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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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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욥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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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4년 9월 5일 주일3부설교 |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더불어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한 왕이 유명한 역사학자들을 다 불러 모아 "세계사를 한권으로 압축해서 올려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 역사학자들은 모여서 열심으로 세계사를 압축하여 한권의 책으로 갖다 놓으니 왕이 보시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이것은 너무 두꺼워서 읽을수가 없다. 반으로 줄여라." "아이고 누가 이것 읽느냐. 또 반으로 줄여라." "이것도 너무 두꺼워서 못읽겠다." "또 줄여라" 그래서 나중에 종이 한페이지 되었습니다. 또 반으로 주려. 또가서 반으로 줄였습니다. 또 주려라. 그리고 자꾸 줄이니까 나중에 세계 역사가 종이 한 장이 되었어요. 그 종이 한 장에 뭐라고 써있냐면 “인류역사는 고난의 역사였다.” 그것이 학자들이 종국적으로 임금님에게 바친 축약된 역사기록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바로 고난 그 자체인 것입니다. 인생이 당하는 고난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피할수 없는 운명입니다. 태어난 후 일생을 살아 노년이 될 때까지 살기위한 경쟁속에서 수많은 심신에 고통을 당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경제적인 사회적, 인간관계, 육신의 질병, 그리고 최후에는 죽음의 고난을 겪게 됩니다. 고난을 즐기는 사람봤어요? 고난 당할 때 그것을 환영하고 기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하지 않고 살수 없다는 사실은 모두다 알고 있지요. 그렇다면 고난의 의미를 확실히 알고 고난을 우리 삶의 보탬이 되게 해야지요. 고난이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사자가 되게 만들어서는 안될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고난을 우리에게 유익이 되게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고난에 대한 정당한 인식을 가지고 잘 이해해서 고난을 받아들이고 소화시키면 고난은 우리에게 큰 축복이 될 수가 있습니다.
[본론]
1. 고난은 자기를 성찰하고 인격적으로 성숙하게 한다
첫째로, 왜 고난이 축복이 되냐면 자기 성찰의 기회가 되고 인격적인 성숙을 가져올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난 당해야 사람들은 회개를 합니다. 모든 것이 다 평탄하고 좋을때는 회개할 이유를 느끼지 않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나 내 가는길이 험해지고 역경이 다가오면 무엇이 잘못되었나. 내가 벌받은 일을 하지 않았나. 제일먼저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 길러보면 알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병들어도 부모가 생각하는 것은 “내가 뭘 잘못했는가. 어린 아이에게 왜 병이 드는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67절에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자기 마음대로 살던 사람도 채찍을 맞고 고난 당하면 하나님 법도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양떼를 기르는 목자가 양이 바른길로 가지 않고 잘못된 길로 가면 막대기로 때리잖아요. 맞으면 바른길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자꾸 끝없이 잘못된 길로 가다가 나중에 사나운 짐승에 잡혀 찢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시편 34편 18절에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마음이 왜 상합니까? 고난 당하니까 마음이 상하지요. 마음이 상하면 회개하고 자복하게 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고난은 우리 마음을 상하게 해서 회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46년 동안 목회하면서 평탄한 삶중에 회개하는 사람은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평안하고 좋은데 왜 회개합니까? 그러나 고난당하면 사람들은 회개를 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자기성찰의 기회가 되고 인격적으로 성숙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민족이 지금 상당한 고난에 처해있지 않습니까? 정치적으로 혼란스럽고 경제적으로 고통스럽고 어디로 우리가 가는지 목표가 분명하지 않고 꿈이 희미합니다. 왜, 이 고난을 통해서 우리민족 전체에게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 축복을 받고 은총중에 살면서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인본주의로 살고 세상을 따라 산죄를 회개하고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신호라고 우리는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속이 상합니다. 