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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나무............... 조회 수 2353 추천 수 0 2009.06.18 00: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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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5:1-7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8479 

jys.jpg 정용섭 목사

세리와 죄인
누가복음 15장은 복음서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1-7절은 '잃었던 양 한 마리'의 비유이고, 이어서 8-10절은 '잃었던 은전 한 닢' 비유이며, 11-32절은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입니다. 누가는 여기서 세 가지 종류의 잃었던 것을 차례대로 배열하고 있습니다. 양, 돈, 아들. 그 당시에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 순서를 따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복음서 중에서 어느 복음서도 이 세 가지 비유를 함께 다루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잃었던 양의 비유를 기록한 마태복음(18:12-14)을 제외하고는 그 어디에도 이 비유가 소개되지 않았다는 걸 보면 하나님이 한 자리에서 이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서로 다른 상황에서 말씀하신 세 가지 비유를 누가는 여기 15장 한 곳에 배치하고 있는데, 세 비유는 한결같이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기쁨이 곧 하늘의 사건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이유를 해명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습니다(1절). 이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못마땅해 하였습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 우리는 그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동격으로 다루는 이유는 그들의 사회적 위치가 똑같이 천하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식민지 상황에서 세리의 업무는 우리의 경우 친일인사들처럼 친(親)로마적이기도 하고, 직업의 성격으로 볼 때 개인 비리에 연루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에 조롱의 대상이었습니다. 누가가 말하는 죄인은 사회적으로 파렴치한 행위를 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율법을 어긴 사람입니다. 
유대 공동체에서 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개그 콘서트나 도올 김용옥의 고전 강의처럼 웃기는 것도 아니고, 아니면 멜로 드라마처럼 눈물 콧물 흘리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리와 죄인들의 영적인 감수성이 다른 일반인들이나 바리새인들보다 탁월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심오한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그것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들을 수 없고, 다만 세리와 죄인들이 모여들었다는 그 현상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현상을 바리새인들이 못마땅해했다는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간접적으로 얻을 수 있는 대답은 이렇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종교적 욕구를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채워주지 못한 반면에 예수님이 채워주었다는 것이 그 대답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종교적 욕구가 있는데, 종교 체제가 이런 욕구를 받아들일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할 때 다른 것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경우에는 지성적인 사람들의 종교적 욕구가 막혀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그런 지성적인 사람들의 비판과 합리성을 매도하고 그들이 있어야 할 공간을 없애버렸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지성적인 사람들은 복음서의 세리와 죄인들에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부분과 전체

