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운명과 자유

마가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903 추천 수 0 2009.05.30 17:49:53
.........
성경본문 : 막10:32-34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8474 
jys.jpg 정용섭 목사

예수님의 공생애를 연대기식으로 요약한다면 갈릴리 호수 근방에서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전하며 제자들을 불러모으는 것을 시작으로,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체포당하시고 심문이 있은 후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스라엘의 변방인 갈릴리 호수부근으로부터 예루살렘까지가 곧 예수님의 공생애 일정입니다. 물론 그 사이에 여러 일들이 그분에게 일어났습니다. 병자를 고친다든지, 하나님 말씀을 설교하거나 전혀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으며,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의 격렬한 논쟁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열두 제자들이 선정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구원의 희망을 발견하고 뒤따르기도 했고, 때에 따라서는 실망하고 흩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차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거기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생각하기에 따라서 예수님이 유대교의 거점인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그들 지도자들과 진리 논쟁을 대판 벌이기 위해서 올라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쫓은 사건으로 인해 제사장들의 심사가 뒤틀린 일을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미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부활할 것이라고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길을 따라간 것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연관된 모든 사건을 큰 틀에서 하나님의 섭리이며 예정이라고 말한다면 이게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서에 이런 단서가 될만한 문구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보도를 무조건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실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성서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형성된 공동체에 의해서 전승되고 기록되었기 때문에 객관적인 사실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가능한대로 정확하게 구분하면서 해석해나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까요? 가장 단순하고 정확한 대답은 예수님도 그 당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유월절을 맞아 '성지순례'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평범한 사건이라면 복음서 기자들이 이 사건을 무엇 때문에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지 궁금하게 생각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예루살렘 순례가 아주 일반적인 일이긴 했지만 이 일의 내면에 아주 특별한 의미가 들어 있으며, 또한 그런 것으로 인해서 결국 인류 역사에 유일회적인 사건이 발생했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오늘은 이 특별한 의미에 대해서 설교하겠으며, 유일회적인 인류사적 사건에 대해서는 다음 두 주일에 걸쳐서 설교하겠습니다.

제자들의 불안
32절 말씀은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그 때 예수께서 앞장서서 가셨고 그것을 본 제자들은 어리둥절하였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불안에 싸여 있었다. 예수께서 다시 열 두 제자를 가까이 불러 장차 당하실 일들을 일러 주셨다." 예수님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앞장서서 예루살렘을 향하자 제자들이 어리둥절했으며, 그 뒤를 따라가던 사람들도 불안에 싸였다고 합니다.
어리둥절하다는 것이나 불안에 싸인 것이나 비슷한 현상입니다. 이들은 왜 그렇게 불안에 싸인 걸까요?
성서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지만 이들 일행이 예루살렘 순례에 관해서 상당한 설왕설래가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오는 길에서도 이미 바리새인들을 중심으로 한 많은 종교 지도자들과의 마찰이 있었으며, 예루살렘 지도자들로부터 크고 작은 압력이 가해졌기 때문에 이제 예루살렘에 들어간다는 것은 아주 큰 모험이었습니다. 가능하면 이번 유월절에는 그만두고 다음 기회를 도모하자, 또는 예루살렘에 은신처를 마련해두자, 이렇게 저렇게 끈이 닿는 유력인사들의 의견을 들어보자 등등, 의견들이 분분했을 것입니다. 개중에는 자신들에게 가해질지 모르는 불이익을 두려워했을 것이며, 또는 예수님의 보호하겠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마당에 예수님이 '앞장서서' 가시니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한 그들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제자들과 예수님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너무나 많은 가능성을 생각하다가 '앞장서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한 가지 사실만 생각하니까 '앞장서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깊어서 어떤 사태를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이야 큰 문제가 아니겠지만 대개의 경우에 우리의 불안은 쓸데없이 좌고우면 하는 데서 일어납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 자신에게 최대한으로 이익이 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머리를 굴리다보면 아무런 대답이 나오지 않고 불안에 싸이기만 합니다. 아마 이런 일을 여러분도 일상에도 자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만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게 쉽지 않습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게 곧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지나치게 머리를 굴리다가 불안과 두려움에 빠지는 우리의 삶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마음과 인격의 도야에서만 찾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일치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말은 곧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과의 일치에서만 가능하다는 뜻이 아닐까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마음먹은 대로 모든 것을 하는 게 자유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소극적인 자유에 불과합니다. 그런 자유는 아예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온 세계를 소유하더라도 만족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과 일행의 불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자기 자신의 일에 사로잡혀 있는 한 인간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기껏 노력해서 자유로운 것 같다는 착각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수난 예고
예수님은 불안에 싸인 사람들 중에서 제자들만 가까이 불렀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일행 모두에게 말씀하지 않고 제자들만 따로 가까이 불렀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렇게 기분 나빠하지 마십시오.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할 권리가 있기는 하지만 어떤 사명(mission)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있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사명 때문에 예수님은 이 미묘한 순간에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 가 사형선고를 받고 다시 이방인의 손에 넘어 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을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마침내 죽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밝히는 작업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불안해하고 있는 이 순간에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미 앞서 8:31, 9:31에 두 번이나 수난을 예고하셨으니까 이번이 세 번째가 됩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 때는 베드로가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펄쩍 뛰었으며, 두 번째 예고 때는 제자들이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했고 묻기조차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세 번째 예고에서는 제자들의 반응이 없습니다. 세 번의 반복 학습에 의해서 정확하게 이해된 것인지, 아니면 반복에 의해서 오히려 그 주제에 대해서 둔감해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순간에 세 번째의 수난 예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이유는 예루살렘이 가까워오면서 제자들의 불안이 더 심해지는 것을 보고 무언가 확실하게 짚어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앞의 예고보다 이번의 예고가 훨씬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보도되고 있습니다. 앞서의 예고는 예수님이 잡혀서 죽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핵심만 다루고 있지만, 이번의 예고는 이방인들에게 넘겨진다거나 조롱받고 채찍질 당한다는 내용이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교육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학습 시간이 경과하면서 내용의 심화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입니다.

