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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그루터기

이사야 배현주 교수............... 조회 수 3060 추천 수 0 2009.06.07 22: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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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6:13 
설교자 : 배현주 교수 
참고 : 부산 장신대학교/ 새길교회 2008.12.28주일설교 

I. 2008년 무자년이 다 지났습니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의 연말은 어수선하기만 합니다. 올해 이명박 대통령께서 취임하면서 2008년을 산업화와 민주화에 이은 대한민국 선진화의 원년으로 삼겠다고 밝히셨는데요, 정치, 경제, 언론, 교육 각 부문에서 들어나고 있는 현 정부의 정책과 방침은 고귀한 생명을 희생하면서 어렵게 성취한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퇴행시키는 신호들, 우리 사회의 삶의 질을 낙후시키는 신호들로 가득 차 있어서 참 염려와 근심이 되는 연말입니다. 2009년 새해가 바로 눈앞에 다가왔지만, 밝은 희망보다는 어두운 표징들이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미국금융자본주의의 실패를 직시하고 있습니다. 수십년간 세계 경제를 지배해왔던 신자유주의가 종언을 고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진단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현 정부는 소수를 위한 다수의 희생, 무한 경쟁, 시장근본주의,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키는 경제 지상주의 이데올로기를 여전히 앞세워 새해의 화두를 “속도”로 삼겠다고 말하고 있으니, 참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께서 미국 방문 중에 자신이 한국이라는 기업의 CEO라는 놀라운 발언을 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는데, 이런 시대착오적인 인식이 바뀔 기미가 보이지를 않습니다. 새해에 경제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중산층이 더욱 붕괴되고 고통받는 서민들이 늘어나며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 청년들이 불어날 것을 예상하자니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올해는 특히 화재로 인한 참사가 많았습니다. 1월초 이천 화재 참사로 인해서 냉동공장에서 조선족 13명을 포함한 40명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매스컴에서는 “화마가 삼킨 코리안 드림”이라고 보도했습니다. 같은 곳에서 얼마 전 또 화재가 일어나 천하보다 귀한 청년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말았습니다. 이런 종류의 화재 사건들은 대부분 노동자의 안전보다 이윤창출을 중요시하는 비인간적인 정신기제와 부조리한 관행들 때문에 일어납니다. 억울한 인명을 희생시키는 이런 종류의 사건들은 우리 사회의 수치이고 재발되어서는 결코 안 되는 사건들입니다. 그런데 2월에는 우리의 소중한 국보인 숭례문이 소실되는 충격적인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사건이 혹시 한국 사회에 대한 하늘의 경고가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불은 성서에서 심판을 가리키는 메타포입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과 불의 심판을 받았습니다(창 19:24).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그 죄가 하늘에까지 닿았던 도시 바빌론도 불에 타버리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계 18:8). 바빌론이 번영할 때 판매했던 상품 리스트에는 각종 보석, 각종 사치품들뿐만이 아니라 노예와 사람의 목숨까지도 들어 있었습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진보한 것 같은 21세기가 뜻밖에도 그 특성상 노예의 시대라고 진단하는 연구도 있습니다. 맘몬에 영혼을 팔아버린 것만 같은 우리 사회의 지도부나 일반 시민 모두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목적, 방향, 그리고 그 방식에 대해서 진지하게 되돌아보아야 하는 시점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마음의 눈이 멀어서, 얼이 빠지고 넋이 나가서, ‘문명의 얼굴을 한 야만’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죄를 짓는데 다 공범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II. 우리 사회가 이렇게 낭떠러지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은 시대에, 교회가 사회의 모범과 영감이 될 만한 대안적인 모습을 제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물질적 기복주의, 성장 제일주의, 경쟁주의에 기초한 개교회주의의 노예가 되어 있는 가슴 아픈 현실을 목도하게 됩니다. 사회의 민주화가 퇴행하는 것을 막아낼 정신적 문화적 내공이 쌓여있기 보다는, 권위주의, 교권주의, 가부장주의 등 비민주적인 생활문화가 교회에 더 뿌리가 깊다는 가슴 아픈 현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난 9월에 제주도에서 개최된 장로교단들의 역사적 연합예배에서는 성찬식을 거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성안수를 주지 않는 교단의 대표들이 “치마를 입은” 여자들이 단 위에 올라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 세대의 물질주의, 차별주의, 양극화 멘탈리티를 본받다가, 이제 그 정신과 정체성까지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역설 주기도문”이라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이라고 하지 마라/매일 땅의 것만 생각하면서