마음이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므로 민족적인 회개가 일어나고 국민적인 회개가 일어나면 하나님이 우리를 성숙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교만하고 자만에 차고 경거망동하는 삶을 사는 사람도 고난을 당하면 깨어지고 겸손하고 자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뭐 좀 일이 잘되면 온 세상이 자기것으로 생각하고 거만하게 행하고 경거망동하게 행하는 사람 많습니다. 그러나 사업에 실패하고 혹은 직장을 잃고 불처의 병이 들고 큰 시련에 부딪히면 박살이 나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71절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옛날에는 하나님 말씀같은 것 거들떠 보지도 아니하고 교회도 오지 않고 설교 말씀 듣지 않던 사람도 고난당하면 깨어져서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에게 절대 은혜 안주십니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은혜는 높은데서 낮은곳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물이 높은데서 낮은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우리가 낮아지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넘쳐납니다. 교만하고 스스로 높아진 곳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조각하는 사람을 보십시요. 큰 바윗덩어리 갖다놓고 난 다음에 그는 그 바윗덩어리 속에 자기가 만들 조각품을 꿈꾸어 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볼때에는 하나의 자연적인 바윗덩어리인데 그 사람은 그 바위속에 자기가 조각할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고 끌을 때려서 혹은 징으로 쳐서 바위를 찍어냅니다. 바위 찍어내고 또 찍어내고 또 찍어내고 또 찍어냅니다. 그것은 징의 찍어내는 역사를 통해서 점점점 아름다운 조각품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바라보고 작품을 만들려고 생각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아담과 하와 이후로 타락한 자연의 반석같은 우리들을 택하여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작품을 만들려고 하는데 그대로 내버려 놓고 작품이 됩니까? 하나님이 징을 들고 망치로써 때린 것입니다. 아프지요. 우리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가면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 우리는 성숙한 크리스챤이 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아름다운 하나님의 예술작품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회개시켜 주고 우리를 성숙시켜 주는 큰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우리가 받아들여서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면 고난은 우리에게 좋은 유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고난은 자아가 깨어지게 한다
둘째로, 고난은 완악한 우리를 깨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도 스스로 깨어지면 참 좋아요. 깨어져서 주님께 순복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내 마음 나도 몰라. 내가 마음을 아무리 깨뜨리려고 해도 안깨어지는 것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을 깨뜨리는 것은 우리의 손에 있지 않고 고난의 손에 있습니다. 고난이 오면 자지가 깨어지고 또 이웃도 소중하게 여깁니다. 고난이 오지 않고 안깨어졌을때는 완악해져서 이웃 사람들을 무시합니다. 남편이 완악한 남편은 부인이 아무리 충고해도 듣지 않아요. 성경에는 아내는 돕는 베필로 주었다고 했는데 인류비서 아닙니까? 하나님이 돕는 베필로 주었는데 모든일에 아내의 충고를 기울여 들을수 있는 겸손함이 있으면 굉장한 도움을 받을수 있는데 교만할때는 그런 것 안들어요. “무슨 잔소리냐. 시끄럽다. 조용하라.” 그렇게 말하잖아요. 이웃의 충고를 듣지 않을때 사람은 위험한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아~ 이젠 내가 잘났다.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다.” 그래서 이웃사람이 충고하고 잘못됨을 지적할 때 반발하고 이를 싫어하고 듣기 원치 아니하면 그분은 이미 낭패와 실망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사람이 이웃의 충고를 싫어하면 벌써 재갈길 다간 것입니다. 욥은 큰 시련 당했을때 욥기 42장 6절에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기가 깨어졌습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말한 것입니다.