세리와 죄인들의 종교적 욕구를 거부하고 상대하지 않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아주 간단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백 마리의 양을 치던 사람이 한 마리를 잃었습니다. 이 사람은 아흔 아홉 마리를 들판에 그대로 둔 채 한 마리를 찾아 헤맵니다. 결국 잃었던 양 한 마리를 찾은 이 사람은 기쁨에 들떠서 집에 돌아와 친들과 이웃을 불러모아 이 사실을 알립니다. 이 비유의 의미를 예수님이 직접 설명하셨습니다.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7절).
우리는 이 비유를 읽으면서 별로 합리적이지 못한 이 목자의 행동을 무조건 그럴듯하게 신앙적인 것으로 미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백 마리의 양을 키우는 사람이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아흔 아홉 마리를 위험한 들판에 내버려둔다는 것은 합리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만약 한 마리를 찾아서 헤매는 동안 나머지 양들이 손상을 받았다면 이 사람은 목자로서의 책임을 완수한 게 아닙니다. 설령 잃어버린 한 마리가 중요하더라도 일단 나머지 양들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든지, 아니면 안전한 우리 안에 모아들인 다음에 행동에 나섰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의 양을 위해서 나머지를 위험에 처하게 내버려두는 이 비합리성이야말로 곧 신앙이라고, 또는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크게 잘못된 가르침은 아니지만 비합리성을 신앙의 토대로 삼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런 가르침이 극단적으로 나가게 되면 '무조건적인 믿음'의 이데올로기가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자리를 잡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목자의 행동이 비합리적인 게 아니라 훨씬 합리적인 것이라고 해석을 하더군요. 비록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지만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위해서 최선을 기울이는 목자의 마음에 감동한 양들이 앞으로 목자를 훨씬 깊이 신뢰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새로운 시각이기는 하지만 비약이 좀 심한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는 이 비유에 등장하는 목자의 행동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비합리성을 강조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양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게 되었다는 실용주의적 해석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 비유의 가르침은 정작 다른 데 있다고 봅니다.
뒤에 나오는 두 비유에서도 우리가 확인할 수 있지만, 잃었던 양의 비유에서도 중심 주제는 '기쁨'입니다. 특히 잃었던 것을 다시 찾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기쁨입니다. 잃었던 은전 한 닢을 찾은 여자가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라고 말하고(9),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을 다시 찾은 아버지는 잔치를 베풀고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하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목자도 역시 "자,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양을 찾았습니다."(6)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단지 잃었던 것을 찾았다고 해서 무조건 기쁜 것은 아닙니다. 백 마리 중에서 한 마리의 실제적 가치는 별로 크지 않기 때문에 그런 효율성이라는 점에서는 기뻐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확실히 경제적인 효과는 별로 크지 않습니다. 1%를 다시 찾으려고 지불한 대가를 생각한다면 이것은 밑지는 장사였습니다. 만약 동네 사람들을 불러놓고 잔치를 베풀었다면 양 한 마리 값보다 더 들어갔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목자는 왜 그렇게 기뻐합니까?
목자에게는 아흔 아홉 마리와 백 마리 사이의 차이는 결정적이었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는 비록 백 마리에서 한 마리가 빈 숫자에 불과했지만 완전한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한 마리가 없다는 것은 전혀 없다는 것과 비슷한 의미였습니다. 수학적인 계산으로는 한 마리가 없어도 여전히 아흔 아홉이나 남아 있지만 양치는 일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하고 있던 이 목자에게는 한 마리가 없음으로써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마저 없는 것과 똑같았습니다. 물론 이 목자가 잃었던 양을 찾지 못했다고 해도 여전히 목자의 일을 하긴 했겠지만 자신의 존재 의미를 상실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빈자리로 인해서 전체의 자리가 비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 마리를 다시 찾았다는 말은 곧 백 마리를 다시 찾은 것과 똑같았습니다. 부분이 채워져야만 전체의 의미가 확보된다는 사실은 '잃었던 은전 한 닢' 비유에서 훨씬 명확하게 설명됩니다. 은전 열 닢은 이 여자가 결혼할 때 그 기념으로 가져온 것입니다. 그 중에서 하나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전부를 잃어버린 것과 똑같았기 때문에 이 여자는 돈을 찾을 때까지 집 안을 샅샅이 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잃었던 은전 한 닢을 다시 찾은 이 여자의 기쁨을 우리는 충분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잃은 양의 비유'에 등장하는 목자의 행위가 합리적이었는가 하는 문제는 여기서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자기의 업무에 대한 이 목자의 전혀 다른 시각을 우리가 여기서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부분과 전체가 상호 변증법적으로, 유기론적으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훨씬 큰 생명의 세계를 이루어간다는 사실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는 그 어느 것도 소홀하게 다루질 게 없습니다. 흔히 말하듯 이름 없는 들풀이 있어야만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가능하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생명의 신비를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그리고 작은 시간 안에서는 이 세상의 것들이 별로 상관없이 존재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든 전체가 하나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 생명의 깊이를 외면하고 이 세상을 피상적으로만 인식하고 살아가는 한 그런 연관성을 놓치고 맙니다. 저 혼자 잘난 것처럼 살아갑니다. 개인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고, 인간 자체도 그렇습니다. 주변과의 관계를 열지 않고, 단절시키면서 흡사 '자폐증' 환자처럼 살아갑니다.  더구나 이 비유에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는 없어도 될만한, 어쩌면 없어야 더 좋을만한 대상이었다는 점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의 실패한 인생을 감안한다면 여기 잃어버린 양 한 마리도 그런 범주에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목자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혼자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결국 길을 잃은 것이겠지요. 평소에도 다른 양들과 싸우기만 하고 불평 불만을 늘어놓다가 '왕따'를 당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 양이 사라지는 게 나머지 양들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서 훨씬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함께 있으면 무언가 꺼림칙하고 불편한, 그래서 사라져 주는 게 모두를 위해서 좋을 것 같은 것들이지만 여전히 그것은 큰 생명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좀 역설적이지만 세리와 죄인 같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좋은 가치가 빛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불쾌한 것들, 별 볼일 없는 것들, 가소로운 것들이 그 자리에 있음으로써 우리가 모두 파악하기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전체 생명의 세계가 유지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나머지 아흔 아홉을 들판에 내버려두고 길을 떠난 목자의 결단은 옳았습니다.   

