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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8: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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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영선 목사 |
참고 : | 사도행전 048/ 1989.03.05 |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사도행전8:5-8
스데반의 죽음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고 사도 외에 전 성도들이 여러 지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인 집사 빌립이 사마리아로 내려와서 그 성에 복음을 전파하고 그 성에 있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를 믿게 하며 많은 기적과 기사를 행하여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주가 누구신가를 아는 데 큰 일을 행한 것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곱 집사 중에 유독 스데반 집사와 빌립 집사의 두 행적이 기록되어 있고 빌립 집사는 특별히 예루살렘을 제외한 사마리아 땅에 첫 복음을 전하는 아주 복된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에도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이라든가, 베드로라든가 유명한 사람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사람을 통하여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도 똑같습니다.
'빌립' 그러면 사마리아 성을 회개케 한 자, 큰 기적을 이룬 자, 여기있는 대로 하자면 귀신이 쫓겨나가고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음을 얻는 커다란 이적을 행합니다만 우리가 기억할 것은 빌립은 처음부터 이럴 의사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아주 자명합니다. 왜냐하면 빌립을 집사로 뽑은 근본적인 이유가 이 일을 맡기려고 뽑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6장을 보십시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행6:1-4)
사도들이 집사를 뽑은 이유는 그들이 말씀 전하는 일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말씀하고는 관계없는 사람만 뽑은 것입니다.
말씀 전하는 데 주 앞에 부름을 받았다든가 소질이 있었으면 지금 이 초대교회에서 집사 일은 안 맡겼을 것입니다.
사도들이 말씀을 맡고 기도하는 일과 봉사하는 일이 겹쳐서 방해를 받는데 말씀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 봉사만 맡을 사람을 뽑았습니다. 뽑힌 사람들은 잘났다는 의미도 있을지 모르지만 한면으로 따지자면 말씀하고 기도하고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뽑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스데반과 빌립은 대표적으로 주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뽑혀진 사람은 아닙니다. 게다가 지금 사마리아 성에 빌립이 왜 내려왔느냐 하면 주의 말씀과 열정으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 핍박이 일어나자 선착순으로 도망온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하면 '빌립이 행한 것을 보라.' 이럽니다. 그러나 빌립은 전혀 이럴 의사도 없었고 계획도 없고 열심도 없었는데 결과가 이렇게 됐습니다. 본인은 전혀 이럴 의사도 없었고 소질도 없었고 주변에서 볼 때도 그럴 만한 소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사가 됐습니다. 그리고 핍박이 일어나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도망왔는데 그만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성경이 하고 싶은 얘기를 아시겠습니까? 왜 제가 굳이 이 얘기를 꺼내느냐 하면 오늘날 신자들이 갖는 무기력이 어디서 옵니까? 여기분들 신앙생활이 피폐된 이유가 뭡니까? 우리가 왜 빌립 같지 못하고, 스데반 같지 못하고, 바울 같지 못합니까? 우리 안에 그 열심과 각오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이제 성경을 따져 보겠습니다만 사도 바울도 그리고, 빌립도 그렇고 그럴 의도와 정열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승리하지 못하고 힘있게 증거하지 못하고 이렇게 나는 버린 몸이다 하고 아주 널브러져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마음에 그런 정열도 없고 확신도 없고 그렇게 해야겠다는 마음이 있지만 그렇게 행할 아무런 조건이 내 마음 속에 없는 줄 알고 있기 때문에 그저 다만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떠내려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무도 처음부터 그런 각오와 열심으로 시작해서 영웅이 됐다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빌립이 지금 그렇습니다. 더 확실히 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의 예를 들어 보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말씀으로 갑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히 있었으나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1:11-17)
여기 아주 재미있는 얘기가 나옵니다. 바울은 사도가 될 계획이 없었습니다.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려고 했던 것은 우리같이 널브러져 있고 포기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반대편에 서서 지독히도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예수 믿는 자들을 잔해한 자입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에 대해서 놀라는 것은 그가 일으킨 결과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연히 그가 우리와 다른 마음과 계획과 준비와 열심과 조건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답니다.
