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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행9:23-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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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영선 목사 |
참고 : | 056/ 1989.05.07 |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사도행전9:23-31
오늘 본물 말씀을 보면 흥미있는 말씀이 하나 등장합니다.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9:31). 이 말의 결론이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9:31)로 이어갑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쉽게 사도 바울의 회심을 연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역시 바울이다. 바울이 회심을 하더니 초대교회가 평안하여지고 든든하게 서 가고 신자가 많아졌다. 마치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담대해진 베드로의 한 번 설교로 3,000명이 회심하는 사건이 연상되는 기록 같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31절이 등장하기 위하여 23-30절까지를 보시면 모두 바울에 관한 얘기인데 아직은 이름을 바꾸지 않고 사울이라고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만 바울이 거기서 교회에 무슨 보탬이 되는 일을 했다는 것이 없습니다. 거의 전부 도망다닌 얘기입니다. 거기는 바울이 얼마나 초대교회에 유익한 인물이었는지, 힘있게 일조를 했는지 이런 말이 없습니다.
다메섹에서 그를 죽이려는 음모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리 타고 탈출해서 예루살렘에 오고 예루살렘에 오니까 먼저 믿은 제자들이 그를 만나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직 그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 덕분에 간신히 소개받고 그 다음에는 예루살렘에서 그를 죽이려는 음모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다소로 도망간 얘기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그리하여'라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9:31)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부분에서 이상해야 됩니다. 이 앞에 있었던 사건들을 9:31에 오기까지 대강 살펴보면 우선 예수님 죽으시고 부활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령강림이 있었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지만 성령강림 이후에 있었던 일들을 잠깐 생각해 보십시오. 그 다음에 교회가 승승장구 하고 형통해 가는 모습이 아니고 어려움을 겪는 모습으로 여기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물론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그 출중한 모습, 빌립 집사의 뛰어난 전도 활동 등을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분위기나 사정은 악화 일로에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제자 외에는 핍박을 피하여 다 도망가 버리고 흩어졌습니다. 빌립도 드러내서 공개적으로 그의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채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도록 감춰진 일들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스데반이 죽고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이 불어 닥치고 여럿이 죽게 되고 사도들을 제외한 신자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남아있지 않는 이런 상황 속에서 그리하여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은 사실 우습습니다.
거기에 그리하여가 등장할 만한 유일한 일이 있다면 사도 바울의 회심인데 그것은 우리가 너무 성급하게 갖다 붙이는 원인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이 이후에 큰 일을 했지 이 시점에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 도움이 될 만큼 아직 어떤 업적을 남길 위치에 서지도 않았고 그럴 만한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사도행전에서는 이 시점에서 그리하여 초대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갔다라고 얘기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이런 힌트가 있습니다. 31절 하반절을 보시면 무엇 때문에 평안하고 든든히 서 갔느냐?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 덕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피려는 본문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되는 아주 중요한 내용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의 승리와 성공의 비결이 형통함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사도행전 9:31 같은 본문을 만날 때에도 이렇게 된 이유는 성공할, 형통한 어떤 하나님의 간섭이 있었을 거다라고 지레 짐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회심 때문에 그가 와서 교회를 위하여 사역을 하게 되자 초대교회는 강하게 됐다라는 등식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고 주를 경외함이 초대교회에 든든함과 평안함에 유일한 근거였다고 얘기를 합니다. 우리가 근거고 원인일거라고 생각하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성경에는 언급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기독교와 기독교 신자들이 갖는 든든함, 확신 그 힘과 능력이라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 하느냐 할 때 성경은 언제나 형통함이나 순탄함이라 그러지 않고 절망과 실패와 난관을 그 근거로 듭니다. 왜냐하면 난관과 절망과 실패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만나고 자신의 한계를 만나야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직면하는 이 사건이야말로 모든 신자에게 있어 특별히 오늘날의 현대를 사는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필요합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신앙이라는 것은 이상스럽게도 기독교라는 신앙을 가짐으로써 난관과 절망을 모면할 수 있는 것이라는 개념이 훨씬 강합니다.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하여 훨씬 인생의 고통과 어려움과 난관을 덜 만날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신앙이 좋으냐 나쁘냐 하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느냐와 비례하는 것으로 생각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이 말하는 바 절망과 실패를 만나서 인간이 인간의 한계를 직시하고 거기서만 만나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대면하는 일이 없으면 기독교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평안함을 연장하는 것, 고통을 면하는 것에서 정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명하는 방법은 난관과 절망을 빼놓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을 만나지 않고서 인간이 그의 한계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필요성을 인식할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그 고통에서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 없이도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나님. 이렇게 기도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이 기도가 응답될 리가 없고 만일 그 기도가 응답되었다면 그 사람은 곤란한 사람입니다. 성경에서는 언제나 이 문제가 아주 중요한 것으로 대두됩니다.
