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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슥10: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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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배성환 목사 |
참고 : | 성남산성교회 |
성경 말씀을 정확히 알고 은혜를 받기 위해서 성경에 나오는 지명들을 아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로 알고 있는 나라가 성경에는 이스라엘, 유다, 야곱, 에브라임 족속, 요셉 지파 등으로 나타나기에 정확히 알지 못하면 혼돈을 가져 올 수 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이름도 다양합니다. 한국이라는 Korea라는 이름이 있지만 따지만 외국에서는 남한, 북한이라고 부릅니다. 동남아 권에서는 남한을 한국, 북한을 북조선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도 우리나라와 흡사한 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통일왕국이었는데 남북으로 분단이 됩니다. 분단 후 남쪽을 보통 유다라고 부릅니다. 남쪽 유다가 다윗 왕의 혈통을 이었기 때문에 정통성이 있습니다. 보통 분단 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북쪽은 반역에 의해 세워진 나라입니다. 북쪽에는 가장 큰 지파가 에브라임이기에 성경에서는 북쪽 이스라엘을 에브라임 혹은 요셉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분열 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은밀하게 북쪽 이스라엘을 일컫는 호칭입니다. 에브라임이나 요셉도 마찬가지이지요.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하여 흩어지고 남쪽 유다는 그 후 100년 뒤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잡혀갔다가 70년 만에 돌아옵니다. 남쪽 유다는 나라를 잃은지 70여년 만에 돌아오니 순수 혈통이 유지되었는데 북쪽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고 흩어진 후 거의 200년이 지났으니 순수 이스라엘 혈통이 약화됩니다. 이민을 가서 200년이 지나면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 현지인들과 결혼할 것이고 자기 나라 언어도 잊을 것입니다. 그렇게 몇 백년이 지나서 몇 대가 흘러가면 홀혈인이 되어 외국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스가랴는 북쪽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고 거의 이방인이 되었고 남쪽 유다가 포로에서 돌아온 후 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포로에서 70년 만에 돌아온 유다의 희망이 있다면 어떻게 하든지 더 많은 유다인이 돌아와서 옛 다윗시대 영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혼혈인이 되었기에 돌아올 것은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미 포기한 것입니다. 그때 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6절 내가 유다 족속을 견고(강성)하게 하며 요셉 족속을 구원할지라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그들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이 내게 내어 버리움이 없었음 같이 되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그들을 들으리라
하나님은 남쪽 유다 족속을 더욱 강성하게 할 것이고 그리고 잊혀져 가는 북쪽 요셉 족속 이스라엘을을 구원할 것이라고 어머어마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오래전에 노예가 되어 세계 방방 곳곳으로 흩어진 북쪽 요셉 지파는 다시 찾아 볼 수 없는 때에 그들을 구원할 것이라는 복음이 전해진 것입입니다.
마치 어릴 때 공원에서 아이를 잊어 먹고 30년이 지나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해 포기한 아이를 찾게 될 것이라는 소식보다 더 큰 소식인 것입니다. 거의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신다는 것이지요.
돌아온 유다인들의 기대는 아직 돌아오지 않는 유대인들이나 돌아왔으면 좋겠다 정도인데 하나님은 그 기대를 훨씬 능가하여 오래 전에 잡혀간 요셉 족속 북쪽 이스라엘까지 구원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사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계획보다 훨씬 위대하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땅과 하늘보다 더 차이가 납니다.
우리는 겨우 생각하는 것이 코앞의 일들만 생각합니다. 가능한 일들만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생각은 겨우 믿다가 낙심한 성도들이 회개하고 돌아왔으면 좋게다. 우리 이웃 사람들이나 구원받았다면 좋겠다. 내 친한 친구 아무개가 예수 믿었으면 좋겠다 그 정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은 훨씬 더 위대합니다. 믿다가 낙심한 사람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이단 중에 이단에 빠진 사람도 구원할 것이다. 아예 예수님의 예자도 싫어하는 사람도 돌아오게 할 것이다. 산성 교회가 이웃 지역을 구원할 정도가 아니라 전 세계에 복음의 나팔수로 쓸 것이다. 산성교회 성도들은 친한 친구 전도가 아니라 원수까지 전도하는 능력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훨씬 위대합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선지자의 심령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 때문에 교회를 복 주시고 성도들 가정에 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유다를 더 강하게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유다가 더 강성해야 잊혀져가는 혼혈인인 이스라엘이 회복되듯이 하나님의 교회가 복을 받아 강성해 지는 것은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통로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유다가 강성해 지는 것처럼 교회가 복을 받고 성도들이 복을 받는 것의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중심의 생각이 강하여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시고 부요하게 하신 것은 나와 나의 가족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잘되게 하신 것은 한번도 얼굴을 본적도 없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을 구원하고 우리가 알지도 듣지도 못한 나라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선교사들을 부를 때 가만히 보면 선교사 가족이 다 구원 받은 다음에 선교사로 나가는 분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분도 있습니다.