자기가 깨어져야 남을 낫게 여기지요. 이웃의 충고에 기를 기울이고 항상 내 탓이라고 하다가 내탓을 인정하고 이웃에게 귀를 기울이면 얼마나 큰 축복이 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 자녀들도 길러보면 그렇습니다. 일이 잘될때는 “내가 실력이 있어 총명하고 능력이 있어서 잘된다”했다가 일이 안되면 조상탓을 합니다. “우리 부모 잘못 만나가지고서. 우리 조상탓으로 내가 잘못됐다.” 그럴 리가 있냐. 자식길러 보면 다 알수 있습니다. 여러분. 잘될때에 부모님 덕분으로 잘됐다는 자식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못될때에 부모가 잘못해 주어서 자본 안대주어서 교육 못시켜 주어서 뒤를 안밀어 주어서 못됐다고 못되는 것은 조상탓을 할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사람이 깨어지고 겸손해지고 낮아지면 모두다 네 탓이라고 하던 마음이 내탓으로 변합니다. 내가 잘못했다. 자기 부인에게도 “여보, 내가 잘못했오.” 부인도 남편보고 “내가 잘못했오.” 이웃에게도 “내가 잘못했오.” 자기의 탓을 알고 깨어지는 사람은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른 사람 탓으로 돌려요. 그러면 희망이 없지요. 자녀들을 길러보면 아버지가 불러서 “야 이놈아. 이런 이러한 일을 잘못했지 않으냐?” 그러면 그 자리에서 “아버지 잘못했습니다.” 정말 회개합니다. 그러면 좋은데 꿇어앉아 있다가 나가서 엄마에게 “엄마 일러줬지? 엄마가 다 일러줬기 때문에 아버지가 나를 불러서 꾸짖지 않느냐?” 그러면 꾸짖음이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자기 잘못한 것 회개하지 않고 “엄마가 고자질 했구나. 형이 고자질했구나. 아우가 고자질했구나.” 자기 타당화를 하고 오히려 자기탓으로 돌리지 않고 남의 탓으로 돌리면 희망이 없잖아요. 길거리 가다가 종종 자동차 운전하다가 사고가 나면 서로 나와서 길거리에서 고함고함을 치는 것을 봅니다. 고함 큰 사람이 이기기 때문에. 고함을 적게 하면 안되므로 네 탓이다. 내 탓이다. 할것없이 전부 네 탓입니다. 당신 잘못으로 사고났지 않느냐? 아니야 당신의 잘못으로 사고났지 않느냐? 그래서 고함소리가 커져서 온 길거리에 고함소리가 꽉 들어차게 되는 것입니다. 내탓이라고 하는 사람 좀처럼 발견할 수 없어요. 그러나 고난을 통해서 깨어지게 되면 겸손하게 낮아져서 사건을 해결할 때 자기를 먼저 살피는 것입니다. 자기 타당화하지 않고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고 고백하는 사람은 도움을 받을수 있고 긍휼을 입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났다고 하면 전부 다른 사람 잘못없고 주님께서 누가복음 6장 42절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위선자, 교만한자는 자꾸 남의 허물만 들추어 냅니다. 이것도 너 잘못했다. 저것도 너 잘못했다. 남의 허물만 바라봐야. 외식하는 자, 위선 자, 교만한 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깨어지고 겸손하게 된 사람은 자기의 잘못을 먼저 회개하고 자기눈의 들보를 뽑고 그리고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뽑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히브리 격언에 “하나님은 부서진 것들을 사용하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단단한 곡식은 부서져야 빵을 만들잖아요. 밀가루, 보릿가루를 어떻게 만듭니까? 밀이나 보리를 부서야 가루가 되어야 빵을 만들어서 먹을수가 있지 않습니까? 포도주를 만드는 포도는 짓니겨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스가 나와서 포두주를 만들 수 있잖습니까? 올리브 열매를 짓밟아야 올리브 기름이 나오잖아요. 깨어지지 않고 기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 음식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씹어서 입속에서 완전히 저장해서 가루를 만들어야 그리고 죽같이 만들어야 소화를 시킬수 있습니다. 요사이 우리가 장수하는 이유도 이빨이 튼튼하기 때문에 장수합니다. 오복중에 하나입니다. 요사이는 이빨이 없어도 병원에 가서 치과에서 의치를 만들어서 우리 자연 이빨하고 똑같이 음식을 저장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 우리 어릴때만 하더라도 동리 할아버지, 할머니 보면 이빨없이 오물거리며 씹는 사람 많습니다. 잇몸으로 씹으니까 김치도 못먹습니다. 단단한 음식도 못먹습니다. 고기도 못씹습니다. 영양실조가 되어서 몸에 저항력을 잃어 버리고 몸이 병들면 죽게 되는 것입니다. 요사이 장수하는 이유중에 하나가 이빨이 튼튼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 이빨이 없으면 우리는 의치를 만들어 넣어서 씹습니다. 무엇이든지 잘게 부수고 죽처럼 만들어야 소화가 됩니다. 급히 먹는 음식은 체합니다. 천천히 많이 씹어서 먹는게 좋습니다. 숟가락으로 한술 떠가지고서 입에 넣어서 그냥 삼키지 말고 젖가락으로 조금 입에 넣어서 씹어서 먹는 것이 여러분 소화가 잘되고 장수하는 비결중에 하나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한가지입니다. 부서진 정도에 따라서 성숙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많이 부서지면 부서질수록 성숙한 크리스챤이 되고 안부서지면 성숙한 크리스챤이 안됩니다. 제가 어릴때는 시골에 여름 마당에 깨나 그렇지 않으면 콩이나 녹두나 그런 것 배어와서 널어놓고 난 다음 도리깨질 하는 것입니다. 도리깨로 때립니다. 저도 도리깨질을 많이 했습니다. 도리깨로 때리면 그 모든 알곡들이 검불에서 분리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대로 내어 주면 알곡을 쓸수가 없습니다. 검불하고 합쳐 있기 때문에 도리깨로 때리면 굉장히 고통스럽고 괴롭겠지요? 얻어 맞으니까. 그러나 도리깨로 때려야 검불에서 알곡을 분리할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도리깨질 할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도리깨로 우리를 내리칩니다. “하나님 왜 나를 때립니까? 