디모데전서 1장으로 가십시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1:12-16)
사도 바울이 자신을 뭐라고 평가하는가 보십시오. 주께서는 자신이 훼방자고 핍박자고 포행자였는데 자신을 능하게 하시고 충성되이 여겼다 그럽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주님 앞에 쓰임 받는 것을 준비하고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면 그가 한 준비, 열심, 열정에 의하여 주께서 그를 충성되이 여겼다라는 말이 앞뒤가 맞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고백에 따르면 그는 분명히 주께서 부르신 이 사역에 대해서는, 즉 사도와 복음을 맡은 종으로서는 계획한 적이 없습니다. 준비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그를 충성되이 여겼답니다.
그럼 이 충성이라는 것은 사도 바울이 바친 열심과 헌신과 각오와 어떤 지혜와 능력, 이런 것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그를 충성되이 여겼다는 것은 그가 가진 어떤 재능도 조건도 아닙니다. 주께서 이제부터 하시려고 하는 일에 제목으로 선택했을 뿐입니다.
만들어져 있는 음식이라든가 만들어져 있는 물건이 아니고 그런 제목으로만 쓴 것입니다. 가져다가 주께서 다듬으실 겁니다. 주께서 다듬으시고 주께서 그의 손에 잡고 쓰셔서 이 일이 이루어진 것이지 그가 예전부터 준비하고 각오하고 재능을 갖고 있어서 이 일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왜 이런 얘기가 우리에게 있어야 되느냐 하면 우리의 쓰임을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 마음에 불타는 신앙이 있지도 않고 목숨을 내건 각오가 있거나 주를 위하여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을 만큼 속에서부터 뭐가 끓어오르는 그런 것들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 우리는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우리의 전생애가 아무것도 아니고 쓸모없고 간신히 턱걸이 해서 천당이나 가고 말것이냐? 이것은 우리가 주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르는 것 때문에 생기는 오해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뒤집어 보십시오. 그럼 주 앞에 쓰이고 주 앞에 큰 일을 행하는 자들은 원래부터 그런 재능이 있고 각오가 있고 열심히 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왜 아닙니까? 우선 바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르지 않습니다. 주께서 부르사 쓰시기로 작정하시고 쓰시기 때문에 바꿔가고 열심히 생기고 실제로 풍성한 열매가 맺혀진다고 얘기를 합니다.
스데반은 그의 목숨을 걸고 주를 위하여 봉사했습니다만 그가 그 일에 자격이 있다라고 부름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랬으면 그도 바울같이 뒤늦게라도 사도가 됐을 것이지 집사로 부름받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일곱 집사는 물론 여러 가지로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 시대에 분명히 말씀과 기도를 위해서 영적인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적 사역을 위해서가 아니라 잔무를 위해서 불러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의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성을 뒤집어 놓습니다. 주께서 그를 쓰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나중에 와서 준공 검사만 합니다. 빌립이 한 일이 잘했나 못했나 와서 안수하고 기도하자 성령이 임하십니다. 그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세다는 뜻이 아니라 빌립이 한 일이 완벽했다는 뜻입니다. 전혀 본인이나 주변에서 그런 일을 할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던 사람을 통하여 주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앞으로 뭘 할지 모릅니다. 우리를 통하여 이 나라의 역사뿐 아니라 세계사와 특별히 하나님 나라에 커다란 기적들이 어떻게 펼쳐질지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포기하고 있고 기대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 바울의 결과와 지금 우리의 시작 이전의 모습과 비교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중학교 3학년짜리가 국민학교 3학년짜리하고 똑같은 시험문제를 푸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안됩니다. 중학교 3학년은 국민학교 3학년을 거쳤습니다. 비교를 하려면 지금 국민학교 3학년짜리와 중3짜리의 국민학교 3학년 때의 실력과를 비교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사도 바울의 결과와 빌립 집사의 결과와 비교하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시작과 비교를 해야 합니다. 그럼 아마 우리가 나을지도 모릅니다. 우린 최소한 사도 바울 같지는 않습니다. 우린 믿고 있고 성의가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주일날도 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여기 나와 계신 대다수가 아직 집사로 부름받지 않았습니다. 그 얘기는 집사보다 괜찮은 일을 시키려고 그러시는지도 모릅니다. 안 그렇습니까?