“우리”라고 하지 마라/언제나 너 혼자만 생각하면서
“아버지”라고 하지 마라/전혀 아들, 딸답게 살지 않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지 마라/ 제 이름만 내려고 발버둥치면서
“나라가 임하옵시며” 하지 마라/ 오로지 황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지 마라/내 뜻만 이루기를 바라면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지 마라/죽을 때까지 아니 대대로 먹을 양식을 쌓아두려고 하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 하지 마라/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적에 대한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하지 마라/죄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매일 죄지으면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하지 마라/ 악을 빤히 보면서도 피하려 하지 않으면서
“아멘”이라 하지 마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간디는 “사탄은 입술로만 하나님을 말하는 곳에서 큰 성공을 거둔다”고 지적했다고 합니다. 사탄은 껍질뿐인, 말뿐인 기독교를 몹시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저 자신부터 매일 공허한 주기도문을 입술로만 외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크게 반성하게 됩니다. 시대의 문제를 인식하고 분석하면서도, 사회생활과 도시생활을 한다는 미명 아래 편리한 물질문명에 길들여진 자신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부터 모순에 가득 찬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또한 고난 받는 민중과 자연 앞에 송구스러움을 지니고 참회할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III. 오늘 본문 말씀이 들어 있는 이사야서 6장은 이사야가 선지자로서의 소명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글입니다. 6장의 초점은 이스라엘과 유다 남과 북의 두 나라가 다 멸망할 것이라는 충격적인 심판선언입니다. 하나님께서 “정의와 공의를 바랐는데 . . 도리어 포학이고. .. [가난한 자들의] 부르짖음만” 울려 퍼졌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유다는 멸망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사 5:7).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의 관계를 멸망과 심판으로 끝내버리지 않으신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아울러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뜻을 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소수, 거룩한 씨, 곧 “이 땅의 그루터기”를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한국 사회와 교회의 전반적인 어두운 현실을 바라보면서 과연 오늘날 어떤 신앙인들이 변함없이 하나님의 새 역사를 열어갈 “이 땅의 그루터기”인가 질문하게 됩니다. 저는 한반도에서 살아갔던 자랑스러운 믿음의 선배들을 기억하고 한국 기독교의 소중한 유산을 오늘에 되살리고자 노력하는 신앙인들이야말로 이사야서 본문이 가리키는 “이 땅의 그루터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국기독교는 서구 선교사들의 일방적 선교 이전에 한국인에 의해 적극적으로 주체적으로 수용되었고, 멸망해가는 민족과 국가의 정기를 바로 세워보려고 치열하게 싸웠던 민족 지도자들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1919년 삼일운동의 범민족적 저항에 한국교회가 적극적으로 동참했으며, 민족의 수난에 책임적으로 동참하는 교인들을 보고 교세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던 것도 역사의 한 사실로 남아 있습니다. 한국의 초기 기독교인들은 식민지의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믿었습니다. 소망할 것이 하나 없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정의를 소망하며 믿었습니다. 그리고 믿는 대로 살았습니다. 이런 기독교인들을 바라보면서 일제하의 백성들은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자포자기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발견하였습니다. 세상과는 차원이 다른 가치관을 지니고 신앙을 실천하고 살면서 동시에 민족의 정기를 드높이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교회 다니는 사람은 보증수표, 무조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회적 인정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삼일운동의 유관순 같은 인물이야말로 20세기 초반부 한국 기독교의 정신을 대변하는 상징적 인물일 것입니다.

