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행8:9-24 |
---|---|
설교자 : | 박영선 목사 |
참고 : | 사도행전 049 / 마술사 시몬 / 행 8:9-24 / 1989.03.12 |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며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오래 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여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라" 사도행전8:9-24
지난 주에 우리는 빌립 집사의 행적을 더듬으면서 빌립 집사나 더 유명했던 바울 사도나 그들의 열정이나 계획과 관계없이 하나님께 쓰여졌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한 걸은 더 나아가서 그 쓰임에 관하여 성경이 조명해 주고 있는 특성을 살펴봄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하는 신자로서의 정당한 신앙생활의 모습이 원리적으로 그 목표와 방법에 있어서 어떤 시각을 가지고 어떤 것은 배제해야 하는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도행전 8장의 빌립 집사가 지금 주 앞에 쓰임을 받고 있는 모습 중에서 우리가 꼭 놓치지 않아야 될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사실은 시몬이 등장하고 있다 이렇게 보셔도 무관합니다. 여기 마술사 시몬의 등장은 그저 그 시대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라는 것 때문에 기록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빌립 집사의 사역에서 놓쳐서는 안되는 중요한 내용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지금 등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우선 시몬부터 살펴보는 것이 순서입니다. 13절에 보시면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 표현대로 하자면 믿고 세례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사마리아 성에 복음이 전파된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온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 안수하여 성령 받게 하는 사건에서 드러난 바에 의하면 시몬은 정당한 신자로서 입문을 한 것이 아니고 조금은 다른 이유 때문에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18절을 보시면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서서 하니."(행8:18,19)
여기서 시몬의 본심과 시몬이 어떤 사람이요 엄던 생각에서 예수를 믿는다고 그랬었는가 하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시몬은 원래 사마리아 성에서 제일가는 마술사입니다. 여러 가지 기적을 일으키고 말하자면 손장난에 의한 속임수를 쓰는 정도가 아닌 보다 큰 어떤 기적을 을으킬 줄 아는 사람이었는데 빌립 집사가 오자 상대가 안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를 이어서 온 두 사도는 더 큰일을 벌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가지고 있는 본심을 꺼내는 겁니다. 그는 이들이 행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 천극 복음이 지금 증거되고 있고 하나님이 계시며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은혜를 베풀고 구원을 베풀고 우리를 부르고 있다는 징조로써 이 일들이 행해지고 있는 것을 못 보고 자기가 사용하는 마술보다 더 큰 마술을 행하는 사람들이라고 밖에는 모르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 중에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아주 쉽게 얘기해서 예수를 믿으면 잘먹고 잘산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분류를 하자면 그런 식이 됩니다. 물론 처음 예수를 믿을 때 정당한 방법으로만 믿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우리 애들이 철이 들어서 공부를 잘할 때만 공부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 무서워서 또는 공부 잘해 오면 무슨 상을 줘서 열심히 하다 보니까 공부를 잘해서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같이 예수를 믿는 그 방법에 있어서는 각양각색입니다. 마지막 물에 빠진 사람 기분으로 잡은 지푸라기같이 교회를 찾아 나왔다가 진리에 접하고 주님을 만나는 수도 있고 남이 다 그러라고 권하니까 옆에서 마지못해서 한 번 나왔다고 그럴 수도 있고 추운 겨울날 마누라가 꼭 교회를 가야겠다라고 그러는데 인신매매단이 교회 옆에도 진을 치고 있다고 해서 마음이 불안해서 태워주러 왔다가 차 안에 있자니 기름값이 들어서 할 수 없이 따라 들어왔다가 믿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믿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은혜와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을 만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문제에 있어 시몬은 틀리는 것입니다. 늘 돈을 주고 사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기독교라는 것이 주께서 나에게 요구하시고 제시하시고 권면하는 내용으로 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냐? 기독교 신앙 전체가 말입니다. 아니면 그것이 내 욕심과 내가 하고 싶은 것의 방법으로 동원되고 있느냐 하는 것은 언제나 조심해야 되고 확인해야 되는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문제에서 하나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기적이라는 것, 그것은 도대체 기독교 신앙에서 어느만큼의 가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지금 수준보다 더 깊어지기를 원하는 분들이 틀림없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깊은 신앙, 더 충만한 진리와 은혜에 감동으로 넘쳐나는 신앙의 자리로 가고 싶어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일반적인 방법보다는 조금은 기적적인 방법이 있었으면이라고 누구나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이 꼭 좋은 방법이냐? 성격이 그런 것을 가장 좋은 방법으로 제시하느냐 하는 것을 우선 이 문제에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가시면 그 질문에 대한 가장 적절한 예가 나옵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가 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16:19-31
자, 여기 기적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느냐 하는 대표적인 비유가 등장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내용과 영원한 약속이 평범하게 증거된 것과 기적과 함께 증거된 것은 어느 쪽이 더 효과가 있을 것이라 생각을 하십니까? 기적과 함께 있는 것이 분명히 효과가 있습니다. 그냥 그저 평범한 사람이 와서 평범하게 기독교 내용을 얘기하는 것과 그 사람이 만일 우리 집에 와 기도해서 우리 집에 있는 병자를 일으키고 또 우리 속에 있는 비밀스러운 죄를 지적하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이걸 알게 하셨다 너는 내 말을 들으라 하면 이렇게 하는 쪽이 훨씬 효과가 있을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하나의 아주 미묘한 함정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게 보십시다.제가 안 믿는 사람인데 어떤 사람이 저희 집에 와서 조금 전에 얘기한 것같이 저희 가정에 앓고 있는 저희 애를 일으키고 제 마음속에 있는 비밀스러운 고민거리를 지적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야! 정말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영원한 나라가 있구나. 그럼 이제 제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렇게 나올 것 같습니까? 안 그렇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여러분이 그 일을 당하면 여러분 당장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제가 살아야 정당하게 사는 겁니까? 이럴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목사님, 이번 주에는 어떤 주식을 살까요, 이렇게 물어볼 것입니다.
