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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9: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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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영선 목사 |
참고 : | 사도행전 052-053/1989.04.09/04.16 |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사도행전9:1-9
사도행전 9장에는 사울이 회심하는 유명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을 대할 때마다 특별히 신앙의 연조가 깊으신 분들은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하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을 만나서 회심하여 바울로 바뀌면서 이제 모든 운명과 인격과 인생의 목표와 신앙이 바뀌는 이 사건을 놓고 우리가 얼마나 많이 부러워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도대체 바울은 어떤 사람이길래 주께서 직접 와서 그를 만나시고 그를 회심시키시며 큰일을 맡기시는가 하는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태껏 사도행전을 추적해 온 바에 의하면 사도행전에 기록된 이 바울의 회심은 그런 식의 목적을 가지고 여기 기록된 것이 아닌 것 같은 어떤 낌새를 채셨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이 사건을 가지고 바울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후에 그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기 때문에 쉽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어떤 한 영웅을 생각할 때 그 영웅이 처음부터 달랐다라고 생각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모든 위인들의 전기를 읽어보면 태몽부터가 다릅니다. 꿈에 용을 봅니다. 꿈에 뱀보고 이렇게 태어나면 위인 되기는 틀린 것입니다.
불행히도 저희 어머님을 저를 가지셨을 때 뱀을 보았답니다. 그래서 전 마음에 지렁이를 안 본 것이 어디냐 이렇게 생각하는데. 용두사미, 앞에 것은 못 보시고 뒤에 것만 본 것 아닙니까? 또 센 사람은 용도 한 마리가 아닙니다. 한 9마리가 와야 센 겁니다.
동양에서 제일 상스러운 동물로 숭상하는 용을 자세히 보시면 보통 그려있는 용의 무늬는 발가락이 3개입니다. 우리나라 왕의 무늬에는 발가락이 4개입니다. 중국의 황제만 발가락이 5개로 되어 있습니다.
누가 잘 되면 그는 남달랐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희 교회 나오시는 분 중에 이런 분이 있습니다. 지금 어느 회사에서 영어로 먹고 사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의 영어 실력은 원래 알아줄 것이 없는 실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영어를 잘하니까 모두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아! 다른 공부는 안했어도 영어만은 잘했구나가 아니고 다른 공부도 못 했을 뿐만 아니라 영어는 특별히 못 했는데 들어간 회사에서 영어를 맡았던 분이 그만두는 바람에 눈치로 때려잡은, 눈글리쉬라고 있습니다. 그것을 몇 년 하시다가 서당개 3년이면 영어한다고 이제 하는 겁니다. 누가 저 사람이 영어로 밥먹으리라고 아무도 생각을 안했는데 영어를 합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많습니다.
여러분, 학교 전공을 살려서 지금 일하시는 분이 많지 않습니다. 저만해도 전기공학과 출신인데 원래대로 하면 교회에서 저 스피커나 놓고 형광등이나 달았어야 마땅한데 앞에서 이렇게 떠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 생각을 우리한테서 자꾸 몰아내야 됩니다. 특히 이 생각이 영적인 문제에 들어올 때 우리를 많이 괴롭히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가진 자랑거리들과 우리가 받은바 은혜거리들을 놓치게 해서 제가 유난히 오늘 이 말씀을 이렇게 꼬집을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사울은 지금 이 자리에 이런 입장으로 섭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시면 빌립 집사의 사마리아 전도에 관한 설명이 이렇게 나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행8:4-8)
그러니까 사마리아 성에 가서 이 말씀을 전할 때는 말씀만으로 저들을 다 회개시키기에 부족해서 거기에 기적이 보조 수단으로 동원됐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귀신이 쫓겨나고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써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내용을 전달하는데 일조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9장에 나타난 사건은 하나님께서 땅끝까지 그의 자녀들을 부르시는 일에 있어서 말로만 하시지 않고, 기적으로만 하시지 않고 필요하다면 직접 손을 대서라도 그 사람을 회심시키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이키게 한다는 것이 주 내용으로 기록된 사건입니다. 바울은 얼마나 대단하길래 주님께서 친히 심방을 오셨을까? 이런 대목은 아닙니다.
국민학교 다니는 학생에게 처음에 산수 가르쳐 주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3+5=8이다. 이것을 가르치는데 숫자 개념이 안 들어오니까 뭘로 설명을 합니까? 손가락 3개에 5개를 더하면 몇 개냐? 그렇게 세죠?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그래서 그것으로도 잘 안 통하면 그 애가 제일 잘 알아들을 수 있는 것으로 합니다. 네가 쵸코렛이 3개 있었는데 다섯 개가 더 생겼다. 그럼 모두 몇 개냐? 하며 쵸코렛 가지고 합니다. 그래도 안되면 어떻게 합니까? 맞는 수밖에 없습니다. 쵸코렛 갖고 교훈한 것이 사마리아라면, 사울에 와서는 그것으로도 안되기 때문에 뺨을 3대 때리고 그 다음에 이쪽으로 5대 때리고 너 모두 몇대 맞았냐? 8대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울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따져보면 바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지금 여기서의 상징은 가장 구원받기에 완악하고 반대 입장이고 가장 조건이 나쁜 사람의 상징입니다.
