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꽃씨와 도둑>은 최용우 개인 책방의 이름입니다. 이곳은 최용우가 읽은 책의 기록을 남기는 공간입니다. 최용우 책방 구경하기 클릭! |
저자 : 김남준 | 출판사 : 솔로몬 판매가 : 5,500원 → 4,950원 (10.0%, 550↓) 창세기의 신앙부흥창세기 35장 1절에서 15절 사이에 나오는 야곱의 집안의 신앙 회복 기사를 통하여 참된 부흥의 성경적 원리들을 밝히고, 이것을 토대로 이 시대 조국 교회 현실을 진단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큰 각성과 참된 신앙 부흥을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방법과 원리들을 다루었다. 간간히 교회사의 예증들을 보이면서하나님이여!주님은 하늘로 부터이 땅 위에 친히 강림하소서이 조국교회 위에 임하기 위하여 길이 필요하시다면나의 육체를 가르사당신의 오실 길을 삼으소서나의 몸과 마음을 드리나이다기꺼이 그리고 진심으로[더보기▶] |
책을 읽으면서 밑줄 그은 부분을 쳤습니다.
----------------------------------------------------------------------
1.영적인 각성을 대망하기 이전에
영적인 각성의 역사에 있어서 공통된 사실은, 그 위대한 영적 각성과 부흥은 항상 교회의 절망적인 부패와 그리스도인들의 타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역사상 위대한 영적인 각성이 있기 전에는 교회는 반드시 절망적인 영적인 타락과 무지의 늪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축복스러운 영적인 각성을 대망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 조국의 교회와 나의 영적인 상태의 진실을 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과 교회가 얼마나 하나님의 축복에서 멀어져 있으며, 우리의 영적인 상황이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태에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처한 영적인 상황에 대해 안일한 종교적 위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상실해버린 하나님의 축복을 헤아리고, 그분의 임재의 경험을 상실해 버린 까닭이 무엇인지 통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2.오직 하나뿐인 최선의 대안
한 20년 전에 한국 교회의 현실을 비판한 글들을 읽어보시고 오늘날의 그런 종류의 글들을 비교해 보십시오. 제목들은 달라졌어도 그 내용은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오래도록 지적을 받아온 개 교회의 이기주의, 성직자들의 수준 저하, 교인들의 기복적이고 미신적인 신앙관,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 등 무수히 지적을 받아왔습니다. 지적들은 명쾌하고 개선의 논리도 분명하나 나아지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똑같은 문제들로 인하여 고통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해결 방법은 있지만 그 모든 것 중의 최선의 대안은 없습니다.
최선의 대안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 자신이 교회의 주인이신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우리의 잠들어 있는 신앙을 각성시키시고 부흥을 주심으로써 우리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여호와가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스스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창28:22)
3. 하나님의 임재
신앙부흥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 되는, 하나님 앞에서의 임재의식(臨在意識)에 대해서는 별로 쓸 말이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로 해명되고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섰던 하나님의 사람들의 경험을 빈번히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더 깊이 묵상하고 깊은 뜻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던 시내산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체험이나, 성전에서 선지자로서 소명을 받던 이사야의 경험, 이후 선지자들의 소명과, 임하시는 권능의 증거 등이 모두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재의 진수는 바로 이 임재를 느끼는 것입니다.
4.각성된 모임과 예배
그리스도인들이 각성되고, 교회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부흥을 맞을 때 거기에는 아주 뚜렷하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때 그들은 하나님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 지극한 거룩하심과 엄위로우심과 영광스러우심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티끌같이 하찮은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배와 기도회는 눈물이 마르지 아니하고, 사람들은 기쁨으로 혹은, 죄에 대한 슬픔으로 흐느껴 울며 집으로 돌아가기 일쑤입니다. 기도회에서는 사회자를 젖히고 성령께서 직접 모임을 인도하시는 증거가 현저히 느껴집니다. 한 자리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깊은 기도에 들어가게 되고 모인 사람들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몸소 체험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 곳에서 먼저 두려움을 느끼고, 이어서 그 두려움은 변하여 찬양이 됩니다. 사람들은 세속적인 일에 관심이 사라지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일에 자신을 모두 드리고 싶어합니다.
