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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1:2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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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5년 6월 5일 성찬주일 3부설교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서론]
“마음에 평안을 얻기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열심히 목회하는 어느 목사님과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조목사님 저는 제 자신이 죽고 예수님만 내안에 사시도록 아무리 노력해도 제 자신이 좀처럼 죽지 않는데 정말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또 다른 목사님은 “욕심을 다 버리고 내 자신까지 버려야만 참된 마음의 평화를 얻겠는데 버린다. 버린다 하면서 쉽게 버려지지 않더라구요.” 저도 그 목사님들의 말에 동감을 했습니다. 그러나 내 자신이 살아있는 한 마음을 비우지 않는 한 마음에 평화를 갖기는 대단히 힘이 듭니다. 독일의 대문호였던 괴테는 80세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단 몇주 동안이라도 참으로 행복한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다. 내가 평안함을 느끼고자 할 때는 내 자아에서 벗어날 때에만 그것이 있었다.”고 말했었습니다. 진정한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자아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존 메이슨은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부정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워 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본론]
1. 내가 죽는 일
첫째로, 내가 죽는 일입니다.
내가 죽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지요. 바울선생은 성경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 선생은 분명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도 그와 같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이론상으로는 확실히 알지만 실제적인 삶속에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와 사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6장 1절로 6절에도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그런데 우리가 예수믿고 물세례 받을 때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물무덤에 장사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옛사람이 되어서 죽고 새사람으로 부활했다고 말하고 그것을 우리가 알고 믿습니다만 그러나 여전히 우리 속에는 옛사람이 살아있고 죄에 대한 유혹에 넘어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내가 죽었다 죽었다 하면서 사실은 안 죽을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 자신도 ‘아~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죽었다. 이제는 예수께서 내 속에 살아계신다.’고 큰 소리 하다가도 다른 사람이 와서 자꾸 화를 돋우면 ‘옛사람이 살아서 뭐 어쩌고 어째? 주님 잠시 비켜 계십시오.’ 그리고 옛사람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것을 보고 난 다음에 나중에 마음에 크게 실망을 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죽은 줄 알았는데 아직 너무나 팔팔하게 살아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의미가 뭡니까? 죽는다는 것은 관계의 단절을 말합니다. 죽었으면 옛 세계 옛사람은 반응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한 제자가 선생님께서 찾아와서 “선생님! 죽는 것이 뭡니까?” 그렇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그것을 알고 싶으면 내가 시키는데로 해라! 내일 점심 도시락 싸서 너의 사랑하는 옛날 친구 중에 죽은 사람이 있으면 그 무덤에 가서 애통하고 친구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칭찬하고 온갖 좋은 말로 다 말을 하고 난 다음에 점심 도시락을 먹고 오후에는 미워하는 친구가 죽어서 있는 무덤에 찾아가서 발을 구르고 침을 뱉고 욕을 하고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로 차고 그리고 오너라! 그러면 내가 죽는 것이 뭔지 알려 주겠다.” 그래서 이 사람이 점심 도시락 싸서 사랑하는 친구의 죽은 무덤에 가서 오전 내내 칭찬을 하고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미운 친구에게 가서 발을 구르고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고 주먹을 휘두르고 나쁜 놈, 죽일 놈, 고약한 놈 온갖 욕을 다했어요. 그리고 그 이튿날 선생님께 가서 “선생님 그렇게 했습니다.” 그 선생님이 웃으면서 “사랑하는 친구에게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좋아한다고 칭찬하고 찬양을 할 때 무덤에서 친구가 뭐라고 하더냐?” “아무 말도 안합니다.” “그러면 점심먹고 미운 친구에게 가서 온갖 욕을 하고 발을 구르고 침을 뱉고 주먹을 휘두를 때 그 친구는 뭐라고 말하더냐?” “그도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 왜요? 죽었는데 무슨 말을 합니까?” “그래~ 죽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너를 욕하는 사람에게도 반응하지 아니하고 너를 칭찬하는 사람에게도 동요하지 아니하고 관계의 단절을 말하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 무슨 화를 내고 죽은 사람이 무슨 아양 떠는데 좋아하느냐?” 그 학생은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이해는 되나 실천하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맞았어요. 우리는 이론적으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장사지내 버리고 말았는데 실제는 아직 안 죽어 있단 말입니다. 그것을 알고도 안 죽어 있는 것이 큰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 안에서 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초대 교회사에 보면 능력있고 유명한 부흥사로 김익두 목사님이 나오는데 그는 원래 황해도 아낙산골에서 유명한 불량배요, 깡패였습니다. 하루도 술마시지 않는 날이 없고 주먹을 휘두르고 싸우지 않는 날이 없어요. 장날에는 성황당에 돌을 던지고 침을 뱉고 김익두 안 만나게 해달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 김익두 깡패에게 괴로움을 안 당한 동네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한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 마을에는 이런 부고장이 떠돌았습니다. ‘김익두가 00월 00일 00시에 죽어서 장사를 지냅니다.’ 부고장을 받은 사람들은 얼씨구나 좋다고 어깨춤을 추었습니다. “이제는 시장터에 가도 김익두 안 만나니 좋겠고 그를 만나서 욕을 안얻어 먹을 것이니 좋다. 아~ 그놈 잘 죽었다. 아주 속시원하다.” 그런데 부고장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여 어쩔줄 몰랐는데 얼마 후 보니 죽었다는 김익두가 성경책을 끼고 거리를 왔다 갔다 하고 있거든요. 사람들이 너무나 실망을 했습니다. “아니~ 당신 죽었다고 부고장을 보내놓고 난 다음 어떻게 살아서 또 돌아다니냐?” 그러니까 그는 싱긋이 웃으면서 “예~ 옛날 불량배요, 깡패였던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보는 김익두는 옛날의 김익두가 아닙니다. 나는 예수믿고 새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실제로 하루는 그가 변한 것을 알아보려고 한 청년이 구정물을 그에게 덮어 씌웠습니다. 구정물 세례를 받은 그는 눈을 비비고 얼굴을 닦고 난 다음에 그 청년을 노려보면서 하는 말이 “당신은 옛날 김익두가 죽었다는 사실을 기뻐해야 됩니다. 그가 옛날 사람 같았으면 오늘 당신 내 손에 요절났어” 김익두 목사님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거듭난 후 자신의 옛 모습이 사라지고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은 그런 체험을 했습니다. 그로인해 그는 능력있는 부흥사로써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그렇게 됐는데 왜 나는 안 되느냐? 그것이 의문입니다.
