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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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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영선 목사 |
참고 : | 사도행전 001 1988.01.03 |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 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사도행전 1:1-3
사도행전 1:1-3까지 보시면 사도행전이 어떤 목적과 어떤 목표로 쓰여졌는가에 대한 중요한 힌트가 나옵니다. 사도행전은 근래에 와서 특별한 관심을 갖고 읽히게 된 성경 중의 하나이며 사도행전 속에 있었던 사건들을 다시금 재현하자고 하는 운동이 교회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하는 것이 요즘 교회들의 큰 흐름이 아닌가 싶습니다.그러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이 무엇이냐 할 때 그때 같은 순수한 신앙과 열정과 그리고 참다운 하나님의 사람으로의 승리를 다시 한 번 구가하자 하는 것이 그 중요한 초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데에는 사도행전 속에 있었던 내용들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식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도행전을 논하라고 할 때 여러분들은 사도행전 속에 나타난 몇가지 사건들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한 번 설교에 삼천명이 회개했다든가, 성령강림으로 모든 신자들이 방언을 하며 기쁨 속에 신앙생활을 했다든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속인 죄로 베드로의 말 한 마디에 죽었다든가, 고넬료 집안의 일이라든가 그 여러 가지 일들을 알고 있습니다. 또 빌립 집사의 사건, 스데반의 일, 드디어 사울의 등장, 사울의 회심, 또 사도 바울이 말씀을 전파하는 동안에 일으킨 여러 가지 기적들, 또 그가 당한 고난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면서 가장 조심해야 되는 것은 이 기록들이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사람들이 행한 기적들, 승리로운 업적들을 기록한 책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1:1에 의하면 이 글을 쓴 사람이 누가복음도 기록한 사람이라고 합니다.“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에 가면 전에 쓴 글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1절부터 4절까지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으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 동일인이 썼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글을 쓴 시각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처음에 쓴 것은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그 후의 일입니다.
“해 받으신 후에”, 여기에서 해는 십자가 사건을 말합니다.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1:3)
그래서 지금 주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끝이 아니고 그것은 어떤 큰 일의 한 과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아직도 남겨 두신 일이 있기에 그 일을 완성하기 위하여 사도들에게 명하셨습니다. 또 사도들에게 그 일을 확신 속에서 하게 하기 위하여, 즉 그의 부활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을 더 확실히 더 많이 분명하게 부탁을 했노라고 여기 서문에 쓰고 있고, 그 일이 어떻게 진전되어 갔는가 하는 것이 나머지 사도행전의 모든 기록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행전 서두의 말씀으로 우리 신앙의 아주 중요한 부분 하나를 조금 수정해야 됩니다. 많은 신자들이 기독교 신앙을 정적인 신앙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정적인 신앙이라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제가 말을 만들었습니다. 동적인 신앙과 비교하기 위해서 입니다. 정적인 신앙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이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십자가로 구원을 얻었으니 주께 무엇이든지 기도를 하고 요구를 하면 복을 받으며 문제 해결을 받으며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신앙의 스타일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신앙이 틀린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지만 그것이 아니라 신앙의 한 부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나라 신자들으니이런 식의 신앙 외의 신앙이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것이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신앙에 관한 중요한 내용들을 설명해 나가는 시각이 어떤 시각이냐 하면 ‘내가 이제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나의 모든 필요와 위기와 곤란에서 하나님께 도움을청하면 응답을 받는 자 되었다’라는 식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며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었으며 우리를 사랑하시며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일을 하고 계시는데, 그 일의 궁극적인 목적 중의 하나가 우리를 죄에서 꺼내서 영원한 복을 받게 하시는 것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 일을 완성해 나가는 일에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고 있다는 사상입니다.
말이 좀 어렵지요. 두 신앙이 전혀 다릅니다. 물론 둘 다 하나님을 인정하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공통된 신앙의 뿌리를 가집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전혀 달라지는 것이 됩니다. 정적인 신앙을 가지면 내가 필요로 하는 것과 내가 요구하는 목표가 있고 그 일에 하나님이 도우시는 이로 등장하게 되는 위험성이 굉장히 많아집니다.
그에 반해 동적인 신앙은 하나님의 뜻이 있으며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이며 사랑의 대상인 것과 함께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계획 속에 우리가 동역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목표와 방법과 필요가 내 필요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결정이 되고 거기에 맞는 사람으로의 나의 변화라는 것이 신앙의 중요한 싸움거리가 됩니다.