5.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오늘날 우리 조국교회(祖國敎會)는 어떠합니까? 경제성장 위주로 치닫는 사회와 이로 말미암는 갈등의 파장 속에서 우리 모두 겨레의 도덕적 위기를 말하고, 영적인 암흑을 말합니다. 민족은 정신적 스승을 잃어버린 상태에 있습니다. 개화 이후 우리는 수많은 국가적인 위기들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난국들은 대부분 외세에 의한 위기였고, 정치적인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민족이 당면하고 있는 위기는 단순한 외세에 의한 위기도 아니고, 정치적인 위기상황도 아닙니다. 보다 심각한 것은 경제성장 속에서 무너져버린 동포애와 몰가치한 시대의 풍토 그리고 피폐해진 국민 정신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총체적인 위기 상황 한 가운데는 영적각성(靈的覺醒)을 필요로 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6.세상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교회가 할 일은 아니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모든 영적 각성과 신앙부흥운동의 시작입니다. 한 시대와 교회의 잘못된 것은 결코 이 세상의 가치 기준이나 세상이 "교회는 이러하여야 한다"고 제시하는 요구 앞에 섬으로써 고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변혁이 이러한 기초 위에 이루어진다면 결코 하나님이 교회에 약속하신, 세상을 구원하는 기관으로서의 영광스러움을 회복하지는 못 할 것입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이 세상의 비위를 맞추는 데 그치고야 말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세워졌고 성경 계시의 증언을 따라 이 땅에 하나님의 세우신 기관으로서 나타나야 합니다.
7.세속화(世俗化)
이 시대의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가 세속화(世俗化)의 문제라고 하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 올 때, 버리도록 도전을 받았던 세상의 기준과 가치들이 교회에 의하여 다시 모아지고, 자신은 변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교회는 자신이 거듭난 가치의 기준을 따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실로 이 시대의 조국 교회에 필요한 것은, 잠시 일상적인 기능에 대한 기대에 회의를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잠시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면서 불결한 세속의 물결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것입니다. 새롭게 비취시는 하나님의 얼굴빛을 받기를 사모하면서, 이것을 통해서만이 자신들의 영혼이 새롭게 되고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증인이 될 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8.영적인 각성과 부흥은
영적인 각성과 부흥은 자기의 존재 속에 내재하고, 일상적으로 계속 되어 온 습속에 들어붙은 세속주의를 미워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으려는 갈망들을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속에 심어줍니다. 위대한 각성과 부흥이 일어나던 시기의 그리스도인들이 탁월한 정도로 높은 수준의 경건을 실천하며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영적 변화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훈련에 의해 체득하고 실천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합니다. 영적인 요구를 따라 사는 경건한 삶은 물이 흐르는 것처럼 쉽고 자연스럽지만, 영혼의 변화로 말미암은 내적인 요구 없이 실천하려고 하는 경건의 삶은 언제나 부자연스럽고 불안합니다.
9.한 사람을 부르시는 부르심
하나님의 구속계시의 공동체를 각성시키는 위대한 영적 각성과 부흥을 야곱의 집안에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야곱 한사람을 부르시는 부르심과 각성에의 촉구로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수의 움직임에 유의하나, 하나님은 소수를 자기편에 서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일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한 사람, 그가 곧 다수입니다."
사람은 방법을 찾아다니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십니다.(막3:13) 사람은 모임을 결성하고 후원자를 찾아 다니지만, 하나님은 한 사람을 당신 앞에 세우심으로써 위대한 영적 각성과 부흥의 새벽을 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방법을 사용하시지만, 그것으로 위대한 일의 출발점을 삼으시지는 않습니다. 이 일은 언제나 하나님의 심정으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형편과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과 참담하도록 가난한 그들의 영적인 현실과 무력함 사이에서 애통하는 사람, 혹은 소수의 무리들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 한사람이 바로 당신일수도 있습니다.
10.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뜨거운 열망
우리가 온 마음과 뜻을 다하여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다 허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우리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사역의 목표나 교회의 선교의 비전도 아닙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일차적인 관심은 잃어버린 세상의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관심과 비전은 하나님의 영광(榮光)입니다. 우리의 모든 추구는 이것과 관련이 있으며 이것을 위한 것일 때에 비로소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입니다.
커다란 영적 각성과 부흥이 있기 전에 하나님 앞에 서도록 부르심을 받은 소수들의 뚜렷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이 위대한 부흥을 갈망하는 까닭은 그 부흥과 영적인 각성의 때에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높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11. 오늘날 우리들은 너무 교만합니다.
우리 자신들이 무엇이나 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감히 자신들을 하나님의 파트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없으면 하나님은 아무것도 못 하실 분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깊은 인식이 없을 때 우리는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티끌과 같은 존재들임을 도무지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겸손하게 되는 길은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인지를 경험함으로 아는 것입니다. 흔히 하나님은 교리적으로 너무 가까우나, 영혼이 그분의 임재를 느낌에 있어서는 너무나 멀리 계시는 분입니다.
12.하나님의 방법
영적인 상황이 곤경에 처하고, 사회적으로 위기의 국면에 마주할 때에 사람들은 흔히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지혜를 모으고 이론을 세우고 모임을 만드는 일에 열중합니다. 심포지움을 열고 떠들썩한 조찬기도회로 모이고 대규모의 집회를 준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너무나 단순합니다.