교회사에 위대한 획을 그었던 신학자요, 성자였던 어거스틴도 방탕자였습니다. 얼마나 음란하고 방탕했든지 그 어머니 모니카가 그 아들을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금식하며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기도로 어거스틴이 회개하고 변화받아 옛날 어거스틴은 죽었습니다. 그가 하루는 길을 걸어가는데 옛날에 그와 같이 놀던 창녀 하나가 어거스틴을 보고 “아이고 여보시오~ 어거스틴 그동안 얼마나 기다렸는데 왜 안 찾아 왔소? 갑자기 왜 우리 집에 두문불출하오? 오늘 우리 집으로 갑시다.” 어거스틴은 뒤도 안돌아보고 그 창녀보고 말하기를 “당신이 말한 그 옛날 어거스틴은 이미 죽었소. 지금 보는 어거스틴은 그 옛날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난 사람이니 당신하고 아무 관계가 없소”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죽었다고 하는 것은 옛날과 관계를 끊었다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실제적으로 나의 삶 속에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의 새사람으로 살아서 행동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이 듭니다. 왜 실제적으로 노력을 해도 안 될까요?
2.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우는 일
둘째로,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우는 일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다 비워야 내가 마음이 평안해지고 내 속에 그리스도가 채워진다고 그러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버리고 비운 것 같다가도 나중에 보면 그대로 있다 말입니다. 우리가 보면 성자들은 그것이 가능했어요.
누가복음 9장 23절에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쫓으라. 올바른 말씀입니다. 아멘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이 잘 안되거든요.
마태복음 19장 29절에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어떻게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집도 버리고 형제도 버리고 자매도 부모도 자식도 전토도 버릴 수가 있습니까? 가능할 것 같지만 우리 같은 범인들은 불가능하잖아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하라고 했는데 또 그렇게 한 사람들이 있어요.
이탈리아의 아시스에 살던 성 프란시스는 부자집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난 다음 그의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있는 옷조차 벗어서 벌거벗고 그는 누더기 옷을 갈아입고 평생을 걸인으로 살면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다 비우고 버릴 수 있었습니다.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는 독일같은 부유한 나라에 태어나서 30대에 벌써 신학박사, 철학박사, 유명한 음악을 전공한 음악가가 되었고 그 다음에는 의학을 공부해서 의학박사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유한 독일을 버리고 집안을 버리고 다 털어서 아프리카 중에서도 가장 독벌레가 많고 뱀이 많고 그리고 사자들도 많고 위험한 랑바다라는 곳에 가서 나환자촌을 세우고 나환자를 위해서 일생을 바쳤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모골이 송연합니다. 왜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느냐? 어떻게 알버트 슈바이처박사는 문명을 버리고 30세 이후로 평생을 나환자를 위해서 아프리카에서 자기를 바칠 수 있었는가? 그렇게 한 사람도 있거든요? 테레사 수녀도 유고의 마케도냐에서 부요한 가정의 1남 2녀 막내로 태어나서 온갖 사랑을 다 받고 자랐지만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인도에 건너가서 가장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라는 음성을 듣고 켈거타에 가서 길거리에 쓰러져 죽어가는 거지들을 불러다가 목욕시키고 머리 빗기고 무릎에 누여서 편안하게 세상을 뜨게 하는 일을 하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돌보아 주는 일을 위해서 평생을 바쳤다. 그들은 이 세상 인연 다 끊어 버리고 다 버리고 비우고 주님만 위해서 살았는데 나는 겹겹이 인연의 줄에 매여서 꼼짝을 할 수 없어요. 부모와의 인연을 어떻게 끊어요? 나는 부모를 모른다고 하고 등질수가 없어요. 부부인연을 어떻게 끊어요. 서로 의지하고 백년을 살자고 결혼을 했는데 내가 하나님의 사명을 받았다고 부인을 버리고 혼자서 나갈 수가 있나요? 그 인연 끊을 수 없잖아요. 부모, 자식의 인연을 끊을 수가 있어요? 주님을 사랑한다고 에라 그냥 자식들 다 버리고 떠나자고 그렇게 할 수가 있나요? 친척의 인연도 끊을 수가 없지요. 이 세상에 친척들을 모른다고 할 수 없고 사회적 인연도 너무나 끈끈하잖아요. 선배도 있고 후배도 있고 동창도 있고 지연도 있고 이런 인연이 겹겹이 묶여 있는데 내가 다 버리고 다 떠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서대문에서 목회할 때 우리교회 주의 종이 되겠다고 자원해서 들어온 사람이 저하고 인터뷰를 했는데 그는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특심하고 목숨을 바쳐서 일을 한다고 말을 하기에 상당히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가족관계가 어떻게 됩니까?” 그러니까 얼굴에 큰 웃음을 웃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분토와 같이 버렸습니다.” 라고 하더라구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모르겠어요. 그 사람이 성자 아니면 방탕자입니다. 이 사람이 성자냐, 탕자냐. 나는 그 사람 앞에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당신이 가족을 분토와 같이 버렸으면 나도 오늘 당신을 분토와 같이 버립니다. 당신을 우리교회 주의 종으로 세울 수 없습니다.” 자기는 성자인줄 알고 처자를 분토와 같이 버리고 안 돌보고 우리교회 주의 종이 되겠다고 하는데 나는 그 사람을 볼 때 성자로 보이지 않고 탕자로 보입니다. ‘이 놈의 자식 처자도 버린 사람이 무슨 주의 종이 되겠다고 와가지고서 건방지게 날 뛰는가’ 이렇게 본다 말입니다.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무엇을 어떻게 버리란 말입니까? 이해는 되나 실천하기가 너무나 힘들잖아요. 그래서 바울선생께서도 로마서 7장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마음으로는 그렇게 해야 되겠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안 되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3.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신다
