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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행2:32-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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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영선 목사 |
참고 : | 사도행전 019 / 1988.05.15 |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2-36)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가 오늘 설교의 중심입니다.
베드로 설교의 가장 큰 핵심은 두가지 사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이었고, 그런 의미에서는 설득과 논쟁이 없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문제를 좀 더 추적해서 이 말씀을 파헤쳐 가려고 합니다. ‘사실’이라는 것이 신앙에 어떤 역할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사도들과 신자들을 대표해서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그 신앙의 근거가 ‘사실’이라는 것을 제시하면, 증명이 되면 누구나 믿음을 갖고 회심하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분명히 ‘사실’위에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다’ ‘영원한 나라가 있어 죽고 나면 끝이 아니고 죽음 뒤에 부활 생명이 있고 부활하여 영원히 사는 것과 영원히 형벌받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한 근거이고 기초입니? 사도바울이 얘기하는 것 같이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믿는 것도 다 헛것이고 우리의 증거하는 것도 다 거짓이고 우리가 세상 사람들보다 더 비참할 것이라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한 사람을 회심시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아직도 기독교 신앙을 오해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베드로 설교의 중심 내용이 될 수 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베드로가 그의 설교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증명하는 것이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을 회심시키려는 목적으로 이 설교를 했느냐 하는 질문이 야기되는 것입니다. 물론 결과를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하루에 삼천명이나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너무나 쉽게 몇가지를 엮어 버립니다. 그 베드로가 성령충만하더니 한 번 설교에 삼천명이나 휘어잡았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 같이 고기를 낚던 어부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됐다. 그러나 꼭 그렇게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초대교회는 분명히 믿음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설교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물리적인 증거를 제시하는 데가 없습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회심의 결실을 위하여 물리적인 증거를 제시하는 데가 없습니다. 성경은 사실을 제시해서 회심을 의도하려는 그런 방법을 동원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있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불신자와 만나서 신앙적인 토론을 할 때 기독교 진리의 사실성과 객관성을 증명하려고 논쟁을 벌이다가 서로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이 이익을 본 적이 있습니까? 어떤 유명한 사람이 말한 것 같이 지면 바보되고 이기면 원한만 산다고 합니다. 가급적 논쟁을 피하십시오. 교회에 대해서 뭐라고 하면 식사나 하자고 슬쩍 뒤로 연기하십시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살피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사실과 그 사실이 갖는 내용이 한 사람의 신앙고백이 되는 데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실이라는 것과 그 사실이 갖는 내용이 신앙고백으로 나오는 것 사이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을 인정해도 그 인정하는 사실이 얼마든지 신앙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만일 사실을 제시함으로 한 사람을 신앙적으로 항복시킬 수 있다면 성경은 복음서에서 끝나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역들을 복음서에 기록된 모습대로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 자명해집니다. 그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풍랑이 이는 바다는 잠잠케 하시며 바다 위를 걸으시고, 뭇사람이 보는 앞에서 중풍병자를 고쳐내시고 죽은 자를 살려내시며 눈 먼 소경을 고쳐내십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아무도 회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인간이 누군가를 지적하고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자 그를 붙잡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 회심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예수님 스스로 오셔서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제자들에게 맡기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하는 沽?대해 일차적인 오해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8을 보십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이 이제 여기서 풀릴 것이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늘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가 성령충만을 받자 어떻게 담대해졌는가. 어떻게 능력있어졌으며 많은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됐는가? 그러나 그렇게 따지지 말고 조금 전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것으로 얼마나 많은 영혼을 구하셨는가라고 되물어야 됩니다.
그러면 너희가 권능을 받는다는 것이 사실을 증명하는 일에 어떤 신비로운 묘약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충만을 받음으로 말이암아 우리가 증거하는 일,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을 상대방에게 제시하는 데 어떤 신비로운 작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전 예수님의 공생애 때부터 일어났어야 했습니다. 이렇게만 따져도 이 문제는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것같이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이 성령충만을 받게 됐고 그러자 그들이 하는 모든 일에 만사형통하는 묘책이 되고 신비로운 어떤 능력이 된다는 식의 발상은 곤란하다는 답이 저절로 나옵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설교를 이런 차원에서 다시 한 번 봐야 됩니다. 즉 베드로의 설교의 특징은 회심과 구원을 얻게 하는 일의 결과에 대한 설득은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실에 집중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어떤 면에 집중되어 있느냐 하면 사도행전 전체가 이런 식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5:42에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가르치시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다고 나오는데 그러나 그 앞에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를 쉬지 않았다가 나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붙여서 부릅니다만 예수라는 이름이 그분의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직함, 직책 입니다. 공식 명칭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헬라어고 히브리어로는 메시야라고 합니다. 메시야와 그리스도는 같은 말입니다. 그 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기름부음을 받는 3대 직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왕,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입니다. 기름부음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맡은 종’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메시야는 많습니다. 사무엘, 다윗, 엘리야가 다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말하자면 다 메시야 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메시야라 할 때 예수를 생각하는 것은 정관사를 붙인 ‘그 종’ 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에 나타나는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하나님의 일을 위해 보내진 그 시대의 일꾼들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전 인류의 구원을 맡을 종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부터 예수님 오실 때까지 계속 하나님쎄서 그 사람, 그 종을 보낸다는 예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종은 우리를 구원할 뿐만 아니라 마지막 나팔소리와 함께 재림하셔서 이 세상 역사를 끝내고 새 하늘과 새땅을 여실 것이며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해 낼 것입니다.
