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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힘

고린도전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007 추천 수 0 2009.06.03 23: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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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전15:1-11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8476 
jys.jpg 정용섭 목사

예수 사건의 딜레마
다른 종교의 가르침은 일반 사람들이 비교적 접근하기 쉽지만 기독교의 가르침은 결정적인 부분에서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예컨대 불교는 인간에게 스스로 내면에 담겨 있는 불성을 회복하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교리는 그것의 옳고 그름을 둘째 치고 사람들에게 불편하게 다가가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며 덕을 실현함으로써 완전한 삶을 성취할 수 있다는 공자의 가르침도 역시 사람들의 생각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가르침들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기독교의 십자가와 부활은 사람들의 마음을 매우 불편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경험에 비추어볼 때 상당히 어긋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기 어색한 내용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는 분명히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문제를 설명하려면 책 한 권을 써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세세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그 핵심적인 내용을 부분적으로나마 검토하겠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부처나 공자는 천수를 다 누리고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인생을 마쳤습니다.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분들은 죽은 다음만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도 역시 존경을 받았습니다. 특별한 가르침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 자체가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될 만 합니다. 이에 반해서 예수님은 젊은 나이에, 그것도 십자가 처형을 받고 죽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이미 바울이 고린도전서 1:23에서 진술하고 있듯이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 지금은 기독교인들이 십자가 모형을 목거리로 만들어 달고 다닐 정도이지만 원래의 십자가는 종교적인 의미와는 너무 거리가 먼, 로마 제국이 자신들의 제국을 지키기 위해 실시한 인류 역사상 가장 비참한 처형 방식이었습니다. 민족 해방을 위해 투쟁하던 혁명가들이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는 점에서 유대인들에게 일말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는 했지만 그런 극단적인 투쟁이 늘 지지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로마 제국의 억압이 심해졌기 때문에 속으로는 상당히 불편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 로마인들은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반역 죄인을 보고 당연히 어리석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로마 정권에 도전하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아무런 의미도 없이 자기만 희생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는 이런 십자가를 구원의 길로 선포해야만 했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이나 행복과는 완전히 반대라 할 수 있는 십자가를 구원의 길로 선포한다는 것은 곧 기독교의 딜레마였습니다.
아마 어떤 분들은 부활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이것처럼 참된 구원이 있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기독교인이 그렇게 믿는 것은 옳고 당연합니다만 우리는 이런 기독교의 가르침을 늘 보편적인 인식의 지평에서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만약 오늘날 어떤 소종파 교인들이 자신들의 교주가 죽은 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났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을 미친 사람, 맛이 간 사람, 사이비 집단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시작될 때는 오늘처럼 과학적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부활을 선포한다고 하더라도 거절하는 강도가 우리와 비교해서 약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결국은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상관없이 사람이 다시 산다는 것은 그렇게 당연한 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런 소문은 대개 거짓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도 부활이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전한다는 게 말처럼 간단한 게 아니었습니다.
기독교가 이런 딜레마를 벗어나기 위해서 몇 가지 다른 길로 접어들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사실성보다는 그것의 도덕적, 실존적 의미를 강조하는 게 하나의 길입니다. 자기 희생적으로 사는 것이나 절망에서 희망을 안고 사는 게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라고 말입니다. 이런 선택은 아마 교양과 지성을 삶의 토대로 삼는 사람들에게 그런 대로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조건 교리적인 차원이나 주술적인 차원에서 강요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이 담고 있는 딜레마를 이런 방식으로 해결해 하는 게 잘하는 일일까요? 기독교의 역사는 그런 비겁한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 시대의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불편한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자신들의 복음을 변질시키거나 왜곡시키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도 바울의 이런 태도가 엿보입니다.