기적은 분명히 우리로 하여금 무한한 신뢰감을 갖게 하고 기대를 갖게 하는데 그것이 꼭 정당한 데로 간다는 것까지는 보장을 못합니다.
기적일지라도 우리를 시몬 같은 방법으로 끌어당겨서 내가 원하는데 시녀 노릇을 시킵니다. 저희 어머님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여자보다도, 말하자면 신앙적으로 좋을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갖고 계십니다. 목사를 아들로 두셨을 뿐 아니라 목사를 또 아버님으로 모신 분입니다.
그런데 저희 어머님의 신앙은 어떠냐 하면 점을 보러 자주 다니셨습니다. 결정적인 일이 있을 때는 점을 보러 가는 겁니다. 한 번은 가셨더니 들어가는데 점쟁이가 '당신은 제가 못 봅니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그래서 괜히 센 척해서 복채를 많이 받는 점쟁이들이 있거든요, 돈은 달라고 하는 대로 드릴 테니까 그저 속시원히 제 고민과 앞길을 밝혀주십시오. 아니요 당신은 나와 다른 너무나 지고한 분이 당신을 붙잡고 있는 사람입니다. 못 봅니다. 그래서 얼마나 기쁘셨겠습니까. 그때 성가대를 하셨는데 성가대에 오셔서 다 이야기하신 겁니다.
야. 내가 갔더니 당신은 나와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이라 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야! 정말 하나님은 계시는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구나' 이렇게 감동을 했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떼거지로 몰려갔죠. 이것이 기적의 감추어져 있는 함정입니다.
시몬이 이 빌립 집사의 한 일과 두 사도가 한 일을 보고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다른 세상이 있구나 하는 것이 아니라, 야! 이 방법을 써서 여태껏 시시하게 일이백만원 갖고 놀았는데 이젠 억대로 놀자 하며 스케일이 바뀌었습니다. 목표가 바뀌지는 않습니다.
지금 그 얘기입니다.모세와 선지자에게 듣지 아니하면, 모세와 선지자라는 것은 구약성경을 대표하는 것이고 보통 얘기할 때 성경을 얘기하는 겁니다. 성경 말씀으로 믿지 않는 자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가서 얘기해도 효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끊임없이 '하나님이 이렇게 해 주신다면' '이런 방법으로 하신다면' 그럽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보통 내가 지금 당장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요것만 해준다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겠다. 요것만 해주시면 하나님이 날 사랑하는 것을 믿겠다. 이렇게 하여 실상은 지금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뺏어가는 데 목표를 두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지금 시몬과 비교를 함으로써 빌립에게 있어 두드러진 특징은 그가 한 모든 기적으로 인하여 보답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8장 기록의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다시 돌아가 보십시다. 우선 빌립은 사마리아에 가는 이유가 지난 주에도 살펴본 바와 같이 핍박에 쫓겨서 간, 영웅적이거나 개선하는 모습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누가 초청을 한 것도 아니고 기대를 한 것도 아니고 숨어서 도피행각으로 간 것입니다.
게다가 그가 가서 한 일에 대하여 베드로와 사도가 뒤에 와서 빛은 보고 그는 어떻게 되냐 하면 26절,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가사까지 인도돼서 갑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우리나라보다 작습니다만 거리가 꼭같은 것은 아닙니다. 이해를 위해서, 예루살렘을 서울이라고 볼 때 지금 여기 사마리아는 지리적으로 평안남도쯤 되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가사까지 가라 한 데가 우리나라 지도로 생각하면 목포쯤 가는 것입니다.