이제 바울이 나가서 일하는 것이 사도행전의 후반부를 만들고 있으니까 우리는 바울이 그런 입장에서 부름을 받았을 것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나중에 일한 것 때문에 바울을 너무 높이 평가해서 이런 생각에 빠진다는 말입니다. 역시 바울은 실력과 능력으로 많은 일을 시킬 사람이니까 세상에서도 학문과 모든 능력을 구비케 한 다음 주님께서 특별히 뽑은 사람이다 하는 생각을 자꾸 합니다.
그래서 누구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직접 가서 스카우트해 오지 않았느냐가 아닙니다. 절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무엇에서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느냐면 사도 바울이 늘 말하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베냐민 지파요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열심으로는 신자들을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고' 한 모든 것들이 나중에 그가 사도가 되어서 어떻게 쓰였는가를 연결해 보면 자명해집니다.
빌리보서 3장으로 가보십시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3:4-9)
여기 그가 자랑했던 것,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고 베냐민 지파고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고,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세상적인 기준으로 자랑할 만한 모든 것이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와 사도로 부름을 받는 데 있어서 연속된 것이 없습니다. 해로 여길 것밖에 안된다 그럽니다. 해로 여겨야 됩니다. 그것이 이 일을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갖는 이 뿌리깊은 오해, 바울은 실력이 있으니까 주님께서는 특별히 스카우트 해서 이쪽에 썼다는 이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신자가 신앙생활을 자랑과 승리로 영위해 나가는 데 결정적인 걸림돌이 됩니다.
돈 많은 불신자와 가난한 신자는 누가 더 하나님 앞에 쓸모가 많습니까? 물론 신자여야 됩니다. 그러면 부자인 신자와 가난한 신자는 누가 더 하나님 앞에 쓸모가 많습니까? 기왕 같은 신앙이라면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다. 있는 쪽이 낫지 않느냐라고 틀림없이 우리가 생각을 하게 돼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돈이 없어서 돈 가진 자를 부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실력이 없어서 권세 가진 사람을 신자 되게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세상에서 어떤 지위에 있고 어떤 부를 축적했든지 간에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그의 불쌍한 영혼뿐이지 그가 있어야 하나님 나라에 도움이 되고 이익이 되고 이런 개념에서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가 주께 먼저 꾸어주고 갚게 하겠습니까? 인간의 지식과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고 머 쓸만 한 것이 있어서 하나님 하는 일에 보탬이 되겠습니까?
이 생각을 깨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생각을 가지는 겁니다. 나 같은 것은 그저 구원 얻는 것으로 감지덕지하고 입다물고 가만이나 있자. 이렇게 되는 겁니다. 스스로가 자신의 신앙적인 활동력과 자신감을 묶어둔 채 가만히 있는 것이 무슨 미덕인 양 숨어버리는 신자의 모습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만큼 많은 신자들을 올무에 붙들어 맨 것이 없지 않는가 싶어서 특별히 이 말씀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을 보면 조금 더 명확한 설명이 나옵니다.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 나로 조금 자랑하게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 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우리가 야갛ㄴ 것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고후11:16-21)
사도 바울이 그가 복음을 전하며 이 복음을 인하여 세상적인 힘과 자랑거리들을 감추고 겸손과 온유와 애타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더니 상대방들이 자기를 깔보더라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이 일 아니면 행세할 근거도 없고 이것 아니면 밥벌어 먹을 때도 없으니까 와서 아첨 떨고 비굴하게 굴어서 어떻게든지 우리를 예수 믿게 해서 먹고 살려고 저러는 것이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하는 얘기입니다. 너희는 참 웃긴다. 세상의 권세를 갖고 와서 짓누르면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아주더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세일 때는 저들이 너희를 해롭게 하고 너희를 괄시하고 조롱해도 세상의 힘과 세상의 자랑거리라고 그럴 때는 저들이 너희를 해롭게 하고 너희를 괄시하고 조롱해도 세상의 힘과 세상의 자랑거리라고 그럴 때는 아무 소리 못하면서도 너희를 위해서 내가 양보하니까 나를 우습게 알더라는 이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부득불 자랑해야겠다 이겁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잘났고 너희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얼마나 뛰어난 사람이 있는 줄 모르겠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나도 내가 그것을 갖고 너희를 어떻게 하겠다는 얘기가 아니라 나도 세상적 가치로 볼 때 내가 꿀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너희의 못난 것 때문에 내가 한 번 얘기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고후11:22,23). 너희가 좋은 학교 나왔냐? 나도 그랬다. 너희가 좋은 대학 나왔냐? 나도 그랬다. 난 대학교 입학시험 본 그 해에 사법고시도 1등으로 통과했다. 할 말 있냐? 내가 유진호 박사에게 배웠다. 김구 선생과 딱지치기 하고 유치환과 함께 시를 썼다.
왜 그런 얘기를 합니까? 너희는 우리가 가진 힘을 모르는구나 이것입니다. 너희가 세상적인 문제에 대해서 자랑하면 내가 그것에서 하나도 꿀릴 것이 없는 사람이다. 이것입니다.