고난과 수난의 시대에 민족의 정신적 지도력으로 부상하였던 한국기독교가, 물질적 풍요의 시대에 사회의 지탄을 받는 집단이 된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비록 소수였다고 해도 각 시대마다 한국 사회의 중심과제와 씨름해온 자랑스러운 기독교인들,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일제 저항기에 ‘민족’을 위해 씨름하였던 거룩한 씨앗들이 있었듯이, 분단시대의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민주,’ ‘인권’ 그리고 ‘통일’을 위해서, 급속 산업화 시대에 ‘민중’을 위해서 헌신하였던 거룩한 씨앗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거룩한 씨앗들이야 말로 한국 기독교의 소중한 정신적 광맥입니다.

오늘날 인류의 최대과제는 그리고 한반도의 중심과제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그런 점에서 생명과 평화를 추구하는 각종 NGO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기독교인들, 사회의 약자들과 장애인들과 이주노동자들을 위하여 묵묵히 목회와 선교에 임하는 도시의 교회들과 기독교인들, 그리고 농촌에서 묵묵히 생명농업을 지향하며 교회가 지렛대에 되어서 농촌지역 살리기를 행해온 교회들과 기독교인들은 비록 그 수는 적다고 하더라도 20세기 후반부에 그리고 21세기 초반부에 한국사회의 양심과 정기를 바로 세우는 고독한 작업을 수행함으로써 전래 초기부터 면면히 흘러온 한국기독교의 참된 광맥을 이어주는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삶의 자리가 어디이건 간에 생명과 평화의 문제를 자신의 과제로 삼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21세기에 한국 기독교의 소중한 정신의 광맥을 이어가는 거룩한 씨앗들이고, 우리 시대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이 땅의 그루터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 길을 걷고 싶어서 새길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오늘 함께 예배드리시는 여러분들도 “이 땅의 그루터기”로 살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IV. 우리는 자연의 생명과 인간 공동체의 생명이 파괴되는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생명살리기 운동이 절박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매시간 1,500명의 어린이들이 기아로 죽어가고 있는데 매분마다 전 세계의 국가들은 1천 8백만 달러를 군사무기에 소비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평화운동이 절박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더더욱 한국의 신앙인들은 우리 한반도의 평화가 동북아의 평화 그리고 세계의 평화와 직결되는 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평화통일운동을 절실하게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의 생명과 평화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일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의 영혼과 존재에 예수의 생명과 평화가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게 없는 것을 세상에 줄 수 없습니다. 성전 미문에서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만났을 때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말씀으로써 치유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행 3:6). 우리가 세상의 생명과 평화를 위해서 효과적으로 일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각자의 영혼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평화를 충만하게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땅의 그루터기”로 살기 원하는 신앙인들의 영혼에 있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평화의 특징을 세 가지 정도로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평화는 우리에게 감사하는 마음, 자족하는 마음을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행한 이유는, 더 많은 물질을 가지면 자동적으로 행복해질 것이라는 탐욕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는 성경의 진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눅 12:15). 잠언 마지막 부분에서 아굴은 두 가지를 주께 구하고 있습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7-9). 같은 잠언에 지혜자의 깨달음이 실려 있습니다.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 15:16-17).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과 필요한 물질이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동시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마 6:33). 감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에 가장 중심이 되는 힘이 하나님인지, 아니면 물질인지를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았던 사도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감사하고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고백합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사도 바울은 감옥에 앉아서, 거동의 자유도 누리지 못한 채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권면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사람의 지각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4-7).