정적인 신앙을 가지면 내 필요가 먼저 있고 내 욕심이 앞서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어떻게 아첨을 떨어야 하느냐가 신앙의 갈등으로 등장합니다. 우리는 사실 이 정적인 신앙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거의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번 대학입시에 실패한 분들 당장 무슨 생각이 듭니까? 일단 그 생각부터 나지 않습니까? 제가 무얼해야 붙여 주시겠습니까! 무엇이든 하겠으니 2차에라도 붙여 주십시오. 제가 언제 십일조 헌금 떼먹었습니까. 뭘 잘못했습니까?“
내 필요가 있고 그 필요를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하나님께 아첨을 떨어야 되느냐가 신앙의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우리 마음 속에 차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도행전을 들어 가면서 분명하게 분리해 내야 되는 내용인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이 기록을 보면서 놀라는 것은 이것입니다. 여기 3절을 다시 보십시오. 해 받으심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부활하심을 증거하시는데, 그러니까 부활하셨다는 것을 무엇의 근거로 삼으시며 무엇에 대한 증거로 삼느냐 하면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기 위해서 동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잘 보십시오. 우리 신앙은 이렇게 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오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여 이제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고 모든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거기거 끝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마저도 앞으로 있을 일의 증거로 동원하고 있다고 합니다.
주님의 죽으심과 십자가의 부활이 결국 이제 도래할, 하나님이 이루시고야 말 영원한 목적, 궁극적인 목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중요한 부분일지언정 그것이 다라고는 이야기 안합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은 우리 구원에 대해서는 완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죄 가운데서 꺼내 놓는 것이 하나님 계획의 전부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직 남아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의 부활이 있으며 영원한 나라가 우리를 위하여 준비되어야 할 것이며 거기서 그리스도와 우리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살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혼자서 다 하시지 않으시고 이제 예수 십자가의 구속으로 구원해 낸 우리들과 함께 이루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올해 88 올림픽이 있는데 금메달이 240개 정도나 된답니다. 우리나라가 239개 정도 따고 나머지만 외국에 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또 TV보다는 직접 가서 보면 더 좋고 선수로 뛰면 얼마나 좋으며 선물 주는 사람으로도 족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면 그 나라는 분명히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 눈물을 씻기시고 고통이 없으며 다시는 싸움이나 해하는 것이나 사망이 없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그 곳에서 살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만드십니다. 그 일을 하나님 혼자 만드셔서 우리를 그 곳에 오게 하여도 고마운데 그 일 만드는 일에 우리를 불러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는 천지를 6일 동안 말씀으로 만드신 분입니다. 빛이 있으라 했더니 빛이 있었던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 분이 그 나라를 우리와 함께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아시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가져야 하는 신앙 중의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모든 일을 하셨다. 이제는 그 분 마음에 들도록 하라’는 정도가 아니라 더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지금 완성하고 계시며 그 나라에 우리를 부르신 것같이 또 더 많은 사람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 일을 옛날의 “빛이 있으라”와 같이 ‘내 자녀들아 다 모여라’라고 하지 않고 우리가 가서 전도해서 불러오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우리 피를 흘리며 우리 무릎을 꿇어 기도하게 함으로써 그 나라를 만들어 가십니다.
우리는 물론 실력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초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축구도 못하는 우리를 축구팀에 넣어 주시고 후보도 아닌 정선수로 넣어 주는 것입니다. 축구장에서 결선을 하는데 관중만 의식해서 딴 데 보고 있다가 어쩌다 수비가 걷어찬 공이 내 머리에 맞아 골인하면 하루 아침에 스타 플레이어가 됩니다. 하나님은 딴 데 보고 있다가 넣게 된 공을 보고 넌 어쩌면 이렇게 잘 하느냐고 하시며 상급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 성경의 한 시각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성경을 잘 보시면 이런 느낌을 받게 됩니다. 성경은 왜 이토록 많은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다? 66권이나 되는 성경책 중에 구약은 모두가 역사서입니다. 신약도 따지고 보면, 복음서가 다 예수님의 생애를 쓴 것이기 때문에 전기이면서도 일종의 역사서이고, 그리고 사도행전이 역사서이고 요한계시록이 미래에 관한 역사서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하면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목표를 가지고 계획을 가지고 일을 추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베드로가 그렇게 멋있게 등장을 하지만 그 다음에 어떻게 됐는지 그의 끝이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하루에 삼천 명을 회개시키고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도 일으키고 고넬료 집에 가서 성령의 임함을 보고 안수하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고함질러서 죽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는 없어지고 사도 바울이 등장합니다. 사도 바울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어떻게 회개시키고 논쟁을 벌이며 잠자다 떨어져 죽은 청년을 살려 놓고 그는 뱀에 물렸는데도 살고 또 잡혀가고 합니다. 그러다가 사도행전 28:30을 보면 끝이 시시하게 끝납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 주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이것이 처음에 엄청나게 시작했던 사도행전의 끝입니다.