아주 대표적인 예로 욥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욥은 우리가 볼 때 고난과 절망을 만날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욥기 1장에 보면 욥이 어떻게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으며 자기 자식들도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는가 하는 기록이 자세하게 등장을 합니다. 부지중에 실수를 한 것이 있을까봐 꼭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뒤에 제사를 지내며 현대식으로 말하면 회개 기도와 거룩한 제사가 꼭 따라다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욥의 생애에 불행과 고통으로 그를 간섭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욥은 그의 신앙이 정금같이 단련되고 귀로 듣기만 하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자리에 갑니다.
여러분은 끊임없이 그렇게 묻고 싶을 겁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방법이 있냐고 묻는다면 이것은 우리 애들이 하는 질문과 똑같습니다. 아빠! 어떻게 공부를 안 하고도 시험을 잘 보는 방법이 없을까요? 이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질문입니다. 회사에 안 나가고 월급을 받는 방법이 없을까요. 이것만 하나 특허를 내면 거저 앉아서 먹는건데, 그렇죠? 손을 움직이지 않고 밥을 먹는 방법이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해 보시죠. 눈을 뜨지 않고 앞을 보는 방법은 없을까? 이런 질문과 하나도 틀린 것이 없습니다. 이상하게도 공부를 안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방법이 없는가라는 것은 말도 안되는 질문이라고 하면서도 인간의 한계를 직시하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대면하기 위하여 우리가 우리 한계를 보는 절망과 실패를 맛봐야 한다는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간섭하시는 이 복된 일들에 대해서만은 우리는 눈을 돌리고 등을 돌리고 따져보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도 모르게 늘 잡혀드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사도행전 9장에 나타난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를 경외함이 지금 초대교회의 평안함과 든든함의 근거입니다. 외적으로 보면 온갖 어려운 조건과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 권세를 쥐고 있고 그 여론이 아직도 팽배한 사회속에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였던 주님은 안 계십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실제로 핍박을 받았고 온 유대의 지도자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기로 결의를 했습니다. 그들을 잡아 채찍질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고 감옥에 가둔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들을 조롱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저들이 확신에 차서 거리에 뛰어나오자 모든 사람이 저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놀렸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자 잡아가두고 채찍질하여 놓아주었습니다. 가장 뛰어났다고 얘기할 수 있었던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습니다. 어느것도 지금 초대교회가 평안하고 든든해질 외적 조건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됐느냐 초대교회가 이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이 겪는 세상적 시각에서의 실패가 절대 실패가 아니며 그들이 약한 것이나 하나님이 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디어 배우는 겁니다. 대표적으로 이 사도 바울의 회심에서 배웁니다. 첫 번째 이들이 배운 것은 우선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혀가시고 죽게 되자 제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이 끝이 아니고 주님께서 부활하십니다. 성령께서 오십니다. 저들은 거기서 아마 가장 큰 교훈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실패와 절망이 절대 실패와 절망이 아니라는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것을 저들이 배웠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전보다 더 힘 있었고 더 능력이 있어졌습니다. 이제 저들은 감옥이나 채찍질로는 좌절시킬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으로 배우는 겁니다. 거꾸로 가는 것을 꼭 보십시오. 주님이 왕권을 얻고 빌라도를 몰아내는 것으로 제자들이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배웁니다.