하나님 중심의 삶은 세상의 인식과 차원이 다른 삶을 살게 합니다. 평범한 사회인이었지만 비범한 신앙을 지녔던 한 성도를 늘 기억합니다. 오랜 이민 생활의 고생 끝에 생활이 안정되시자 치명적인 암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심방갈 때마다 감사하다고 하시는 겁니다. 갑자기 세상에서 불러가실 수도 있는데, 인생 정리할 수 있는 여유를 주셔서 감사하고, 하나님을 알고 죽을 수 있어서 감사하고, 아내가 아니라 내가 암에 걸려서 감사하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산 사람들 위로하고 가셨습니다. 그 성도의 장례식이 추운 겨울날이었지만, 참석한 저희들은 오히려 뜨거운 성령을 체험하며 전혀 추운 줄을 몰랐습니다. 저는 목회 현장에서 그리고 신학교 현장에서 개인사 가족사의 수많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신앙인을 만날 때마다, 오늘 같은 허영과 교만의 시대에 하나님이 보내주신 작은 예수를 만나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같은 허영과 교만의 시대에 가장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자족할 줄 아는 신앙인을 만날 때마다, 아무도 혁명을 말하지 않는 이 세상 속에서 혁명적인 인간상을 보여주시는 분들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평화는 양이 아니라 질을 중시합니다. 한국 사회와 교회의 물량주의, 경쟁주의, 성장제일주의, 스타 추종 현상, 허영 등은 “질에 대한 감각”을 결여한 공허한 문화에서 비롯한다고 불 수 있습니다. 물량주의 문화는 물질 소비의 양과 사회적 지위의 고하를 통해서 인간의 가치를 측정함으로써 우리 사회를 비인간화시키고 살맛 안 나게 만듭니다. 방금 인용하였던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는 예수의 말씀은 삶의 질을 옹호하는 대선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양에서 질로 삶의 기준을 전환하는 것이 인간성을 성숙하게 하고 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 첫걸음이 됩니다. 본회퍼는 “십년 후”라는 글에서 전체주의 사회의 위험을 경고하며 “질에 대한 감각”(feeling for quality)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질은 어떤 유형의 타락에 있어서도 가장 강력한 적이다. 사회생활에 있어서 질이란 지위상승을 위한 분투의 포기, 스타숭배(the cult of stardom)와의 결별, 특히 친구들이라는 보다 협소한 써클을 선택해야 할 때 상하층 사회적 신분에 구애됨 없이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 들어내지 않는 삶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 동시에 공적인 삶에 대한 용기 등을 포함한다. 문화적으로 볼 때 질을 경험한다는 것은 신문과 라디오로부터 책으로, 분주함에서 여가와 고요함으로, 산란한 마음에서 침착한 마음으로, 선풍적 인기에 대한 집착(sensationalism)에서부터 성찰로, 거장(virtuoso)이라는 이상으로부터 예술 자체로, 속물근성으로부터 겸양으로, 방종에서 중용으로 돌아오는 것을 포함한다. 양(quantities)은 서로 분쟁하는 반면 질(qualities)은 서로 보완한다.”

한국 사회가 분단 상황 속에서 압축된 근대화를 겪어오는 과정 속에서 개인들은 물량주의로 인한 갖가지 “상흔”들로 얼룩진 상처입은 영혼들이 되어 있습니다. 물량주의에 편승한 사람들은 마치 가난한 나사로를 눈 앞에 두고 혼자 먹고 마시는 부자처럼 비인간화되었고, 경쟁에서 밀려 난 사람들은 동일한 물량주의의 논리를 통해서 패배의식을 내면화함으로써 비인간화되어 갑니다. 20세기 경제공황 시기에 미국에 근본주의가 부쩍 자라났다는 연구에 주목하면서, 2008년 금융위기가 한국 사회와 교회를 근본주의와 정치적 파시즘으로 기울게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립니다. 물량주의가 물질적인 힘에 맹목적으로 의존함으로써 인간 정신을 무력화시키는 현상이라면, 근본주의나 파시즘은 억압적이고 절대적인 외부의 힘에 맹목적으로 의존하려는 현상입니다. 이런 현상들은 다 양적인 힘, 강압적 힘, 과시적 힘, 지배적 힘에 대하여 맹종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양이 아니라 질로 삶의 관심을 바꾼다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강자만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소위 약자들에게도 큰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강압적 힘, 물량적 힘, 시끄러운 힘, 돈의 힘만이 힘이 아니라, 생각의 힘, 설득하는 힘, 수용하는 힘, 기도의 힘, 믿음의 힘, 소망의 힘, 사랑의 힘, 용서의 힘, 기쁨의 힘, 꿈의 힘, 상상력의 힘, 저항의 힘, 연대의 힘도 큰 힘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평화는 이러한 창조적인 질적인 힘을 지니고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축복합니다. 양적인 파라다임은 부귀와 명성과 권력을 우상화하는 “일차원적 인간”을 양산하지만, 질적인 파라다임은 푸르른 생명력이 있는 인간, 평화의 향기가 나는 인간을 형성해나감으로써 우리 사회를 인간화하고 성숙하게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우리가 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평화는 기억의 힘을 통해서 더욱 풍성해집니다. 