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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행2:22-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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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영선 목사 |
참고 : | 사도행전 018 / 1988.05.08 |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제자들이 방언을 해서 세계 각지에서 모여온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사도행전 2:12을 보시면 이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 노랄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그래서 이제 베드로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가르르 설명하기 시작한 것이 사도행전에 나타난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입니다.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행 2:14)
그러면서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설명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설교와 오늘날 일반적으로 우리가 기독교를 소개하는 것과 조금 차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대로 오면 올수록 옛날과 비교했을 때 교육과 과학 문명에 많은 진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물을, 사실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려는 풍토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 관한 설명도 이렇게 논쟁을 벌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독교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설명을 해서 상대방을 납득시키려는 그 일이 참으로 많아져 왔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그런 시도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한번쯤 생각해 보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의 설교에서는 이런 대목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인격적으로 얼마나 괜찮은 분이었는가 하는 설명도 없습니다. 그 분이 우리를 얼마나 지극히 사랑하셨는가 하는 애기도 없습니다. 감정적이거나 논리적인 어떤 제시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과같이 예수를 믿는 그 마음이 어떻게 뜨겁게 되고 그 마음에서 사이다가 튀게 하는 그런 방법이 없습니다.
베드로의 설교의 두 기둥은 이것입니다. 하나는 에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과 너희가 못박아 죽인 에수를 하나님은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두가지를 살펴보고 우리 신앙의 두 기둥으로 삼아야 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다윅과 견주면서 이야기해 나갑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다윗이 이미 알고 있었다. 다윗은 죽었으나 예수님은 죽지 않았고 다윗은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우리가 그 일에 증인이다.’ 이것이 베드로의 설교에 가장 중요한 기둥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것이 왜 그토록 강조되어야 되느냐 하는 것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 사건을 좀더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어디로 연결시키는가를 주의 깊에 추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1-11절)
신앙의 최고 핵심을 ‘너희가 내 말 가운데 거하라. 그것을 굳게 지켜라 그러면 구원을 얻는다.’ 그것은 3절에 있는 바와같이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이것입니다.
그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이것이 무엇과 연결되기 때문이냐 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즈억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2 - 19)
우리가 믿는 에수님이 얼마나 센 분인가, 그는 모르는 것 없이 다 아라아서 귀신같이 맞추신다라고 누가 그렇게 설교를 합니다. 뭐든지 알아서 귀신같이 맞춘다고 하는데 그러면 그렇게 말하느 사람과 예수님과 누가 더 높은 것입니까. 지금 에수님을 높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높여서 그런 높은 분을 섬기고 있는 우리를 덩달아서 높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존경하느냐 할 때 베에토벤을 존경한다고 하면 갑자기 음악적으로 베에토벤처럼 센 것 같고 홍난파씨를 존경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베에토벤을 존경하는 사람보다 낮아지는 것 같은 착각을 하는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높여서 예수를 믿는 것이 다른 종교를 믿는 것보다 세다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그것이 우리에게 적용될 새로운 질서와 세계, 새로운 사실에 관한 시작을 증명하는 증거로 등장하기에 그것을 높이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사신 것이 곧 우리도 다시 산다는 것에 대한 증거요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그를 부활시키셨으니 우리도 죽음에서 부활할 것이요, 죽음으로 끝나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새 나라 새 땅 새 하늘이 있다는 새로운 우주관과 인생관을 가지는 새로운 가치 체계를 아는 