셋째로, 어떻게 해야 내가 옛사람이 죽고 또 버리고 비울 수가 있나요?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동네에 가셨는데 부자가 와서 “선생이여 내가 무엇을 행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웃을 거짓증거하지 말라. 이웃을 탐하지 말라.” 그러니까 “나는 어릴 때부터 그런 것 다 지켰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보시고 “아직 한 가지 모자란 것이 있다. 있는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그러니 그 부자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서 떠나가고 만 것입니다. 돈이 많고 재산이 많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때 주님은 제자들보고 하신 말씀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 불가능하잖아요. 약대가 어떻게 바늘귀로 들어갑니까? 그 제자들이 너무 놀래서 “주여!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겠나이까?” 그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할 수 있느니라.” 부자도 예수믿고 천국가는 사람 허다하게 많아요. 사람으로는 안 되지만 하나님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태어나고 내가 옛사람을 버리고 욕심을 비워 버리는 것 이것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 일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을 내 힘으로 하려고 하면 온갖 부작용이 생기는 것입니다.
제가 옛날에 목회할 때 한 집에서 급히 와서 기도해 달라고 해서 가보니까 그 집 아들이 열심히 교회 나오고 기도를 많이 하던 학생이었는데 목을 매어 죽으려고 달려 있는 것을 부모들이 끌어내려서 겨우 살렸습니다. 왜 목을 매었냐니까 성경에 죽으라고 해서 죽으려고 목을 맸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죽으면 끝장이 나고 마는 것이지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우리 교회 교회학교에서 열심히 아동을 가르치는 자매님이 수면제를 많이 먹고 거의 죽게 되어서 병원에 입원해서 위세척을 해내고 빨리 기도하러 오라고 해서 갔습니다. 정신이 들 때 왜 수면제를 먹었냐고 하니까 세상을 버리고 떠나려고 했는데 아무리 해도 세상 욕심이 마음에 붙어서 안 떠나기 때문에 내가 떠나기로 작정을 하고 수면제를 먹었다고 합니다. 그런 방법으로 여러분 죽고 버릴수 있다면 끝장난 것이지요. 사람으로써 죽어서 되는 일도 아니고 사람으로써 수면제를 먹고 세상을 떠남으로써 욕심과 세상을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내가 죽는 일과 내가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은 내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해주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는 “인간의 싸움에는 자연과의 싸움, 이웃과의 싸움, 자기와의 싸움. 이 세 가지가 있는데 이중 가장 힘든 싸움은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자연과의 싸움에서 산을 헐고 강을 막으며 추위를 막고 더위를 이기는데 성공했고 이웃과의 싸움에도 나라와 나라가 전쟁으로 싸워서 이기기도 하고 사람과 사람이 다투어서 이기고 지기도 하지만 아직 인류 역사상에 자기와 싸워서 이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빅토르 위고는 자기와의 싸움은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가 죽는 것인데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자아가 죽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못하고 하나님이 하시니까 내가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맡겨야만 하는 것입니다. 못할 일을 내가 자꾸 하려고 해요. 목매야 됩니까? 수면제 먹어도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인데 하나님은 하실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맡겨야 돼요.
예레미야 33장 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은 희한한 비밀한 일을 가지고 계시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옛사람이 죽고 세상과 탐욕을 버리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로 30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그 일을 해주려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끌어안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장사 지내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옛사람을 죽여 버리고 우리 옛사람을 비워 버리고 옛사람을 떠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루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의 옛사람을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십자가에서 옛사람을 비워 버리고 그리스도로 채워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했습니다.
