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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의 변질

마가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135 추천 수 0 2009.06.03 23: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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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1:15-19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8475 
jys.jpg 정용섭 목사

이방인의 뜰에서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은 팔레스틴의 북쪽 갈릴리 호수 부근에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일로부터 공생애를 시작하셨다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체포당하고 십자가 처형당하는 것으로 끝맺습니다. 모든 복음서가 일관되게 보도하고 있는 것처럼 마가도 역시 11장
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을 스케치하듯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귀를 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 길에 깔고 열렬하게 환영했습니다. 시편 118:25-26에 따른 노래를 부른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가장 먼저 성전
에 들어가셨습니다(막 11:11). 성전을 둘러보시고 날이 저물자 예루살렘을 다시 나와 열 두 제자와 함께 베다니라는 작은 마을로 가셨습니다. 그곳에 쉴만한 거처가 있었겠지요. 이튿날 예수님 일행은 베다니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성전을 찾으셨습니다. 그때가 바로 유월절이었기 때문에 성전은 그야말로 순례자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였겠지요. 객관적인 눈으로 보면 예수님도 그런 순례객 중의 한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찾으신 예루살렘 성전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넓습니다. 단순히 화려한 성전 건물만 있는 게 아니라 들어가면서 차례대로 이방인의 뜰, 유대인의 뜰, 제사장의 뜰이 있었습니다. 큰 절기마다 이방인의 뜰에서 시장이 섰습니다. 요즘 하양의 5일장을 생각하면 됩니다. 이 뜰의 크기가 가로 475 미터, 세로 300 미터였다고 하니까 최소한 축구장 세 개 정도를 모아놓은 크기입니다. 순례객들은 여기서 깨끗한 돈도 바꾸고, 자기 경제 능력에 따라서 비둘기나 양을 사서 제사 드리기 위한 제물로 사용했습니다. 아마 제사장들은 순례객들의 편리를 위해서 이런 장을 허용했을 것입니다. 먼 곳에서 오다보면 준비하기 불편하기도 하고, 더구나 조금도 흠이 없는 동물을 준비하는 게 어렵기 때문에 돈을 주고 구입하는 게 편리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도 이방인의 뜰 한쪽 구석에서 사람들이 장사하고 있었겠지요.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15, 16절 말씀이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예수께서는 성전 뜰 안으로 들어 가 거기에서 사고 팔고 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시며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장수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 또 물건들을 나르느라고 성전 뜰을 질러 다니는 것도 금하셨다." 이런 묘사만 보고 판단한다면 예수님은 평소의 그분답지 않은 소동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있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폭력적으로 행동하셨다는 게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성전을 시장처럼 만들어놓은 사
람들을 보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긴 합니다.
우선 이 사건을 장사하던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해볼까요? 유월절이 닥칠 때마다 늘 그렇듯이 순례객들을 대상으로 돈을 바꿔주거나 비둘기를 파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어떤 젊은이가 와서 그 판을 둘러엎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흡사 요즘 구청에서 나온 단속 반원들이 길거리에 좌판을 벌여놓고 장사하는 분의 판을 파손하는 경우와 비슷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뜰에서 장사하는 것은 합법적이지 않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관행이었습니다. 순례객들의 편의를 제공하는 대가로 약간의 이익을 남기는 것뿐입니다. 이런 사정을 알고 있던 제사장들은 이들의 장사를 묵인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자다가 날벼락이지, 갑자기 '단속반원'이 들이닥친 격입니다. 평소에 약간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자식새끼들과 먹고살아야 했던 장사꾼들에게는 예수님의 이 행위가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민중들의 고달픈 삶을 모르실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들의 장사판을 뒤집어버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쩌면 예수님께서 이 장사꾼들과 제사장들 사이에 오가던 은밀한 관계를 파악하신 것일지 모릅니다. 돈이 모이는 곳에는 늘 검은 거래가 있게 마련인데, 제사장들은 이방인의 뜰에서 장사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면서 일정한 자릿세를 받았습니다. 아마 공식적인 자릿세 못지 않게 비공식적인 돈이 은밀하게 오갔을 개연성이 많습니다. 이러한 구조적인 부도덕성을 알아채신 예수님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서 이런 부분이 우리가 판단하기 힘든 것들입니다. 개인이 사회의 구조적 악과 연결되어 있을 때 우리가 그런 책임을 그 사람에게 얼마나 물어야 하는가의 문제 말입니다. 물론 모두가 깨끗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더 이상 좋은 일이 없겠지만 산 속에 들어가 혼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일반적인 사회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런 사회악과 다소간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교 선생님들이 촌지를 자주 받았습니다. 대학교 선생님들도 연구비를 받아서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일이 있습니다. 아파트를 사서 그 자리에서 프리미엄을 받고 되파는 일들이 매스컴에 자주 보도됩니다. 지금은 공명선거가 상당히 자리를 잡은 것 같은데, 그래도 돈을 뿌리면서까지 표를 얻으려는 사람들, 이 기회에 한몫 잡아보려는 선거 브로커들도 많습니다. 이런 반사회적인 일들도 정도에 따라서 약간씩 다르겠습니다만, 어쨌든지 한 개인이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이런 구조적 악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요? 이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손톱만큼이라도 잘못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 개인보다는 사회 구조에 더 큰 문제가 있으니까 이런 구조를 바꾸는 게 우선해야 할 일인지 여러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음모