부활의 현실성(reality)
고린도전서 15장은 신약성서의 부활 전승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대목인데, 오늘 우리가 읽은 1-11절은 부활의 역사적 현실성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3-5절 말씀을 읽어봅시다. "나는 내가 전해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서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서에 기록된 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과 그 후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전해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바울의 표현에 따르면 이미 초기 공동체 안에 이런 내용이 전승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전승의 내용이 곧 그리스도의 죽음, 무덤에 묻힘, 다시 살아나심, 사람들에게 나타나심입니다. 이 구절 중에서 '성서에 기록된 대로'는 그렇게 중요한 진술은 아닙니다. 대개의 신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듯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성서를 해석함으로써 부활에 대한 확신을 얻은 게 아니라 부활에 대한 사실적 경험이 우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도 받아들이기 힘든 부활 경험이 먼저 있었고, 그 뒤로 이제 그 안에 머물러 있던 초기 증인들에게 차츰 구약성서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십자가와 부활만 언급하지 않고 '무덤에 묻히셨다'는 언급이 포함된 이유는 그 사건의 역사적 사실성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예수가 가사(假死)상태에 빠졌다가 정신을 차린 게 아니라 완전히 죽었다고 말입니다.
부활의 그리스도가 여러 사람에게 나타났다는 전승을 바울은 자신의 입장에서 훨씬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먼저는 베드로에게, 다음에는 열 두 사도에게, 오백 명이 넘는 교우에게, 그 뒤로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 자신에게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이런 부활한 주님의 현현 보도는 예수의 부활 보도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논리적이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부활한 주님이 열 두 사도에게 나타났다는 언급이 그렇습니다. 이미 가룟 유다는 공동체에서 제외된 사람이기 때문에 열 한 사도라고 해야 맞습니다. 오백 명이 넘는 교우들에게 부활한 그리스도가 나타났다는 언급이 어떤 사실에 기초하고 있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1:15)이 보도하듯이 성령을 받은 120명의 교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에 대한 이야기는 복음서에 등장하지 않지만 바울이 그를 사도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경험은 그 유명한 다
메섹 도상의 회심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바울이 회심할 때는 이미 부활한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이기 때문에 베드로의 경험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아마 부활하신 예수님이 40일 동안 이 세상에 계시면서 현현하신 사건과 성령의 임재 사건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바울이 이런 일련의 증언을 통해서 전하려는 메시지는 예수 부활이 얼마나 확실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목도한 증인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더 이상 확실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11절에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하든지 다른 사도들이 전하든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고 있으며 여러분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부활신앙을 통한 구원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한 사도들의 증언이 진리라는 전제에서만 가능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사도들의 신앙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말씀하신다는 뜻입니다. 간혹 예수님을 직접 경험한다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또한 그런 가능성을 무조건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근본적으로는 사도들의 신앙 경험이 예수님과 우리 사이를 매개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11절 말씀도 그렇지만 1절 말씀도 역시 이런 배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형제 여러분, 전에 내가 전해 준 복음을 여러분의 마음 속에 되새겨 주려고 합니다. 이 복음은 여러분이 이미 받아 들였고 또 여러분의 믿음의 기초가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도의 신앙은 곧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것인데, 핵심적으로는 부활입니다. 십자가도 역시 기독교 신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인입니다만 부활이 훨씬 중요한 요체입니다. 십자가가 뿌리라고 한다면 부활은 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뿌리가 없다면 꽃도 없다는 점에서 십자가가 필수적이지만 목표는 곧 꽃을 피우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역시 부활이 우선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우선하는가, 하는 논의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성서 기자들이 증언하고 있는 대로 우리가 따라가면서 배우기만 하면 충분합니다. 오늘 본문의 중심 주제는 부활입니다. 이 부활 신앙을 통해서 기독교인이 구원받는 사실을 바울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이 헛되이 믿는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 내가 전해 준 복음 그대로 굳게 지켜 나간다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복음은 그 이후의 구절에서 자세하게 설명되고 있듯이 곧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우리는 곧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로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특히 바울은 무슨 근거에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걸까요? 이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면 15장 전체를 읽고 상당히 복잡한 사유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만, 오늘 우리는 거기까지 나가지 않겠습니다. 다만 한 대목만 확인하면 충분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생명의 완성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사도들은 자신들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죽음을 깨뜨리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경험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확실한 것인지는 위에서 살펴본 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현을 경험한 사도들을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실제로 부활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성서의 부활 보도 역시 그것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며, 오늘 바울의 진술도 역시 그런 증명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은 그것을 생생하게 체험했을 뿐입니다. 그 체험을 두서 없이 증언하고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 자리가 신앙의 비약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논리적 증명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신뢰하는 신앙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기독교 신앙에서 합리적 인식과 무조건적인 믿음 사이에는 늘 긴장이 따라 다닙니다. 한편으로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해석하고 인식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믿어야만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이 두 측면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한쪽으로 쏠려버리면 병들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적당하게 이성을 중심으로 인식하고 적당하게 믿음에 따라서 행동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철저하게 합리적이고 철저하게 신앙적이어야 합니다. 지성적인 사람들은 이런 것을 인간의 인식론에 대한 훼손이라고 생각하지 모르겠습니다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신앙적 비약이라는 말은 "믿을 만 하지 못하지만 그냥 믿는 게 아니라 아직 명증하게 해명할만한 준비가 못되었지만 믿을 만 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인간이 '존재의 신비' 앞에 정직하게 선다면 이런 말을 무시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 사건을 아직 우리가 과학적인 방식으로 완벽하게 해명하지 못했을 뿐이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근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더구나 과학 실증주의라는 것의 토대가 얼마나 허약한가 하는 점을 안다면 그런 기준만을 잣대로 예수 부활 사건을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생명의 힘
부활 신앙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결국 예수의 부활이야말로 바울이 표현하고 있는 대로 '믿음의 기초'이며 복음의 초석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모든 내용이 곧 여기에 토대를 놓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부활 종교이다."
아마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이런 말을 잘 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으며, 결국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좋습니다. 그런 신앙을 꾸준히 유지시켜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부활과 얼마나 단단히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점도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은 철저하게 생명 파괴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면서 말로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안타깝지만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자주 일어납니다. 부활이 단지 죽은 교리로만 작용할 뿐이지 현재 우리의 삶의 능력으로 작용하지 못하는 일 말입니다.
간단히 우리의 일상에서 이런 문제를 생각해봅시다.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매일의 삶에 억압당하고 있을 것입니다.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염려하면서 노심초사합니다. 나쁜 일이 일어날까 염려하기도 하지만, 혹시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나 하는 기대 때문에 마음이 자리를 잡지 못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되돌아보십시오. 참된 생명의 완성인 그리스도의 부활을 우리가 참되게 믿는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인간적 한계에서 순식간에 해방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부활의 영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만큼 우리의 인간적인 수고로 인한 상처와 혼돈을 사라질 것이며, 대신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 생명의 에너지가 솟아날 것입니다. 생명의 에너지는 곧 사랑의 능력으로 승화함으로써 우리 주변을 생명 현상으로 바꿔나갈 것입니다. 흡사 봄이 오자 죽은 듯이 보였던 나무에 꽃이 피고 잎이 피듯이 말입니다. 이게 곧 기독교가 가르치는 부활 신앙
이며, 복음의 기초입니다. 금년 부활절을 맞는 우리 모두에게 이런 생명의 힘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2004.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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