그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당신 앞에 마주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분 앞에만 홀로 마주서서 펼쳐진 현실 상황과 영적인 현실에 대한 주님의 심장을 그들도 느끼게 하시는 것입니다. 감정이입이라고 할까요? 일종의 그런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가난한 영적 상황과 자신들이 직면한 현실적 위기 상황들을 직시할 수 있게 될 때 그들은 그 모든 문제들 앞에서 자신들이 너무나 작고 초라함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부흥을 구하는 출발은 현실 상황에 대한 인간의 한계를 전(全)존재적으로 고백하는 일에서부터 출발합니다.
13.얼음보다 더 차가운 것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계3:17-18)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처럼 하나님의 시각에 서서 교회를 보게 될 때 하나님의 심정이 그들의 심령 속에 전해지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그들의 가슴에 일찍이 없었던 하나님의 열정, 혹은 정염(情炎, pathos)을 흘려 보내줍니다. 우리는 너무나 차가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특히 정통파라고 자부하는 교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무디(Moody)는 당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얼음보다 더 차가운 것을 원하십니까? 장로교 신자들이 모인 예배로 가 보십시오."
14.우리가 구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지 않은 기질적인 열정이나 흥분과, 영적인 각성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정염은 벌써 그 근원으로부터 구별됩니다.
죠나단 에드워즈는 천성적으로 따뜻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성격은 전혀 사교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심방을 통해 성도들을 돕는 것을 그만두고 하루 열세시간 이상씩 성경을 연구하는데 몰두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의 정염(情炎, pathos)이 임하였습니다.
청교도 역사상 이 사람처럼 차가울 정도로 냉정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인데 그의 설교와 편지들을 읽어보면 어떤 뜨거움이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정염이 결코 그 사람의 기질의 문제에 매이지 아니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지 않은 열정은 어떠합니까? 기도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계곡을 돌아올지라도 하나님의 보좌는 고요합니다. 외치는 설교 소리는 회중을 잠에서 깨울 수 있어도 심령속에는 적막이 감돕니다. 우리가 구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의 시각에 서서 깨닫는 각성을 통해 주어지는 정염입니다.
15.설교단이 권위를 상실한 두 가지 이유
종교개혁 이후 오늘날처럼 설교단이 권위를 상실해버린 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강단의 권위에 대한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비성경적인 제사장적 접근이고, 또 하나는 강단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곳이라는 사실에 대한 심각한 회의가 그것입니다.
전자는 구약의 제사장과 오늘날의 설교자들을 동일한 맥락에서 보는 신학적인 오해에서 기인합니다. 오늘날 강단을 섬기는 사역자들에게는 구약의 제사장적인 권한이 없음을 기억하여야합니다. 제사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폐하여졌고 제사장의 직분은 그리스도 자신에 의하여 성취되었습니다.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물과 피를 흘려 뿌리신 피 길을 지나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당당히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벧전2:9)
또한 강단의 설교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대한 회의주의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1950년대 이후 유행해 온 비성경적인 부흥설교가 이에 대한 상당한 책임을 설교자들 앞에서 져야 합니다. 그들의 설교를 듣고 있노라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생각보다는 한편의 개그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느껴질 뿐입니다.
16.부흥의 시작은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대체로 무엇을 가질까(what to have)에 몰두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삶은 무슨 일을 할까(what to do)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부흥에 대한 소망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까(what to have)에 대한 고민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부흥의 시작은 무엇을 하는 것(to do)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되는 것(to be)으로부터 시작합니다. \
17.이 술집을 폐업함
영적인 각성과 부흥을 통해서 사회는 도덕(道德)적으로 현저히 정화되고 사람들의 삶은 의로워집니다. 미국에서 1851년, 각성과 영적 부흥을 동반한 대대적인 기도의 물결이 일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때 도회지에서 나타났던 재미있는 현상 중 하나는 극장과 술집의 폐업이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영적인 위기를 깨닫고 각성하자 그들은 회개(悔改)하였고 회개한 그들은 복스러운 부흥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인하여 혹은 하나님 앞에서 혹은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고, 도시 전체가 죄(罪)에 대한 애통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집회에서 돌아온 그들은 자기가 경영하는 극장을 기도 처소로 간판을 바꾸어 달았고, 술집을 하던 사람들은 자기의 술집 문 앞에 이런 팻말을 써 붙이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술집을 폐업함. 어제 주인이 회심하였음"
18.세상을 향한 교회의 영향력의 회복은
영적으로 각성된 사람들에게는 거룩함에 대한 말할 수 없는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그 목마름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들은 사회가 공평을 회복하고 민주화가 되고 법치국가가 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각성과 부흥운동에서 사회의 도덕적인 수준이 고양되는 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기를 갈망하는 추구로 인하여 일어나는 주변적인 효과입니다. 따라서 각성과 부흥을 통해서 참으로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 서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영향력과 사명을 회복하는 모든 것이 여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19.세상에 대하여 교회가 필요한 것
세상에 대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독교의 필요성을 세상이 인정해주는 지적 동의(知的 同意)가 아니라, 영적 권세(靈的 權勢)입니다.