고린도후서 6장으로 가 보십시다. 신자들이 어떤 모습으로 이 세상을 걸어가느냐? 상충되고 상반된 두 가지 모습이 그려집니다.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8-10)
우리는 내가 모든 것을 가진 자면 가진 자 같은 외양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내가 주 앞에 쓰이고 큰 일을 할 것이면 이미 모든 조건과 모습에거 큰 일을 할 사람의 대접과 이름과 지위와 능력이 나타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보기는 욕됨으로 말미암고 무명한 자 같고, 징계를 받는 자 같고, 근심하는 자 같고, 가난한 자 같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것을 가진 자고, 유명한 자고, 부유한 자고, 생명이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는 쓰시려면 벌써 3살 때 신구약 다 떼고 다섯살 때 벌써 삼층천에 올라갔다 내려오고 일곱살에 예수님과 40일, 이런 것이 아닙니다. 뜻밖에도 유명한 모습이 나타나서 유명한 자로 쓰이지 않습니다.
국민학교 들어가서 매맞고, 또 맞고 또 맞아서 엉덩이가 어떻게 굳어졌는가. 어떻게 국민학교 6년 동안 부모속을 내내 썩였는가. 중학교도 재수하고 들어가고 고등학교도 재수하고 들어가고, 대학교도 재수하고 또 못 들어 갔는가.
무명한 자요, 없는 자요, 망하는 자요, 죽는 자 같게 갑니다. 그러나 그 속에 생명과 비밀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께서 쓰시기 때문입니다. 우린 자꾸만 이것 때문에 좌절합니다.
나는 그런 결심을 한 적도 없고 그런 열심히 내 마음에 솟구치지도 않으며 그런 일을 할 만한 아무런 조건, 실력, 이름, 권세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죽치고 십일조나 내고 이렇게 설교나 듣고 마치렵니다 하는 것은 불신앙이다는 것입니다.
빌립이 쓰인 것과 바울이 쓰인 것을 늘 다시 한 번 마음속에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그들보다 우리가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습니다.
딱 하나의 이유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곳, 그늘진 곳, 고통하는 곳, 슬피우는 것으로 보내야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찾아가는 곳은 멍에를 풀어주며 죽은 영혼들을 일으키며 죄와 사망의 포로된 자들을 구풀하기 위하여 가는 곳입니다.
여러분에게 유명하게 해주고, 능력주고 부요하게 해주면 여러분 어디 갑니까? 왜 사망의 그늘진 곳을 가겠습니까? 왜 슬픈 자의 옆으로 가겠습니까?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하고 이 세상을 오래 살아야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 옆으로밖에 더 가겠습니까.
핍박이 일어나지 않았던들 빌립이 사마리아를 갔겠습니까? 그에게 돈이 있고 더 잘됐으면 미국 여행이나 갔겠죠. 하와이를 가든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더 좋은 것으로 주지 않느냐고요. 왜 이렇게 쳐 박아 놓으셨냐고요? 거기가 그늘진 곳이고 거기에 여러분이 빛을 던지고 생명을 전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위를 쳐다보지 마시고 옆을 보십시오. 주께서 하늘 보좌의 영광을 버려두시고 우리를 찾아 오신 것처럼 주께서 그렇게 우리를 그늘진 곳으로 보내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지금 가난하십니까? 잘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 옆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프십니까? 더 잘 됐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여러분은 아픈 사람 옆에 갑니다. 괴롭고 슬프십니까? 외로우십니까? 그래서 여러분은 괴롭고 외로운 사람 옆에 가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여러분은 절망하지 않은 사람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고통스럽지만 절망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슬프지만 포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영원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나누십시오. 슬픔 때문에 만나고 병 때문에 만났지만 저들에게 없는 것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을 나누십시오.