자의 깨우침, 그 사실을 소유하고 있는 자의 자신, 확신, 그 모든 계획과 모든 일에 대한 어떤 근거로서 이것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에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근거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도 말씀드린 바와같이 베드로의 설교에 있어서 왜 이것이 강조되어야 하느냐 하면 이것만큼 사람의 생각과 생활을 바꿔 놓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결국 우리 마음이 뜨거워서 우리가 어떻게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뜨거움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여기에 무언가 영원이라는 세계가 더 있으며, 이 세상의 가치가 저누가 아니라 거룩하고 영적인 차원에서의 가치가 더 중요한 것을 깨우치는 방법으로 오는 것이지 뜨거움이 새로움의 내용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도 바울의 사건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을 가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빛을 보고 음성을 들은 것이 그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내가 핍박했던 예수가, 하나님을 반대한 참람죄로 저주받아 죽어 무덤 속에 있으리라고 생각한 이가 살았는 것을 본 것입니다. 죽은 것을 내 눈으로 봤는데 살아있다는 것은 누가 사리리신 것인가, 하나님이 살리셧으며 그가 내 길을 막고 이 말씀을 합니다. 초자연적인 간섭을 하시는 것으로 보아 이 분이 맞다면 내가 틀리는 것이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그가 갖고 있던 가치 체계가 뒤집어지는 거스로 만나는 것이지 빛을 봤다. 가슴이 뜨거워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하는 것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것이 오늘날 신자의 내용이 되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곤란한 문제입니다. 신앙의 내용은 얼마나 뜨거웠으냐 얼마나 놀라웠느냐 감격했느냐 행복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그를 감격으로 몰고갔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떤 깨우침, 어떤 새로운 시각을 얻은 것이 여태까지 짓눌리면서 절망 가운데 있더 ㄴ그를 새로운 소망 가운데로 인도했느냐 하는 것이지 ‘나는 기뻐요, 정말 기뻐요’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린이가 하는 노래입니다. 우리 엄마가 돈도 주고 짬뽕에, 짜장에 풍선도 사 줬어요 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의 신앙생활은 속에서 무엇이 올라오기를 기다려서는 아무것도 안됩니다. 늘 예를 들다시피 직장생활을 하는 사회인이 되면 회사 가고 싶어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회사란 일해야 되는 곳이니까 가기 싫은 곳입니다. 그러나 몸이 조금 불편하다고 해서 회사에 안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러면 당장 회사에서 전화가 오기를 ‘매일 쉬세요’하면 안되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가고 싶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안 가면 안되는 곳으로 너무나 현실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갑니다. 신앙이란 그런 근거가 있어야 됩니다. 이것은 너무나 확실한 사실이기 때문에 그 길을 갈 수밖에 없어야지 마음이 뜨거워지기 전에는 못 갑니다라는 식이니 항상 매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군에 가니까 처음에 소대장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제트기는 왜 ?빠르냐’해서 출력이 어떻고 하며 대답을 하니까 시끄럽다며 제트기는 꽁무니에서 불이 나니까 빠르다며 ‘귀관들도 곧 빨라질 것이다’하며 패기 시작하니 꽁무니에 불이 붙어서 아주 빨라지더군요. 이와같이 우리의 신앙은 전부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뺨을 때려서 뺨이 얼얼해야 한 발자국씩 가고 가슴을 때려서 뜨거워져야 가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사실에 인식해서 움직여야 됩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우리가 보고 만지는 것, 세상에서 힘쓰는 가치가 영원한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가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에 갑니다. 군에 가서 3년만 채우면 됩니다. 그래서 군인들은 일에 대한 생각보다 시간 흐르기만 원합니다. 거기서 해놓는 것은 다 헛것입니다. 군에서는 먼저 입대한 사람의 계급이 위니까 나이 상관없이 서열이 정해집니다. 나이 어린 병장이 지금 입대한 일병에게 자기보다 나이는 많아도 라면을 끓여오라고 하며, 라면도 국물이 많다 적다 우동 같다고 하고 집이 어디냐고 해서 서울이라면 서울이 다 네 집이냐고 시비하고, 서울 동대문고 신설동... 하며 주소를 외우면 내가 네 집 찾아갈 것도 아닌데 주소는 왜 대냐며 야단입니다.
군에서 농담으로 빈정거리며 욕을 하는 것이 ‘말뚝 박아라’입니다. 모두가 빨리 제대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시간이 흘러서 빨리 나가기를 바랍니다. 군대에서 쌓아 놓는 것은 내 것이 아니고 사회에 나가서 해야 할 일이 내 것입니다. 그래서 군에 있는 동안에도 짬짬이 영어도 공부하며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합니다. 그것이 신자가 이 세상을 사는 모습과 방불합니다. 그 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신자가 아닙니다.
여기에 대해 신자들은 핑계대기를, 뜨거움을 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을 준비한다는 것은 누에 안 보이는 일이기 때문에 알고는 있지만 실감이 안 나고 세상 사는 것이 너무 재미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핑계를 대면서 사실은 놀고 잇는 것입니다. 회개합시다.
