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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하는 인간

창세기 나무............... 조회 수 1660 추천 수 0 2009.06.18 00: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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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3:8-19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8481 

jys.jpg 정용섭 목사

창세기 3장만큼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있는 성서 본문도 드물 것입니다. 그 본문은 외면상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징벌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흔히 인간의 본질이 죄라는 주장의 증거 자료로 인용되곤 했는데,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여자가 뱀의 유혹에 더욱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남녀 차별의 성서적 근거로 삼기도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창세기 3장은 인간에 대한 기독교의 견해를 매우 부정적으로 각인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중에는 타당한 주장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인간의 삶에 만연한 모순과 부조리의 원인을 일단 인간의 죄에서 찾으려 했다는 것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인간의 죄를 숙명적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인간의 생명 의지를 송두리째 박멸시킨 것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이렇게 오용되기도 하는 창세기 3장을, 주로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가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있다가 하나님에게 들켰습니다. 그 당시는 하나님과 사람이 직접 대화가 가능한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동산을 거니신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니까 이런 성서의 보도는 사실적이기보다는 전형적인 설화적 이야기라고 보아야 합니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추궁을 받고 결국 죄를 자백합니다. 아담은 이브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이브는 뱀에게 책임을 미루었습니다. 하나님은 뱀이 변명할 여유를 허락하지 않고 '저주를 받아' 죽을 때까지 배로 기어다녀야 한다고 벌을 내리셨습니다. 이어서 여자에게는 세 가지 벌을 내리셨습니다. 임신과 분만의 고통, 남자에 대한 그리움, 남자에게서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 지배당함. 전통적 신학자들은 이런 구절을 인용하면서 여자는 어쩔 수 없이 남자에게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서를 그렇게 읽는 것은 잘못입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벌어지는 어떤 문제의 원인을 따져서 그런 일을 야기한 사람을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현실에 대한 통찰을 그런 설화 방식으로 해명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성들의 임신과 산고, 사회적인 불이익 같은 문제들은 이브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이 내리신 징벌이니까 '끽' 소리 내지 말고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게 아니라 여성으로 살아가는 그 현실을 설명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도 이에 못지 않은 징벌을 내리십니다. 17-19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땅은 아담의 죄로 인해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기울인 노력만큼의 결실을 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아담은 평생 고생해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0-24절은 약간 다른 전승이지만, 여기서도 결국 인간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고 에덴 동산을 쫓겨난 후 "땅에서 나왔으므로 땅을 갈아 농사를 지며"(23) 살아야 할 운명에 처해졌다는 점에서 앞 단락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말씀은 인간의 노동이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뜻으로 해석되고 그렇게 적용되기도 했습니다. 이 말씀의 묘사 자체가 그렇게 이해될 수 있는 여지를 보인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살리라.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17, 18a). 이 말씀이 유대인들에게 전승되는 그 '삶의 자리'를 약간 들여다보면 이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이런 민담이 형성된 시대는 짧게 잡아도 3천년 전입니다. 혹은 4천년 전쯤으로 올려 잡아도 될 것 같습니다. 고대인들이 이 땅 위에서 생존하기 위해 치러야 했던 노동의 대가라는 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요즘처럼 영농기술이 발달한 시대에도 농사라는 게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닌데 3,4천년 전 시대에는 그야말로 몸으로 때우는 방식의 농사였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이 정착해 살던 팔레스틴 지역은 일부만 제외하고는 척박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이 땅은 한 마디로 그들에게 저주의 땅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급기야 나일강을 중심으로 상당히 풍요를 일구던 이집트로 이민 갔습니다. 그곳에서 대충 4백년쯤 살다가 돌아오면서 팔레스틴 지역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만 인간이 더불어 먹고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겨우 입에 풀칠만 하는 그런 삶의 조건을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한 유대인들을 우리는 나무랄 수 없습니다.
