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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4:16-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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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482 |
정용섭 목사
사마리아 여인
요한복음 4장에는 그 유명한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가 나옵니다. 이 사건이 특별히 주목받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사마리아라는 지역이 그렇습니다. 북쪽 갈릴리와 남쪽 유다의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있는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부터 '왕따'를 당했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여행하거나 반대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올 때 사마리아 땅을 거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멀리 우회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문제가 많은 지역을 예수님은 아무 거리낌 없이 들어가셨다가 수강 성 우물가에서 한 여자를 만났습니다. 우리나라의 옛 그림이나 소설에도 나옴직한 장면인데,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웬 낯선 남자가 초면의 아낙네에게 물을 달라는 것도 괴이쩍었습니다만, 그 남자가 유대인이고 그 여자가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사실이 더욱 해괴했습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과는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그 당시의 상식적인 관점에서 자연스럽지 못한 만남이었지만 예수님의 적극적으로 자세로 인해서 이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매우 깊은 정신적인 세계로 밀려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예수님이 이 여자에게 전혀 의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서, 남편을 불러오라."(16절). 당황한 이 여자는 남편이 없다고 대답합니다(17절). 그러자 이 여자의 실상을 이미 파악하고 있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남편이 없다는 말은 숨김없는 말이다. 너에게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사실은 네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 대로 말하였다."(18절). 이런 대목에 이르면 예수님이 좀 짓궂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사마리아 여자의 부도덕한 삶을 책망하실 게 아니었다면 과거에 다섯 남자와 살았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까지는 없었던 것 아닐까요? 예수님은 어디서나 사람들의 부도덕성 자체를 나무란 일은 별로 없습니다. 삭개오를 만났을 때도 그렇고, 세리 마태를 제자로 삼았을 때도 그렇고, 동네에서 손가락질 받던 어떤 여자를 만났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의 부도덕한 행위를 잘했다는 뜻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에서 사람들을 만나신 것입니다.
오늘 여러 남자를 거친 이 사마리아 여자의 행적을 거론한 것도 그 행위 자체를 책망하기보다는 대화를 영적인 깊이로 끌어가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사마리아 여자가 보인 태도를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과연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19). 아마 이 여자는 자신의 과거를 짚어내는 능력을 보고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자도 자기 방어 능력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남편을 데리고 오라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추켜세우더니 대화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립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은 저 산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렸는데 선생님네들은 예배드릴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20). 이제 남편을 여러 명 갈아 치웠던 과거는 사라지고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 사이에 놓여 있는 매우 델리케이트한 예배 장소문제가 대화의 주제로 부각되었습니다. 이 여자가 이런 주제에 대해서 호기심이 많은 탓인지 아니면 자신의 곤란한 형편을 벗어나기 위해서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 것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이 여자는 매우 중요한 주제를 제시함으로써 예수님과의 대화를 진지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 사람들이 서로 다른 곳에서 예배드린다는 이 여자의 말에는 어두웠던 이스라엘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자기들 땅에 있는 그림신 산이 곧 하나님께 예배드릴 적소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로 모세 오경만을 성서로 인정하고 있던 사마리아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모세 등, 중요한 인물들에게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을 사마리아 지역에 있는 그림신 산과 연결시켜서 해석함으로써 예루살렘에 성전을 갖고 있던 유대인들과 갈등을 빚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어떤 설교에서 이 본문을 최초의 종교간의 대화라고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사마리아의 그림신 산과 유대의 예루살렘 사이에 벌어진 대화 말입니다. 종교간의 갈등과 대화는 여러 면에서 어렵습니다. 종교는 자체 안에 절대적인 경험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상대화할 위험성을 감수하면서까지 대화에 나서기는 힘든 형편입니다. 특히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서 훨씬 강도가 높은 배타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주변의 종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간혹 목사들 중에서도 석탄일을 맞아 축하 현수막을 내다 거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 일은 거의 별종들이나 하는 짓거리로 치부됩니다. 요즘 연일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미군들의 야만적 행위가 보도되고 있는데, 그들의 그런 행위가 미국의 제국주의적 발상에 근거하고 있기는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이슬람교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독선적인 감정이 작용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모든 종교가 자기의 특성을 허물어뜨리고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혼합적 형태를 보이는 게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진리론적 태도로 대화의 가능성은 늘 열어놓아야 할 것입니다.