빌립은 핍박을 피해서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거기서밖에 살 수 없었던 사마리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들과 다른 것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성 전체를 기쁨으로 바꿔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신자의 생애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있든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그것은 다 참으로 기가막힐 만큼 복된 조건들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빌립이 핍박을 피하여 도망간 것같이 몰골이 정말 흉측하고 옆에서 볼 때 흠모할 만한 것이 없고 상해 보이고 망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베드로전서 2장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1-9)
주님꼐서 건축자들의 버리운 돌이지만 하나님 앞에는 거룩한 건축물의 모퉁이 돌이 된 것같이 우리가 그렇습니다. 세상이 보면 진 사람들이고 생존 경쟁에서 밀린 사람들로 보이겠죠. 그러나 하나님 앞에 우리의 인생은 놀라운 성전의 모퉁이 돌이고 주춧돌입니다. 우리로 인하여 만민이 구원을 얻고 죽어가는 심령들이 빛을 얻고 잠자는 영혼들이 일어나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너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우리의 영광된 모습과 권세들이 가리워져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늘진 곳에 보내지기 때문입니다. 애통하는 곳에 보내지기 때문입니다. 슬프고 눌리고 절망하는 심령들에게 보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저들과 동일한 짐을 지고 있으되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 아닌 것을, 이 세상에서의 질고와 고통을 당하되 그것이 우리의 운명을 얽어매는 것이 아님을 저들에게 나타내려고 주께서 우리를 그 곳에 보내십니다.
사업에 망하셨습니까? 잘 됐습니다. 여러분이 사업에 흥하시고 돈 있고 건강할 때 한 일이 뭡니까? 시간을 낭비하는 것 외에는 뭐 잘한 것이 있습니까? 괴로우시고 자존심 상하십니까? 잘 됐습니다. 깊어지시고 같은 슬픔과 외로움으로 절망하고 있는 영혼들 앞에 절망할 수 없는 우리의 믿음의 내용들을 전하십시오.
이 잠깐 사는 나그네된 인생길에서 영혼을 준비하는 복된 소식을 전하십시오. 주를 사랑하는 마음도 없었고 주께 우리를 바칠 열심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불러 그의 자녀가 되게 하시며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신 주를 찬송하시고 기쁨으로 전하십시오. 지금 있는 여러분의 위치가 모자라 보이고 여러분의 마음의 준비가 덜 된 것 같고 신앙적인 확신과 열정이 없어서 망설이고 계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께서 우리를 들어 쓰십니다. 우리를 통하여 그의 나라를 확장하시고 그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그의 기쁘신 뜻을 증거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여러분들이 더 큰 지위를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눈을 뜨시고 빌립을 들어 쓰시는 주님, 바울을 들어 쓰시는 주님 앞에 우리가 있는 줄 아십시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너는 내 것이라 명하시는 주의 말씀 앞에 여러분의 존재와 생애를 귀중히 여기십시오.
여러분이 포기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나는 이것 가지고 못하겠다 하는 자리에서 주님은 기적을 이루십니다. 여러분의 생애에 분명히 영적인 기적들을 목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책임이고 권리입니다. 여러분 중의 어느 누구도 사도 바울보다 못한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 중의 어느 누구도 빌립 집사보다 못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주신 주님이 피로 값주고 산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을 통하여 주께서 주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를 작정하셨고 여러분이 아니라면 주님은 이랗시지 않겠다고 버티고 계실 것입니다.
함께 일하시고 함께 영광받기를 기뻐하십니다. 여러분의 그 작은 삶, 사소한 인생을 사소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안에서 일어나는 기적들과 주님의 놀라운 은혜들과 역사와 지혜와 드러나는 주님의 영광을 기대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충성되이 사시고 누리고 사시고 감사하면서 사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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