노동의 문제는 척박한 땅에서 생존의 위기를 겪었던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사실은 3백만 년 전 인류의 조상인 유인원으로부터 시작해서온갖 형태의 사회 구조를 발전시켜온 인류 전체가 씨름한 문제였습니다. 로마 제국은 전쟁을 통해서 노획한 노예의 노동력을 통해서 그들의 문화, 문명의 꽃을 빛낼 수 있었는데, 로마 귀족들이야 그런 방식으로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었을지 모르지만 노예와 그 이외의 식민지 주민들은 훨씬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중국의 만리장성 축성에 강제 동원된 사람들은 오늘 본문의 표현처럼 땅이 저주받은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잉카 문명의 특징은 돌이라고 합니다. 안데스산맥 고지대에 정교하고 엄청난 거석 문화를 건설한 그들의 그 역사에는 노동을 신의 저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절규가 베어 있습니다. 고대 문명 치고 이런 노동의 혹사가 없이 이루어진 문명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문제는 고대 문헌을 연구해야만 확인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분명합니다.
인간과 노동의 관계를 가장 깊이 들어다본 근대 학자는 당연히 칼 마르크스입니다.
영국의 산업혁명이 피치를 올리고 있던 그 시대에 마르크스가 본 노동의 현실은 고대 제국의 노예들이 감당했던 상태와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게 참으로 이상하지요? 고대 사회는 기술 문명이 발전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인간의 노동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생존에도 부족했던 노동력을 전쟁과 건축 등에 쏟아 붓게 되니까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소외되기 마련입니다만, 산업 기술이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시대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그런 상황이 변하지 않았다는 게 말입니다. 마르크스가 활동하던 시대에 비해 오늘 우리는 그 이전의 전체 인류 역사가 이룩한 발전보다 훨씬 큰 업적을 이루었지만 이런 노동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빈곤으로 인해서 학대받고 버려지는 아이들의 숫자가 적지 않다는 현실을 보면 지금 우리가 21세기를 사는지 아니면 19세기를 사는지 착각할 정도입니다. 최저임금이 여전히 5,60만원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이 땅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살리라"는 말씀이 딱 들어맞습니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는 이런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느냐, 하면 상대적으로 양호할 뿐이지 별로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괜찮은 부분은 우리가 가능한 빨리 배워서 따라가는 게 좋습니다. 임금 격차가 우리보다는 그리 크지 않다는 게 그 중의 하나입니다. 예컨대 의사나 변호사들의 수입이 다른 직종보다 높기는 하지만 우리처럼 큰 차이가 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수입이 많다고 하더라도 대개는 세금으로 내야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삶의 수준에서는 별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즉 세금을 많이 거둬들여서 그것으로 교육과 의료를 완전히 정부가 책임지는 형태로 사회가 운영되고 있으니까 노동으로 인해서 받는 스트레스가 우리보다는 덜 하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들도 여전히 노동시간과 임금 문제로 인해서 불평도 많이 하고, 시위와 폐업의 악순환도 여전합니다. 여러분이 뉴스를 통해서 잘 알다시피 복지 문제가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잘 짜여진 독일의 경우만 하더라도 실업 문제로 인해서 사회적 갈등이 적지 않습니다. 4월29일자로 유럽 연합 가입국수가 25개국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이런 힘을 바탕으로 경제적인 차원에서 미국에 밀리지 않겠다는 생각 때문에 이런 연합체를 만들었겠지요. 이것은 곧 옛날에 비해서 현대인들이 아무리 잘 살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노동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으며,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반증입니다. 과연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는 우리 인간이 영원히 짊어져야 할 숙명인가요?

우리는 오늘 본문을 약간 다른 시각으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창 2:17절에 의하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는 '반드시 죽어야' 했는데 오늘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대로 실제로는 죽지 않았습니다. 죽어야 할 사람이 죽음을 모면한 것은 큰 행운이며 은총입니다. 물론 본문에 '흙으로 돌아간다'거나 '먼지로 돌아간다'는 표현이 죽음을 가리키는지 아닌지 지금의 우리가 그것을 정확하게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일단 그것이 인간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게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즉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과 이브를 당장 없애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도 역시 인간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표현이 죽는 것과는, 즉 무화(無化)되는 것과는 다르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죽는다기보다는 생명 형식이 달라진다는 의미라고 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인간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을 묘사하고 있는 본문은 심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은총입니다.  
따라서 땀을 흘려야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다는 이 진술도 역시 하나님의 징벌이라기보다는 은총의 구도에서 읽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죽어야 할 사람이 죽지 않는 대신 좀더 심한 노동을 하며 살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이 은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한편으로 아담과 이브가 죄를 범하기 이전에도 이들은 에덴 동산을 돌보는 노동을 했다는 사실을 보면(창 2:15) 노동이 단순히 죄의 징벌은 결코 아니라는 게 분명합니다.
