍼스가 진 터니의 목을 부러 뜨릴것이라는 기사를 써서 크게 보도했습니다. 그 신문을 본 진 터니는 그날부터 자신의 목이 달아나는 환상에 사로잡혀 괴로워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생각하면 아이구~ 잭 텐퍼스가 와서 자기를 때려서 목이 툭 떨어져 나가는 그것이 자꾸 머리속에 떠오르며 그는 마음속에 불안하고 괴로워서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괴로웠던지 그는 며칠동안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나중에는 완전히 힘을 잃고 크게 절망해서 뭐 권투시합할 필요없이 자기 목이 날라 갔다고 생각을 하고 그것을 꿈꾸고 그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시합 며칠 앞두고 어느날 진 터니는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부정적인 기사가 실린 신문을 버리고 대신 성경을 읽기 시작한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고 기도하며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수많은 관중 앞에서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믿음을 얻었습니다. 할수있거든 무슨 말이냐 믿는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그리고 기도하면서 마음에 꿈을 바꾸었습니다. 목이 떨어져 날라가는 꿈이 아니라 그 수많은 관중앞에서 자기가 상대편의 복서를 쓰러 넘어 뜨리고 만중에 박수를 받는 것을 마음속에 꿈꾸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주의 도움으로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내 목이 날라갈것이 아니라 내가 승리할 것을 꿈꿉니다.” 그는 마음에 꿈을 가지고 “나는 반드시 승리한다. 텐퍼스는 내 주먹에 나가 떨어졌다. 나는 이제 세계 챔피언이다.”고 끊임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외쳤습니다. 그는 꿈을 바꾸어 놓고 입술에 고백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러한 꿈을 꾸며 입술로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속에 있던 불안이 모두 사라지고 새로운 힘이 솟아 오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운명의 시합날 진 터니는 그가 꿈꾸고 고백한 대로 잭 텐퍼스를 이기고 해비급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시합후에 기자가 승리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기자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긍정적인 꿈을 꾸지 않았더라면 저는 무참히 쓰러졌을 것입니다. 그러다 저는 부정적인 꿈대신 하나님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중에 승리의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늘 입술로 시인했습니다. ‘나는 반드시 챔피언이 된다.’ 날마다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승리할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라할지라도 승리의 꿈을 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총을 의지하고 말씀에 서서 승리의 꿈을 꾸어야 됩니다. 사망대신에 생명을 패배대신에 승리를 질병대신에 건강을 실패대신에 성공을 꿈꿔야 되는 것입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우리의 입이 무엇으로 엽니까? 꿈꾸므로 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생각과 꿈을 가지고 끊임없이 승리를 입술로 시인하며 나가야 도전에 대해서 응전하고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는 “모든 문명에는 도전과 응전의 법칙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모든 문명은 탄생하고 성장하는 1막과 성장을 멈추고 점차 쇄퇴하여 붕괴되어 가는 2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 문명이건 그 문명이 직면하는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하면 성장을 계속하지만 만일 어느 하나에 응전이라도 실패하면 그 문명은 쇠망하고 만다고 말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원시문명이 발생했지만 자연과 사회환경의 도전에 올바로 응전한 문명만이 살아남았습니다. 이집트문명과 수메르문명은 가뭄이라는 도전에 인도문명은 열대산림의 도전에 안데스 문명은 고온사막이라는 도전에 중국문명은 늪지대와 홍수라는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했기 때문에 위대한 문명으로 성장할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 개인도 다가오는 도전에 응전하여 성공해야 계속 자라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지만은 패배하면 그 인생은 그로부터 쇠퇴하고 마는 것입니다. 한 사회와 국가도 거기에 다가오는 도전에 대해서 끊임없이 응전하여 성공하면 그 나라와 그 민족은 성하고 자라고 축복받지만 패배하면 쇠퇴하고 망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결론]
크고 작은 싸움이 없는 삶은 없어요.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성공하기 위해서는 끝없는 경쟁과 시련의 산과 강을 건너야만 합니다. 삶의 도전에 응전하지 못하면 노예가 되고 삶의 도전에 응전하여 이기면 왕노릇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때부터 죽을때까지 삶에 여러 가지 도전을 당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강하고 담대하게 응전하여 개인, 가정, 사회, 국가 할것없이 온 삶이 승리하고 왕노릇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아담과 하와는 삶의 도전에 응전하지 못하고 패배하여 쇠망하고 말았습니다.
아담과 하오의 흉을 보는 우리들도 그와 같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사탄의 맹렬한 도전에 대해서 말씀에 서서
단호하게 응전하여 그를 이겨 버리고 왕노릇했습니다.
아버지여 아담 안에서 종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다 왕노릇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성령의 도움으로
어떠한 삶의 도전도 두려워 말고 우리가 그것을 받아 들여서
극복하게 도와 주시옵시고 승리하게 도와 주시옵시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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