종파간의 갈등
이제 예수님은 이 여자의 문제 제기에 대해서 답을 주십니다. "내 말을 믿어라. 사람들이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에 '이 산이다' 또는 '예루살렘이다' 하고 굳이 장소를 가리지 않아도 될 때가 올 것이다."(21). 이 말씀이 예수님의 친언(親言)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입을 빌린 요한의 신앙고백인지 우리가 지금 정확하게 분별하기는 힘들지만 어떤 경우라고 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국 성서를 기록한 사도들이나 그 사도들의 제자, 혹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예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차이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예배의 본질을 정확하게 해명하고 있습니다. 예배드릴 장소가 아니라 예배 받으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사람들이 장소로 인해서 서로 자기들이 옳다고 주장했지만 이제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서 그런 다툼이 무의미해진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림신 산에서 예배드려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들로서는 절실한 문제였습니다. 늘 무시당하는 것도 억울한데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유대인들의 본산지인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치욕이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하나님은 반드시 그림신 산에서 자신들을 만나주시는 분이어야만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거론되고 있는 그림신 산과 예루살렘 같은 문제로 갈등하지는 않지만 약간 다른 관점에서 여전히 이런 닫힌 마음을 갖고 살아갑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반드시 그림신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곧 오늘 우리에게 거의 절대적인 도그마로 자리잡은 개교회 중심주의를 의미합니다. 이런 강도가 심한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먼 곳에 출타하더라고 주일은 반드시 본교회에 돌아와서 지키라고 가르칩니다. 신앙인들도 인간인 이상 자신들만의 동류 의식에서 강한 연대감을 느낄 수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거의 조폭들의 패거리 의식처럼 강화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신앙이 굳어진 사람들은 다른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어색할 뿐만이 아니라 예배를 드렸다는 느낌도 없게 됩니다.
예배를 드릴 때 굳이 장소를 가리지 않아도 될 때가 온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좀더 넓게 해석한다면 어느 한 시점에, 그리고 어떤 형식을 통해서 드리는 예배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곧 예배로 승화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장소가 무의미해진다는 것은 일정한 시간의 절대성도 사라졌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늘 일정한 공간과 시간을 거룩하게 여기고 그런 장소와 시간에 절대자와 만난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이제 예수님에 의해서 그런 시공간의 거룩성은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험은 인간에게 일종의 자유입니다. 그림신 산과 예루살렘이 더 이상 그들을 지배할 수 없다는 자유입니다. 그 자유는 방종의 수단이 아니라 훨씬 깊은 차원의 예배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속하는 시간과 장소가 사라짐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통해서 이제 우리는 모든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해졌다는 뜻입니다.
영이신 하나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굳이 장소를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오늘 우리에게는 매우 자연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아주 파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기존의 발상을 깨곤 했습니다.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든 씻지 않든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거나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는 말씀 등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일부러 파격적으로 보이려고 그렇게 하신 게 아니라 당신 자신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을 하셨을 뿐인데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였을 뿐입니다. 지금도 성지 순례를 대단한 것인 양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형편인데, 2천년 전이야 오죽했겠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제사장들이나 사두개인들에게 들어갔다면 예수를 당장 멍석말이 해야한다고 들고일어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슨 근거에서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었을까요?