우리의 상상력을 빌려서 이렇게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죄를 짓기 이전에 에덴 동산을 돌보는 책임이 너무 한가했기 때문에 아담이 결국 이브와 더불어서 뱀의 유혹에 넘어갔다고 말입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으려면 노동 조건이 열악해지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요. 생산성이 바닥으로 떨어진 고된 현실에 내맡겨진 아담이 이제는 엉뚱한 데 정신을 빼앗기지 않고 생존을 위해서 최선으로 노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말입니다.
저는 오늘 성서 본문을 읽으면서 노동이야말로 인간의 생존 조건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노동 문제를 생존의 차원에서 접근할 때만 바르게 해석될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해방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해석은 노동을 소유의 차원이 아니라 존재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많이 벌어서 잘 살기 위해서 노동한다기보다는 노동함으로써 인간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곧 노동하지 않으면 인간이 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수도사들이 종교적 명상 훈련과 육체 노동을 한 이유도 노동이 인간을 인간 되게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서구와 그 서구를 따라잡으려는 아시아 모든 나라에서 노동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노동을 늘 돈과 연결키는 데 있다고 봅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경우에도 노동자, 기업가, 정부가 노동을 거의 소유의 관점으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즉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노동을 연봉과 직결시키고, 기업가는 노동을 통해서 기업을 확장시키고, 정부에서는 그런 관계를 적절하게 운용함으로써 개인 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열겠다는 야심만드러내기 때문에 사안마다 대립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조조정과 일자리 창출은 서로 모순되는 행위인데도 우리 사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경제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는 내가 이런 국가 경제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시비를 걸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노동 문제를 단지 생산성 제고와 연봉 높이기 차원에서만 생각하다가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뿐입니다.
노동의 존재론적 해석이라는 말이 너무 관념적이어서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할 분이 있을 것 같아서 구체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얼마 전에 한번 소개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녹색평론사에서 나온 <오래된 미래>는 티베트 라다크 마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방식으로 농사를 짓고 야크를 키우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서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건강만 허락하면 모두가 일합니다. 그들 마을 공동체에는 빈부귀천도 없습니다. 모두가 일하고 함께 축제를 즐기면서, 우리의 눈으로 보면 매우 지루하게 일상을 살아갑니다. 땅의 임자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처럼 사유재산의 의미가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농사를 지을 능력만큼만 자기 땅으로 삼습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은 노동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충실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오늘 우리의 삶은 매우 화려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내면은 별로 풍요롭지 못합니다. 가능한대로 불로소득을 기웃거리고, 노동의 능력이 단지 연봉으로만 평가되는 이런 시스템에서는 결코 우리가 노동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할 수 없습니다. 흡사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사람들처럼 영혼이 시들어갑니다.
노동에 대한 존재론적인 접근은 한 개인을 인간답게 만들뿐만 아니라 사회구조를 정의롭게 만드는 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노동을 통해서 생존을 보장받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지금처럼 빈익빈부익부 현상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습니다. 만약 잘 사는 나라가 자신들의 노동을 통해서 벌어들인 것을 자신들의 생존 차원에서만 사용한다고 한다면 가난하기 때문에 굶어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에서 부자 나라는 가난한 나라를 그대로 방치하거나, 또는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경제적 힘을 보존시켜나가려고 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선진국에서 그렇게 열을 올리면서 자유무역협정을 밀고 나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인류는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떤 미래를 내다보십니까? 매일 먹고 놀면서 취미 생활이나 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좋을까요? 만약 그런 때가 오면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인간이 아닐 것입니다. 노동을 하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는 세상은 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며, 인간이 가야 할 길도 아닙니다. 물론 여기서 노동이라는 게 반드시 육체를 쓰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글을 쓰는 사람, 사람의 병을 고치는 사람, 설교하는 사람도 역시 노동하는 사람의 범주에 넣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일을 하든 우리의 노동에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참여한다면 노동은 바로 우리가 구원받는 길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이 궁극적인 차원에서는 이 현실에서의 생존이 곧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출산과 노동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후에 야훼 하나님이 인간에게 징벌을 내렸습니다. 먼저 이브에게는 출산의 고생이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타락 이전에는 출산의 고생이 없었다는 말이 되는데, 약간 이상하긴 합니다.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해서 생각한다면 타락 이전에는 출산 행위 자체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인간 복제 기술을 통해서 출산의 고통을 받지 않는 시대가 온다는 것은 곧 새 땅과 새 하늘이 시작되었다는 증거일까요?