그러나 이 다음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옛날에 내가 가말리엘 문하였고 베냐민 지파였고 바리새인이었다라는 것이 그때는 주를 위해서 쓴 것이 아닌 것으로 있었지만 그 실력과 능력만은 쓸모가 있기 때문에 주께서 특별히 바울을 회심시켜서 그 실력을 이제 주의 나라를 위해서 썼다라는 생각을 자꾸 갖는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자랑할 마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것으로 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왜 이 고생한 얘기를 써야 됩니까? 여기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떤 의미에서 내가 이렇게 내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면서도 손해보면서까지 일을 한 것이 무슨 일이었겠는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 면에는 이런 일을 했다고 해서 내가 내 의지력이 남다르다는 것을 너희에게 자랑하려는 것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28절에 나옵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고후11:28,29)
결국 사도 바울이 구별해 내려고 하는 것은 좀 똑바로 확인해 봐라, 너희가 세상의 자랑거리들을 가지고 있느냐? 난 다 내팽개쳤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갖는 데는 세상의 것으로는 방해가 될 뿐이다. 세상의 것도 갖고 이것도 갖는 방법은 없더라. 나는 세상의 것을 버렸다. 세상의 것이 뭐냐? 사람 앞에서 나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너 잘났냐? 나도 잘났다. 택시타고 가는 너만 잘났냐? 자전거타고 가는 나도 잘났다. 이 세상의 생존경쟁이요, 인간끼리의 자기 증명과 자존심 싸움이라 거기서 이제 훌훌 털어버리고 나온 것입니다. 그것을 저쪽에서 볼 때는 넌 원래 지게 생겼으니까 기독교로 도망간 것이라 합니다.
네 실력으로는 서울대학 갈 자신이 없으니까 신학대학으로 토꼈지. 현실적으로 그런 사람이 물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에 사도 바울은 할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잘났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증명하려는 기독교 복음이 약화되고 오해받는 것이 싫어서 하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기독교의 복음과 그가 증거하려는 영생의 도리는 그것으로 증명되거나 그것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얘기를 합니다. 내가 너희보다 꿀릴 것이 없다. 그리고 내가 이 일을 하면서 한 일들을 봐라. 내가 얼마나 나를 위하지 않고 내가 어떻게 헌신적으로 일한 사람이냐? 내가 세상적 가치로 봐도 괜찮은 사람이라 따져줘야 된다. 그러나 내 자랑은 내가 얼마나 의지력의 사나이이고 의타심이 있고 헌신적이었느냐로 나를 평가해 달라는 것이 아니다. 나를 위해서 내가 살지 않고 남을 위해서 사는 자가 됐습니다. 사도 바울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가 처음에 갖고 있었던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고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고 율법의 의로 흠이 없었던 것이 지금 와서 쓰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정반대 되는 것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같이 바울은 실력있는 자니까 하나님 나라에서도 스카우트하러 오시고 직접 구단주가 오시는구나. 이 개념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 쪽에서 보자면 제일 방해되고 제일 못나고 제일 조건이 나쁜 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자비와 은혜와 긍휼로 그를 불러내시는데 선생을 보내도 말을 안듣고 누구를 보내도 말을 안 들으니까 결국 주님이 와서까지 붙들어 가시더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영혼들을 불러내시는 일에는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시는 분이심을 확인하는 것이 사도행전 9장의 바울 회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을 뭐라고 평가하나 계속하여 보십시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히라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새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고후11:30-33)
나에 대해서 증명할 것이 있다면 나는 못난 사람이고 약한 사람이라는 것밖에 할 말이 없다. 광주리 타고 도망갔다. 이것은 사나이로서는 창피한 일입니다. 지금 부끄러운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 와 있는 것은 옛날에 가졌던 그의 실력, 그의 천부적인 소질, 이런 것들이 주를 위하여 쓰이는 모습으로 와 있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옛날의 사울은 없어지고 바울이라는 새로운 인물로 만들어진 것은 이것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표현하는 인물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히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만들실 수 있는 분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십니다.
하나님은 적대하고 하나님을 반대하던 그들을 불러온 것입니다. 반대하고 적대하던 대표적인 인물이 바울입니다."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리라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후12:11,12)
사도 바울이 사울에서 바울로 바뀐 가장 중요하고 핵심되는 주의 사도가 된 표는 그때 가졌던 능력으로 어느만큼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본질이 바뀌어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됩니다. 사도의 표 된 것은 모든 참음, 표적, 기사, 능력입니다. 그래서 표적과 기사와 능력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우월감을 증명하는 것으로써가 아니라 주를 증거하기 위해서 동원된 방법들인 것입니다.