그 종은 다른 메시야들과 구분해서 정관사를 붙여 늘 사용합니다. 그래서 다른 메시야는 희미해져서 이제는 메시야 하면 예수로 됐고 신약에서는 붙여서 ‘예수 그리스도’로, ‘예수 그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뜻은 그 분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라는 얘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하신 구원을 드디어 실천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 약속한 종을 보내셨으며 그 종을 보내사 우리 죄를 없이 하시고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해 그를 십자가에 달아 죽이셨으며 우리를 부활 생명에 초대하기 위하여 그를 부활시켰다. 그래서 부활생명이 시작됐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갖고 계셨던 그 계획과 뜻을 실천하여 이루셨다 하는 선포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그랬으니 믿어라’는 말이 아직 등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셨다. 그동안 계속 예언하셨고 약속하셨던 메시야를 보냈다. 우리에게 약속한 구원을 이루셨다는 것에 그의 설교의 초점이 있습니다.
오늘날 이 메시지는 교회에서 상당히 중요한 것인데 이것이 조금 변질되어서 꼭 세일(sale)하는 것 같습니다. ‘이 구원이 사실은 5만원짜리인데 하늘나라 건축사업이 바빠서 금번에 특별히 원가 이하인 2만원에 팔기로 했으니 하나씩 장만해 보시죠.’ 이렇게 됐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응을 구해야 해야 구원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불쌍한 우리들, 죽어가는 우리들, 형벌속에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찾아 오셨고 구원을 이루셨고 은혜와 긍휼과 자비속에 우리를 초대하셨다 드디어 하셨다는 선포입니다. 마치 8?15해방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전쟁에서 이기지 않았고 골방에서 나라에 대한 걱정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드디어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모두 우리나라가 해방됐다며 밖으로 뛰어나왔습니다. 국민들이 믿거나 말거나 해방된 것입니다. 그들이 ‘아! 그렇습니까’ 하며 믿음으로써 해방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해방됐다. 일본이 말했다는 선언이 지금 베드로의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초점인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런 의미에서 전도하느라고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적당히 하세요. ‘당신네만 구원이 있다고?’ 해도 열내서 맞받아 치지 말고 또 그 앞에서 빌빌거리며 떡 사주고 빵 사주며 데리고 오려고 하지 마세요. 안믿겠다면 그냥 놔두십시오. 그런데 ‘인생이 불쌍하니까, 내가 가진 자니까, 나도 구원을 얻었으니까,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하며 한 번 참고 두 번 참으며 ‘사실 그게 아니구요. 이것 안 믿으면 큰일납니다’라고 합니다.
안 믿으면 큰일나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두고보면 압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열심을 부리는 것이지 재라는 것이 아닙니다. 왜 마치 우리가 노력하고 애쓰고 상대방이 반응해야만 천국이 생기고 하나님이 생기는 것 같이 그렇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마치 계를 모집하는 계주 같습니다. 20명을 모아야 하는데 6명밖에 모집을 못 했어요. 그래서 통사정하여 ‘이번에 하면 2번 줄게’ 하는 식으로 하지 마십시오.
베드로의 설교는 지금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반응에 대해서는 전혀 기대가 없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돌을 맞을지도 모르고 회개가 결실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님 쪽에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에는 삼천명의 사람이 회심하고, 동일한 설교인 스데반의 설교에서는 그 결과가 돌로 맞는 것으로 나옵니다. 설교로 상대방이 납득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해방됐다 하는 식으로 ‘구원을 이루셨다. 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지셨다. 이제는 부활 생명에 우리가 초대받았다.’ 여기까지가 베드로 설교의 강조점인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언제나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유명한 성경구절인 요한복은 3:16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 다음이 우리 것입니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개 하려 하심이니라.“ 주시기 않았는데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믿어야 되는 것은 심각한 것이지만 여기서 실패해서는 안되는 문제입니다.
사도들이 맨 처음 기뻐했고 그들이 모든 세상 사람들 앞에 소리 높여 외쳤던 사실은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돌아보셨다 하는 것입니다. 어느 만큼이나 돌아보셨느냐 하면 우리를 구언해 그의 자녀로 삼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찾아오시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 사실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에 찬 집념이 선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종종 우리의 미련함과 게으름과 무지함과 넘어지고 실패하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으로 연결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엉망이죠. 하나님 앞에서 일주일 동안을 하나님이 만족할 만큼 산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가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를 돌아보신 것이 먼저이며 그의 돌아보심과 찾아오심이 우리의 실패와 무능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기에 그러합니다.
