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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학개 이한규 목사............... 조회 수 2382 추천 수 0 2009.06.18 21:5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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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학1장 
설교자 : 이한규 목사 
참고 : http://johan316.or.kr 
< 교회에 매인 삶이 복된 삶입니다 >
교회는 우리의 영혼이 만족을 얻을 수 있는 터전이고 축복의 근원입니다. 저는 우리 나라가 개화되고 이만큼 잘 살게 된 것도 교회 때문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약 85년 전에 러시아에 공산주의가 들어서면서 바로 교회의 문을 닫게 했습니다. 결국 러시아는 하나님과 교회가 없는 땅이 되면서 은혜도 없는 땅이 되었습니다. 그후 서서히 가정도, 교육도, 문화도, 경제도 죽어가면서 나라가 크게 쇠퇴했습니다. 지금 약 만 여명의 러시아 여인들이 우리 나라에서 몸을 파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영국, 독일민족은 원래 야만 민족인데 교회로 인해 문화민족이 되었습니다. 중국의 등소평은 프랑스 유학 시절에 교회의 도움으로 공부를 했던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평생 교회의 은혜를 잊지 못했고, 결국 중국식 삼자교회를 세우게 했습니다. 비록 공산주의는 폐기하지 않았지만 그의 정치에는 기독교 정신이 물씬 풍겨납니다. 권력이 있었지만 청빈하게 살다가, 사후에는 시신을 홍콩 앞바다에 뿌리게 했습니다. 그 등소평이 등장한 후, 중국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발전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우뚝 서 있는 곳을 축복의 땅으로 삼으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교회에 우뚝 선 곳에 땅도 살고, 나라도 살고, 가정도 살고, 인생도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고, 가까이하고, 자주 찾고, 섬겨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에 매이는 것을 싫어하지만 사실상 교회에 매이는 것이 복입니다. 사람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무엇인가 한 가지에 매여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일에 매이고 교회에 매여야 합니다. 그래야 보다 성도답게 삽니다. 소는 코가 꿰어야 송아지에서 비로소 소가 되고 그때서야 사람에게 쓰임 받습니다. 송아지의 코가 꿰이지 않아 계속 송아지로만 있으면 별로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좋은 일에 매일 줄 알아야 성숙해지고 유익하게 쓰임 받습니다. 저는 스풀 네 살부터 인생의 가장 황금시절 18년을 거의 교회에 매여 살았습니다.
그러나 24살 이전에 세상이 주던 즐거움보다 24살 이후에 교회가 주는 즐거움이 훨씬 컸기 때문에 너무 일찍 매였다고 후회한 적은 이제까지 한번도 없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일찍 교회에 매인 것이 얼마나 큰 축복으로 여겨지는지 모릅니다. 그때 저보다 잘 살고, 잘 생기고, 자유롭게 매이지 않고 사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그들끼리는 신촌이나 종로나 명동에서 만나면서 더 이상 저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술 먹고 자유롭게 다닌 친구들을 보면 지금 대부분 불행하게 삽니다. 술 먹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은 사실 자유가 아니라 악한 사슬에 매인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면 사단에게, 교회가 아니면 세상에 매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오십이 넘어도 아직도 좋은 일에 안 매이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한 어떤 분은 젊었을 때는 교회에 매였는데, 나이가 들면서 안 매이려고 합니다. 곧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는데도 매이지 않아서 끝내 행복과 보람을 놓칩니다. 우리는 좋은 일에 매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숙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교회에 매이며 해야 은혜를 받고, 영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나무도 뿌리를 내려야 그때부터 뿌리가 뻗치고 튼튼하게 자라 열매를 맺듯이 신앙생활에서도 교회에 든든히 매여 있어야 그 신앙이 뿌리를 내리고 성장합니다. 교회에 매이는 것이 때로는 부담도 되지만 헛된 자유보다는 훨씬 소중한 것입니다.

< 무관심과 이기주의가 문제입니다 >
오늘 본문이 교훈하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주전 537년, 바벨론을 멸망시킨 고레스가 유대인 포로들의 귀향을 허락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돌아오자마자 열정을 가지고 성전재건공사에 착수했지만 곧 열정이 시들면서 자기 집만 꾸미고 성전건축은 15년 동안 방치해두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 말씀이 학개에게 임했습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백성들은 성전 건축 얘기만 나오면 "아직 건축 시기가 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시기 문제가 아니라 무관심과 이기주의 문제였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여기에서 '판벽한 집'이란 백향목으로 고급 인테리어를 한 화려한 집을 말합니다. 화려한 집에 살면서 "형편이 어렵다, 때가 안되었다"고 하면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께 관심을 두어야 하고 교회에 깊은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고 있는지 자기의 행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학개를 통해 말씀하시는 내용이 그것입니다. 5절과 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지니라."
그들은 열심히 살았습니다. 나름대로 성과가 있어서 완벽한 집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을 황폐한 채로 놔두고 그렇게 잘 살면 진정 복된 삶이라 하겠습니까?