주께서 어떻게 은혜로우신가? 주께서 어떻게 사랑이 넘치는 분인가를 증명하는 것으로 여기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이 언제나 환란과 핍박과 고난의 길을 걸은 것입니다. 그는 한번도 형통하거나 승승장구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됐으면 그의 잘난 것이 증명이 됐겠지만.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표적과 기사와 능력은 자신이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과 오래 참음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베냐민 지파요, 이스라엘인 중에 이스라엘인이요, 가말리엘 문하요,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던 자로다 하는 천부적인 자연인이 가졌던 그 우월한 모든 인간의 재능과 실력이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이 권위가 있냐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사람인 것입니다. 이 사람이 그 사람이냐고 물을 만큼 딴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위대한 바울, 태어날 때부터 준비된 바울,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려고 벌써 가말리엘 문하로 공부시키고 남몰래 밤새워 공부시키더니 결국 때가 차매 주께서 친히 가서 길동아 일어나라 길을 떠나자. 이것은 아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돼서 우리에게는 나는 쓸모없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나는 동대문 가는 길에 주님이 나타난 적이 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두 번 아니라 한 번만이라도 불러줬으면 좋겠지만 우리에겐 뭐하나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쓸모없는 존재구나. 그래서 나는 그렇게 특별히 부르지 않고 믿으려면 믿고 말려면 말아라. 그래도 내가 붙들었으니까 그나마 천국이라도 지금 가는 것이지 놓았으면 난 꽝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관심도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바울에 비하자면, 누가 더 뛰어납니까? 우리가 더 낫습니다. 우리는 말로 할 때 알아들은 것 아닙니까? 베드로나 요한이 온 것이 아니라 이 박 목사가 한 얘기 듣고도 돌이킨 사람들 아닙니까? 이 얼마나 셉니까? 설명을 두 번, 세 번 해서 알아듣고 매 맞아서 알아듣는 사람하고, 척 설명해도 아! 하고 알아듣는 사람하고 어느 쪽이 센 겁니까?
물론 여러분이 센 겁니다. 사도 바울, 그 못났던 사울을 바울로 만들어서도 쓸 수 있는 분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쓰겠습니까? 더 크게 쓸 수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런데 왜 없습니까? 여러분이 눈 감고 세상으로 도망가서 그렇습니다. 아니겠지라는 절망과 또 하나 아니었으면이라는 여러분의 소망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직까지도 많은 신자들이 바로 이 사도 바울이 걸었던 것과 방불한, 아니 그것보다 더 놀라운 주의 자녀 된 자로서 승리롭게 걸어가야 되는 인생을 포기하고 이럴 줄 알았으면 죽기 5분 전에 예수 믿고 회개하고 천국이나 갈 것을, 미리 믿어서 주일날 놀러 가자리 뒤통수가 간지럽고 나와 있자니 심심하고, 이렇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기쁨과 즐거움을 여러분들이 아직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필요하다면 주께서 이 땅에 오시며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십니다. 그의 인생에 간섭하셔서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찾아오실 수 있는 분이 우리를 불러내신 것입니다. 우리를 이 자리에 앉힌 것입니다. 왜 우리 인생이 값없겠습니까? 왜 쌀 한 말 푸듯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쌀 한 알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부르신 사람이고 주께서 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하나를 위해서라도 주께서 이 땅에 오셨을 것이고 피를 흘렸을 것입니다. 지금도 여러분 하나에 울고 웃으며 하나님이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계시며 사도 바울이 주님의 마음을 품고 11장에서 읽은 것같이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바울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스승은 더 합니다. 주님이 이렇게 우리가 미련하게 굴면 왜 안타깝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가 실족하면 왜 애타지 않겠습니까? 더 하십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그것이 우리입니다. 바울 같은 것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바울이 결단코 쓰이지 않습니다. 그를 불러낸 주님의 은혜와 실력을 기억하십시오.
바울을 불러내신 열심과 실력이, 그 은혜와 사랑이 그것 이상의 힘으로 우리의 생애가 간섭되었고 우리를 사랑하사 불러내신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우뢰와 같은 음성으로 사울아, 사울아, 하신 그 분이 우리 생애에 찾아오셨고 우리 심령을 두드려서 우리를 붙잡아 내신 겁니다. 여러분 고집을 누가 꺾습니까? 여러분 부모가 꺾습니까? 여러분 남편이 꺾습니까? 부인이 꺾습니까? 주님이 꺾어서 여기 데려 온 겁니다. 여러분이 맨 정신에 여기에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고집을 여러분이 잘 알지 않습니까? 난 한다면 하는 사나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끌어내어 오십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이 복된 은혜와 사랑을 신자들이 종종 놓칩니다. 그리고 누구만 쳐다보고 있습니까? 입 벌리고 침 흘리며 바울, 아브라함, 엘리야 박물관에 가서 구경하는 것 같습니다.