베드로 설교의 두 번째 기둥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가 주와 그리스도가 됩니다. 그런데 이 표현을 할 때마다 성경은 ‘너희가 못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표현합니다. 사도행전 4장으로 가면 이런 설명이 나옵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11, 12절)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 구원의 유일한 문 되심.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 베드로 설교의 또 하나의 기둥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몹시 중요합니다. 기독교를 애기할 때마다 일반인들과 가장 크ㅔ 충돌하는 것은 왜 너희만 옳으냐 하는 문제입니다. 기독교의 유일성과 배타성이 문제가 됩니다.
사실 너희도 옳고 우리도 옳지만 우리가 더 세다 하면 좋겠는데 우리만 옳다는 것이 꺼려지는 신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 하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종교상의 옳다 그르다는, 절대성을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할 때 옳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종교란 무엇이냐’고 자기가 설정해 놓고 자기가 옳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문제를 자기가 내고 자기가 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다 정답입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우리나라의 인사 문제를 인척관계나 무슨 혈연관계로 인해 정당하게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렇게 우스개 소리로 꼬집은 적이 있습니다. 시험을 봐서 두사람이 남았습니다. 둘 중에 한 사람을 뽑아야 되는데 한 사람은 조카이고 한 사람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더 실력이 있습니다. 한사람을 뽑기 위해 마지막으로 구두 시험을 봅니다. 묻기를 중국집과 약국 사이에는 뭐가 있습니까. 한 사람이 모르겠다고 대답하니 조카는 금방, 세탁소라고 대답을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항의를 합니다. 그대 우리가 사는 동네에는 중국집과 약국 사이에 세탁소가 있다고 대답합니다. 답은 맞지만 객관성이 없습니다.
자기네가 만든 문제에 자기네 식의 답입니다. 즉 종교를 논하자면 절대 진리에 관한 싸움으로 종교를 논하는 것이냐, 아니면 인간이 말하는 윤리와 도덕으로써 종교를 말하는 것이냐 하는 선을 일단 긋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윤리와 도덕을 종교라고 합니다. 그들이 생각할 때 나는 이것을 가치있게 생각한다. 충이다 효다 또 예의다 하며 그런것들을 최고의 가치라고 해놓고 그 가치에 맞게 종교를 보니까 불교가 괜찮고 이슬람교가 괜찮더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입학 시험에서 합격자 불합격자를 가리 때 수험생이 얼마나 최선을 다했느냐의 여부로 정하지 않습니다. 오직 정답이냐 아니냐로 따집니다. 연필이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 오른손으로 썼느냐 발로 썼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정답을 썼느냐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정답은 본인이 얼마나 정답인가를 확신했느냐가 아니라 문제를 낸 사람이 요구한 답을 썼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종교는 그런 문제를 낼 분이 있느냐 없느냐로 돌아가야 됩니다. 그런데 종교 이야기를 할 때 모두가 자기가 문제를 내고 있으니 누가 신입니까? 각자가 신이니까 정답도 인간 수 만큼 나옵니다. 그래서 불신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꼭 예수를 믿어야 된다는 것보다 누구나 다 이웃에게 선하고 착하게 살자는 것인데 성경과 예수쟁이들은 이런 방법으로 잘하는 것이고 우리는 안 나가고도 괜찮게 하는데...’ 이것은 이야기가 다른 것입니다. 문제를 내는 사람과 답을 쓰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계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다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라고 하면 그가 문제를 내는 주인인 것입니다. 그를 믿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를 믿는다, 주님이 계신다, 창조주가 계신다라는 것을 모르는 한 문제는 본인이 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싸움거리입니다. 이것을 기독교의 배타성이라고 하는데 정말 이것이 배타성입니까? 그러니까 이런 질문도 나옵니다. 옛날에 기독교가 들어오지 않았을 때의 우리 선조들은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억울합니다. 인정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댔고 세종대왕은 어떻게 됐을까. 안타깝습니다. 확실한 것은 천국에 갔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로 문제가 생깁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똑똑하고 괜찮은 사람인데 그 부모는 일자무식에 아주 가난합니다. 그래서 그는 공부를 해본 적이 없어서 대학을 가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대학 교수들이 모여서 부모가 무식하고 가난해서 아이를 공부 못 시켰으니 특별히 그 아이를 특차로 입학시키자고 합니까. 대학은 소정의 시험을 거쳐서 합격을 해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불쌍하고 안됐어도 합격시키지 않습니다.