시편 55편 22절에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말씀했으며
베드로전서 5장 6절로 7절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을 하나님은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알았으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 지내고 부활하고 비워 버린 이 일을 하나님이 이루어 달라고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맡기고 기도해야 합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다 보니 반대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고 그를 해치려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근심, 걱정이 쌓여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고민한 끝에 루터는 하나님께 맡겨 버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세상이 저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교회가 저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세상도 하나님의 것이고 교회도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의 것 하나님이 돌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없이 내가 세상을 운전하고 교회를 돌보려고 하니 이렇게 힘이 들잖아요. 이제 하나님의 것 하나님께 맡깁니다. 세상도 교회도 하나님이 맡아서 운전해 주십시오. 나는 잠자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완전히 맡겨 버리므로 그는 마음에 평안을 가져오고 그 다음 하나님이 역사해 주시므로 종교개혁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하게 보여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맡기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 놀라운 역사는 하나님이 성령이 주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는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난 다음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은 무거운 멍에입니다. 율법의 무거운 멍에를 짊어지고 지킬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었으며 다 죄를 범하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몸찢고 피흘려서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저주를 다 청산하시고 이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성령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성령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성령이 우리 속에 와서 거하시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의 다른 점은 믿는 사람은 그 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보혜사로 와 계신 것입니다. 보혜사란 하나님이 보내심을 받아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항상 우리 곁에 계신이가 바로 보혜사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여러분과 나를 돕기 위해서 우리 속에 와 계셔서 성령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옛사람이 죽게 하시고 성령이 우리가 옛사람을 떠나고 비울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 우리는 신앙생활 못합니다. 구약시대에 한 사람도 율법의 짐을 짊어진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 실패했지요. 오늘날 예수를 믿고 자기 옛사람을 죽고 새사람으로 변화받고 세상을 비우고 욕심을 비우고 살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아무리해도 안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알고 믿어도 실제적으로 우리가 할 힘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기도할 때 성령이 기적을 통해서 우리에게 변화를 갖다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이 얼마나 애를 쓰는지 말할 수 없는 탄식을 가지고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우리를 도와주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성령종교요,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성령이 믿어 주는 것입니다. 성령이 회개하게 해주시고 성령이 기도하게 해주시고 성령이 믿어 주시고 성령이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바울선생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게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인간 스스로는 못해요. 할 수 없어요. 무능력해요. 그러나 성령이 속에 계신 것을 알면 성령께 의지하면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수 있고 전도할 수 있고 회개할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은혜로 살 수 있습니다. 옛사람을 벗어 버릴 수가 있고 나를 비워 버릴 수가 있고 신령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됩니다. 성령으로 됩니다.
스가랴 4장 6절에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힘으로 능으로 안 되는데 인간의 힘과 능으로 자살을 하거나 수면제를 먹고 옛사람을 죽이고 세상을 떠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성 프란시스코나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나 그렇지 않으면 테레사 수녀같은 사람이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힘으로 능으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러서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으로 그런 일을 하려면 거대한 무리가 생기고 실패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 범인들, 평범한 인생들이 우리가 어떻게 성자와 같이 살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우리의 평범한 삶속에 매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나를 버리고 주님으로 충만하고 나아가 스스로의 욕심을 떠나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믿어야 돼요. 하나님께서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기도를 듣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주시고 또 우리를 비우고 세상을 등지고 그리스도로 충만하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 수 있게 만들어 준다는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느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아주 믿어야 돼요. 성령이 내속에 와 계신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도와주심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과 마귀를 떠난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나님과 나를 믿으라. 내가 해주겠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어떻게 내가 죽고 자신을 비울 수 있는가. 그 방법과 결과는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내가 그 길을 열려고 애를 쓰지 마십시오. 내가 어떻게 죽어요. 내가 어떻게 자신을 비워요.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성령으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크고 비밀한 역사로써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가 옛사람이 죽고 내가 세상을 비울 수 있는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잠언서 16장 1절에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야웨께서 응답해 주시고 시편 37편 5절에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죽고 비우면 내가 죽은 자리에 그리스도가 살아나고 내가 비운자리에 예수님이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살고 내가 비워지면 내속에 그리스도가 들어와서 살면 무엇이든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고 구하는 것마다 하나님이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5만번 기도응답을 받은 조지뮬러를 찾아와 하나님께 응답받고 축복받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조지 뮬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모든 것에 대해 죽었습니다. 조지 뮬러라는 사람은 아주 철저하게 죽었습니다. 나의 편해가 죽고 나의 기호가 죽고 나의 의지가 죽고 나에 대한 세상의 인정이나 비판도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친구들이나 형제들의 칭찬과 비난에 대해서도 나는 죽었습니다. 나는 오직 주께만 의지하고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고 살고 있습니다.” 조지 뮬러가 기도하는 문제마다 응답을 받은 것은 자기를 버리고 주님만을 바랬기 때문인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이 세상에 사는 삶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소용돌이치는 환경 중에 한없이 부딪혀오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하고 내가 비워지고 버려져야만 하나님이 능력으로 나를 통하여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팔팔 살아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 속에 역사할 수 없습니다. 내가 가득차 있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채울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죽고 내가 비워질 수 있는 길은 내 힘으로는 안돼요. 이는 힘으로도 되지 않고 능으로도 되지 않아요. 나의 신으로 말미암아 되느니라. 그러므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고 그렇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성령님을 의지 하십시오. 성령님은 전능한 하나님으로 바로 이런 일을 도와주기 위해서 우리와 같이 계신 것입니다. 성령은 바람같이 불같이 생수같이 우리 가운데 임하여 계십니다. 성령은 여러분 속에 계시며 24시간 떠나지 않습니다.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하면 성령께서 여러분의 십자가를 통해서 알고 있는 그 지식을 쫓아서 믿고 의지할 때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께서 죽는 것도 버리는 것도 비우는 것도 가능하게 만들어 주셔서 여러분이 그리스도로 살고 그리스도로 충만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기사와 이적으로 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참 평화를 갖고 권세와 능력있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살고 내가 비워지고 그리스도가 채워져야 되겠는데 아버지 내가 죽는 것과 내가 비워지는 것은 나의 힘으로 능으로는 되지가 않습니다.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고 애써도 안 됩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살고 내가 비워지고 그리스도가 채워지는 일은 성령이 해주시는 일이옵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할 수 있사옵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기도하오니 성령으로 아버지여 기적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평범한 우리의 생활 속에 범인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다 그리스도로 살고 그리스도로 채워져서 그리스의 영광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서론]
“마음에 평안을 얻기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열심히 목회하는 어느 목사님과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조목사님 저는 제 자신이 죽고 예수님만 내안에 사시도록 아무리 노력해도 제 자신이 좀처럼 죽지 않는데 정말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또 다른 목사님은 “욕심을 다 버리고 내 자신까지 버려야만 참된 마음의 평화를 얻겠는데 버린다. 버린다 하면서 쉽게 버려지지 않더라구요.” 저도 그 목사님들의 말에 동감을 했습니다. 그러나 내 자신이 살아있는 한 마음을 비우지 않는 한 마음에 평화를 갖기는 대단히 힘이 듭니다. 독일의 대문호였던 괴테는 80세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단 몇주 동안이라도 참으로 행복한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다. 내가 평안함을 느끼고자 할 때는 내 자아에서 벗어날 때에만 그것이 있었다.”고 말했었습니다. 진정한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자아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존 메이슨은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부정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워 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본론]
1. 내가 죽는 일
첫째로, 내가 죽는 일입니다.