그 동일하신 하나님이, 그 능력과 은혜의 주님이 그를 불러내신 것같이 지금 여러분을 불러내셨고 여러분을 지키고 계십니다. 누가 여러분을 방해하며 누가 여러분 생애를 훼방할 수 있겠습니까? 단 하나입니다. 여러분 자신일 뿐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부러워하는 다메섹 도상의 바울의 회심, 그를 만나신 영광의 주님, 그의 은혜와 자비의 풍성하심 그것이 다 우리의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베풀어져 있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분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생애가 여러분 혼자만의 것이 아니고 이 은혜와 사랑과 능력과 긍휼로 함께 만들어져 가는 생애입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감사와 찬송과 순종을 그 앞에 바치고 남은 생애에서 바울이 걸었던 기적의 생애, 놀라운 보람과 영광의 생애를 실제로 누리십시오. 이것을 방해할 자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전 생애에 걸쳐서 찬송과 감사와 기적을 여러분이 셀 수 없이 누릴 수 있을 것을 성경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약속합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므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사도행전9:1-9
사울이 살기가 등등해서 다메섹으로 가던 노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하게 되는 장면을 지금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꾸짖은 말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그 말씀을 가지고 오늘 생각하고자 합니다.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과 이 도에 대하여 적대하는 행위를 했고 살벌하도록 그 반대편에 서서 힘을 쓴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가지고 주님이 핍박했다라고 하는 표현에는 좀더 깊은 내용적 차원에서의 어떤 이우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2장에 가시면 나중에 사도로 그의 사역을 하는 중 마지막에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유대인들에게 사로잡혀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변명을 하는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거기서 도대체 사도 바울이 왜 기독교를 핍박했고 예수님께서 나를 핍박했다라고 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데 대한 어떤 단서들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 저희가 그 히브리 방언으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가로되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받게 하려고 가더니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웠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나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행22:1-8)
여기 지금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붙잡히고 고소를 당합니다. 이 자신을 적대하고 자신을 고소하는 유대인들에 대하여 자기가 변명하는 중요한 원리가 나도 예전에 너와 똑같았었다 하는 것입니다. 너희와 똑같이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히고 율법에 엄한 교훈을 받은 사람이다. 너희가 지금 그러는 것같이 나도 전에는 이 도를 핍박하고 이 도를 믿는 자들을 대적한 사람이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지금 고소하고 자기를 대적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볼 때 자신의 옛날 모습을 보는 겁니다. 거기에서부터 예수를 만나서 이렇게 변했습니다. 변한 내용은 요즈음 식으로 얘기해서 불교로 가다가 이제는 예수를 믿게 됐다. 이렇게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을 믿는 방법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이 도를 믿는 자들을 핍박해야 된다고 생각을 했었고 이제는 아닌 자로 변한 것입니다. 지금 바울을 대적하고 있는 유대인이나 바울이나 같은 뿌리 유대인이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준 율법을 열심있게 추종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옛날에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것이 주를 대적하는 것이 되었고 이제는 그러지 않는 것이 되었느냐 하는 이 차이가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26장으로 가시면 같은 일을 가지고 아그립바 왕 앞에 서서 변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26:4-15)
여기서도 보면 유대인들과 내가 방불한 사람이요, 동일한 도를 믿는 사람이요, 같은 소망을 가진 사람이고 그래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야 된다고 그때는 생각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변화받기 이전의 상태를 가장 잘 진술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율법을 버렸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고 또 하나님을 배신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같은 하나님을 쫓으며 같은 율법을 지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에는 그것이 기독교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해야 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어떤 때는 그것을 용납하는 것으로 그렇게 사람이 나뉘어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나 회심하기 전의 바울 입장에서 볼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의 가장 곤란한 것이 율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저들이 율법을 폐하는 것같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스데반을 송사할 때 나왔던 고소들입니다. "사람들을 가르쳐 말 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것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행6:11-4)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고 율법을 거스려 말하고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이렇게 심각한 문제냐 이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생활하시는 모습중에 유대인들의 종교 지도자인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에게 큰 충격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동류로 자신을 취급하시고 그들의 친구가 되신 것입니다. 아마 그 시대에도 계급투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분명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율법을 개념과 지금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을 쫓는 제자들에게 있어서의 율법을 개념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면 이제 이 싸움이 무슨 싸움인가 분명해집니다.
마태복음 5장으로 갑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가르치심에 대하여 유대인들의 오해가 있을 것을 미리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5:17). 21-48절까지 유대인들이 이해하는 율법관과 주님께서 이해하는 율법관의 차이를 극명하게 대조시키십니다. 율법의 진실된 뜻이 무엇이며 진실된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1,22)
라가라는 말은 미련하다, 멍청하다, 바보다 하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여기 예를 드시는 몇 가지 율법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이렇게 이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이 율법이라는 것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 속에서 율법을 수용합니다. 이 율법을 지키면 상 받고 어기면 벌 받습니다. 율법이 제시된 그 대상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기네가 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전제조건 하에서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율법을 준 것은 그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누군가를 분명케 하기 위하여 주었다고 얘기합니다. 율법을 이 율법을 지키는 싸움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 율법을 못 지키는 것으로 내가 누구인가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상 설교에 나오는 주님의 율법의 해석을 들으면 여기있는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로 우리를 몰고 갑니다. 살인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이해하는 것은 살인을 했느냐 안했느냐의 싸움입니다.
주님의 지적은 살인을 했느냐가 아니라 네 마음에 형제에 대한 미움이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그것이 열매로 맺히면 살인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미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생각해보십시오. 미운 사람이 누굽니까? 여러분 마음속에 전화번호부보다도 더 두껍게 명단이 있지 않습니까? 저에게도 한 번 물어 보십시오. 미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왜 없겠습니까? 우리 집안 식구 중에도 있는데. 그러나 이제 목사니까 대외 선전용으로 없다고 말하지만 개인적으로 물으면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손가락 발가락을 다 동원해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 편입니다. 죽었다 깨도 자기 편입니다. 아무도 남의 편이 아닙니다. 부모 편도 아니고 자식 편도 아니고 마누라 편도 아니고 언제나 자기 편입니다.