전혀 자기가 행한 일이 알려지지 않는 광야로 가는 것입니다. 빌립이 여태껏 행한 모든 이적과 그가 전한 복음으로 말미암아 얻어낸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버린다는 것입니다. 갈때도 밀수꾼같이 들어갔다가 나올 때도 슬며시 밀수꾼 도망가듯이 하여 그가 일으킨 모든 기적들이 이렇게 그에게 보상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여기에 내려가서 에디오피아의 국고를 맡고 있는 내시를 만납니다. 그래서 그에게 세례를 주고 그를 회심시키고 구원을 얻게 한 다음 돌아가 버립니다. 지금 우리식으로 하면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인 굉장히 유명한 사람인 셈입니다. 그를 회심시켰는데 그는 자기 나라로 가버리고 빌립은 빌립대로 또 다른 데로 갑니다.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혼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행8:29-40)
가이사랴는 우리나라 지도식으로 얘기해서 인천이나 진남포쯤 되는 곳입니다.
자기가 한 일이 누구에게 열매를 맺어가지고 그 열매 맺은 사람이 옆에 있지를 않습니다. 그가 한 일이 주변에서도 모르는 쪽으로 자꾸자꾸 끌려다니고 옮겨다녀서 늘 새로운 사람으로 그러니까 낯선 자로 그렇게 이끌려 다니고 있는 모습을 조심해서 보셔야 됩니다.
왜 이것이 사도행전 8장에 기록돼야 되는지 아십니까? 신앙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점이 우리의 신앙적인 삶이 지금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나에게 보상되지 않는다는 것 때문입니다.
여러분, 정직하게 산 것과 거룩하게 산 것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보답되지 않기 때문에 어느 신자든지 신앙적인 생활을 감춰놓는 것입니다.
그 문제에 대한 대표적인 예를 마태복음 25장에서 찾아봅시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거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약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로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뻬앗아 열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뻬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로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마25:14-30)
이 달란트 비유를 잘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 두 달란트 받은 사람, 한 달란트 받은 사람 중에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왜 감춰두고 묻어두었는지 아십니까? 거기서 얻어지는 모든 이익은 그것을 맡긴 사람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섯 달란트를 갖고 나가서 다섯 달라트를 남긴 것이기 때문에 주인이 왔을 때 주인이 맡긴 다섯 달란트와 그것으로 인하여 남긴 것까지 주인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어떻게 하기로 했냐면 주인 것은 갖다 파묻고 자기 생활을 한 것입니다. 자기한테 돌아오는 농사만 지은 것입니다. 오늘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가장 방해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삶과 우리의 모든 것이 주께서 나에게 맡긴 것이라는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하는 모든 것이 주께 돌아가는 것이고 나에게 돌아오지 않습니다. 거룩히 사는 것, 정직히 사는 것, 주를 앞세우고 사는 것, 십자가를 지고 사는 것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나에게 보답되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밤낮 밟힙니다. 주를 닮아가게 산 것으로 이 세상에서 아무 보답을 못 받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관둬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분 중에 예전에 평양에 살던 주 장로님이라고 계셨습니다. 일제시대 때부터 유명했던 분입니다. 신앙생활도 하셨습니다만 신앙생활과 혈기가 반씩 섞여 있으신 분이었는데 어느날 교회에 깡패들이 와서 시비를 겁니다. 어떻게 하셨는지 아십니까? 잠깐 기다리라우 하고 들어가서 "아버지,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가서 무차별 폭격을 한 다음에 돌아와서 회개를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삽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주께서 나에게 맡긴 것으로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고 있죠? 파묻고 있습니다.
한 번 심각하게 여러분 자신을 반성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의 현장 속에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 앞에서 여러분이 주께 받은 것으로 나가서 그들과 만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 묻어 놨습니다. 주께서 오시는 날 파서 여기 있습니다 하고 본전 돌려드릴 작정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은 이 세상의 방법을 따라 내 모든 힘과 지혜를 기울여 교활하고 비열하고 악날하고 무자비하게 이 세상을 사는 것에 익숙하게 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에 가장 큰 암적 존재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망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가장 큰 거침돌입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이 무익한 종' 이라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주께서 우리에게 맡긴 일을 제대로 순종하고 잘할 때 그것은 적은 일이라는 것을 이제 알게 됩니다. 주께서 맡긴 것을 충성되게 한 것을 내가 갖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다섯 달란트 맡긴 것에 대해서 다섯 달란트 남긴 것을 내가 갖는 것은 너무 적습니다. 나중에 다른 복음서에서 얘기하는 것과 같이 다섯 고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습니다.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라. 그리고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종으로서 한 일에 배상을 받는 정도가 아닙니다.
여러분,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8장에는 빌립 집사를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길을 가야 됩니다. 내가 한 일을 내가 거기서 훈장받고 박수받고 하는 인생이 아닌 길을. 그러나 그 길을 통하여 많은 사람이 주께 돌아오는 일과 주께서 영광받으시는 일과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일을 보게 되고 그리고 주 앞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듣게 됩니다. 우리가 그것을 만일 땅에 묻어 놓으면 무익한 종이고 바깥 어두움에 쫓겨날 것입니다. 슬피울며 이를 갊이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명심하시고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기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그리고 지혜롭게 경주하시기 바랍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