내가 죽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지요. 바울선생은 성경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 선생은 분명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도 그와 같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이론상으로는 확실히 알지만 실제적인 삶속에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와 사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6장 1절로 6절에도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그런데 우리가 예수믿고 물세례 받을 때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물무덤에 장사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옛사람이 되어서 죽고 새사람으로 부활했다고 말하고 그것을 우리가 알고 믿습니다만 그러나 여전히 우리 속에는 옛사람이 살아있고 죄에 대한 유혹에 넘어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내가 죽었다 죽었다 하면서 사실은 안 죽을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 자신도 ‘아~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죽었다. 이제는 예수께서 내 속에 살아계신다.’고 큰 소리 하다가도 다른 사람이 와서 자꾸 화를 돋우면 ‘옛사람이 살아서 뭐 어쩌고 어째? 주님 잠시 비켜 계십시오.’ 그리고 옛사람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것을 보고 난 다음에 나중에 마음에 크게 실망을 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죽은 줄 알았는데 아직 너무나 팔팔하게 살아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의미가 뭡니까? 죽는다는 것은 관계의 단절을 말합니다. 죽었으면 옛 세계 옛사람은 반응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한 제자가 선생님께서 찾아와서 “선생님! 죽는 것이 뭡니까?” 그렇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그것을 알고 싶으면 내가 시키는데로 해라! 내일 점심 도시락 싸서 너의 사랑하는 옛날 친구 중에 죽은 사람이 있으면 그 무덤에 가서 애통하고 친구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칭찬하고 온갖 좋은 말로 다 말을 하고 난 다음에 점심 도시락을 먹고 오후에는 미워하는 친구가 죽어서 있는 무덤에 찾아가서 발을 구르고 침을 뱉고 욕을 하고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로 차고 그리고 오너라! 그러면 내가 죽는 것이 뭔지 알려 주겠다.” 그래서 이 사람이 점심 도시락 싸서 사랑하는 친구의 죽은 무덤에 가서 오전 내내 칭찬을 하고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미운 친구에게 가서 발을 구르고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고 주먹을 휘두르고 나쁜 놈, 죽일 놈, 고약한 놈 온갖 욕을 다했어요. 그리고 그 이튿날 선생님께 가서 “선생님 그렇게 했습니다.” 그 선생님이 웃으면서 “사랑하는 친구에게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좋아한다고 칭찬하고 찬양을 할 때 무덤에서 친구가 뭐라고 하더냐?” “아무 말도 안합니다.” “그러면 점심먹고 미운 친구에게 가서 온갖 욕을 하고 발을 구르고 침을 뱉고 주먹을 휘두를 때 그 친구는 뭐라고 말하더냐?” “그도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 왜요? 죽었는데 무슨 말을 합니까?” “그래~ 죽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너를 욕하는 사람에게도 반응하지 아니하고 너를 칭찬하는 사람에게도 동요하지 아니하고 관계의 단절을 말하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 무슨 화를 내고 죽은 사람이 무슨 아양 떠는데 좋아하느냐?” 그 학생은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이해는 되나 실천하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맞았어요. 우리는 이론적으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장사지내 버리고 말았는데 실제는 아직 안 죽어 있단 말입니다. 그것을 알고도 안 죽어 있는 것이 큰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 안에서 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초대 교회사에 보면 능력있고 유명한 부흥사로 김익두 목사님이 나오는데 그는 원래 황해도 아낙산골에서 유명한 불량배요, 깡패였습니다. 하루도 술마시지 않는 날이 없고 주먹을 휘두르고 싸우지 않는 날이 없어요. 장날에는 성황당에 돌을 던지고 침을 뱉고 김익두 안 만나게 해달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 김익두 깡패에게 괴로움을 안 당한 동네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한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 마을에는 이런 부고장이 떠돌았습니다. ‘김익두가 00월 00일 00시에 죽어서 장사를 지냅니다.’ 부고장을 받은 사람들은 얼씨구나 좋다고 어깨춤을 추었습니다. “이제는 시장터에 가도 김익두 안 만나니 좋겠고 그를 만나서 욕을 안얻어 먹을 것이니 좋다. 아~ 그놈 잘 죽었다. 아주 속시원하다.” 그런데 부고장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여 어쩔줄 몰랐는데 얼마 후 보니 죽었다는 김익두가 성경책을 끼고 거리를 왔다 갔다 하고 있거든요. 사람들이 너무나 실망을 했습니다. “아니~ 당신 죽었다고 부고장을 보내놓고 난 다음 어떻게 살아서 또 돌아다니냐?” 그러니까 그는 싱긋이 웃으면서 “예~ 옛날 불량배요, 깡패였던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보는 김익두는 옛날의 김익두가 아닙니다. 나는 예수믿고 새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실제로 하루는 그가 변한 것을 알아보려고 한 청년이 구정물을 그에게 덮어 씌웠습니다. 구정물 세례를 받은 그는 눈을 비비고 얼굴을 닦고 난 다음에 그 청년을 노려보면서 하는 말이 “당신은 옛날 김익두가 죽었다는 사실을 기뻐해야 됩니다. 그가 옛날 사람 같았으면 오늘 당신 내 손에 요절났어” 김익두 목사님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거듭난 후 자신의 옛 모습이 사라지고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은 그런 체험을 했습니다. 그로인해 그는 능력있는 부흥사로써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그렇게 됐는데 왜 나는 안 되느냐? 그것이 의문입니다.