집에 가서 오늘 싸울 일이 걱정입니다. '당신 이제 알고 봤더니' 이럴까봐 걱정입니다. 성경이 지적하는 인간의 죄인 된 모습입니다. 아무도 누구 편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 편을 들 때는 그 편을 들어서 나한테 이익이 있거나 그 편을 들으므로써 제3자의 누구를 죽이려고 할 때만 누구 편을 듭니다. 그 외에 남의 편을 드는 예가 없습니다. 역사상 한 사람도 그래본 적이 없다는 것이 세계사가 증언하는 인류의 공통된 결론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7,28). 간음이라는 것은 결단코 내가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는 것으로만 간음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내 마누라 외의 여자를 내가 안 건드리면 나는 간음 안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지켰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주님은 이 계명을 가지고 다른 여자를 보고 생각을 품었으면 간음한 것이라 합니다.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제가 아는 교인 한 분은 TV를 보다가 예쁜 여자 탤런트만 나오면 입을 다물지 못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히 밝히고 싶은 것은 우리가 누군가입니다.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이 율법을 준 이유입니다. 진실된 목적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을 하지 않고 이 기준이 있는 한 이 기준을 따라서 내가 상받는 일을 할 수도 있고 실패하는 일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서는 이 율법이 만일 폐지된다면 선한 것과 의로운 것을 주도하는 모든 분위기와 기준이 없어져서 인간의 세상 삶이 망가질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 이유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기를 쓰고 적대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여기서 의인이란 유대인들 쪽에서 보면 율법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킨 것과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 동등하다면 도대체 율법을 지킬 이유가 어디 있으며 사람이 선한 의지를 발동하고 죄를 멀리하고 자신을 절제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세상을 망치는 이런 교는, 이런 도는 분명히 내 눈에 흙이 들어가지 않는 한 막아야 합니다. 그래서 아주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지금 방해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것은 우리 중에 아무도 율법을 시행할, 그 율법의 기준을 통과할 사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기준이 우리에게서 분명해져야 됩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직시하도록 율법이 동원되어 있지 우리가 율법을 지킬 것이냐 안 지킬 것이냐의 싸움을 위하여 율법이 제시되고 있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로마서 7장을 보십시다. 나중에 바울이 회심하고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을 받으면서 이제 율법에 대한 진실된 뜻을 해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한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7:5-9)
율법이 여러 가지 금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하지 말라, 이런 것은 하지 말라. 그런데 사람은 사람이 죄인인 것이 어디서 증명이 되느냐 하면 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더 하고 싶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즈음 신문지상에서 여러 가지 추악한 사회 범죄 현상들을 봅니다. 누가 어떻게 돈을 빼돌렸는가? 누가 어떻게 큰 죄를 저질렀는가? 그래서 우리는 맨 처음에 놀랍니다. 아니 이럴 수가 있는가? 두 번째는 야! 그놈 참 신났었겠다. 이 생각이 꼭 든다는 말입니다. 잡히지만 않는다면 해보고 싶은 일로 우리 마음속에 유혹으로 남아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문지상에 발표하는 것 외에 어떤 것들은 언론기관 자체에서 발표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저런 범죄를 저질렀다고 발표를 하면 사람들이 놀라는 것이 아니라 그 범죄를 배우더라는 말입니다. 인신매매가 있다고 발표됨으로써 놀라고 조심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우리도 막가는 인생이 되면 그거나 하자 돈이 드냐 뭐가 드냐?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인간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을 했는데, 그 명령을 받자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계속 탐심이 나를 괴롭혀서 계명이 나에게 오히려 죄를 조장하더라는 것입니다.
어찌 율법이 죄이겠습니까? 율법이 나쁜 짓을 시켰겠습니까만 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건 나쁜 일이다라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에 있는 죄가 나로 하여금 그 금령마저도 하고 싶은 소욕으로 삼아버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명이 임하자 그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가 나의 선한 의지를 발동하고 좋은 일로 나를 추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키지 못한 것으로만 결과가 이어져서 여기 있는 식으로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라는 결론에 이르는 것입니다. 계명을 깨닫지 못할 때는 왜 살았었습니까? 그때는 쉽게 계명을 지키면 되는 문제인 줄 알았다구요. 살인하지 말라. 난 살인 안했다구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서 전도를 할 때 제일 많이 쓰는 말이 뭡니까? 당신은 죄인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을 얻으십시오. 그럼 뭐라고 대답을 합니까? 내가 왜 죄인입니까? 당신 내가 살인하는 걸 봤소, 사기 치는 걸 봤소? 그런다는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다 떳떳합니다. 그 정도로만 따지자면 우리가 살인을 했습니까? 우리가 사기를 쳤습니까? 그 식으로 따지면 우리도 죄인이 아닙니다만 성경이 율법을 제시해서 우리에게 확인시키려고 하는 것은 그 뿌리입니다. 미움이 있지 않느냐 이것입니다.