이브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징벌은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오히려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이미 아내들이 남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훨씬 큰 힘을 행사한다는 것을 보면, 타락 이후의 이 현실이 시나브로 정리되어 가는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아담에게도 매우 혹독한 징벌을 내리셨습니다.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살리라.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17,18절). 선악과를 따먹는 즉시 죽어야만 했던 아담이 비록 노동의 강도는 높아졌지만 그래도 생존할 수 있었다는 것만 해도 하나님의 은총이긴 합니다만, 에덴 동산의 삶과 비교할 때 이제 아담의 삶은 견뎌내기 힘들 정도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어쨌든지 이브와 아담에게 내린 야훼 하나님의 징벌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내용적인 면에서는 결국 똑같습니다. 출산이나 노동이나 모두 생명의 본질에 속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출산이 없으면 지구상에 있다가 사라진 수많은 동물들처럼 인간도 사라질 것이며, 노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설화 형식을 빌려서 이 문제를 해명하고 있습니다만 인간의 삶에 대한 매우 정확한 통찰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지만 이브와 아담은 여전히 출산과 노동을 통해서 생명을 지속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그 두 행위에는 엄청난 수고가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만약 인간이 출산과 노동을 포기하거나 또는 그것에 따르는 고생을 감내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자신의 본질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창세기와 같은 고대 문서의 이러한 가르침을 가볍게 여기고 자신들이 생산해내는 기술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볼 때 과학적인 지식이 짧았던 고대인들의 통찰은 우리에게 더 이상 설득력이 없는 걸까요?

땅의 저주

창세기 기자는 아담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인 땅은 원래 아름답습니다. 모세의 전승에 의하면 땅은 거룩합니다. 그 땅은 하나님에게 속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기자는 이 땅이 이미 저주를 받았다고 고발합니다. 창세기 4장으로 넘어가면서 아벨의 피로 얼룩진 땅은 또 다시 저주를 받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카인을 이렇게 다그치십니다. "네가 아무리 애써 땅을 갈아도 이 땅은 더 이상 소출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창 4:12). 3천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창세기 기자는 땅이 저주를 받았다고 연달아서 고발하고 있습니까? 어떤 엄청난 사건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영농 기술도 없이 순전히 인간의 노동력만으로 농사를 지어야 했던 그들에게 이 땅은 무언가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땅과의 싸움에서 그들이 감당해야할 생존의 무게를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입에 풀칠하는 것조차 보장되지 않은 현실 속에서 땅이 저주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오늘 우리의 눈에 땅은 어떻게 보입니까? 그냥 우리가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여전히 꽃이 피고, 논밭 농사가 되고, 과일이 열리니까 풍요로운 땅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심층적으로 이 땅은 또다시 저주받은 곳으로 변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땅의 산성화라든가, 갯벌의 훼손이라든가, 고속도로 및 고속철 공사로 인한 산과 강의 맥이 끊기는 일, 인간의 몸에 축적되는 독성, 그로 인한 정자 수의 감소 등등, 먹고살며 소비하고 즐기는 일에 마음을 빼앗긴 현대인들이 실감하지는 못하지만 이 땅은 신음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혹은 우리가 모르는 사시에 더 큰 일들이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전문가들의 경고대로 이 생태계는 어느 상태까지는 그 모습 그대로 유지되지만 그 고비에 이르게 되면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해체된다고 합니다. 앞으로 10년 후가 그 고비일지, 아니면 20년 후일지 모르지만 이 땅은 그렇게 병들어 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생존의 위기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 주변에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저주받은 땅을 생각하게 됩니다. 끼니를 걱정하는 분들이 아니라면 땅이 저주받았다는 창세기 기자의 증언이 별로 심각하게 들리지 않겠지만, 우리 주변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생존의 위기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며칠 전 밤 열 한시가 넘어 교회에서 집으로 가기 위해 천호 아파트를 나서고 있는데, 허름한 옷을 입은 어떤 여자가 아파트의 분리 수거대 앞에서 종이를 챙겨 리어카에 싣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부슬비가 약간 뿌리는 그 늦은 시각에 폐지를 수집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끼니 걱정을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겠지요. 이 늦은 시간에 이걸 모아서 어디로 갖고 가느냐고 물으니까 귀찮다는 듯이 아무 대답이 없더군요. 하양 시내에는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남녀 각각 두 명씩 4명 정도 됩니다. 북한 주민들이나 동남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까지 지역을 넓혀서 본다면 땅은 여전히 저주받은 상태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담 죄는?