수난의 운명 앞에서
몇 번에 걸친 예수님의 수난 예고로 인해서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을 것이며, 아마 그 이후로도 실랑이가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수난이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앞에 놓인 운명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이해시키고 설득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은 반복해서 그 수난을 예고하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이런 죽음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분의 모든 구원론적 행위의 진정한 의미가 훼손됩니다. 초능력적인 인식과 능력이 천부적으로 주어진 분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체포당하고 급기야 죽게 될지 모른다는 예감을 하셨을 것입니다. 이런 예감은 특별한 능력이 있어야만 인식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태의 전개를 세심하게 들여다보기만 하면 대충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당할 것으로까지 생각하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세 번에 걸친 수난 예고의 내용에는 단순히 수난 받고 죽는다고 했지 십자가로 죽는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종교적인 이유로 죽는다면 당연히 십자가가 아니라 돌에 맞아 죽어야 했습
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러한 운명 앞에서 예수님이 도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똑같은 목소리로 전하고 있습니다. 잡히시던 날 밤에 가능하다면 이 '잔'을 마시지 않겠다는 순간적인 갈등이 보이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완전히 운명에 맡겼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운명과 예수님의 자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운명 앞에서 우리가 무력한 존재가 되는지, 아니면 그 엄청난 운명의 힘 앞에서도 역시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발버둥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운명을 전혀 교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의 삶은 철저하게 운명의 노예처럼 생각됩니다. 예컨대 이라크 전쟁 1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까? 이라크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그 운명 앞에서 무력했습니다. 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들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일상에는 그런 운명적인 힘들이 개입하고 있습니다. 이런 힘들에게 철저하게 예속 당하게 되면 우리는 운명론자가 되고 말겠지요.
그러나 그 운명의 힘이 아무리 폭력적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자유를 송두리째 파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자기에게 밀려드는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운명론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운명에 떠밀리는 게 아니라 그 운명을 선택했습니다. 이게 곧 자유가 아닐까요? 운명을 억지로 거부하거나, 또는 어쩔 수 없이 운명에 빠져서 사는 것과 운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한쪽의 삶은 운명의 악한 힘에 의해서 파괴되는 반면에 다른 한쪽은 그 운명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유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약간 극단적으로, 장애의 운명에 의해서 삶이 파괴되는 사람도 있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자유로운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자유의 근원
수난 예고는 끝마디에 '부활'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읽는 사람들 중에는 이런 예지의 능력이야말로 예수님의 초월적인 특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만약 자기의 부활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면 그가 죽음 앞에서 보인 두려움이 해명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극구 반대한 제자들의 태도도 역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하더라도 사흘 후에 부활하는 게 확실하다면 그 죽음을 아쉬워할 필요는 하나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에 보인 제자들의 태도를 미루어 볼 때 예수님의 부활 예고는 전혀 다른 뉘앙스로 전달된 게 틀림없습니다.