음욕이 우리 속에 있지 않더냐 이겁니다. 네가 죄인이 아니라고? 이러는 겁니다. 사과나무는 사과를 열매 맺어서 비로소 사과나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과나무이기 때문에 가을에 사과가 달립니다. 죄란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에는 죄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행동을 하지 않는 한 죄가 아니라고 율법을 오해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고 있는 한 정당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이 왜 큰 싸움이 될까요? 이렇게 큰 싸움이 됩니다.
내가 나를 옳다고 인정을 하고 내가 선한 일을 하고 있고 율법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 동안 우리는 주님 앞으로 갈 이유가 없어집니다. 여기가 바로 주님께서 사울에게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깃들어 있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만일 영원한 심판관이신 하나님도 없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도 없고 즉 내세가 없고 이생뿐이라면 요즈음 현대 사회가 가는 식으로 이제 뭐 새삼스럽게 예의니 양심이니 찾지 말고 인생이란 한 번 살고 돌아갈 것인데 서로 까놓고 살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로 하여금 절망케 하고 너는 죄인이다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있고 하나님이 있고 내세가 있다면 거기 들어가기 위한 아주 유일한 방법으로서 율법이 방법이 아니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우리가 그것을 준비하는 일에 있어서 가만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면 우리는 모두 주님으로밖에 피신할 수 없게 됩니다. 즉 율법이 우리에게 이걸 지키자 말자 이걸 지키면 상 받고 이걸 못 지키면 벌 받는다는 기준으로 서있는 한 우리는 주님을 찾아갈 이유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율법이 나를 어떻게 정죄하며 내가 어떻게 죄인인가를 정말 꼼짝없이 항복시키느냐가 제대로 발휘되면 될수록 우리는 주님 앞에, 십자가 앞에 가서 무릎을 꿇게 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옆에 매달렸던 강도가 한 말과 똑같습니다. 주여 오늘 나를 기억하소서. 이 율법의 정죄와 율법의 절망감 없이 우리는 십자가 앞에 인도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다른 종교와 기독교의 차이를 가장 이해못하는 것이 저들도 착하게 살자는 것이고 우리도 착하게 살자는 것이 아니냐라고 이해하는 한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아무런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착함은 뭡니까? 내가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살인하지 않고 사기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교회 나가서 착하게 살자는 것이고 나는 교회 안 가고도 착하게 살자는 사람,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돈내고 학원 가서 착하게 살자고 배우는 사람, 나는 과외공부, 학원 안 나가고 교과서만 갖고도 공부 열심히 한 사람. 이 차이밖에 안 생기는 것입니다.
전혀 다릅니다. 신자란 우리가 죄인인 것과 이대로 있으면 안된다는 것을 확인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주를 찾아나온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지키느냐 못지키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주를 붙잡아야 된다는 것을 인식한 사람들입니다. 로마서 3장 이 말씀을 이런 식으로 기록합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느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3:9-18)
모든 인류를 묘사한 것입니다. 입을 열면 남 죽이는 말밖에 하지 않더라. 어디로 가장 부지런히 달리느냐 하면 사람 짓밟는 곳으로 가장 부지런히 다니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19절)
그래서 율법을 지켜보려고 애를 쓰면서 사람들은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수준밖에 안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시한 최소한의 커트라인에 통과하는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인인 것을 자인케 하는 것으로 율법이 등장을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20절)
율법을 지킬 자가 없습니다. 율법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우리가 죄인이다, 본성적으로 죄인이다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구원을 합니까? 그래서 율법 아닌 방법, 십자가라는 방법으로 구원을 합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 밑에 온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죄인인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법칙을 지키고 어느 만큼의 윤리와 도덕과 선을 쌓음으로써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아직도 자신이 선하고 의로운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한테 이 생각이 얼마나 많으냐 하면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신앙의 핵심을 규범화하기를 좋아합니다.
율법주의와 기독교 신앙과의 가장 큰 차이가 뭡니까? 율법이란 결국 자신을 신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와 다른 모든 종교의 차이가 뭡니까? 다른 모든 종교는 범신론입니다. 범신론이란 인간 자신의 신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간 안에 영적이고 초월적인 어떤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깨우침이 부족해서 아직도 자신을 다 개발하고 완성시키지 못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슬람교식으로 얘기하자면 그 어떤 법을 지키므로 신으로 가는 길에서 이탈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어떻게 다릅니까? 스스로가 스스로를 깨우치고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아닙니까?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저를 지옥에 보내지 마십시오. 이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의 가장 무서운 적이 뭐냐 그럴 때는 우리의 믿는 바를 규범화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의 도로 깨우치려는 것이 가장 무섭습니다.
이것을 물론 이해해야 됩니다. 신앙의 깊이를 갖기 위해서, 풍성하기 위해서 정리해야 됩니다만 그것이 하나의 개념이 되고 관념론으로 빠져서는 안됩니다. 관념론으로 빠져 내가 그것을 이루어나가는 싸움으로 가는 한 우리는 주님을 놓습니다. 기독교는 관념과 철학과 무슨 도에 관한 싸움이 아니고 주님에 관한 문제입니다. 주님과 나의 싸움입니다.