오늘 본문에서 이런 소동이 일어난 이후의 사태 전개가 상식적으로 약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이 소식이 알려졌지만 그들은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의 행동이 성전 안에서 허락되지 않는 것이었다면 당연히 예수를 형사 고발
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로마는 제사장 계급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제사장이 눈치만 주어도 로마 군인들에 의해서 예수님은 당장 성전 폭력범으로 체포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동은 그대로 넘어갔습니다. 그 가능성을 우리는 몇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선 이방인의 뜰에서 환전하고 장사하는 일들이 모두에게 잘못된 일로 명백하게 인식되어 있었으며, 이런 점에서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도 떳떳하게 나설만한 상황이 아닐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양심적으로 부끄러운 부분이 있는 일인데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이 사건을 직접 형사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일이 복잡하게 꼬일 염려가 있으니까요. 혹은 군중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감탄하고 있었다는 18절(후)의 보도를 미루어본다면 여론이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행동을 억눌렀을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단지 종교 지도자일뿐만 아니라 식민지 상태에 있던 이스라엘의 모든 부분을, 정치까지 포함한 모든 부분을 대표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여론의 힘이 자신들의 권위를 지켜내는데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소동을 직접 처리하는 대신에 훨씬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곧 아예 "예수를 없애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예수에 대한 소문을 일찍부터 듣고 자신들의 종교적 권위에 방해거리가 된다고 생각하던 차에 이번 일을 계기로 그를 없애버리는 게 좋다고 결정한 것입니다. 이렇듯 악한 힘은 영악합니다. 웬만해서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이 오기를 기다려 악한 일을 꾸밉니다. 그들은 공연히 성전 소동 문제로 트집잡다가 흐지부지 되기 보다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예수를 완전히 제거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무슨 문제로 예수님을 없애버리려고 했을까요? 일단 우리는 그들을 포악무도한 사람들, 최소한의 양심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가 되려면 그만한 역량을 갖추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오늘의 대법관, 요즘 매스컴에 자주 오르내리는 헌법재판소 위원들 정도의 지식과 교양과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아직 확실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대제사장들이 정말 무엇이 진리인지 몰라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는지, 아니면 그들이 알기는 했지만 마음이 악하기 때문에 그런 음모를 꾸민 것인지 말입니다.
성서가 이에 대한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기 때문에 저도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제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이 두 요소가 같이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최고의 지성인들이며 권력자들이었던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무식했다고 말하면 이상하게 여길지 모르겠지만 그게 인간입니다. 한쪽 부분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많은 지식을 갖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진리를 볼 수 있는 눈이 닫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1972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종신 집권하기 위해서 유신헌법을 공포했는데, 이 법을 만든 사람들이 바로 이 나라의 최고 지
성인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좌경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군사 쿠데타가 필요하다고 부추기는 대학교 선생들이 있을 정도니까 이 문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은 아무리 지성적으로 훈련을 받고 사회적 높은 지위를 확보했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악할 수 있습니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올라갈수록 자기 자신을 성찰하지 않으면 그 권력이 주는 마력 때문에 악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
님을 죽어야겠다고 그렇게 음모를 꾸미게 된 것은 예수가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훼손시킬지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런 심리적 상태에 빠지면 인간은 악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런 일은 오늘도 일어납니다.