교회사에 위대한 획을 그었던 신학자요, 성자였던 어거스틴도 방탕자였습니다. 얼마나 음란하고 방탕했든지 그 어머니 모니카가 그 아들을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금식하며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기도로 어거스틴이 회개하고 변화받아 옛날 어거스틴은 죽었습니다. 그가 하루는 길을 걸어가는데 옛날에 그와 같이 놀던 창녀 하나가 어거스틴을 보고 “아이고 여보시오~ 어거스틴 그동안 얼마나 기다렸는데 왜 안 찾아 왔소? 갑자기 왜 우리 집에 두문불출하오? 오늘 우리 집으로 갑시다.” 어거스틴은 뒤도 안돌아보고 그 창녀보고 말하기를 “당신이 말한 그 옛날 어거스틴은 이미 죽었소. 지금 보는 어거스틴은 그 옛날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난 사람이니 당신하고 아무 관계가 없소”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죽었다고 하는 것은 옛날과 관계를 끊었다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실제적으로 나의 삶 속에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의 새사람으로 살아서 행동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이 듭니다. 왜 실제적으로 노력을 해도 안 될까요?
2.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우는 일
둘째로,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우는 일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다 비워야 내가 마음이 평안해지고 내 속에 그리스도가 채워진다고 그러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버리고 비운 것 같다가도 나중에 보면 그대로 있다 말입니다. 우리가 보면 성자들은 그것이 가능했어요.
누가복음 9장 23절에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쫓으라. 올바른 말씀입니다. 아멘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이 잘 안되거든요.
마태복음 19장 29절에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어떻게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집도 버리고 형제도 버리고 자매도 부모도 자식도 전토도 버릴 수가 있습니까? 가능할 것 같지만 우리 같은 범인들은 불가능하잖아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하라고 했는데 또 그렇게 한 사람들이 있어요.
이탈리아의 아시스에 살던 성 프란시스는 부자집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난 다음 그의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있는 옷조차 벗어서 벌거벗고 그는 누더기 옷을 갈아입고 평생을 걸인으로 살면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다 비우고 버릴 수 있었습니다.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는 독일같은 부유한 나라에 태어나서 30대에 벌써 신학박사, 철학박사, 유명한 음악을 전공한 음악가가 되었고 그 다음에는 의학을 공부해서 의학박사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유한 독일을 버리고 집안을 버리고 다 털어서 아프리카 중에서도 가장 독벌레가 많고 뱀이 많고 그리고 사자들도 많고 위험한 랑바다라는 곳에 가서 나환자촌을 세우고 나환자를 위해서 일생을 바쳤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모골이 송연합니다. 왜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느냐? 어떻게 알버트 슈바이처박사는 문명을 버리고 30세 이후로 평생을 나환자를 위해서 아프리카에서 자기를 바칠 수 있었는가? 그렇게 한 사람도 있거든요? 테레사 수녀도 유고의 마케도냐에서 부요한 가정의 1남 2녀 막내로 태어나서 온갖 사랑을 다 받고 자랐지만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인도에 건너가서 가장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라는 음성을 듣고 켈거타에 가서 길거리에 쓰러져 죽어가는 거지들을 불러다가 목욕시키고 머리 빗기고 무릎에 누여서 편안하게 세상을 뜨게 하는 일을 하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돌보아 주는 일을 위해서 평생을 바쳤다. 그들은 이 세상 인연 다 끊어 버리고 다 버리고 비우고 주님만 위해서 살았는데 나는 겹겹이 인연의 줄에 매여서 꼼짝을 할 수 없어요. 부모와의 인연을 어떻게 끊어요? 나는 부모를 모른다고 하고 등질수가 없어요. 부부인연을 어떻게 끊어요. 서로 의지하고 백년을 살자고 결혼을 했는데 내가 하나님의 사명을 받았다고 부인을 버리고 혼자서 나갈 수가 있나요? 그 인연 끊을 수 없잖아요. 부모, 자식의 인연을 끊을 수가 있어요? 주님을 사랑한다고 에라 그냥 자식들 다 버리고 떠나자고 그렇게 할 수가 있나요? 친척의 인연도 끊을 수가 없지요. 이 세상에 친척들을 모른다고 할 수 없고 사회적 인연도 너무나 끈끈하잖아요. 선배도 있고 후배도 있고 동창도 있고 지연도 있고 이런 인연이 겹겹이 묶여 있는데 내가 다 버리고 다 떠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서대문에서 목회할 때 우리교회 주의 종이 되겠다고 자원해서 들어온 사람이 저하고 인터뷰를 했는데 그는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특심하고 목숨을 바쳐서 일을 한다고 말을 하기에 상당히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가족관계가 어떻게 됩니까?” 그러니까 얼굴에 큰 웃음을 웃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분토와 같이 버렸습니다.” 라고 하더라구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모르겠어요. 그 사람이 성자 아니면 방탕자입니다. 이 사람이 성자냐, 탕자냐. 나는 그 사람 앞에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당신이 가족을 분토와 같이 버렸으면 나도 오늘 당신을 분토와 같이 버립니다. 당신을 우리교회 주의 종으로 세울 수 없습니다.” 자기는 성자인줄 알고 처자를 분토와 같이 버리고 안 돌보고 우리교회 주의 종이 되겠다고 하는데 나는 그 사람을 볼 때 성자로 보이지 않고 탕자로 보입니다. ‘이 놈의 자식 처자도 버린 사람이 무슨 주의 종이 되겠다고 와가지고서 건방지게 날 뛰는가’ 이렇게 본다 말입니다.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무엇을 어떻게 버리란 말입니까? 이해는 되나 실천하기가 너무나 힘들잖아요. 그래서 바울선생께서도 로마서 7장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마음으로는 그렇게 해야 되겠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안 되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3.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신다