결혼하기 위해서 만난 젊은 한쌍이 상대방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거기서 네가 얼마나 똑똑한가? 네가 얼마나 잘났는가? 네가 얼마나 있는가를 얘기한다면 그것이 상대방을 사로잡기 위한 것으로 등장하는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연애란 어떤 것입니까? 연애학 개론부터 시작해서 결혼학 본론으로 하는 것은 바보입니다. 상대방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분과 나와의 문제가 해결돼야 되는 것입니다. 그분을 사귀고 그분 마음에 드는 싸움을 해야 됩니다.
네가 얼마나 성경을 많이 읽었는가? 성경에 대하여 박학한가 하는 것은 도무지 관계가 없습니다. 만일 그것이 필요하다면 주를 알고 주와 더 깊이 사귀는 방법으로써 그것을 쓰셔야 됩니다.
여기가ㅣ 바로 우리가 모자라는 부분입니다. 언젠가 한 번 안식일 강의를 하다가 그 강의를 실컷 해놓고 끝에 허탈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안식일이라는 것은 구약시대에는 지금으로 말하면 토요일날 지켰습니다. 제7일 내에 지켰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안식후 첫날로 안식일의 개념이 주일로 승계되면서 요일이 바뀌었습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도록 구약에 명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도 해서는 안됩니다. 그 이유는 이런 상징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엿새 동안 지으시고 이레 되는 날 쉬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너희가 천지를 만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신이 아니다 이겁니다. 나만이 신이다 이겁니다. 너희도 피조물이고 너희가 지금 누리는 모든 것을 내가 만든 것을 가지고 너희가 누리는 것이다.
이 상징으로 안식일은 아무 일도 하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개념으로는 구원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죄인되었고 타락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의 협조를 받은 것이 아니고 우리의 요청을 받은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만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우리를 구원해 내십니다. 혼자하셨습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은 것이다. 내가 일한 대가로 받은 것이 아니다라는 상징으로 이제 그 안식일을 승계한 이 주일, 예수님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안식후 첫날 주일을 아무것도 안하는 것으로 안식일 개념과 어쩌면 조금은 일맥상통하는 개념 속에서 이 날은 일을 안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일을 안한다는 상징은 이 온천하 만물의 주인이시요 창조주는 한 분 하나님뿐이시며 우리도 피조물이다.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기업과 영원한 상급을 주시려고 하시는 분이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혜로 주셨다. 이것을 상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아무것도 안합니다. 하나님, 저 사람은 오늘 일했습니다. 그래서 불러다 때려 죽이고 난 안했으니까 훈장 하나 달고 하는 이것을 위해서 아무것도 안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개념은 아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8장에서 보면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에 데리고 왔습니다.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어떻게 할까요?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죄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처리하셨습니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다 빠져나가고 여인만 남았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고 보냅니다. 안식일의 정신이 이것입니다.
마가복음 2장 같은데서는 이런 싸움이 벌어집니다. 제자들이 안식일날 밀밭을 지나가다가 배가 고파서 밀이삭을 비벼서 까먹습니다. 그래서 옳다 됐다고 시비를 겁니다. 안식일날 아무일도 안해야 되는데 왜합니까? 주님이 대답하십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
이 정신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기독교 신앙의 정신을 이해하십시오. 이것이 무엇을 지키는 법칙, 내가 남보다 잘났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들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나쁜 것은 주님과 십자가를 가로막고 서서 오늘식으로 표현하면 주님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막고 서서 나는 어떻게 법을 지켜서 잘난 사람이요 너는 얼마나 형편없는 놈이냐를 비교하고 확인하는 싸움으로 신앙을 끌고 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나 같은 것도 예수를 믿는다고 말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율법적 차원에서의 절망과 좌절이 있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정말 아가씨와 건달들에 나오는 식으로 얘기해서 싱싱한 죄인입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바로 십자가를 찾아오셔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가 외치는 복음입니다. 기독교는 의인을 구하겠다는 종교가 아닙니다. 죄인을 구하겠다는 종교입니다.
십자가로 여러분을 부릅니다. 우린 모두 죄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지 못할 때 십자가를 막고 있습니다. 주를 핍박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그 회심하는 장면에서 주님 앞에 꾸중 듣는 중요 무쌍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모든 인간이 갖는 본성적 차원에서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이 실수를 범합니다. 주를 찾고 그에게 자비를 구하는 것을 놓칩니다. 떳떳하려 그럽니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거하는데 너무나 많이 시간을 보내고 주님을 만나는 시간을 빼앗깁니다. 주를 찾고 은혜를 구하고 긍휼을 구하십시오. 그것보다 더 훌륭한 신앙은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세상적인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으로만 만나지 마시고 그분이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우리를 용납하시고 부르신다는 사실로 인하여 존재론적으로 그분을 만나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문제를 그분과 상의하십시오. 영원한 운명과 내세와 그리고 금세에서 사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그분께 인정받는 삶을 의논하십시오. 그를 찾는 이들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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