비토하는 세계

그런데 우리는 이런 생명의 비밀과 신비를 이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정반대의 길로 나갑니다. 앞에서 설명한대로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게 된 동기는 예수님 주변에 세리와 죄인들이 모여들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환영하고 함께 음식까지 나누는 것에 대해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못마땅해한 이유는 자신들만으로도 이미 완전한 사회를 꾸려 갈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죄인들을 끌어들일 필요까지 없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율법을 어긴 사람들이라는 바리새인들의 주장은 단지 명분일 뿐이고 속으로는 그들을 귀찮은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말썽꾸러기, 못생긴 사람들, 바보들은 없을수록 이 사회가 건강해진다고 말입니다. 인류 역사는 늘 그런 방식으로 흘러왔으며, 종교도 그런 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하는 기능을 감당했습니다. 사회적 마리너리티를 억압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집시들을 종교재판에 처하거나 타종교를 강제로 억압했습니다.
그들이 없어도, 아니 그들이 없으면 없을수록 이 세계는 깨끗해지고 완전해진다는 믿음으로 정화 작업에 열을 올렸습니다.
요즘도 우리는 어떤 집단을 그렇게 불쾌하게 여기고 그들이 사라져 주었으면 하고 살아갑니다. 예컨대 수년 전부터 미국의 부시 대통령 같은 사람이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이런 생각은 성서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나쁜 놈들을 '싹쓸이'함으로써 이 세상을 정의와 평화가 지배하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생각 자체가 지나치게 낭만적일 뿐만 아니라 그가 정의하고 있는 나쁜 놈들이라는 개념도 일방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우리 배속에 일정한 박테리아가 살아있어야 하는 것처럼 이 세상이 이런 정도라도 유지되려면 테러 집단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제국주의적 패권은 그런 방식으로밖에는 도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내가 여기서 테러리즘을 옹호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가능한대로 폭력의 질서를 제거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하지만, 우리의 가장 밑바탕에는 악한 요소까지 더불어서 이 땅에 존재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뿐입니다.
이런 문제는 국제관계의 살벌한 현장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도 늘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여러 종류의 장애인들과는 상관없이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부도덕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하루빨리 사라져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도시의 미관을 헤친다는 이유로 노점상을 강제로 철거하는 일도 역시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가 하는 점을 증명합니다. 상대방이 없어야 내가 잘된다는 생각이 점점 확실한 진리로 자리를 잡아가는 우리의 이 시대정신은 결국 생명을 파괴하는 길로 나가는 것 같습니다.

다시 찾아야 할 영성

저는 오늘의 이 비유를 개인의 영성 문제와 연결해서 생각하고 싶습니다. 한 마리의 잃은 양을 다시 찾은 목자의 기쁨은 사소해 보이는 일부를 통해서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전체의 생명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하나의 요소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아주 사소한 것 같지만 우리의 삶이 완성되기 위해서 결정적으로 필요한 그것은 무엇일까요? 영성이 아닐까요? 사람들은 대개 아흔 아홉의 숫자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살아갑니다. 여전히 자신들은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부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우리의 삶을 완성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그 하나의 요소가 간과되는 이유는 우선 그런 세계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목자의 뛰어난 점은 한 마리가 모자란다는 사실을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백 마리 중에서 한 마리가 빠진다고 해서 표시가 나지 않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목자는 그것을 알아냈고, 그래서 곧 찾아 나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온통 양을 살찌우는 데만 정신을 팔다가 양이 없어졌는지 조차 모르는 상태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좀 가난해져도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가 되는 게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어갈 틈이 조금도 없습니다. 도대체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을 막아버리는 경제발전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7). 여기서 죄인이라는 말은 자기의 삶을 파괴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이 이제 자기 삶을 긍정하고 풍요롭게 만들어가기로 마음을 돌리는 것이 곧 회개입니다. 회개할 것이 없는 사람들은 아예 돌아설 가능성이 없다는 점에서 구원의 길도 막혀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닫힌 마음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삶의 방식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무엇이 진정한 생명인지에 대한 성찰도 불가능합니다. 결국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처럼 자기 자신의 세계에 갇혀서 살아가겠지요. 자신과 다른 이웃을 향해서, 인간 이외의 모든 세계를 향해서 마음을 열고 살아갈 때만 참된 생명의 세계에 동참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04.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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