왜 이렇게 고통스럽습니까?” “그래야 너희 속에 검불을 다 제하고 알곡을 취할 수가 있다.” 고난은 잘못된 삶을 버리고 돌이키게 하는 큰 요소가 됩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십시오. 탕자가 아버지 품안에 있으면서 잘먹고, 잘입고 행복하게 사니까 천지를 모르고 아버지 앞에 “내게 속한 상속을 내게 주소서. 내게 주소서.” 하도 못되게 구니까 아버지가 상속을 주었습니다. 그것을 다 청산해 가지고 먼나라 아버지 그림자가 안비취는 곳에 가서 그 돈으로 허랑방탕합니다. 온갖 주지육림에 빠져서 삽니다. 돈을 쓸동안에는 영웅입니다. 친구도 많고 아름다운 여성들도 많이 따라옵니다. 그러나 돈이 한없이 한없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돈이 다 떨어지고 그 나라에 기근이 오자 헐벗고 굶주리게 되었습니다. 비로서 굶주림이 얼마나 슬프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고 직장을 구하나 얻을수 없어서 겨우 시골에 돼지를 치는 직장을 얻었는데 너무 배가 고파 돼지가 먹는 주엽열매를 먹으려고 하다가 돼지에게 물려서 온몸에 돼지 이빨자국이. 그는 돼지 퇴비속에 살며 비인간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고통에 들어오자 비로소 자기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꼬락서니가 뭐냐. 우리 집에는 먹을 양식이 풍족한 일꾼들도 많은데 나는 먼 나라에 와서 주려 죽지 않느냐. 내가 살길은 뭐냐. 회개하고 아버지와 하나님께 덕죄한 것을 돌이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다.” 그가 고난당했을때 비로소 잘못된 삶을 버리고 돌아갈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8절로 20절에 보면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얻어 맞아야 돌아갑니다. 안그러면 끝없이 자기길로 나아갑니다.
디엘 무디 목사님과 함께 미국과 세계 큰 부흥을 일으켰던 토리 박사가 있었습니다. 토리박사는 성령운동에 거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토리 박사는 자랄 청년시절에 어머니가 자꾸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 성경 읽어라. 기도하라. 주일 교회 나가라.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살아라.”고 잔소리 하니까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하루는 어머니에게서 “어머니 나는 이제 어머니 잔소리에 몸서리가 났습니다. 나는 집을 떠납니다. 어머니 안녕히 계십시오.” 어머니가 나가는 아들을 붙잡고 “야~ 네가 인생을 살되 고난 반드시 다가온다 견딜수 없는 고통 당할 때 너희 에미가 너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말을 뒤뚱으로 하고 그는 떠났어요. 그래서 세상에 온갖 죄는 다 지었습니다. 음란하고 방탕하고 술취하고 세상에 취해 살다가 나중에는 아주 추한 인간이 되고 마음도 병들고 몸도 병들고 생활도 궁핍하게 되어서 하루는 삼류 여관에 들어가서 죽으려고 작정했습니다. 거울을 턱 들여다 보니까 머리는 삼발이고 수염은 나고 초췌한 모습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죽어야지.”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어머니의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네가 인생을 살아갈 때 큰 고난에 부딪히거든 네 에미가 너를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다는 이 생각을 잊지마라.” 그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 오면서 눈물이 줄줄 나고 그 책상위에 여관에 있는 성경책을 펼쳐서 읽기 시작하자 그는 탕자처럼 마음에 크게 애통하고 자복하고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야 되겠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어머님과 화해하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고 훌륭한 주의 종이 되고 나중에 미국에 디엘 무디와 함께 부흥을 가져오는 성령의 전도자가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고난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끝없이 탕자가 되어 나아가는 사람이 돌아가게 한 것은 삶에 고난이 그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6절로 7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부르고 돌아오면 하나님은 우리를 영접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하고 부르지도 아니하고 돌아오지도 아니하는데 하나님께서 돌보아 줄 리가 있겠습니까?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래오래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찾으라. 나를 부르라. 돌아오라. 내가 너를 용서하고 너를 변화시켜 주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 사람들은 비로서 하나님을 찾게 되고 부르게 되고 돌아오게 되는 것이니 고난이 알고보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안내자가 된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고난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한다
셋째는 고난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해주는 것입니다.