선교사로 부름 받을 때 나의 가족, 나의 친지부터 구원하고 선교사로 나가겠습니다. 이런 소아적 생각을 가졌다면 오늘 한국에까지 복음이 들어오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일단 나의 가족이 구원을 받지 못해도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나가는 것입니다. 이름도 연고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6절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긴다. 그래서 돌아오게 합니다. 들이 내게 내어 버리움이 없었음 같이 되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그들을 들으리라
전혀 긍휼이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요셉 지파에게 긍휼을 베푸시어 돌아오게 하는데 전혀 버리움이 없었음 같이 할 것이라고 합니다. 완전히 구원하여 완전히 치료한다는 것입니다. 버리움을 당한 아픔이 얼마나 클까요? 몇 백년 노예가 되어 고생을 사람들에게 버림 당함의 아픔은 말로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을 구원하여 버림을 당한 기억이 없게 할 것이라고 하빈다. 마음의 상처를 완전시 씻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게 하신다는 위로의 약속이지요.
예수 안에 돌아와 긍휼과 은혜를 받기만 하면 과거의 아픔과 상처는 다시 기억이 되지 않게 복을 주십니다. 다 치료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계획입니까? 이 계획을 가지고 먼저 믿는 종들을 복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북쪽 이스라엘은 겨우 구원받은 사람 노예 정도가 아니라 용사가 됩니다.
7절 에브라임이 용사 같아서 포도주를 마심 같이 마음이 즐거울 것이요 그 자손은 보고 기뻐하며 여호와를 인하여 마음에 즐거워하리라 에브라임은 북쪽 이스라엘을 말한다고 했지요.
이들은 노예가 아니고 용사같다고 합니다. 지금 에브라임은 노예처럼 흩어져 있습니다. 노예는 꿈도 희망도 없고 스스로 판단한 능력도 없습니다. 시키는 일이나 합니다. 일단 하루만 잘 넘기면 됩니다. 힘든 일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시키면 어쩔 수 없는 합니다. 주인의 눈치를 보면서 매맞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밥이나 먹고 옷이나 주면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용사는 시키지 않아도 자원하여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움니다. 자진해서 어려운 일을 합니다.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임을 알기에 웃으면서 합니다. 전혀 짜증을 부리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이스라엘은 노예가 아니라 용사같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노예 생활 한 사람인데 어떻게 용사처럼 일을 합니까? 포도주를 마심같이 마음이 즐겁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인하여 마음이 즐겁기 때문에 시키지 않아도 목숨걸고 기쁜 마음으로 일을 하는 용사와 같은 것입니다.
포도주를 마심같이 마음이 기쁜 것은 성령 충만함을 말합니다. 오순절날 성령 충만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새 술을 취하였다고 합니다. 새 술은 일찍 취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마음이 즐겁기에 용사처럼 자원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노예처럼 어쩔 수 봉사하는 단계가 아니라 여호와로 인하여 마음이 기쁘기에 일하는 것입니다. 주체할 수 없는 없는 성령의 기쁨이 있기에 용사처럼 즐거움에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봉사하는 이런 은총을 간구하고 받아야 합니다. 돈이 생기지 않아도 무슨 혜택이 없어도 여호와로 인한 기쁨으로 인해 힘써 일하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기쁨이 넘치기에 힘써 일하는 것입니다. 나같은 죄인인 하나님의 자녀된 것 자체가 기쁘고 즐거웁니다. 그래서 용사처럼 자원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혀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을 불러 용사로 어떻게 모을까요?
8절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 불어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 같이 번성하리라.
흩어져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게 노예 생활 하는 이스라엘을 모을 때 휘파람을 불어서 모은다고 합니다. 휘파람은 목자들이 양들을 모을 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한 마리 한 마리 잡으로 다니지 않습니다. 또 도망가는데 어떻게 한 마리씩 잡을 수 있습니까? 휘파람을 불면 저녁에 다 달여옵니다.