이미 구약성서에는 이런 부활을 예고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에 구약성서와 연결해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에 관한 구약의 증언은 여전히 미래의 가능성으로만 제시되고 있지 실증적이거나 현실적인 것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런 증언들은 구약 전체와 비교할 때 매우 미미한 것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34절)라는 예수님의 예고도 역시 이런 구약성서의 테두리 안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사흘 후에 반드시 살아난다는 확신이라기보다는 자기가 어쩔 수 없이 죽더라도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새로운 방식으로 생명을 허락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예수님에게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 제자들에게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부활 예고를 마음에 새기지도 않았고, 또한 실제 부활 사건이 일어난 다음에도 믿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 안에서 자기에게 밀려드는 십자가의 운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믿음이 곧 자유의 토대입니다. 죽음 이후의 생명이 아직 손에 잡히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불안하기는 했지만 결국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의 운명을 맡김으로써 그는 자유로운 존재가 되셨습니다. 죽음으로부터도 자유롭고, 운명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존재 말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 하나님을 참되게 믿었던 유일한 분인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비록 우리가 이 땅에서 비참하게 죽어야 할 운명 앞에 놓여 있지만 다시 생명을 얻는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감당해야 할 운명이 무엇인가요? 예수님의 운명보다 더 험한 것은 아니겠지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자기 머리로 계산해서 피해가려면 결국 운명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에게 우리의 미래를 맡깁시다. 거기서 우리의 운명은 아무리 험하더라도 극복되고, 우리는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2004. 3.28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1591 사도행전 하나님의 희망 속에 있는 공동체 행2:37∼47  임영수 목사  2009-06-06 2185
1590 요한복음 보혜사 성령 요16:5∼16  임영수 목사  2009-06-06 3207
1589 마가복음 자기를 부인하는 삶 막8:34∼38  임영수 목사  2009-06-06 3164
1588 마태복음 구원의 현실성 마11:25∼30  임영수 목사  2009-06-06 1754
1587 시편 인간의 길 시1:1∼6  임영수 목사  2009-06-06 2273
1586 고린도전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힘 고전15:1-11  정용섭 목사  2009-06-03 2007
1585 마가복음 본질의 변질 막11:15-19  정용섭 목사  2009-06-03 2135
1584 시편 나는 왜 감사해야 하는가? 시50:22~23  조용기 목사  2009-06-01 2999
1583 베드로전 눈에 안 보이는 대적 벧전5:5~9  조용기 목사  2009-06-01 2016
1582 고린도후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되지요? 고후5:8-9  조용기 목사  2009-06-01 2068
1581 갈라디아 내 인생을 누가 살아주나? 갈2:20절  조용기 목사  2009-06-01 2639
1580 열왕기하 육의 눈과 영의 눈 왕하6:14~17  조용기 목사  2009-06-01 2831
1579 마태복음 주께 업혀서 사는 삶 마11:28~30  조용기 목사  2009-06-01 2348
1578 마가복음 버려야 얻는다 막10:28~31  조용기 목사  2009-06-01 2182
1577 고린도전 방언 기도의 유익이 무엇인가? 고전14:39~40  조용기 목사  2009-06-01 3524
1576 시편 고난과 소망 시23:4~5  조용기 목사  2009-06-01 2029
1575 갈라디아 성령으로 시작했으면 갈3:1-3  강종수 목사  2009-05-31 1974
» 마가복음 운명과 자유 막10:32-34  정용섭 목사  2009-05-30 1903
1573 민수기 야훼의 자기 증거 민20:1-13  정용섭 목사  2009-05-30 2110
1572 골로새서 세계의 토대 골1:15-20  정용섭 목사  2009-05-30 1846
1571 마태복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와 팔복 [10] 마5:3-12  김형국 목사  2009-05-27 2802
1570 야고보서 시험이 없는 자는 성도가 아니다 약1:12-13  강종수 목사  2009-05-24 2351
1569 시편 하나님 중심의 삶 시127:1~2  조용기 목사  2009-05-23 3763
1568 욥기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욥5:7  조용기 목사  2009-05-23 3466
1567 누가복음 기도, 어떻게 할 것인가? 눅18:1~8  조용기 목사  2009-05-23 2276
1566 요한복음 마음의 평안 요14:27  조용기 목사  2009-05-23 3011
1565 누가복음 참된 자유와 해방 눅4:16~21  조용기 목사  2009-05-23 2169
1564 창세기 버리고 따르라 창3:1~2  조용기 목사  2009-05-23 1862
1563 갈라디아 종교개혁 참 정신과 우상으로부터의 자유 갈5:1~6  김경재 교수  2009-05-22 2212
1562 룻기 다말과 롯에 대한 오해와 진실 릇4:9~12  이경숙 교수  2009-05-22 2718
1561 예레미야 내 중심에 타는 불 렘20:9  정지석 박사  2009-05-22 1905
1560 마태복음 매일 추수 감사 마6 :24~26  권진관 형제  2009-05-22 2287
1559 시편 함께 고난당하시는 하나님 시116 :1~14  유경재 목사  2009-05-22 1648
1558 마태복음 하나님 나라의 위기 마13:1∼9  임영수 목사  2009-05-21 2019
1557 고린도후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고후5:16∼21  임영수 목사  2009-05-21 2685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