그 사건을 겪은 이후로 저들은 감옥과 채찍으로 저들을 막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제 저들을 그렇게 반대했던 세력의 선두 주자 사울이 하나님 앞에 거꾸러집니다. 그래서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더구나 거기는 이런 일이 있습니다. 저들을 대적하던 적대 세력의 우두머리였던 사울이 하나님 앞에 거꾸러졌을 뿐만 아니라, 그 적대 세력의 힘이 꺾였을 뿐만 아니라, 저가 은혜와 긍휼의 대상이 됩니다. 이것이 초대교회가 갖는 평안함과 든든함의 실제적인 근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온 우주만물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그 역사를 진행하시는 주인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 모든 신자가 가져야 할 확신의 근거입니다.
그것을 이들이 갖고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듯이 사울이 일어나 자기들을 다 죽이려고 덤벼드는 것이 하나님이 지금 세상과 싸우다가 막상막하가 돼서 이렇게 떠밀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어려움은 하나님이 잠시 우리를 방치했거나 하나님이 지셨거나 세상이 우리를 손댈 수 있는 권세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 그것대로 하나님의 깊은 뜻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혹 울 일이 있고 비명을 지를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끝이거나 절망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빼앗길 수 없는 신자의 평안함이고 빼앗길 수 없는 신자의 힘입니다.
다니엘서 9장에 가시면 이 문제에 관한 아주 대표적인 사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있을 때입니다. 포로된 자중에 다니엘이라는 신실한 사람이 이제 주 앞에 회개하는 장면입니다. 이 내용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 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자시여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와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여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욕은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날과 같아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과 이스라엘이 가까운 데 있는 자나 먼데 있는 자가 다 주께서 쫓아 보내신 각국에서 수욕을 입었사오니 이는 그들이 주께 죄를 범하였음이니이다 주여 수욕이 우리에게 돌아오고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마는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사유하심이 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패역하였음이오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여호와께서 그 종 선지자들에게 부탁하여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법을 행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온 이스라엘이 주의 율법을 범하고 치우쳐 가서 주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이 저주가 우리에게 내렸으되 곧 하나님의 종 모세의 율법 가운데 기록된 맹세대로 되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 주께서 큰 재앙을 우리에게 내리사 우리와 및 우리를 재판하던 재판관을 펴서 하신 말씀을 이루셨사오니 온 천하에 예루살렘에 임한 일 같은 것이 없나이다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 모든 재앙이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사오나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은총을 간구치 아니하였나이다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재앙을 간직하여 두셨다가 우리에게 임하게 하셨사오니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는 행하시는 모든 일이 공의로우시나 우리가 그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강한 손으로 주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오늘과 같이 명성을 얻으신 우리 주 하나님이여 우리가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나이다 주여 내가 구하옵나니 주는 주의 공의를 좇으사 주의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이는 우리의 죄와 우리의 열조의 죄악을 인하여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에게 수욕을 받음이니이다."(단 9:1-16)
이 내용 가운데 핵심되는 내용을 발견하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게 잡혀온 것은 군사력이나 정치력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나라에서 풀려나려면 이제 다니엘이 독립 투사를 기르고 비밀 결사를 만드는 것이나 국력을 부강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온 우주만물과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일어난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일어날 것이지 세상의 인간이나 나라나 권세나 자연의 어떤 일들이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자연만의 법칙대로 이루어진 일은 없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일은 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셔서 닥치게 하는 일 중 하나입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가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 편이고 하나님이 내 편인 이상은 우리에게 닥친 일이 무슨 일이라 할지라도, 사망이 우리 앞에 입을 벌리고 있을지라도, 사자가 입을 벌리고 있을지라도 겁이 안 납니다. 자동차가 100km로 여러분 앞에 들이닥쳐도 실감이 나십니까? 겁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자 입에서 다니엘을 구하시고 달리는 차 앞에서 여러분을 구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무슨 일이든 그것이 하나님의 간섭과 계획과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일이 없습니다. 형통함과 순종함으로 우리의 힘을 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법칙과 세상에서 필요한 것으로 힘을 갖는 것입니다.