하나님께서 전혀 복음을 모르는 사람을 불러 용사로 사용하기 위해 복음의 휘파람을 불 것입니다. 복음의 휘파람을 불 때 성령의 감동에 된 사람들이 다 몰려 올 것입니다. 전혀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이 용사가 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붙잡고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오순절 날 성령 충만하여 복음의 휘파람을 불 때 부흥의 역사, 세계 복음화의 역사가 일어난 것처럼 다시 한번 성령의 충만하여 부흥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기도하고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들이 이 일에 쓰임 받도록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그 때 다시 한번 번성함의 복, 회복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봅시다.
9절 내가 그들을 열방에 뿌리려니와 그들이 원방에서 나를 기억하고 그들의 자녀와 함께 다 생존하여 돌아올지라
범죄로 인해 하나님이 세상에 포로되게 했습니다. 뿌리듯이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버리지 않습니다. 그들을 먼 곳에서 다시 돌아오게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징계를 받을 때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버림을 받은 것 같지만 그곳에서 다시 정화하고 깨끗해 지면 주님은 다시 돌아오게 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할 때, 주님의 은총을 기억할 때 탕자처럼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할 때 다시 돌아오게 되고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곳에 있든지 어떤 장애물이 있던지 하나님은 회복시키고 복을 주십니다. 10절 내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 돌아오며 그들을 앗수르에서부터 모으며 길르앗 땅과 레바논으로 그들을 이끌어 가리니 그 거할 곳이 부족하리라.
애굽같은 강대국이 막던지, 앗수르같은 강한 족속이 막든지 어떤 환계가 있어도 회복시켜 줍니다. 완전히 치료하여 완전하게 회복시킵니다. 길르앗 땅은 가나안의 동쪽이고 레바논은 북쪽입니다. 가나안 땅에 차고 넘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회복시키실 때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다 이길수 있고 넘치는 복을 받습니다. 누리고 흔들어 차고 넘치는 복을 받습니다. 물론 고통의 바다를 통과해야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11절 내가 그들로 고해를 지나게 하며 바다 물결을 치리니 나일의 깊은 곳이 다 마르겠고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겠고 애굽의 홀이 없어지리라
하나님의 용사들도 고통의 바다를 지나지만 방해물들은 다 마르고 교만도 낮아지고 애굽왕의 지팡이 없어집니다. 마치 이라크에서 후세인의 권세가 꺾이고 마음껏 신앙 생활하는 것처럼 됩니다.
성도들의 고통은 일종의 시험입니다. 끝끼지 의지하면 앗수르의 교만도 바로왕의 홀도 막을 수 없습니다. 어떤 장애물도 하나님의 종들이 받을 복을 막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12절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케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을 받들어 왕래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구원 받은 용사의 특징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왕래하는 것입니다. 형통할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하며 그 이름을 힘입는 용사들이 됩시다. 아멘
/배성환 목사
이스라엘도 우리나라와 흡사한 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통일왕국이었는데 남북으로 분단이 됩니다. 분단 후 남쪽을 보통 유다라고 부릅니다. 남쪽 유다가 다윗 왕의 혈통을 이었기 때문에 정통성이 있습니다. 보통 분단 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북쪽은 반역에 의해 세워진 나라입니다. 북쪽에는 가장 큰 지파가 에브라임이기에 성경에서는 북쪽 이스라엘을 에브라임 혹은 요셉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분열 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은밀하게 북쪽 이스라엘을 일컫는 호칭입니다. 에브라임이나 요셉도 마찬가지이지요.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하여 흩어지고 남쪽 유다는 그 후 100년 뒤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잡혀갔다가 70년 만에 돌아옵니다. 남쪽 유다는 나라를 잃은지 70여년 만에 돌아오니 순수 혈통이 유지되었는데 북쪽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고 흩어진 후 거의 200년이 지났으니 순수 이스라엘 혈통이 약화됩니다. 이민을 가서 200년이 지나면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 현지인들과 결혼할 것이고 자기 나라 언어도 잊을 것입니다. 그렇게 몇 백년이 지나서 몇 대가 흘러가면 홀혈인이 되어 외국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스가랴는 북쪽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고 거의 이방인이 되었고 남쪽 유다가 포로에서 돌아온 후 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포로에서 70년 만에 돌아온 유다의 희망이 있다면 어떻게 하든지 더 많은 유다인이 돌아와서 옛 다윗시대 영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혼혈인이 되었기에 돌아올 것은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미 포기한 것입니다. 그때 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6절 내가 유다 족속을 견고(강성)하게 하며 요셉 족속을 구원할지라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그들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이 내게 내어 버리움이 없었음 같이 되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그들을 들으리라
하나님은 남쪽 유다 족속을 더욱 강성하게 할 것이고 그리고 잊혀져 가는 북쪽 요셉 족속 이스라엘을을 구원할 것이라고 어머어마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오래전에 노예가 되어 세계 방방 곳곳으로 흩어진 북쪽 요셉 지파는 다시 찾아 볼 수 없는 때에 그들을 구원할 것이라는 복음이 전해진 것입입니다.