성전의 변질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이런 음모를 꾸미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예수님이 일으킨 소동도 소동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약점을 찔렀다는 데에 있습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을 몰아내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서에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
리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구나!"(17절). 앞 부분은 이사야 56:7에서, 뒷 부분은 예레미야 7:11에서 인용한 말씀인데, 이게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인지, 아니면 마가의 편집에 의한 것인지 학자들에 따라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예수님을 일차적으로 경험한 사도들의 경험은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사도신경을 우리가 매 주일 암송하는 것은 그저 예배의 한 형식을 채우려는 게 아니라 우리 신앙이 사도들의 신앙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복음서를 정확하게 분석한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를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 예수님을 경험한 사도들의 신앙을 발견할 뿐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이 예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 아니라 마가의 삽입이라고 해도 큰 문제는 아닙니다. 그 순간에 그 말씀이 필요하다는 마가의 판단은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하며 그런 점에서 그 말씀은 곧 예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신약성서학자 그닐카에 따르면 예수님의 성전 소동을 해석하고 있는 이 말씀은 낡은 제의의 폐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유대교의 성전 제의는 하나님의 성전이 갖고 있어야 할 원래의 의미를 상실했으니까 폐기되어야 하고 그것의 근본적인 본질을 되살려낼 새로운 예배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성전의 장사꾼들을 몰아낸 이 사건을 마가는 이제 예수님을 예배하는 새로운 공동체의 도래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예배가 시작되어야 하는 이유는 성전의 본질이 변질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유월절 같은 큰 절기에는 수 만 마리의 양이 도살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외에도 비둘기나 소도 역시 제물로 바쳐졌겠지요. 그런 제의가 반복되다보니 그 근본 정신은 사라지고 모든 사람들이 일에 파묻혀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사는 것보다는 어떻게 하
면 멋진 제의를 드릴 것인가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결국 이방인의 뜰이 시장 터로 변질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과 문화는 늘 이런 유혹을 받는 것 같습니다. 본질의 변질 말입니다. 교회는 원래 종말론적 공동체로 시작되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자기 자신을 위한 집단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유대교의 성전 제의만이 문제가 아니라 오늘 개신교의 정체성도 역
시 그들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의사들의 일은 히포크라테스의 말을 빌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생명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의사는 장사꾼처럼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그분들이 개인적으로 부도덕하다는 게 아니라 이 시대 정신이 그들을 그렇게 몰아간 것 같습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 삶 전반에 깔려 있습니다. 대학사회도 그렇고, 국회도 그렇고, 어떤 점에서 가정도 역시 그렇습니다. 모두가 장사꾼들처럼 돈버는 일에만 마음을 빼앗긴 게 아닐까요?
다른 것은 접어두고 우리의 '삶' 자체만 생각해보십시오. 대개 사람들은 삶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수단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넓고 쾌적한 집을 구하는 것에만 마음을 두지 삶의 평화와 기쁨의 본질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
론 넓은 집에 살면서도 평화롭게 사는 게 좋지, 좁은 집에 살면서 평화롭게 사는 거는 싫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겁니다. 이게 말이 안됩니다. 그런 마음에 치우쳐 있는 한 좁은 집에 살게 되면 그는 불행하게 생각합니다. 삶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장사꾼처럼 살아간다면 결국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장사꾼들처럼 성전(생명)의 집에서 쫓겨날 것입니다.
다음 주일은 기독교 축일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부활절입니다. 단지 우리가 다시 산다는 것에 마음을 두는 것으로 이 날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그런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준비도 필요합니다. 성전 청결 사건에서 확인했듯이 본질을 상실하면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우리는 신앙의 본질을 왜곡시키지 않고 늘 새롭게 갱신시켜 나가야 합니다. 즉 장사꾼처럼 신앙생활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더 근본적으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예수님이야말로 새로운 성전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장사꾼에게서 돈으로 구입한 양이나 비둘기가 아니라 예수님 자체가 곧 제물이라고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을 믿음으로써 새로운 신앙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20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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