고난의 고통과 절망에서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사람들은 찾게 됩니다. 환한 대낮에 빛을 찾는 사람 없습니다. 대낮에 촛불 찾는 사람, 회중 전등 찾는 사람 보았습니까? 빛이 있으니까 다른 빛을 찾지 않습니다. 그러나 캄캄한 밤이 되면 사람들은 회중 전등이나 촛불이라도 찾는 것입니다. 고난의 흑암이 다가와야 희망의 빛을 찾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안찾습니다. 그러나 고난 당하면 사면초과가 들리면 희망이 빛인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호세아 5장 15절로 6장 1절 말씀 우리 다같이 소리내어 한번 읽으십시다.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보세요. 하나님은 돌아가서 기다리겠다고 말했습니다. 저희가 고난을 받을때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가자. 우리를 하나님은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찢으셨으나 싸매어 주실것이니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고난의 어두운 밤이 찾아와야 소망이 빛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시편 91편 15절에도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좋을때는 하나님을 안찾습니다. 환난을 당하니까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50편 15절에도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김경순 자매님의 간증을 들어 보십시오. 그 김경순 자매님은 남편과 함께 예수를 안믿었습니다. 여러번 전도를 받아도 우리는 예수 필요없다고 안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 아들이 자전거를 타다가 길거리에서 트럭과 부딪쳤습니다. 팔이 박살이 났습니다. 팔 관절이 다 부서졌어요. 으게졌습니다. 너무 놀래서 업고서 병원에 뛰어가니 의사는 하는말이 “관절이 다 박살이 났으니 인공관절을 해넣을 도리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그러나 인공관절을 해 넣으면 팔이 안자르게 됩니다. 몽당팔이 되고 만다.” 그래서 그 어머니는 자라는 어린아이가 팔이 안자르고 몽당팔이 되면 한평생 병신이 될것인데 그럴수 없다고 어찌하든지 자연치유가 되도록 도와 달라니까 병원에서 넉달을 입원해서 치료하나 팔은 점점 굳어지고 낫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너무 답답하니까 그가 하루 병원의 구석에 앉아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죄가 있으면 부모인 내게 있지 어린 자식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내 죄를 용서하시고 어린 자식을 고쳐 주옵소서.”그런데 우리 교인 한 사람이 어떤 분이 병원 복도 구석에 앉아서 쭈그리고 기도를 하고 있으니까 예수믿는 사람은 이심전심으로 서로 통하니까 반가와서 어깨를 두드리면서 “예수 믿으세요?” 그러니까 “안믿어요.” “하나님 안믿어요?” “그러면 왜 기도를 합니까?” “하도 답답해서 하나님께 한번 부르짖어 기도해 보는 것입니다.” “아이구 예수도 안믿고 하나님도 안믿으면서 부르짖어 기도한다고 응답이 되나요? 내가 당신을 도와 주겠다.” 구역장을 불러서 함께 그 병실에 갔습니다. 어린 아이의 으게진 관절에 손을 얹어 기도하고 그리고 찬물 찜질해주니까 꼼짝도 안하던 손이 움직이기 시작을 하더랍니다. 그러더니 그 애기 어머니가 너무 놀래가지고서 “아이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그 자리에서 깨어져서 눈물로 회개하고 그 길로 어린아이를 퇴원시켜서 집으로 데려 왔습니다. 그 남편과 온 식구들이 다 깨어지고 회개하고 주님께 부르짖어서 기도하고 우리 구역장과 구역원들이 가서 두달동안 기도를 했는데 두달만에 박살났던 관절이 깨끗이 나아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자매님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아이의 자전거가 차에 부딪쳐서 팔 관절이 박살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지금 우리 가족은 모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천국가게 되었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오히려 축복입니다.” 고난이 하나님을 찾는 기회가 된다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대다수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을 찾게 된 것은 크고 작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것입니다. 편안하고 좋을때 등 따뜻하고 배부를때는 하나님을 필요없다고 생각해요. 좀처럼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다가와서 풍랑이 일어나면 안일한 자리에서 앉아 있을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게 되고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온유하게 만들고 복종하게 만들지요. 고난받기 전에는 내가 제일인줄 알고 하나님이 믿지 말고 내 주먹이나 믿으라고 하고 자기의 지식과 지혜와 총명과 청춘을 자랑하지만 고난이 되고 나서 박살이 나면 그런 것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5장 8절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이 새 사람으로 변화받는 용광로가 바로 고난입니다. 용광로에 들어가면 돌도 불순물도 금도 은도 다 녹아 버립니다. 그래서 불순물을 다 떠오르니까 제켜 버리고 순수한 금, 은을 얻을수 있지 않습니까? 은장색이 은을 달련할 때 어떻게 합니까? 흑그릇에 은을 넣어서 은을 불을때 녹이면은 은에 찌꺼기가 떠오릅니다. 그러면 제켜 버리고 또 불을 때면 또 찌꺼기가 올라오면 제켜 버리고 나중에 들여다 보고 얼굴이 녹은 은물에 환하게 비취면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이제는 순수한 은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고난의 불을 통해서 우리에게 찌꺼기를 자꾸 걷어내는 것입니다. 고난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녹아질때 깨어질때 우리의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시고 그리스도의 형상이 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3절로 4절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4. 고난은 축복의 그릇을 만드는 과정이다