교회가 부흥을 맞고 영적 權勢를 가진 공동체로 나타날 때 세상은 교회로부터 어떤 권위(權威)를 느끼게 됩니다.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교회에 성령의 능력이 부어질 때 세상은 그 교회에게서 자기들에게는 없는 어떤 권세를 의식합니다. 그리고 권위를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 속에서 죄인의 방만한 심령을 압도하는 이러한 권세가 느껴지십니까? 사람들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낍니까? 성품이 경건해서가 아니라, 어떤 영적인 힘이 느껴짐으로 두려움과 존경에 사로잡혀서 예배드리고 설교를 듣습니까? 그리하여 세상을 압도하는 진리의 權威가 느껴집니까? 이것은 단순히 설교 안에 깃든 정연한 논리의 체계가 사람들의 지성을 굴복시키는데서 오는 그런 위세(威勢)와는 다른 것입니다.
20.교회의 역할은
교회는 단지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사회에 미담(美談)을 만드는 일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귀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교회(Church of God)는 그 이상(以上)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기관으로서, 그분의 백성들을 천국의 백성으로 양육하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등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도록 부름 받은 공동체입니다. 이것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교회의 이상(이상)은 이 땅의 모든 육체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사40:5).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영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1.하나님이 공동체에 임하실 때
하나님은 本質상 하늘에 속한 초월적인 존재이십니다. 그분은 榮光의 至尊이십니다. 그는 모든 능력의 근원이시니 그분에 비하면 세상의 능력과 권세는 지푸라기와 같고, 그림자 같을 뿐입니다.
하늘에 계시고 전능하시고 영광스러우시며 위대한 능력이시며, 사랑의 원천이시며 지극히 嚴威로우시고 超越者이신 그분이 이 땅에 속한 인간들의 공동체에 임하십니다. 성령으로 내려 오사 잠시 특별한 능력으로 거하십니다.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적인 은총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어주십니다. 이때 그 공동체에 찾아오는 변화는 더 이상 사람들 사이에서 감춰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뵙고 산에서 내려왔을 때 백성들이 두려워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22.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하나님의 시각에서 자신과 교회의 영적 현실을 바라보고 그분을 뵙기를 갈망하는 각성은 이미 부흥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참된 부흥은 거기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을 심대히 경험하게 합니다. 교회로 하여금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게 합니다. 진흙과 같은 육체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합니다. 차갑게 읽혀지며 전승되어 오던 진리들 속에 깃든 "자유케 하는 능력"(요8:32)을 체험하게 만들어 줍니다.
23.하나님의 준비시킴
하나님께서 위대한 부흥을 통해서 우리를 당신의 임재(臨齋)속으로 들어오게 하시는 영적 부흥의 진수(眞髓)를 경험하게 하심에 있어서 우리를 준비시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을 가난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왜 이리 부요한지요. 우리의 속사람은 그분께서 한없는 은총을 주시고 위대한 능력을 드러내 보여 주시며, 심지어 우리의 진흙 같은 육체를 영광스러운 임재 안에 세워두시기 까지는 도무지 완전한 행복을 느낄 수 없는데 우리의 겉 사람은 우리의 영혼의 이 같은 부르짖음을 외면하기 일쑤입니다. 이 영혼의 부르짖음이 우리의 가슴에 들리지 아니하는 것은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우리의 마음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우리의 마음은 도무지 하나님을 향하여 가난해질 줄 모릅니다. 그분과의 완전한 사귐에 목말라할 줄 모릅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하나님 이외의 것들에 얼마나 골몰하는지 이처럼 애처러운 영혼의 탄식어린 애원을 들으며, 그와 하나되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신 하나님만을 바라는 일에 자신을 드리지 못하면서 살아갑니다.
24.창세기의 신앙부흥을 다시
주께서 이 조국 교회에 복을 주시사 우리로 하여금 자신들이 세겜에 있는 것을 알게 하시고, 벧엘로 올라갈 결단을 하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특별히 말씀으로 섬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야곱처럼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사 강단에서 폭포수와 같은 복음의 선포가 터지게 하시고, 그 물을 인하여 이 땅의 모든 영혼들이 생명을 얻는 역사가 있기를 원합니다.ⓒ김남준 (열린교회 목사)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