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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성과 불연속성

사도행전 박영선 목사............... 조회 수 2241 추천 수 0 2009.06.25 00: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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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13:1-3 
설교자 : 박영선 목사 
참고 : 사도행전 070-071 1989.08.13/08.20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랍에게 안수하여 보내리라”    사도행전 13:1-3

사도행전 13:2을 보시면 “주를 섬겨 금식할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하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사도행전 끝나기까지 사도 바울이 주인공이 되어 선교여행을 시작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사도직을 수행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기록됩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이 행한 이러한 일들을 구체적으로 추적하기 이전에 이 모든일에 대한 기본적인 안목을 정립하고 지나가야 됩니다.

한글 번역 성경에는 정확히 안되어 있지만2절에서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우라”(행13:2)라고 했을 때의 ‘내가 불러 시키는 이’이란 것이 원문에 의하면 완료형 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내가 불러 시키기로 이미 작정한일을 위하여”라고 표현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이해하기 좋습니다. 즉 성령 하나님께서 사울과 바나바에게 지금 이시점으로부터가 아니고 훨씬 오래 전부처 계획을 갖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문제를 제기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오래 전에 어떤계획과 뜻을 갖고 계셨다면 왜 바울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것같이 이시점에서 부르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스데반을 죽이게 놓아 두고 한동안 시행착오를 일으키도록 놔두시고 뒤늦게야 부르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 속에서도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할 때에 왜 하나님이 이 일을 말리시지 않는가? 이 일을 깨우칠 지혜를 왜 미리 주시지 않는가? 그것을 이길 힘을 왜 주시지 않는가? 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신자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어떤식으로 부름을 받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만은 우리가 오해가 없어야 됩니다.

이문제는 갈라디아서 1장에 가면 사도 바울 자신의 설명을 통해서 좀더 분명하게 기록된 것을 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갈 1:11-16)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알고 있는 것은 그가 깨우친 것도 아니고 누군가 다른 사랍에게 배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것입니다. 정말 신비스렵게 계시로 알게 하는 것인데 그일을 언제부터 준비하셨느냐 하면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책정하셨다라고 시기를 애기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문제로 삼고 싶은 것는 왜 그토록 시행착오 이후에 시작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시점에서 오늘 설교의 내용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회심 전과 회심 후에 연속성을 가지는 것과 불연속성을 가지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분명히 신자는 불신의 시기와 신자가 된 시기에 연속성이 없다는 것을 이렇게 애기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분명히 새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얻는 것을 중생이라 합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옛날 사람은 죽고 새로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불연속성입니다. 그런데 이 불연속을 어디에 많이 이용하시느냐 하면 ‘신자가 되어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고 기도를 할 수 있으니 이제 내 삶이 평안하고 형통하리라’하는 쪽으로 인용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많습니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이제는 알았어요’ 이것은 대표적인 간증의 어투인데 ‘옛날에 이랬는데 지금은 이렇게 됐습니다.’ 보통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는 많은 간증문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의 내용은 옛날엔 이렇게 아팠으나 지금은 나았다라듣가 예전엔 이렇게 고통 속에 있었으나 지금은 행복하다, 옛날엔 늘 울면서 살았지만 지금은 늘 웃으면서 산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진리의 한 면인 것이 사실이고 신자 된 자가 누리는 경험의 일부인 것이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상당히 곤란한 요소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즉 신자가 되면 세상이 불신자일 때와 다른 태도로 신자를 대접히 주더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지 않았을때 세상이 나한테 하던 것과 내가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세상이 나에게 하던 것은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차이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성겨은 세상을 살아 나가는 데 형통과 행복을 성경은 약속한 것이 없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요즈음 여러분들도 혹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원주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엘리야 복음 선교원이라는 데가 있습니다.

그 선교원을 운영하시는 분은 ‘나뭇꾼 선생님’ 이라는 별명이 붙어있으시던데, 어떤 성도님이 그곳에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고침을 받은 사람들의 간증문을 모은 책을 보내 주셨습니다. 「흑암 중에 만난 광명」이란 제목으로 되어 있고 그 안에 많은 간증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간증을 보면서 제가 두려워했던 것은 이것입니다.