셋째로, 어떻게 해야 내가 옛사람이 죽고 또 버리고 비울 수가 있나요?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동네에 가셨는데 부자가 와서 “선생이여 내가 무엇을 행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웃을 거짓증거하지 말라. 이웃을 탐하지 말라.” 그러니까 “나는 어릴 때부터 그런 것 다 지켰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보시고 “아직 한 가지 모자란 것이 있다. 있는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그러니 그 부자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서 떠나가고 만 것입니다. 돈이 많고 재산이 많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때 주님은 제자들보고 하신 말씀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 불가능하잖아요. 약대가 어떻게 바늘귀로 들어갑니까? 그 제자들이 너무 놀래서 “주여!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겠나이까?” 그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할 수 있느니라.” 부자도 예수믿고 천국가는 사람 허다하게 많아요. 사람으로는 안 되지만 하나님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태어나고 내가 옛사람을 버리고 욕심을 비워 버리는 것 이것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 일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을 내 힘으로 하려고 하면 온갖 부작용이 생기는 것입니다.
제가 옛날에 목회할 때 한 집에서 급히 와서 기도해 달라고 해서 가보니까 그 집 아들이 열심히 교회 나오고 기도를 많이 하던 학생이었는데 목을 매어 죽으려고 달려 있는 것을 부모들이 끌어내려서 겨우 살렸습니다. 왜 목을 매었냐니까 성경에 죽으라고 해서 죽으려고 목을 맸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죽으면 끝장이 나고 마는 것이지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우리 교회 교회학교에서 열심히 아동을 가르치는 자매님이 수면제를 많이 먹고 거의 죽게 되어서 병원에 입원해서 위세척을 해내고 빨리 기도하러 오라고 해서 갔습니다. 정신이 들 때 왜 수면제를 먹었냐고 하니까 세상을 버리고 떠나려고 했는데 아무리 해도 세상 욕심이 마음에 붙어서 안 떠나기 때문에 내가 떠나기로 작정을 하고 수면제를 먹었다고 합니다. 그런 방법으로 여러분 죽고 버릴수 있다면 끝장난 것이지요. 사람으로써 죽어서 되는 일도 아니고 사람으로써 수면제를 먹고 세상을 떠남으로써 욕심과 세상을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내가 죽는 일과 내가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은 내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해주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는 “인간의 싸움에는 자연과의 싸움, 이웃과의 싸움, 자기와의 싸움. 이 세 가지가 있는데 이중 가장 힘든 싸움은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자연과의 싸움에서 산을 헐고 강을 막으며 추위를 막고 더위를 이기는데 성공했고 이웃과의 싸움에도 나라와 나라가 전쟁으로 싸워서 이기기도 하고 사람과 사람이 다투어서 이기고 지기도 하지만 아직 인류 역사상에 자기와 싸워서 이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빅토르 위고는 자기와의 싸움은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가 죽는 것인데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자아가 죽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못하고 하나님이 하시니까 내가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맡겨야만 하는 것입니다. 못할 일을 내가 자꾸 하려고 해요. 목매야 됩니까? 수면제 먹어도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인데 하나님은 하실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맡겨야 돼요.
예레미야 33장 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은 희한한 비밀한 일을 가지고 계시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옛사람이 죽고 세상과 탐욕을 버리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로 30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그 일을 해주려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끌어안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장사 지내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옛사람을 죽여 버리고 우리 옛사람을 비워 버리고 옛사람을 떠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루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의 옛사람을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십자가에서 옛사람을 비워 버리고 그리스도로 채워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했습니다.