성서 기자는 땅이 저주받는 것은 '아담 때문'이라고 합니다. 야훼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아담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토대인 땅까지 저주를 받았습니다. 성서 기자의 직관은 아주 정확합니다. 인간이 자연보다 잘난 척 하지만 실제로는 인간 때문에 땅은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만약 인간이 없었다면 땅이 저주을 일이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여기서 아담이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진지하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성서의 진술을 상투적으로 해석하거나 또는 핵심을 놓치고 변죽만 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개의 기독교 신자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이야기를 읽고 흡사 동화책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고 생각하고 맙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아주 옛날,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처럼 여깁니다. 아니면 그것을 실존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원죄와 연결시킬 뿐입니다. 아담과 이브의 죄가 우리에게까지 전달된다는 뜻으로 해석해서 늘 이런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 사건이 바로 그런 것일까요? 우리를 숙명적으로 죄에 묶어두기 위해서 창세기 기자는 아담의 죄와 하나님의 징벌과 땅의 저주를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아담이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는 말씀의 리얼리티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질문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자이십니다. 그분은 바로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기도 하십니다. 따라서 생명의 영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말은 곧 아담이 생명의 길을 따르지 않고 역행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땅이 저주를 받게 된 이유는 곧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이 생명의 목소리를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노장 식으로 표현한다면 도와 자연의 소리를 듣지 않고 인위적이고 의도적으로, 인간 중심적으로 판단하고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서 땅이 저주를 받았다는 이 창세기 기자의 진술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생명이 무엇인지, 또는 생명의 영에게 불순종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여기서 우리의 어려움은 하나님을 생명의 영이라고 표현할 때의 그 '생명'이 무엇인지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어쩌면 생명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생명은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저는 그것을 직접 설명하기보다는 거꾸로 반생명적 현상의 하나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접근하려고 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 가장 반(反)생명적인 현상은 곧 소비 중심의 삶입니다. 사람이 생명을 누리려고 하는 모든 소비 행위들이 결국은 생명을 파괴하는 쪽으로 진행된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이긴 하지만 그게 사실입니다. 물론 인간이 육신을 갖고 살고 있으며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이상 소비는 어쩔 수 없습니다. 밥도 먹어야 하고 다시 배설해야하고, 학교도 운영해야 하기 때문에 소비는 어쩔 수 없긴 하지만, 오늘 현대의 도시 사회가 저지르고 있는 소비는 약간의 과소비를 지나서 근본적으로 소비 지향적 특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쩌면 "누가 누가 소비를 잘하나?" 경쟁을 벌이듯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화장품과 양주 소비가 제일 심하다거나, 고급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내장재를 몽땅 갈아치운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돈들이 많기는 많은 모양이다" 하고 그냥 지나쳐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교육의 과소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자기 자식에게만은 특별 교육을 제공하고 싶어하는 부모의 마음이야 이해할 수 있지만 교육 마저 소비의 수단으로 변하고 있는 이 시대 정신의 반생명성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설교를 작성하고 있는 이 시간에(5월21일, 밤 10시 반쯤) 가톨릭 대학교 학생들이 축제 마지막 이벤트로 불꽃놀이를 하는지 폭탄 터지는 듯한 소리가 하양을 흔들어 놓습니다. 예비 지성인들인 대학생들이 한 순간의 불꽃놀이를 위해서, 또는 유명 사회자를 초청하면서 수백 만원 씩 소비하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도 젊은이들의 낭만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예쁘게 보이고 싶은 여성들의 심리를 그렇게 빈정대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 몇 가지 현상 자체보다는 이 시대가 날이 갈수록 소비 중심적 패러다임으로 빠져드는 것을 쓸데없이 걱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대의 소비 지향적 삶은 결코 생명을 인간을 살리는 게 아니라 병들게 하고, 더 나아가서 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생명의 목소리를 거역한 아담의 죄는 오늘날 우리에게 소비 지향적 삶의 태도와 똑같습니다. 오늘 기독교인들 중에서 소비 지향성이 죄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오늘의 시대가 얼마나 소비 지향적인가 하는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한 마디만 덧붙이겠습니다. 지상 목표인 경제 발전을 위해서 소비의 극대화를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집단은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비교적 진보적 입장을 보이고 있는 민주노동당마저 이런 틀에서 별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지난 대선 때 권영길 씨는 "여러분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멘트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번 총선을 즈음해서도 그들은 노동자들의 수입이 많아져야 소비가 늘어나고, 소비가 늘어나면 공장이 잘 돌아간다는 논리를 폈습니다. 부의 재분배라는 미시적 구조에서는 이들의 말이 타당하지만 결국 이들도 이 시대의  소비 지향적 구조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은총으로서의 노동