아주 재미있는 기도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고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주만을 의지해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겠습니다. 그러니 돈을 주십시오.' 그러니 그 놈의 돈을 벌 수가 없지요,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이 그 나머지는 다 책임지신다는 것을 손에 돈이 와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하나님이 아니라 돈을 믿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시편 139편에 하하님이 온 천하만물의 주인이요 역사의 주관자시다 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란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 139:1-4)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24)
이 내용을 보면 다윗이란 이런 면에서 훌륭한 사람인 겁니다. 그가 깨끗하고 정당하고 정직해서 훌륭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누구인가를 너무나 잘 알아서 훌륭한 것입니다. 이 시 속에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 저를 잘 아사지 않습니까? 이겁니다. 안다는 것이 여기서 왜 등장을 하느냐 하면 제가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겉으로만 하는 척하는 것으로 속지 않는 분이다는 것입니다.
속마음을 아십니다. 내 진심이 그렇지 않은 것을 언제나 압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눈가림을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갈 수도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마음에 들지 않게 행했을 때 하나님의 심판과 눈으로부터 도망갈 데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도망갈 수도 없고 하나님을 속일 수도 없으며 내가 정당한 수밖에 없는데 나는 밤낮 악하다는 말입니다. 그럼 문제는 이제 어떻게 하느냐는 겁니다. 속일 수도 없고 도망갈 수도 없는데 나는 늘 악합니다. 여기에 답이 나옵니다. 그러니 하나님 제가 어떤 놈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따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이것이 시편 139편의 주제입니다.
주여 나는 괜찮게 했습니다. 저 원수는 저렇게 살았지만 저는 아닙니다. 저 원수는 죽이고 저는 잘해 주십시오. 이것이 아니고 하나님, 제가 악당인 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제 행위대로 갚지 마시고 제 생각대로 처리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을 따라 갚으소서. 이것이 성경입니다.
결국 모든 신자가 갖는 믿음의 제일 큰 근거는, 하나님은 온 우주와 세상과 역사의 주인이시며 내 인생에도 주인이신데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복 주시기를 기뻐하는 분입니다. 그러니 무엇이 겁나겠습니까? 이것이 신앙입니다. 말하자면 오늘 우리가 본 사도행전 9:31이 그 자리에 있게 되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이리하여 아무 근거가 없습니다. 이것 때문에 초대교회 신자들이 그 마음이 든든해지고 빼앗길 수 없는 화평 속에 있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서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반대하는 자를 치실뿐 아니라, 꺾어 방해꾼을 밀어내시는 정도가 아니라 그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시는 자비하심. 이것이 저들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도 방해할 수 없는 저들이 갖고 있는 기쁨과 확신의 근거가 되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런 결론에 도달해야 됩니다. 신자란 무엇으로 그의 든든함을 삼아야 하는가? 초대교회는 무엇으로 그들이 든든한 자리에 갔느냐? 무엇으로 평안을 얻었느냐? 주를 경외합니다. 주의 주 되신 그의 권세, 그의 힘, 역사의 주인 되심과 우리를 사랑하심, 우리 편이심이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무엇이 우리의 든든함이냐? 든든함이 이제는 손에 쥔 것-돈, 세상의 권세, 명예-이 아니라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 옆에 있는 것을 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으로 가 보십시다. 성경은 언제나 이래서 환난과 고통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든든함으로 보내기 위한 것이란 말입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한 줄을 앎이라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고후 1:3-9)
자, 사도 바울마저도 살 소망까지 끊어진 이 환난을 통하여 무엇을 더 굳게 하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만 의뢰하는 법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우리의 든든함입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영어를 가장 잘 배우게 하려면 미국이나 영국에 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에 보내면서 조심해야 될 것은 한국 학생이 없는 학교가 없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가서도 제대로 영어를 배우려면 기숙사에 들여보내는 겁니다. 미국 학생들과 함께 있게 하여야 합니다. 한국 학생들끼리 모여 아파트 얻으면 영어 또 못합니다. 가서 듣고 와서도 한국말로 하니까 아주 영어만 쓰는 데 집어 넣어야 되는 겁니다. 그 얼마나 답답하죠? 생각해 보세요. 처음에 말이 안 통하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달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저희 후배 하나는 유학 가서 웃기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 인사법 중에 멀리서 손가락으로 손짓을 하며 인사를 합니다. 이 학생이 거기까지 쫓아가서 왜 불렀느냐고 하자 그 여학생이 얼굴이 홍당무가 돼서 도망을 갔다고 합니다.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됩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은 나중에 나이가 많아서 연수 교육을 가셨는데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돼서, 하루는 강의실 복도에서 큰소리로 "아이구 죽겠네"라고 하셨답니다. 그랬더니 이것이 하늘에서 들려온 방언인가 하고 교실에서 사람들이 다 튀어나왔더랍니다. 저들로서는 도무지 모를 방언이 큰 우뢰소리와 같이 들렸으므로 나와 보니 얼굴 노란 사람이 뺑소니를 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영어 교육이 안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당하는 모든 난관이 여러분을 하나님에게로 밀고 가는 것이어야 맞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모든 문제는 사실 복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기서 어디로 가죠? 봐라 예수 믿어선 안된다 이겁니다. 성경이 하라는 대로 해선 안된다 이겁니다. 그래서 자꾸 확실한 것 잡으러 가는 겁니다. 타잔이 붙잡은 덩굴같이 이것 놓으면 떨어진다는 겁니다. 세상으로 세상으로 더 갑니다. 우리가 만난 모든 환난과 모든 절망과 실패가 하나님 앞으로 몰고 가기 위하여 하나님의 보내신 유학입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 유학 온 것입니다.