시험을 잘못 치르는 사람 중에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실력은 있는데 떨어지는 이유가 시험 중에 어려운 문제가 나올 때 이것은 나중에 해야지 하면서 그 다음 문제를 풀고 답을 한 칸씩 미루지 못하고 번호와 답을 틀리게 씁니다. 다 쓰고 보면 답란이 남습니다. 놀라서 다시 쓰려니 시간이 다 돼서 그 답안지를 그냥 낼 수밖에 없습니다. 할수 없습니다.
이 문제를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시험을 내서 우리가 답을 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시험 문제를 냈고 그 시험을 통과할 방법은 예수를 믿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냐? 석가면 안되냐해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낸 문제의 답은 예수여서 인간이 아무리 따져서 자기 답대로 해도 그 댓가는 천국이 아닙니다. 강제로 믿으라고 할 수도 없으니 자기 뜻대로 할 수밖에요. 우리는 이스람교도들이 아닙니다. 기독교인만 잘났다고 하는 것이라고 해도 우리는 그런 뜻이 아니라 겨우 커트라인에 매달려서 붙으맂라도 떨어지고 붙는 차이가 얼마나 큰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결단코 우리가 얼마나 잘났는가를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결국은 절대적 권위로써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베드로 설교의 두 기둥입니다. 그가 부활하셨다는 새로운 질서, 부활 생명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 영원한 나라를 소망해야 될 자로서의 우리의 확인과 그 길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다는 이 절대 진리에 대한 제시가 신앙의 근거요 유일한 내용이요 기둥이요 모든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말씀이 지금 성령이 오셔서 제자들을 충만케 하여 남들이 보기에 놀랄 만한 외적인 어떤 현상으로 ‘어찌하여 너희가 그렇게 됐느냐’에 대한 답으로써 제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순절 성경강림을, 첫 번째 문제인 부활생명, 죽음이 모든 일의 끝이 아니라 생명이 모든 일의 끝인 세계로, 이제는 우리가 초대를 받았으며 그 세계가 시작되었다라는 것의 증거라고 얘기를 합니다.
로마서 8장을 보시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위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9-11절)
오순절 성령강림은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얼마나 끓게 하고 폭발시켰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훨씬 중요한 근본적인 어떤 증거거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새로운 부활 생명, 부활 세계, 영원한 세계를 향한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같이 우리는 부활할 것이다. 이미 거기에 참여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다.’ 그리고 주의 주 되심에 대한 증거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을 보시면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30-32절)
하나님이 예수를 구주로 높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신 일의 증인입니다. 성령의 오심은 오늘 본문에도 그렇게 등장을 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2, 33)
성령이 누구에 의해서 오셨습니까?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성령이 자의로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만, 그러니까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실 만한 위치에 계신 분입니다.
베드로 설교의 두 기둥은 부활 생명,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세계에 우리가 들어가 있다. 그 일이 시작되었다.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시다. 그가 하나님이시다. 그를 통해서만 그 나라에 간다. 성령강림마저도 이 두 일에 증인으로, 증거자로 우리에게 오셨다. 이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신앙의 두 기둥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고 삽니다. 이 세상을 지나가는 것입니다. 땅에 보물을 쌓지 않고 하늘에 쌓아야 된다. 주께서 기뻐하시는 것으로 나의 기븜을 삼아야 한다. 모든 일에 주를 의지한다. 세상을 의지하지 않는다. 주께 피하며 주께 피하며 주께 의지하면 주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리라. 이것이 우리들의 신앙의 최고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녀를 그렇게 키우시고 여러분의 사회 생활을 그렇게 하시고 여러분의 모든 삶의 목표와 원리를 이 두 원리에 의해서 사셔야 됩니다. 삶이 평온할수록 더 그렇게 사십시오. 하나니미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축복과 사랑과 허락하신 이 복된 약속들을 누리며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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