넷째로, 고난은 축복의 그릇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아침에도 식사를 할때 밥그릇, 국그릇 그리고 조그만한 종지그릇에 여러 가지 음식을 담아서 먹지 않았습니까? 그릇이 없이는 무엇을 담지 못하잖아요. 우리의 삶과 그릇은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옛날말에도 바가지가 있는 거지는 얻어 먹어도 빈손든 거지는 얻어 먹지 못한다. 뭘 얻어 먹으려고 해도 그릇을 내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면 그릇을 먼저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그릇은 우리의 인간이 그릇이 된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보기에 복을 담을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 복을 담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낙원으로 이끌기 위해서 하나님은 광야를 통하게 한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그릇을 준비해야 됩니다.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고난의 학교를 통해서 그릇이 준비되고 난 다음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게 만든 것입니다.
신명기 8장 3절에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
신명기 8장 16절에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몇 년전에 미국의 ABC 방송에서 엘리자베스 머렌이라는 18세 소녀에 대한 보도가 크게 났습니다.
이 자매는 집도없이 길거리를 방황하는 거지였는데 그 거지가 미국의 최고 대학인 하버드 대학에 우등생으로 합격하게 된것입니다. 원래 그녀는 마약중독자인 부모에게 태어나서 15년간 집없이 길거리에서 움막집에서 살았습니다. 어린딸의 외투를 부모는 벗겨서 마약을 살 정도로 심각한 마약중독자였습니다. 이 어린소녀는 10살때부터 길거리에 구걸해서 번돈으로 아버지, 어머니를 부양해야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도 죽고 그 어머니가 에이즈에 걸려서 죽자 그는 “자기는 부모처럼 살지 않고 오히려 사회에 도움을 주는 인물이 되겠다”고 결심을 하고 스스로 공립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입학을 했습니다. 공립고등학교는 수업료가 없이 공짜로 공부하니까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면서 공립고등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는데 공부할 장소가 없기 때문에 회사의 계단에 앉아서 비를 맞아 가면서 공부를 하고 지하철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서 공부를 했는데 얼마나 맹렬히 공부를 했든지 다른 사람보다 세배나 네배나 수업진도가 빨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뉴욕타임즈가 주는 장학금을 받으며 하버드대학에 입학하게 된것입니다. 그녀의 이러한 사정이 신문에 보도되자 미국 각지에서 장학금으로 헌금을 보내어서 20만 달러의 헌금을 장학금으로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녀는 부모를 원망하거나 자신의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성공의 비결을 묻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나의 고난의 과거는 나를 오늘 있게 한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가난하고 어려웠기 때문에 나는 집도 절도 없이 길거리에서 억센 고난을 당한 것이 나로 하여금 결코 고난을 더 이상 당치 않겠다. 고난을 극복하고 인생을 성공하겠다는 어마어마한 마음에 꿈과 믿음과 노력을 할수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만일 고난 당하지 아니했으면 다른 소녀들처럼 세상에 취해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무나 억센 고난 덕분에 오히려 이 고난을 극복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가난한 그 환경을 감사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을 당한 사람들이 출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사회도 부면 잘먹고, 잘입고, 호사스럽게 자란 자녀들은 삶에 도전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삶을 이겨내야겠다는 투철한 각오가 부족합니다. 그러나 억센 고난을 당하여 헐벗고 굶주린 젊은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그 어려움을 극복하겠다고 나아가서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서 훌륭한 지도자들이 된 사람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고난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수 있는 그릇을 준비해 주는 것입니다. 반드시 고난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고난을 이해하고 소화하면 큰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교수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한 남자가 있었는데 술주정뱅이입니다. 