그 선교원은 (일종의 기도원입니다만) 기존 교회들에 의해서 상당히 많이 백안시되고 이단이라고 정죄를 당하고 있는 모양인데 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뭐라고 논평을 할 문제도 아니고 그 선교원이나 거길 운영하시는 분이나 거기 가서 체험을 하신 분들에 대해서도 저는 비평적이거나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다만 간증한 내용들 일반에 걸쳐서 그것이 우리 모든 신자들이 기대하고 갈구하는 내용과 일치하기 때문에 제가 문제 삼고 있는 것뿐입니다.

‘옛날엔 우리 가정이 늘 부부가 싸우고 가족이 칼부림을 했는데 거기 가서 변화받아서 그것이 없어졌다.’ 대부분의 간증의 결론이 그것입니다. 옛날에는 내가 이렇게 못된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즉 내가 믿지 않았을 때는 세상이 악하게 굴어서 세상 아래 내가 신음했는데 예수를 믿음으로써 어떤 비법을 터득했다는 식으로 성경은 약속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 문제의 골자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을 창세 전에 어머니의 태로부터 예정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뒤늦게야 부르시는가라고 문제를 제기한 내용이 결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기대하는 식으로 새 사람이 되고 문제가 없어지고 모든 비법을 얻을 수 있은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시고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기를 기뻐하는 분으로서 왜 그것을 그렇게 늦게까지 지연시키다가 주시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겁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시 한 번 바울의 회심 장면으로 돌아갑니다. 사도행전 9장입니다. 주께서 아나니아라는 제자에게 사울을 찾아가서 그의 눈을 뜨게 하라 하자 아나니아가 반대를 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사울이 장차 어떻게 쓰일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대목입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9:15,16). 우리가 기대하는 것같이 사도 바울이 사도가 된 이후에 능력을 행하고 형통한 길을 걸음으로 하나님의 종 노릇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즉 그가 회심하기 전과 회심 후에 불연속적인 것이 있고 연속적인 것이 있는데 어디가 불연속이냐 하면 옛날에 그가 가지고 있던 목표, 가치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늘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신자를 대하는 태도와 신자가 이 세상을 사는 데 있어서 갖는 조건은 연속적입니다. 즉 변화가 없습니다. 예수를 안 믿을 때도 감기들고 예수 믿고도 감기 들고 예수 믿기 전에도 세상이 우리에게 나쁘게 굴었고 예수 믿고 난 다음에도 나쁘게 굽니다. 그 문제에 관한 한 회심하고 신자가 됐다는 것으로 절대 어떤 변화가 없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문제에 있어서 변화란 무엇만 있느냐 하면 세상을 보는 우리의 눈 그리고 무엇이 진리냐?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느냐? 여기에만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조건에 있어서는 나와 세상 사이에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단 하나 변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으로 새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고 하나님을 알고 그에게 순종하며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소원인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기쁨이란 외적인 도발과 핍박과 비극이 없어서 오는 행복이 아니라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갖는 행복만을 의미합니다. 부부싸움이 없어진 가정의 평화가 아니라 부부싸움에도 불구하고 가지는 행복으로만 신자는 변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잘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종종 이런 전화를 받습니다. 옛날에는 예수 믿는 문제를 갖고 남편을 완전히 묵사발을 만들었다 이겁니다. “돈밖에 모르는 속물, 당신 같은 사람은 나니까 결혼해 주고 지금까지 살지! 다른 여자 만났으면 지금쯤은 인간도 아닐 거예요.” 이렇게 경멸을 하다가 예수를 믿고난 후에는 아내는 아내 노릇을 하고 열심히 살아야 된다는 걸 배우고 옛날에 하던 짓을 하지 않고 남편에게 잘하고, 지고, 양보하고, 늘 웃고,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대고, 술 먹고 들어오면 꿀물 타주고, 도박하고 들어오면 가락지 빼주고 그랬더니 아! 이놈의 남편이 옛날보다 더 기고만장해져서 아주 사람을 우습게 보더라 이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하라는 대로 했더니 훨씬 망했다.”