23,24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한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참된 예배가 무엇이며, 그런 예배를 드려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24절에 하느님이 어떤 존재인지, 그래서 우리가 드려야 할 예배가 어떠해야하는지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가 무슨 뜻인지 설명하는 작업만 해도 한 두 시간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영적인'이라는 말을 대충 이해하기는 합니다만 정확하게 인식하거나 더구나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헬라어 문장은 이렇습니다. "프뉴마 호 테오스". 일반적으로 '영'이라고 해석되는 '프뉴마'는 구약의 '루아흐'에 해당되는데 주로 생명의 힘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원래 스토아 학자들은 신의 본성을 '프뉴마'라고도 했으며, 또는 '누스'(정신)라고도 했습니다. 프뉴마나 누스 모두 인간처럼 가시적 존재가 아닌 존재를 가리킬 때 사용되긴 했습니다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어쨌든지 여기서 "하느님은 영이시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공허하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적 수단이 아니라 그분의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알리신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보른캄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이것은 분명히 다름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는 거기에 현재하고 있으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다. 실제로 그는 단순히 기다릴 뿐만 아니라 마치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를 맞기 위해서 달려가듯이 두 팔을 벌리고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위에서 좀 까다로운 문제를 신학적으로 설명했기 때문에 여러분의 생각이 더 혼란스러워졌을지 모르겠습니다. 복잡하게 생각되면 그냥 잊어버려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게 된 배경을 염두에 두십시오. 사마리아 여자가 끄집어들인 예배 장소의 문제는 역사적 매우 복잡한 문제들이 연루되어 있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예배 장소에 집착하게 된 이유에는 훨씬 근원적인 요소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여전히 실체처럼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흡사 헬라의 제우스가 올림포스 산에 거주하듯이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또는 그림신 산에 거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신이 한 장소에 거주한다는 것은 공간적으로 제한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게 곧 실체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인간들이 공간적으로, 그리고 실체론적으로 생각하든 방식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적으로 찾아오십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매오 복잡한 의미를 담고 있는 영이라는 단어를 위에서 잠시 언급한 것만 해도 복잡한데 여기서 더 이상 이 문제로 시간을 끌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에 영이신 나님에게 드려야 할 예배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진리의 영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한다."(24). '영적으로 참되게'라는 표현은 헬라어 본문에 '프뉴마티 카이 알레테이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프뉴마티는 프뉴마의 어미 변화이고, 카이는 '그리고'라는 접속사, 알레테이아는 '진리'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은 영과 진리를 동격으로 표현합니다. 이 말은 곧 영과 진리가 동일한 것이라는 뜻일 수 있고, 아니면 최소한 영과 진리가 서로 소통하는 관계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4장17절에도 매우 귀중한 단어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앞으로 성령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하시면서 그 성령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토 퓨뉴마 테스 알레테이아스. 즉 진리의 영이 곧 성령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께 영적으로, 진리의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이라는 말은 곧 참되다는 뜻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도된 대로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다음, 오순절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특이한 현상으로 경험된 사건을 기리는 주일입니다. 기독교는 단지 성령 강림절에만 성령을 생각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삼위일체'의 신앙 안에서 성령을 하나님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이 성령을 기이한 현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든지, 열광적인 신앙에 빠지는 것을 보고 성령 충만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성령이 그런 방식으로 경험될 수도 있지만, 그런 방식에 치우치면 성령을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은 말 그대로 거룩한 영입니다. 이 영은 오늘 본문과 요한복음 14장17절에 나오는 퓨뉴마와 똑같은 단어로 표기됩니다. 따라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는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된 것을 참된 것으로 분별할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성령 충만의 증거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이 세상의 학문이 깊어야만 진리를 분별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른 지식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도움은 되지만 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생물학이나 물리학, 또는 철학과 역사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힘인 하나님을 느끼는 사람이 있고, 전혀 반대로 나가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성령감림절을 맞는 우리 한국 교회에 필요한 것은 영의 진리론적 차원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엉뚱한 것에 치우치면서 성령을 받았다고 고집만 부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얼마나 진리에 가까운지, 얼마나 참되고 진실한지 되돌아봄으로써 성령이 강림한 증거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2004. 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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