성령강림으로 모두가 펄펄뛰고 회개하고 돌이키고 방언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하다가 끝에가서 우리 식으로 보자면 용두사미가 된 것 같습니다. 왜요? 사도행전에서 그리려고 하는 것이 베드로에 관한 것도 아니고 바울에 관한 이야기도, 스데반에 관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어떤 거대한 작품의 일부분을 조명하는 중에 어느 한 부분을 만들어 가는 과저을 보이면서 그 일에 쓰임 받은 사람들을 그 장면에 비춘 것에 불과합니다. 그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를 추적하고 바울을 추적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그 나라를 만드시며 그 나라에 우리를 복된 시민으로 부르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며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부활시키며, 그래서 불러들인 그의 백성과 함께 그 나라를 확장하사, 또 부르신 자들로 하나님 일에 동참케 하여 더 넓고 더 크고 완전하게 더 아름답게 하나님 나라를 키워가고 있느냐를 보이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한 과정이 크로즈 업 될 때마다 거기에 쓰인 사람들도 같이 등장을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다른 과정으로 넘어갈 때는 슬며시 사라지고 다른 사람이 다시 슬며시 나타나서 사건을 만들면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사도행전 3만 몇 장쯤 되는 셈입니다.
이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제부터 내가 하나님께 구하는 모든 것을 받으리라, 또 그가 기뻐하는 것을 하리라는 정적인 차원에서가 아닌 동적인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하고 계시는 일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남은 생애 속에서 그의 나라와 그의 영광을 위하여 나를 어떻게 쓰기를 원하시는가를 봐야 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취하고 싶은 목표와 계획이 있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도와 주셔야 하는가가 아니라 내 남은 생애를 통해서 그의 나라와 그의 영광, 뜻을 위하여 어떻게 쓰임 받을 것인가에 대해 늘 돌이켜 볼 줄 알아야 됩니다.
사도행전에 들어있는 사도들의 신앙을 추적해 보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아주 중요한 두 가지 공통적인 핵심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목표를 두고 역사를 진전시켜 가시며 일을 추진해 나가고 있다는 역사적 시각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디모데 후서 4:1,2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예수 앞과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역사적인 사실에 관한 믿음입니다. 세상의 보이는 역사는 세상 나라의 왕가들의 부침과 정권을 가진 자들의 역사를 그리고 있고 나라와 나라의 역사인 것 같지만, 실제로 사도들이 깨우친 것은 세상의 보이는 역사가 전부가 아니라 이 역사 속에 하나님께서 신령한 역사를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 역사를 면면히 이엉오시며 확장하시며 언제나 세상 역사를 주도하고 끝내며 영원한 거룩한 역사로만 종결지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고 그 역사에 자신의 인생을투영하고 함께 몰입하고 둘을 접붙여 버린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신앙인들의 끝임없는 싸움입니다. 내가 가진 목표와 내가 가진 가치와 내 욕심에 의하여 하나님을 동원할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음을 알고 거기에 나를 맞출 것이냐 하는 싸움이 신앙 갈등 속에서는 대표적인 갈등의 내용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이 사실, 즉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염두에 두고 사는 사상인 것입니다. 그의 나라가 왔으며 그의 나라가 드디어 완성될 것이며 지금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관과 우주관을 완전히 바꾸어 놓아야 되며 우리의 오늘 하루의 삶의 방향과 방법과 결정에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사도들은 깨우치고 있습니다.
그렇게 따져보면 오늘 여러분의 자녀가 실패했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실패라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제가 입증합니다. 삼수를 했어도 저는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부 잘하고 좋은 학교 가고 좋은 직장에 가니까 도무지 하나님이 빨리 오시는 것을 기뻐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두 번째로 사도들이 가졌던 중요한 사상 중의 하나는, 그들이 이제 영원한 나라의 시민이요 자녀요 복을 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그 나라가 도래한 다음에 황금 보석으로 꾸민 집에서 죽은 다음에 받은 것으로만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나라를 이루어가고 계시니까 거기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 큰 축복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서 우리가 놓치지 않고 꼭 봐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운 황금보석 집이 아니고 죽음도 없고 슬픔도 해함도 없는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짓고 잇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자리에 부름받아 벽돌 나르고 삽질하고 모래를 나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기쁨이 됩니다. 그 기쁨을 아십니까?