특히 한국 기독교는 기억을 통하여 누릴 수 있는 유산의 선물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2007년 3월 인도네시아 파라팟에서 개최된 아시아기독교협의회(Christian Conference of Asia/CCA)의 50년을 회고하는 희년행사에 패널토의자로 참석하였습니다. 이 행사에서 가장 감명깊었던 시간은 백발의 노장들이 직접 50년 아시아기독교협의회의 파란만장했던 역사를 회고하는 시간이었습니다. 1955년 반둥회의 직후에 아시아 기독교의 문제는 아시아인들이 일차적으로 협의하겠다는 주체적 자세로 아시아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였을 때, 서구 교회 백인 지도자들이 난색을 표명하였던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아시아 대륙의 기독교협의희는 서구중심주의를 넘어선 최초의 대륙별 에큐메니칼 협의회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경직 목사님이 10명이 넘는 기독교인들과 함께 창립총회에 참석할 정도로 에큐메니칼한 의지를 표명하셨다는 이야기도 현장에서 직접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한국 기독교인의 신앙을 통해서 50년 아시아교회의 정신을 요약하는 이야기였습니다. 뉴질랜드의 론 오그래디(Ron O'Grady) 목사라는 분은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 깊이 관여하셨던 분이신데,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이 배출한 한 장로교 목사가 군사정권 당시 감옥에서 석방되었을 때 한참 염려하고 있다가, 당신같이 부드러운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감옥생활을 버텼느냐고 질문했다고 합니다. 그 한국 목사는 “기도원에 간 것처럼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고 찬송도 했고 가끔씩 하나님 앞에서 춤도 추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말에서 론 오그래디 목사는 아시아 전체 교회의 불굴의 정신과 영혼을 요약하는 핵심을 발견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은 곧 “감옥 속에서 주님을 향하여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dancing to the Lord in the prison!)입니다. 이 표현은 정의를 위한 고난 속에서 임마누엘 하나님을 체험하고 기뻐하며 찬양하는 기독교 신앙의 저력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힘은 단지 한 개인의 신앙만이라기보다, 바로 민주화에 투신하였던 한국 기독교인들 전체의 신앙의 저력을 요약하는 것입니다. 이 한국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저력에 대한 회상이 50년 아시아 기독교의 역사를 회고하는 시간의 클라이막스가 되었던 것입니다. 고난받는 아시아 여러 나라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현장에 있었던 한국 기독교인인 저는 자부심과 함께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동시에 인도의 네루가 자신의 딸에게 한국의 삼일운동은 세계의 약소민족이 다 본받아야 할 정신이라고 가르쳤다는 이야기를 기억하였습니다. 한국의 삼일운동의 상징적 인물은 16세의 기독교 소녀 유관순임을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한국 교회가 타락하여도, 격동의 20세기가 낳은 한국 기독교의 자랑스러운 믿음의 선배들이야말로, 이 땅의 그루터기로 살기를 소망하는 우리의 소중한 유산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땅의 그루터기로 살기를 원하는 우리는 생명과 평화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의 힘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종교 개혁의 원칙을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에서 찾고자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기독교의 출발점인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늘 되돌아가야 하겠습니다. 로마 제국의 거짓 평화를 폭로하시고 참된 평화를 이룩하시기 위해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 고난의 역사 속에서 상처받고 병들고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치시고 새 생명 주신 예수님,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신 예수님, 지혜의 말씀으로 어두운 마음의 눈을 밝혀주셨던 예수님, 자기의 온 생명을 세상을 위한 사랑으로 다 내어 주신 주님, 부활하심으로써 죽음과 사망이 끝이 아니라는 것,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신 주님. 이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생명과 평화 운동의 시발점이 되며, 답답한 속에서도 낙심치 않고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V. 로마서에 의하면 모든 피조물이 함께 신음하면서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롬 8:22). 오늘날 한국 사회와 교회의 혼돈과 어둠은 이러한 바울적인 관점에서 보면 “새로운 창조”를 위한 전조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모쪼록 올해의 마지막 주일을 지내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모퉁이돌이 되시고자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평화를 충만하게 체험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럼으로써 이 죽임과 폭력의 시대에, 참된 생명과 평화의 세계를 열어가실 수 있기를, “이 땅의 그루터기”로 살아가는 힘과 용기를 얻으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기도>