집에 있는 것을 다 술로써 탕진하고 가재도구도 다 팔아먹고 그 다음에 돈을 빌려 오지 않는다고 만삭이 되고 폐병이 걸린 그 부인을 두들겨 패는 남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어린아이가 만삭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폐병3기로써 피를 토하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의과대학생 한 사람이 “선생님! 나같으면 당장 그 어린아이를 낙태시키겠습니다” 그러니까 의과대학 교수가 허허 웃으면서 “당신은 지금 베토벤을 낙태시켰네.” 세계적인 음악가 베토벤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 있는 것 없는 것 술로써 다 탕진하고 가재도구를 다 팔아서 술먹고 폐병걸려 만삭이 된 자기 아내를 두들겨 패고 그런데 그 어머니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베토벤이었습니다. 베토벤은 11살때부터 극장을 돌며 구걸하고 음악을 공부했습니다. 게다가 30세때는 음악가에 있어서 생명처럼 소중한 청각까지 잃어 버렸습니다. 그는 가난하고 외롭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이것을 극복하겠다고 어마어마한 각오와 결심을 하고 음악을 공부하고 노력을 해서 그는 불후의 위대한 작곡가가 된것입니다. 훗날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괴로움을 뚫고 나간 다음에 비로서 기쁨을 발견했다.” 신앙을 통해 그는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고 이를 아름다운 음악으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베토벤의 음악을 들어보면 강한 주제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대부분 끝에가서 환희의 노래입니다. 고통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감격을 음악을 통해 승화시킨 그의 삶은 잘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광이란 여러분 고통을 통하지 않고는 다가오지 않습니다. 역센 고통이 아름다운 영광을 산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몸찢고 피흘린 것이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그 고통을 통해서 무엇을 우리에게 주었습니까? 용서와 의와 평안의 영광을 주었습니다. 거룩함과 성령충만의 영광을 주었습니다. 치료와 건강의 영광을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축복과 형통의 영광을 주었습니다. 부활과 영생과 천국의 영광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없이 아름다운 영광을 우리에게 주실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통은 바로 영광을 산출하는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로 18절 우리 다같이 소리내어 읽으십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우리의 잠시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한다.
경한 환난이 중한 영광을 낳는 어머니가 된다. 고난없이 영광은 없는 것입니다. 우연히 영광이 다가왔다. 거짓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고난이 다가오면 우리는 영광도 온다는 것을 기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로 18절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받는 조그만한 고난이 지극히 큰 장차 영광을 우리 삶속에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존 프랭클린은 탐험대 대장이었는데 탐험대원들이 북극탐험을 갔는데 얼마나 추웠든지 불이켤려고 채워온 알콜까지 다 얼어 붙었습니다. 영하 70도나 되었습니다. 그런데다가 눈속을 걷자니까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대원들이 다 지쳐가지고서 “대장님 좀 잠을 자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프랭클린은 잘 알고 있습니다. 추운데서 잠을 자면 반드시 죽습니다. 절대 못자게 하니까 “그러면 우리 천막속에 들어가서 잠시 쉬었다가 가겠습니다.” 그런데 천막속에 들어가서 안 나오거든. 들어가보니 모두다 곯아 떨어졌습니다. 추운데서 잠을 들면은 마약중독같은 현상이 생깁니다. 그 뇌속에 한파가 들어가서 이상하게 기분이 좋습니다. 노근하고 아주 구름속에 둥둥 뜬것처럼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에 그만 그 자리에서 취해서 자다가 얼어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프랭클린 대장이 아무리 일이켜 깨워도 한 사람도 일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할 수 없어 이 대장이 그냥 주먹으로 때리고 발길로 차고 짓니겼습니다. 코가 비뚫어지고 눈이 부어 터지고 팔이 부상을 입고 고통스러워야 잠에서 깨어 일어났습니다. 그 사람들을 다 잠에서 깨어 일으켜 가지고서 비로서 무사히 북극탐험을 끝내고 영국으로 귀환할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느낀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탐험대처럼 세상 잠에 곯아 떨어져요. 주님을 믿는 사람들조차 주님을 기다리다가 육신의 정욕, 이 세상 자랑, 탐욕에 곯아 떨어집니다. 세상 잠에 떨어지면 영적으로 죽어 버리고 지옥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깨어 일으키려고 하니 부르럽게 말을 하니까 안깨어나거든. “얘야 일어나라. 주님 오실날이 가까워왔다. 너가 천당갈 날이 가까웠는데 깨어서 기도하라.” 그러니까 세상 잠에 너무 취해서 아편중독된것처럼 거기에 취해서 안깨어나니까 하나님이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짓니기기 때문에 코가 삐뚫어지고 상처를 입고 팔이 부러지고 그래야 잠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큰 풍파 일어나는 것 세상줄 끊음일세. 주께서 오라 하시면 내 본향 찾아가리.