그 기쁨에 대한 설명을 이렇게 합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 지금 바울이 직분 맡은 것을 왜 기뻐하느냐 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신자들이 겪는 제일 처음 신앙상의 오해는 이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부인만 교회 나가다가 남편에게 교회에 가자고 해서 한 두 번 나오다가 완전히 나오기를 결정하면 ‘언제 난 장로 되는 거야?’라고 묻는 것입니다. 장로나 집사라는 직분 맡는 것이 다른 사람에 비해 내가 얼마나 우월한가 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우리에게는 뿌리깊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너희보다 낫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라 함은 내가 능력이 있기 때문에 사도가 되었다고 하는 뜻이 아니라 나는 능력이 없는데 하나님이 능력이 있는 자로 대접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것을 기뻐함은 나르 대접해줘서가 아닙니다. 남보다 낫다고 인정해 줘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에 붙여줬다는 것 때문입니다. 어느 만큼이냐!
사도행전 5장에 가면 실제로 이런 식의 설명이 나옵니다.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을 유대인들이 싫어해서 핍박을 합니다. 매를 맞는 장면입니다.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5:40,41). 하나님이 이 일에 붙여 주는 것으로 해서 매를 맞는 것도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기록은 그들이 기도했더니 어떻게 병자가 낫느냐, 그들이 신앙을 따라 싸웠더니 어떤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이 아니며 한 사람의 위대한 신앙의 업적을 기록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볼 때 이 사도들과 베드로, 스데반, 바울은 하나님 일에 영웅들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하나님 일에 붙여 줬다는 것을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완성되어질 나라, 꼭 생겨질 나라에 우리를 붙여 줬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에 소속하는 것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나라를 완성하는 일에 붙여준 것입니다. 그것을 기뻐했습니다. 시각이 달라져야 합니다. 재가 어떻게 남과 다른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롭고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그가 이루어내실 이 나라는 얼마나 확실한 나라인가, 그런데 우리를 위하여 나라를 만드실 뿐만 아니라 그 나라를 만드는 일에 우리를 붙여 줬다는 것이 기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인생관은 이렇게 바뀝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0-24)
지금 사도 바울은 죽고 사는 문제에 전혀 개인적인 차원에서 욕심이 없습니다. 개인적인 욕심을 말하라면 하늘 나라에 빨리 가고 싶다는 소원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이 자신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기 때문에 죽는 것이 주께 유익이면 죽을 것이고 사는 것이 주께 유익이라면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을 들어보니 앞을 못가리는 양이 너무 많아서 사는 것이 주께 유익이므로 산다고 합니다.
인생관이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이것의 원형인 로마서 14장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7,8절). 이것이 사도행전에서 우리가 봐야 하는 사도들의 행적, 그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근거, 신앙, 목표, 원리의 전부입니다. 사도행전의 원래 기록 목적이 저들이 주를 위하여 얼마나 큰 일을 했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하늘 나라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거기에 우리를 시민으로 자녀로 부르셨을 뿐만 아니라 그 복된 나라의 건설에 우리를 일꾼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능력이 많아서, 우리가 없으면 하나님이 그 일을 못하시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대접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를 하나님 자신과 동등히 대접해 주고 있습니다. 놀라운 대접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대접에서 가장 큰 것은 물질의 대접이 아니라 마음의 교환이고 마음의 교환에서 가장 큰 것은 동등한 대접을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대접하신다는 것과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는 것을 사도들이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높고 전지전능하심과 그가 준비하시는 그 엄청난 영광과 계획을 보고 놀라는 동시에 그 일에 부름받은 은혜에 대한 감격이 그들로 하여금 죽음과 고난을 감당하게 했으며, 하나님 앞에 부름받고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는 이 기쁨에서 그 무엇도 저들을 실족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 이 사도행전 기록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일에는 상관없이 우리의 일에 매달려 있어 늘 울고불고 하며 그런 문제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까?
앞으로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깨우치기로 합시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결단코 베드로나 스데반이나 바울을 높이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방불한 사람들이 그렇게 멋있게 변화되어졌다는 증거이기에 오늘 우리에게도 가능한 얘기라는 것을 믿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름받은 이 축복들이, 특권들이 이런 자리에까지 성숙되어 열매 맺기를 기대하며 이 말씀을 대하기로 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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