마치 어릴 때 공원에서 아이를 잊어 먹고 30년이 지나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해 포기한 아이를 찾게 될 것이라는 소식보다 더 큰 소식인 것입니다. 거의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신다는 것이지요.
돌아온 유다인들의 기대는 아직 돌아오지 않는 유대인들이나 돌아왔으면 좋겠다 정도인데 하나님은 그 기대를 훨씬 능가하여 오래 전에 잡혀간 요셉 족속 북쪽 이스라엘까지 구원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사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계획보다 훨씬 위대하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땅과 하늘보다 더 차이가 납니다.
우리는 겨우 생각하는 것이 코앞의 일들만 생각합니다. 가능한 일들만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생각은 겨우 믿다가 낙심한 성도들이 회개하고 돌아왔으면 좋게다. 우리 이웃 사람들이나 구원받았다면 좋겠다. 내 친한 친구 아무개가 예수 믿었으면 좋겠다 그 정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은 훨씬 더 위대합니다. 믿다가 낙심한 사람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이단 중에 이단에 빠진 사람도 구원할 것이다. 아예 예수님의 예자도 싫어하는 사람도 돌아오게 할 것이다. 산성 교회가 이웃 지역을 구원할 정도가 아니라 전 세계에 복음의 나팔수로 쓸 것이다. 산성교회 성도들은 친한 친구 전도가 아니라 원수까지 전도하는 능력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훨씬 위대합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선지자의 심령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 때문에 교회를 복 주시고 성도들 가정에 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유다를 더 강하게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유다가 더 강성해야 잊혀져가는 혼혈인인 이스라엘이 회복되듯이 하나님의 교회가 복을 받아 강성해 지는 것은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통로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유다가 강성해 지는 것처럼 교회가 복을 받고 성도들이 복을 받는 것의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중심의 생각이 강하여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시고 부요하게 하신 것은 나와 나의 가족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잘되게 하신 것은 한번도 얼굴을 본적도 없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을 구원하고 우리가 알지도 듣지도 못한 나라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선교사들을 부를 때 가만히 보면 선교사 가족이 다 구원 받은 다음에 선교사로 나가는 분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분도 있습니다.
선교사로 부름 받을 때 나의 가족, 나의 친지부터 구원하고 선교사로 나가겠습니다. 이런 소아적 생각을 가졌다면 오늘 한국에까지 복음이 들어오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일단 나의 가족이 구원을 받지 못해도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나가는 것입니다. 이름도 연고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6절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긴다. 그래서 돌아오게 합니다. 들이 내게 내어 버리움이 없었음 같이 되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그들을 들으리라
전혀 긍휼이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요셉 지파에게 긍휼을 베푸시어 돌아오게 하는데 전혀 버리움이 없었음 같이 할 것이라고 합니다. 완전히 구원하여 완전히 치료한다는 것입니다. 버리움을 당한 아픔이 얼마나 클까요? 몇 백년 노예가 되어 고생을 사람들에게 버림 당함의 아픔은 말로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을 구원하여 버림을 당한 기억이 없게 할 것이라고 하빈다. 마음의 상처를 완전시 씻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게 하신다는 위로의 약속이지요.
예수 안에 돌아와 긍휼과 은혜를 받기만 하면 과거의 아픔과 상처는 다시 기억이 되지 않게 복을 주십니다. 다 치료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계획입니까? 이 계획을 가지고 먼저 믿는 종들을 복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북쪽 이스라엘은 겨우 구원받은 사람 노예 정도가 아니라 용사가 됩니다.
7절 에브라임이 용사 같아서 포도주를 마심 같이 마음이 즐거울 것이요 그 자손은 보고 기뻐하며 여호와를 인하여 마음에 즐거워하리라 에브라임은 북쪽 이스라엘을 말한다고 했지요.
이들은 노예가 아니고 용사같다고 합니다. 지금 에브라임은 노예처럼 흩어져 있습니다. 노예는 꿈도 희망도 없고 스스로 판단한 능력도 없습니다. 시키는 일이나 합니다. 일단 하루만 잘 넘기면 됩니다. 힘든 일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시키면 어쩔 수 없는 합니다. 주인의 눈치를 보면서 매맞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밥이나 먹고 옷이나 주면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용사는 시키지 않아도 자원하여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움니다. 자진해서 어려운 일을 합니다.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임을 알기에 웃으면서 합니다. 전혀 짜증을 부리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이스라엘은 노예가 아니라 용사같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노예 생활 한 사람인데 어떻게 용사처럼 일을 합니까? 포도주를 마심같이 마음이 즐겁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인하여 마음이 즐겁기 때문에 시키지 않아도 목숨걸고 기쁜 마음으로 일을 하는 용사와 같은 것입니다.