그런 모습은 복된 모습이 아님을 하나님은 강조하십니다. 6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무슨 내용입니까? 하나님을 외면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이 헛수고라는 말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만약 불행하다면 어디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합니까?
오늘 성경 말씀은 그것이 자신의 이기적인 행위 때문이 아닌지 살펴보라고 말합니다. 사실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다 불행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불행을 느낍니까?
나의 어려움이 남 때문이고 남 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개 불행을 느낍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통해 자기의 행위를 살펴보는 사람은 결코 불행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성찰하고, 회개하고, 내일의 의욕을 다시 새롭게 가질 것입니다. 우리는 문제가 생길 때 나의 문제임을 인정하고 나의 부족함을 먼저 탓해야 합니다.
부모들은 뒷방에 쫓아내고 굶기면서 자기 배만 불리는 자녀가 어찌 행복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집은 무관심하고, 내 집만 화려하게 꾸민다면 어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 교회에 깊은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
오늘 본문은 우리의 불행의 이유에 대해 분명히 지적합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라."
당시 백성들의 불행은 성전은 폐허로 둔 채 자기 집을 꾸미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습니까? 혹시 '자기의 집에만 빠른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는 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교회에도 조심스럽게 적용해보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얼마 전 우리 교회가 분당 경계선에서 약 3분 거리에 있는 OOO 지역에 아담한 교회를 건축하기로 작정하고 건축위원회를 구성한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중략) 분당 사랑의 교회 건축과 관련한 구체적 내용은 생략합니다(웹지기)
저는 교회건축에 대해 저의 인생철학과 깊이 관련된 한 가지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이란 절대 성도들에게 건축헌금을 강요하지 않고 건축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까지 살면서 어느 누구에게도 마지못한 돈을 받아가며 살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도 혼자 그렇게 공부했고, 결혼도 그렇게 했고, 교회개척도 그렇게 했습니다. 한번도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항상 필요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건축에 제가 진정 원하는 것은 그저 기쁘게 동참만 해달라는 것입니다. 저는 절대로 물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여러분들의 마음과 격려만이 필요합니다. 건축헌금 안해도 좋습니다. 사실 등록하지 얼마 되지 않아 건축헌금 하기가 힘듭니다. 아마 저도 평신도였다면 저도 건축헌금을 안했을 것입니다. 헌신에는 때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이번에 헌신하는 분이 있고, 다음 번에는 다음 번에 헌신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건축에 헌신하는 분이 이번 건축에 헌신을 유보하는 분보다 더 신앙이 높다고 속단할 수도 없고, 더 교회를 사랑한다고 속단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보십니다. 건축에의 헌신은 신앙 수준을 가름하는 푯대가 아닙니다. 그런 점을 저는 잘 알기 때문에 건축헌금 안하는 분에 대해 절대 실망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건축헌금을 하지 못했다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새로 건축한 성전에 같이 입성하는 것까지 안하려고 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 얘기를 하면서 돈 얘기는 쩨쩨합니다. 더 이상 돈 얘기는 하지 마십시오. 그런 얘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저는 정말 깨끗하게 건축을 포기할 것입니다. 돈이 우리의 마음을 위축시키고, 우리의 눈치를 살피게 하는 삶은 거부해야 합니다.
그런 돈 얘기는 치사합니다. 돈 얘기는 선교와 구제를 하자는 얘기만 하면 족합니다.
"내가 돈이 필요해!"하는 얘기는 수치지만 "남을 돕자!"는 얘기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이번 성전 건축과 관련해서 정말 원하는 단 한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기에 계신 모든 분들이 새로운 성전으로 다같이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우리 분당 사랑의 교회가 OOO에 가면 큰 은혜의 새 시대가 열릴 것으로 믿습니다.

< 선교와 구제에 더욱 힘을 쓰십시오 >
그런데 오늘날 건축과 관련한 문제점으로 우리가 가장 많이 듣는 소리는 무엇입니까? 교회들마다 선교와 구제는 하지 않고 너무 건축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는 말입니다.
그런 소리는 들어야 마땅합니다. 우리 교인들은 그런 말 듣는 교인이 되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이번에 건축과정에서 여러분들은 이전보다 선교와 구제에 더욱 힘쓰십시오.