이것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이런 차원에서 성령강림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구원 되심을 선포하여 그 사실을 더 확대하거나 힘있게 하거나 날카로워지는 것으로 쓰여진 것 같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왜? 사실을 증명하여 회심을 결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강림은 무슨 필요에 의해서 등장했느냐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를 보면 성령강림의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에게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히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나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2:1-16)
여기에 성령의 사역이 분명히 증거됐습니다. 성령이 오게 된 것은 이 사실을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에 대한 증명이 부족해서 그 말을 받는 사람이 항복을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하여 반대하는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도 싫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히 범인이 아니며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자 훨씬 더 악하게 덤벼들어 십자가에 못박아 이 세상에서 쫓아 버린 것입니다. 인간들이 한 짓입니다. 그 마음을 변화시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는 역할을 성령께서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오심은 그것이 사실을 사실 되게 하는 지혜와 능력과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영의 변화요, 죽은 심령을 깨우치는 일이요, 그 마음을 주님 앞에 열게 하는 것으로서 그의 사역이 맡겨지는 것입니다.
이것마저도 은혜이기에 사도 베드로가 이렇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그를 죽음 가운데서 부활시키셨다. 이것을 우리가 알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까지 보내셨다.’ 이것이 베드로 설교의 핵심입니다.
안 믿으면 지옥간다까지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앞의 얘기가 확정되지 않고 뒷 얘기를 하면 기독교는 갑자기 값싼 물건이 되고 맙니다. 은혜가 없어지도 맙니다. 모두 자기가 잘나서 선택한 것이 되고 자기가 지혜로운 사람이 돼서 구원을 얻은 것으로 큰소리 치게 됩니다. 자기는 척 보고 알았다는 발상이 생겨 상대를 윽박지르기 시작하고, 못 알아 듣는 죽어 있는 심령을 향한 불쌍한 마음과 기도하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기독교가 서슬이 퍼래서 기다리지 않고 용서하지 않고 은혜를 구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기독교는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 중에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것이 없고 우리가 깨달은 것 중에 우리의 실력으로 깨달은 것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바로 이 시점에서 한 영혼을 향하여 우리가 실력으로 도전하는 일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실력으로 한 사람을 항복시켜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방법을 그에게 적용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얻은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람을 향하여 가능성을 가집니다. 그가 아무리 극렬하게 반대를 해도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여시면, 그 마음에 빛을 비추시면, 그 영혼에 하나님께서 은총을 허락하시면 누구나 돌이킵니다. 그 산 증인이 사도 바울입니다. 스데반을 죽이고 살기가 등등하여 다메섹으로 가다가 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가장 훌륭한 하나님의 종노릇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조건도, 어떤 이유도 붙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은혜를 베푸신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그가 우리를 구원해 내신다는 것은 사실 성경이 증거하고 싶은 최대의 메시지 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아직도 예수를 못 믿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분을 위하여 여러분의 안타까움이 있습니까? 가서 말싸움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예수 믿는 여러분이 잘나서 믿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믿는 것임을 증명해 보이십시오. 잘나서 믿는 것 같은 얼굴을 없애지 않는 한 아무도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왜요? 여러분이 잘나서 믿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믿음면 그 사람한테 지는 것 같아서 믿기 싫다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실력으로 믿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비 뽑아서 경기중학교?고등학교에 들어 갔는데 왜 퓐?있어서 들어간 것같이 하십니까. 어떤 부모는 ‘실력은 어쩔 수 없나봐요. 제비를 뽑았더니 경기가 됐어요’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남달라서 하나님이 선택했다는 것이 베드로 설교의 핵심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지금 사람들 앞에서 자기는 다른 사람이라고 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보내셨고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여러분이 하고 싶은 일, 여러분의 욕심을 위해 능력을 달라고 하지 마십시오. 어떤 한 영혼이 불쌍히 여겨질 때 여러분이 가서 그 사람을 꼭 잡아 올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의 심령을 깨우소서. 성령님이여. 그의 마음에도 침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였습니다. 이것은 이 새 시대를 여는 설교로서 성경에 기록된 대단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시작하셨고 이루셨고 이루고 계십니다. 무엇이 두렵습니까. 우리가 사는 인생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문을 여셨고, 이 역사를 지속 시키는 동안 세상이 우리에게 못 할 짓을 하겠지만 그러나 결국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는 일을 중단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부름받고 스데반이 부름받듯이, 사도 바울이 부름받고 또 누가누가 해서 우리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앞으로도 주께서 구원의 문을 열어놓고 계시는 동안에 또 누가, 누가, 누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자리에 들어와 있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이 무엇인가, 그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늘 마음속에 간직하셔서 감사를 놓치지 마십시오. 승리를 놓치지 마십시오. 그리고 겸손을 놓치지 마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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