포도주를 마심같이 마음이 기쁜 것은 성령 충만함을 말합니다. 오순절날 성령 충만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새 술을 취하였다고 합니다. 새 술은 일찍 취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마음이 즐겁기에 용사처럼 자원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노예처럼 어쩔 수 봉사하는 단계가 아니라 여호와로 인하여 마음이 기쁘기에 일하는 것입니다. 주체할 수 없는 없는 성령의 기쁨이 있기에 용사처럼 즐거움에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봉사하는 이런 은총을 간구하고 받아야 합니다. 돈이 생기지 않아도 무슨 혜택이 없어도 여호와로 인한 기쁨으로 인해 힘써 일하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기쁨이 넘치기에 힘써 일하는 것입니다. 나같은 죄인인 하나님의 자녀된 것 자체가 기쁘고 즐거웁니다. 그래서 용사처럼 자원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혀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을 불러 용사로 어떻게 모을까요?
8절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 불어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 같이 번성하리라.
흩어져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게 노예 생활 하는 이스라엘을 모을 때 휘파람을 불어서 모은다고 합니다. 휘파람은 목자들이 양들을 모을 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한 마리 한 마리 잡으로 다니지 않습니다. 또 도망가는데 어떻게 한 마리씩 잡을 수 있습니까? 휘파람을 불면 저녁에 다 달여옵니다.
하나님께서 전혀 복음을 모르는 사람을 불러 용사로 사용하기 위해 복음의 휘파람을 불 것입니다. 복음의 휘파람을 불 때 성령의 감동에 된 사람들이 다 몰려 올 것입니다. 전혀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이 용사가 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붙잡고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오순절 날 성령 충만하여 복음의 휘파람을 불 때 부흥의 역사, 세계 복음화의 역사가 일어난 것처럼 다시 한번 성령의 충만하여 부흥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기도하고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들이 이 일에 쓰임 받도록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그 때 다시 한번 번성함의 복, 회복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봅시다.
9절 내가 그들을 열방에 뿌리려니와 그들이 원방에서 나를 기억하고 그들의 자녀와 함께 다 생존하여 돌아올지라
범죄로 인해 하나님이 세상에 포로되게 했습니다. 뿌리듯이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버리지 않습니다. 그들을 먼 곳에서 다시 돌아오게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징계를 받을 때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버림을 받은 것 같지만 그곳에서 다시 정화하고 깨끗해 지면 주님은 다시 돌아오게 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할 때, 주님의 은총을 기억할 때 탕자처럼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할 때 다시 돌아오게 되고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곳에 있든지 어떤 장애물이 있던지 하나님은 회복시키고 복을 주십니다. 10절 내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 돌아오며 그들을 앗수르에서부터 모으며 길르앗 땅과 레바논으로 그들을 이끌어 가리니 그 거할 곳이 부족하리라.
애굽같은 강대국이 막던지, 앗수르같은 강한 족속이 막든지 어떤 환계가 있어도 회복시켜 줍니다. 완전히 치료하여 완전하게 회복시킵니다. 길르앗 땅은 가나안의 동쪽이고 레바논은 북쪽입니다. 가나안 땅에 차고 넘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회복시키실 때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다 이길수 있고 넘치는 복을 받습니다. 누리고 흔들어 차고 넘치는 복을 받습니다. 물론 고통의 바다를 통과해야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11절 내가 그들로 고해를 지나게 하며 바다 물결을 치리니 나일의 깊은 곳이 다 마르겠고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겠고 애굽의 홀이 없어지리라
하나님의 용사들도 고통의 바다를 지나지만 방해물들은 다 마르고 교만도 낮아지고 애굽왕의 지팡이 없어집니다. 마치 이라크에서 후세인의 권세가 꺾이고 마음껏 신앙 생활하는 것처럼 됩니다.
성도들의 고통은 일종의 시험입니다. 끝끼지 의지하면 앗수르의 교만도 바로왕의 홀도 막을 수 없습니다. 어떤 장애물도 하나님의 종들이 받을 복을 막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12절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케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을 받들어 왕래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구원 받은 용사의 특징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왕래하는 것입니다. 형통할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하며 그 이름을 힘입는 용사들이 됩시다. 아멘
/배성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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