그러면 우리 교회는 이번 건축에 그런 말을 듣지 않을 수 있는 당위성이 있을까요? 저는 상당한 당위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 교회의 상황에 비슷하게 맞추어 다음과 같은 예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분이 10평 남짓한 오피스텔에 세 들어 살고 있었습니다. 월세가 190만원입니다. 벌써 세를 낸지 3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항상 그 돈이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물질의 은혜를 주셔서 월세를 지불하고도 매월 150만원을 저축합니다. 그래서 8천 만원 저축했고 누가 그냥 맡긴 돈까지 합쳐 1억 5천 만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피스텔이 작고 월세가 많아 고민하다가 자기 아파트 하나 마련하기로 작정하고 적절한 아파트를 물색하는데 맘에 드는 지역에 32평 아파트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값이 3억 정도여서 그 아파트를 사려고 하니까 1억 5천 만원이 더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누구에게도 빌리지 않고 그 아파트를 담보로 그 돈을 대출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대출이자가 85만원 정도인데 관리비까지 총 한 달에 110만원이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계산하니 10평의 오피스텔에 살 때보다 한 달 지출이 훨씬 절약되었습니다. 현재의 수입을 가지고도 5년 정도 열심히 적금을 부으면 다 상환할 수 있을 것 같고, 가족 중 누군가 헌신하면 그 상환 기간을 훨씬 단축시킬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런 상황에 있다면 여러분들은 자기 아파트를 마련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월세로 계속 사시겠습니까? 아마 대부분이 아파트를 사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어느 것이 진리는 아닙니다. 자기 좋은 대로 결정하면 됩니다. 아파트를 사서 내 집 마련을 해도 되고, 본인이 편하다면 그냥 월세 살아도 됩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내 집 마련이 선교와 구제를 외면한 사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달 지출을 절약하고,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려는 아주 소박한 꿈입니다.
현재 우리 교회가 자체 성전을 가지려는 모습이 꼭 이런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번 건축은 소박한 내 집 마련의 꿈이지 결코 사치가 아닙니다. 즉 선교와 구제는 제쳐놓고 그냥 교회 건축에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점을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서 이번 기회에 더욱 선교와 구제에 힘써보십시오. 이제 3월 12일 대만의 황수 선교사님이 갑상선 암 수술 후, 잠깐 한국을 방문합니다.
우리 교회도 한번 모실 계획인데 그때 최선을 다해서 선교사님을 돕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와 요삼일육선교회가 우리 힘에 과할 정도로 선교하는 것 알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물질로 선교하는 곳이 몽고의 김재호선교사를 비롯해 5곳이나 됩니다. 작년 백혈병에 걸린 이은경 집사를 돕는데 우리 교회 예산의 10분의 1을 썼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선교와 구제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면 건축은 훨씬 쉬웠을 것입니다. 그래도 선교와 구제는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교회건축 이상으로 신경을 써야 합니다. 어려운 선교지에 계신 선교사님을 기도와 물질로 후원하는 것은 기본 아니겠습니까? 그러다가 병까지 얻었다면 우리가 그 병의 치료를 위한 책임도 져야 하지 않습니까?
한 회사원이 회사를 위해 일하다가 병을 얻으면 회사는 그의 치료비를 다 담당하듯이 하나님을 위해 선교지에서 일하다가 병을 얻은 선교사님의 치료비 문제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져야 합니까? 결국 그 소식을 전해들은 저와 여러분의 몫이 아니겠습니까? 이번 황수 선교사님이 우리 교회에 오시면 최상의 위로로 그분을 감격시켜 보십시오.
그런 기도와 격려와 후원이 있다면 선교사님은 반드시 갑상선 암을 극복할 것입니다.

< 성전 건축의 더욱 깊은 의미 >
성전건축은 사실상 참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 8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성전 건축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꼭 추가해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전 건축의 영적인 의미입니다. 성전건축은 꼭 우리 교회의 성전을 새롭게 짓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보다 중요한 성전건축은 건물의 건축보다 바람직한 교회상의 건축이고,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의 신앙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점과 기복주의가 확산되고 있고, 교회에도 침투하고 있습니다. 약 1년 반 전에 이사대란이 있었던 날을 기억하십니까? 2000년 10월 10일입니다. 이 날은 동그라미가 다섯 개 있는 날로 천 년 만에 한 번 밖에 안 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날 이사가야 복을 받는다고 해서 일 년 전에 이사 예약이 다 끝났습니다. 그때 수십 만 가정이 이사를 가고 이사 갈 필요가 없는 집도 일부러 이사 갔습니다. 그런데 복 받는 날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선진국은 다 거지가 되었어야 합니다. 우리는 묘지를 잘 써야 복이 있는 줄 아는데 선진국은 묘지가 거의 공동묘지입니다. 개인 묘지는 거의 구경을 하기 힘듭니다. 그래도 그들은 얼마나 잘 살고 있습니까? 우리 나라에서는 좋은 산을 보면 좌청룡 우백호 명칭을 붙이면서 명당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명당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을 잘 믿다가 어디든지 잠들면 명당일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름을 잘 지어야 복을 받는다고 하지만 이름과 복은 아무 관계없습니다.
몇 백 만원 들여서 이름 짓기보다, 그 돈을 좋은 일에 써야 진짜 복을 받을 것입니다. 결혼 날짜와 복은 아무 관계없습니다. 또한 이사 날짜도 복과 아무 관계없습니다.
축복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복 주시면 우리는 복 받을 것입니다. 날짜나 묘지 같은 것에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우리는 기복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보다 신경 써야 할 것은 하나님 사랑과 교회사랑, 그리고 이해와 용서입니다. 그처럼 마음의 신앙의 전을 잘 건축할 때 우리들의 삶이 더욱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번 성전 건축이 영적 무관심과 나태에서 벗어나는 좋은 계기가 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은혜를 예비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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