시편 34편에 가면 다윗은 이 사건을 이렇게 고백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시 34:1-9)
다윗이 주를 의지해서 어떤 큰 성공을 맛보고, 말하자면 골리앗을 물리치고 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굉장히 난감한 일을 당하고 한 기도문입니다. 그 34편 밑에 부제가 달려 있는 것을 보십시오.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입니다.
다윗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골리앗을 죽이고 구국영웅이 됩니다. 그의 인기가 너무 높자 당시의 왕이던 사울이 그를 미워합니다. 그래서 그를 죽이려고 하자 다윗이 도망가다 국내에서 더 이상 목숨을 부지할 데가 없어서 적국인 블레셋까지 도망을 갑니다. 다윗이 블레셋에는 철천지 원수입니다. 그 나라의 최고의 장수인 골리앗을 죽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도망을 갔어야 됐던 겁니다. 거기 가서 옛날 유비가 조조 휘하에 들어가 있는 것같이 가서 아첨떨고 그 나라의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 나라의 귀족들이 저 사람은 결국 우리 민족의 적인데 살려두었다가는 후한이 있을 겁니다. 죽입시다 합니다. 그래서 결국 죽이기로 결정을 하고 죽이러 갑니다. 유비가 조조 휘하에서 도망갈 때 어리숙하게 한 것같이 그가 미친 체합니다. 수염에 침을 흘리고 완전히 미친 사람 흉내를 내서 미친 놈인데 죽여가지고 내 칼에 더러운 피를 묻힐 것이 무엇이냐? 하고 놓아줘서 간신히 살아납니다. 그런 후에는 지금 읽은 시를 쓰는 겁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하며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며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자기가 모든 꾀를 다 써서 간신히 굴러서 개구멍으로 도망나온 것인데 그런데도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를 건졌다고 합니다. 그렇게 얘기 할 수 있는 사건입니까?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이것도 재미있습니다. 여기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 하는 이 맛이라고 하는 단어가 재미있습니다.
이 미친 척, 미쳤다라는 말은 히브리어에는 맛이 변했다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는 것은 하나님의 맛이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여기에서 겪은 것은 외적으로 보면 목숨이 경각에 달했던 위기였고 참으로 구차하게 목숨을 연장한 어려운 일이었을지 몰라도 내적으로는 그가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하나님의 더 깊은 교제에 초대받은 일이 있었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신자의 든든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평안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약속받으셨습니다. 빼앗기지 마십시오. 손에 쥐어진 세상에서 필요한 것으로 여러분의 든든함을 삼지 마시고 그런 것을 다 빼앗긴 자리에서 드디어 찾게 되는 그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시기 위하여 일부러 여러분 손에 든 것을 다 뺏으신 그 부르심을 깊이있게 추적하셔서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하나님의 손을 붙잡으시고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그 분의 사랑과 그 분의 위로와 그 분의 보호를 받는 그 자리에 앉은 평안과 위로와 확신과 든든함으로 여러분의 힘을 삼으십시오. 다른 것으로는 여러분의 힘을 삼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어떤 위치에 있을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된 약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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