큰 풍파 일어나야 세상 줄 끊습니다. 풍파 안일어나면 세상에 취해서 잠들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주께서 천당에 데려가기 위해서 오늘날 잠든 사람을 고난을 통해서 여러 가지 상처를 입혀서 깨어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환경과 운명에 부딪치는 고난을 피할 수가 없어요. 그것이 온몸으로 부딪쳐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우리가 좌우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 불평, 불만, 반발, 좌절, 절망하면 우리는 많은 상처를 입고 파멸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고 그 안에서 회개하고 깨어지고 하나님 앞에 더욱 순복하여지고 내일에 대한 소망과 꿈을 잃지 않으면 고난을 놀랍게도 우리를 도와주는 큰 축복으로 변화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난을 이해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페스탈로찌는 “나를 높은 예지로 이끌어 준 것은 보석과 즐거움이 아니라 고난과 눈물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톨스토이는 “고난은 생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인간의 성장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영국 속담에 “잔잔한 바다는 결코 노련한 해군을 만들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괴테는 “고난이 있을때마다 그것이 참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임을 기억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브라우닝 웨어 목사는 “최악의 환경은 우리 삶에 새로운 의미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가장 좋은 기회일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J. B. 필립스는 “인간의 역경은 하나님의 기회”라고 말했습니다.
맹자는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큰 일을 맡기려 할때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을 괴롭힌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천국을 주시려면 고난의 과정을 통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평범한 덩어리가 땅속에서 수천도의 불과 높은 기압의 압력을 받으면 다이아몬드가 되는 것입니다. 평범한 숫구멍이 큰 압력과 열을 받으면 다이아몬드가 되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열두진주문으로 통한다고 했습니다. 그게 왜 황금문도 아니고 다이아문도 아니고 진주문입니까? 진주는 조개의 혀밑에 이물질이 들어가서 조개가 그 이물질이 살을 파먹기 때문에 괴로움으로 자꾸 액체를 내어서 그를 감고 감고 해서 영롱한 진주가 되는 것입니다. 진주는 고난이 들어와서 진주로 만든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문은 진주문입니다. 세상에서 고난을 통해서 다이아몬드같이 되고 진주같이 된 사람이 들어오는 곳이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먼저 고난을 통하게 하고 난 다음 영광에 참여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여러 가지 고난이 다가오거든 이상한 일 당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고난을 예수 그리스도 이름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고난속에 희망과 꿈을 잃지 않고 감사하고 극복하고 나가면 이 고난이 여러분을 금과 은과 보석같이 다이아몬드같이 진주같이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신 아버지!
우리는 불티가 하늘로 올라감같이 고난을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부정적으로 대하고 원망, 불평, 탄식, 좌절, 절망하면 고난에 짓니겨 지고
산산조각이 나고 패배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고난을 통해서 깨어지고 회개하고 변화받고 더 하나님께 의지하는 기회가 되면은 우리가 영광스러운 진주와 다이아몬드처럼 변화되어 하늘나라에 들어갈수 있게 되옵니다.
하나님 고난은 피할수 없으나 고난을 부정적으로 대하든지 긍정적으로 대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긍정적으로 고난을 받아 들이고 극복하게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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