아담의 죄로 인해 저주받은 땅이 곧 인간이 살아가야 할 현실이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고대 사회는 말 그대로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살았습니다." 땅은 인간이 먹을 수 없는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냅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노예처럼 평생 중노동을 하면서 살지 않기 위해서, 그리
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제거하기 위해서 그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상상 부분에서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소와 말의 힘을 빌려서 고생을 약간은 면하게 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노예를 이용하거나 머슴을 두고 편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자연과학이 발전한 이후에는 기계의 힘에 의해서 인간은 노동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워졌습니다. 더구나 자본의 축적되는 과정에서 자본과 부가 인간을 먹여 살리는 구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지금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산다는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인간이 바꾸어놓은 이 세계 질서가 과연 구원의 길입니까? 오히려 고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땅이 저주를 받게 되었고, 노동의 소외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저는 지금 전문가도 아니면서 인간과 경제와 노동의 관계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성서의 가르침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저주받은 땅에서 살아야하기 때문에 죽도록 노동해야 먹고산다는 말씀이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징벌 같지만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데카르트의 표현처럼 인간은 사유함으로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여성 신학자 도로테 죌레의 표현대로 인간은 사랑하고 노동함으로써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노동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마 대개의 사람들은 노동함으로 인간이 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니, 본질이니, 하는 말은 귀에 와 닿지 않고 다른 사람들처럼 좋은 집에서 온갖 것을 갖추어놓고 마음껏 소비하며 사는 게 소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성서의 가르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소비 지향적인 삶의 구조에서 벗어나서 '죽도록 고생하면서' 먹고사는 길밖에 인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런 말씀이 너무 비관적으로 들리십니까? 숙명주의입니까? 이 풍요와 소비의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비현실적인 외침인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산다는 성서기자의 진술은 매우 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지구에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소비 지향성으로부터 존재 지향성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모두가 고생해서 먹고사는 데 만족하는 삶의 태도를 유지하기만 한다면 이 지구는 충분한 먹거리와 입을거리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가 좀 가난해지더라도 다른 나라 사람들과 더불어서 생존해야 한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국가 간의 분쟁은 대개 해결될 수 있습니다. 지금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야만스러운 폭력의 뿌리는 자신들만 풍요롭게 살아야겠다는 미국의 패권주의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쩌면 인류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이렇게 살다가 모두 망하는 길을 가게 될 것 같습니다.

이제 생산과 소비의 악순환 속에서 삶의 의미를 훼손시킬 뿐만 아니라 또 다른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만들어내고, 계속해서 땅을 저주받게 만드는 이 야만스러운 문명의 시대에서 종말론적 공동체인 교회가 맡은 선교적 사명은 명백합니다. 더 이상 경제 발전을 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가난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사는 것이 징벌이 아니라 은총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선포해야 합니다. 소비가 아니라 노동이야말로 인간이 되는 길이며, 더구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교회의 선교적 구조 안에 담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는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작은 교회와 자연학교가 모범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작고 가난하기 때문에 과소비 할 여력도 없습니다. 실제로 노동의 구원론적 지평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저주받은 땅을 살려내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는 점에서 생명 지향적 선교 공동체로서 '딱'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고단한 길인지 모르지만 이미 이런 길에서 종말론적 구원의 신비를 발견한 분들의 공동체이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휘파람을 불며 이 길을 가고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2004. 5.23.  2004.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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