시편 55편 22절에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말씀했으며
베드로전서 5장 6절로 7절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을 하나님은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알았으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 지내고 부활하고 비워 버린 이 일을 하나님이 이루어 달라고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맡기고 기도해야 합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다 보니 반대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고 그를 해치려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근심, 걱정이 쌓여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고민한 끝에 루터는 하나님께 맡겨 버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세상이 저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교회가 저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세상도 하나님의 것이고 교회도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의 것 하나님이 돌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없이 내가 세상을 운전하고 교회를 돌보려고 하니 이렇게 힘이 들잖아요. 이제 하나님의 것 하나님께 맡깁니다. 세상도 교회도 하나님이 맡아서 운전해 주십시오. 나는 잠자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완전히 맡겨 버리므로 그는 마음에 평안을 가져오고 그 다음 하나님이 역사해 주시므로 종교개혁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하게 보여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맡기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 놀라운 역사는 하나님이 성령이 주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는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난 다음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은 무거운 멍에입니다. 율법의 무거운 멍에를 짊어지고 지킬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었으며 다 죄를 범하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몸찢고 피흘려서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저주를 다 청산하시고 이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성령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성령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성령이 우리 속에 와서 거하시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의 다른 점은 믿는 사람은 그 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보혜사로 와 계신 것입니다. 보혜사란 하나님이 보내심을 받아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항상 우리 곁에 계신이가 바로 보혜사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여러분과 나를 돕기 위해서 우리 속에 와 계셔서 성령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옛사람이 죽게 하시고 성령이 우리가 옛사람을 떠나고 비울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 우리는 신앙생활 못합니다. 구약시대에 한 사람도 율법의 짐을 짊어진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 실패했지요. 오늘날 예수를 믿고 자기 옛사람을 죽고 새사람으로 변화받고 세상을 비우고 욕심을 비우고 살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아무리해도 안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알고 믿어도 실제적으로 우리가 할 힘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기도할 때 성령이 기적을 통해서 우리에게 변화를 갖다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이 얼마나 애를 쓰는지 말할 수 없는 탄식을 가지고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우리를 도와주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성령종교요,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성령이 믿어 주는 것입니다. 성령이 회개하게 해주시고 성령이 기도하게 해주시고 성령이 믿어 주시고 성령이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바울선생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게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인간 스스로는 못해요. 할 수 없어요. 무능력해요. 그러나 성령이 속에 계신 것을 알면 성령께 의지하면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수 있고 전도할 수 있고 회개할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은혜로 살 수 있습니다. 옛사람을 벗어 버릴 수가 있고 나를 비워 버릴 수가 있고 신령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됩니다. 성령으로 됩니다.
스가랴 4장 6절에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힘으로 능으로 안 되는데 인간의 힘과 능으로 자살을 하거나 수면제를 먹고 옛사람을 죽이고 세상을 떠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성 프란시스코나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나 그렇지 않으면 테레사 수녀같은 사람이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힘으로 능으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러서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으로 그런 일을 하려면 거대한 무리가 생기고 실패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 범인들, 평범한 인생들이 우리가 어떻게 성자와 같이 살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우리의 평범한 삶속에 매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나를 버리고 주님으로 충만하고 나아가 스스로의 욕심을 떠나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믿어야 돼요. 하나님께서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기도를 듣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주시고 또 우리를 비우고 세상을 등지고 그리스도로 충만하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 수 있게 만들어 준다는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느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아주 믿어야 돼요. 성령이 내속에 와 계신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도와주심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과 마귀를 떠난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나님과 나를 믿으라. 내가 해주겠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어떻게 내가 죽고 자신을 비울 수 있는가. 그 방법과 결과는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내가 그 길을 열려고 애를 쓰지 마십시오. 내가 어떻게 죽어요. 내가 어떻게 자신을 비워요.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성령으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크고 비밀한 역사로써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가 옛사람이 죽고 내가 세상을 비울 수 있는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잠언서 16장 1절에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야웨께서 응답해 주시고 시편 37편 5절에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죽고 비우면 내가 죽은 자리에 그리스도가 살아나고 내가 비운자리에 예수님이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살고 내가 비워지면 내속에 그리스도가 들어와서 살면 무엇이든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고 구하는 것마다 하나님이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5만번 기도응답을 받은 조지뮬러를 찾아와 하나님께 응답받고 축복받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조지 뮬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모든 것에 대해 죽었습니다. 조지 뮬러라는 사람은 아주 철저하게 죽었습니다. 나의 편해가 죽고 나의 기호가 죽고 나의 의지가 죽고 나에 대한 세상의 인정이나 비판도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친구들이나 형제들의 칭찬과 비난에 대해서도 나는 죽었습니다. 나는 오직 주께만 의지하고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고 살고 있습니다.” 조지 뮬러가 기도하는 문제마다 응답을 받은 것은 자기를 버리고 주님만을 바랬기 때문인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이 세상에 사는 삶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소용돌이치는 환경 중에 한없이 부딪혀오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하고 내가 비워지고 버려져야만 하나님이 능력으로 나를 통하여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팔팔 살아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 속에 역사할 수 없습니다. 내가 가득차 있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채울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죽고 내가 비워질 수 있는 길은 내 힘으로는 안돼요. 이는 힘으로도 되지 않고 능으로도 되지 않아요. 나의 신으로 말미암아 되느니라. 그러므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고 그렇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성령님을 의지 하십시오. 성령님은 전능한 하나님으로 바로 이런 일을 도와주기 위해서 우리와 같이 계신 것입니다. 성령은 바람같이 불같이 생수같이 우리 가운데 임하여 계십니다. 성령은 여러분 속에 계시며 24시간 떠나지 않습니다.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하면 성령께서 여러분의 십자가를 통해서 알고 있는 그 지식을 쫓아서 믿고 의지할 때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께서 죽는 것도 버리는 것도 비우는 것도 가능하게 만들어 주셔서 여러분이 그리스도로 살고 그리스도로 충만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기사와 이적으로 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참 평화를 갖고 권세와 능력있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살고 내가 비워지고 그리스도가 채워져야 되겠는데 아버지 내가 죽는 것과 내가 비워지는 것은 나의 힘으로 능으로는 되지가 않습니다.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고 애써도 안 됩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살고 내가 비워지고 그리스도가 채워지는 일은 성령이 해주시는 일이옵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할 수 있사옵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기도하오니 성령으로 아버지여 기적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평범한 우리의 생활 속에 범인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다 그리스도로 살고 그리스도로 채워져서 그리스의 영광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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