 일 많은 이 땅에서 저희들을 일꾼으로 부르신 주님,저희의 믿음을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저희가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행함으로써(고후 5:7)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 땅의 그루터기”로 살아갈 수 있도록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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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1611 히브리서 희망의 약속을 향하여 히6:13∼20  박병배 목사  2009-06-13 2062
1610 여호수아 의심과 두려움은 항상 생긴다 수1: 5~9  조용기 목사  2009-06-11 2385
1609 마태복음 원수를 극복하는 길 마5:38~41  조용기 목사  2009-06-11 3072
1608 빌립보서 삶과 염려, 근심, 걱정 빌4:6-7  조용기 목사  2009-06-11 4598
1607 로마서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롬8:33~39  조용기 목사  2009-06-11 2541
1606 누가복음 드리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눅6:38  조용기 목사  2009-06-11 1897
1605 야고보서 자기를 비워야 하나님의 뜻이 이뤄진다 약1:12~15  조용기 목사  2009-06-11 2623
1604 고린도전 새로운 각오 고전13:1~3  조용기 목사  2009-06-11 1938
1603 창세기 하나님을 감동시킨 사람들 창22:15~18  조용기 목사  2009-06-11 3370
1602 시편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시31:19~21  조용기 목사  2009-06-11 3157
1601 예레미야 크고 비밀한 일 렘33:2~3  조용기 목사  2009-06-11 3487
1600 로마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  조용기 목사  2009-06-11 3606
1599 고린도후 하나님보다 더 신령한 사람들 고후8:9  조용기 목사  2009-06-11 2073
» 이사야 이 땅의 그루터기 사6:13  배현주 교수  2009-06-07 3060
1597 빌립보서 그대는 내게 축복입니다. 빌4;1  김경희 교수  2009-06-07 2571
1596 갈라디아 성경을 읽는 한 가지 방법 갈3:26~29  윤진수 형제  2009-06-07 3223
1595 호세아 광야 호13:5-6  최창모 교수  2009-06-07 4133
1594 사도행전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행17:22~29  길희성 형제  2009-06-07 2383
1593 고린도후 강한 자가 되라 고후12:7-10  강종수 목사  2009-06-07 2414
1592 고린도전 대화로서의 기도 고전14 : 15  임영수 목사  2009-06-06 2138
1591 사도행전 하나님의 희망 속에 있는 공동체 행2:37∼47  임영수 목사  2009-06-06 2176
1590 요한복음 보혜사 성령 요16:5∼16  임영수 목사  2009-06-06 3202
1589 마가복음 자기를 부인하는 삶 막8:34∼38  임영수 목사  2009-06-06 3155
1588 마태복음 구원의 현실성 마11:25∼30  임영수 목사  2009-06-06 1752
1587 시편 인간의 길 시1:1∼6  임영수 목사  2009-06-06 2270
1586 고린도전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힘 고전15:1-11  정용섭 목사  2009-06-03 2004
1585 마가복음 본질의 변질 막11:15-19  정용섭 목사  2009-06-03 2131
1584 시편 나는 왜 감사해야 하는가? 시50:22~23  조용기 목사  2009-06-01 2992
1583 베드로전 눈에 안 보이는 대적 벧전5:5~9  조용기 목사  2009-06-01 1996
1582 고린도후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되지요? 고후5:8-9  조용기 목사  2009-06-01 2068
1581 갈라디아 내 인생을 누가 살아주나? 갈2:20절  조용기 목사  2009-06-01 2635
1580 열왕기하 육의 눈과 영의 눈 왕하6:14~17  조용기 목사  2009-06-01 2825
1579 마태복음 주께 업혀서 사는 삶 마11:28~30  조용기 목사  2009-06-01 2336
1578 마가복음 버려야 얻는다 막10:28~31  조용기 목사  2009-06-01 2180
1577 고린도전 방언 기도의 유익이 무엇인가? 고전14:39~40  조용기 목사  2009-06-01 3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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