성경은 하라는 대로 하면 세상이 당신네에게 행복할 것이라고 약속을 한 적이 없습니다. 세상은 더 조롱합니다. 마치 무엇과 같습니까? 예수님께서 말고의 귀를 고쳐 주자 더 기가 살아서 감히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수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하여 놀라고 항복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주께서 기뻐하는 일이라는 그평안과 행복을 못 뺏는 것이지요. 이러한 기쁨은 안 찾고, 성경이 하라는 대로 했다가 저는 쫄딱 망했습니다만 가지고 와서 불평을 한다면 그 사람은 지금 신자가 갖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관점에서 사도 바울을 봅시다. 사도 바울울 택하시고 그를 왜 이제야 불렀는가 하는 문제에서 우리는 이것을 발견해야 됩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창세 전에 택하시고 그의 어머니의 태로부터 조성하셔서 그의 사도로 불러 무엇을 시키려고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분명해지면 하나님 앞에 부름받은 신자들의 모습과 하나님이 신자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하는 것이 분명해지고 우리가 무엇을 기대해야 되는가 하는 것도 분명해집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받은 부름과 사도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자기가 무엇으로 쓰임받는가 하는 것을 정확히 압니다. 디모데전서 1장입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중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 1:12-16)

자, 하나님 잎에 쓰임받는다는 것을 제발 오해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모자라서, 그에게 어떤 보조자가 필요해서 우리를 그의 종으로 부르시지 않습니다. 또 구정물에 직접 손 담그기 싫어서 하수도를 들쳐야 될 일이 있으면 우리라는 부지갱이를 붙잡아서 하시려고 부르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일을 위해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부름을 받은 모든 종들은 그사람이 부름받은 자체가 가는 메시지 때문에 부름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구원을 얻고 그앞에 영광된 직분을 맡았다는 것이 메시지이다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사도 바울이 하는 식으로 애기를 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러 오셨으며 자기를 제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13장부터 시작해서 28장에 이르도록 행하는 일을 보고 사도 바울의 능력과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갖는 열심에 대하여 우리가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엄청난 일을 도대체 누구에게 맡기시는가 하는 데서 은혜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을 죽이고 하나님을 반대하고 하나님 믿는 자들을 훼방하던 자가 긍휼을 입었다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갖고 있는 믿음이요, 우리를 향하여 팔을 벌리고 계시는 모든 것의 내용이라는 것이 사도 바울이 사도직을 받든 가장 큰 이유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제사장직이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이란 것은 자기 혼자만을 위하여 있지 않고 제3자를 위하여 중개인 역할을 하는 자입니다. 이 일을 맨 처음, 최초로 부름을 받은 사람이 아브리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복락만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창세기 12:3에 약속한 것과 같이 너로 인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얻으리입니다.

이 직분은 아브라함에게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주어집니다. 출애굽기 19:6 이하에 의하면 ‘너희는 나의 거룩한 백성이고 나의 제사장 나라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는 것은 이스라엘만 부르고 나머지는 버리겠다는 뜻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인하여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게 하는, 말하자면 어떤 디딤돌, 모판을 삼겠다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모내기를 할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는 사람의 제사장 직분입니다. 그들이 가는 어떤 힘과 지혜와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부름을 받고 하나님 앞에 용납을 받는 자체로서 그들이 갖는 직분의 핵심 되는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무엇이 달라지느냐 하면 과거의 우리와 회심한 이후의 우리에게 하나의 연속성이 생기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옛날은 잊혀지고 무의미하고 없었으면 좋았을 날들이 아닙니다.

종종 신자들이 그런 기대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좀더 일찍 예수를 알았더라면’ 흠없는 신자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지 않아도 되는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신자가 되고 싶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만큼 하나님의 부르심을 모독하는 것은 없습니다.

저는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신앙적으로 가장 중요한 방황기를 겪은 것이 누구 때문이었느냐 하면 아브라함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에 관한 성경의 기록과 여태껏 제가 들은 설교에 의하면 실수한 적이 없습니다. 무슨 큰일이 있을 때마다 어떤 공갈을 받느냐 하면 아브라함을 봐라 이거예요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이 가라 하시니까 뒤돌아볼 것 없이 갔다 이겁니다. 백 살에 난 아들도 바쳐라 그러니까 바쳤다 이겁니다.

우리보고 그 예를 들면서 뭐라고 하면 할 말이 없어요. 우리 마음에는 그런 소원이 없습니까? 있지요. 이삭을 바치고 싶은 소원이 있으며 하라는 대로 하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돼요. 그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점점 좌절감이 쌓여갈 뿐이었습니다. 저에게서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은 참으로 중요한 문턱이었습니다. 많은 고민과 방황과 또 다행히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신 여러 도움을 얻어 나중에 그걸 발견 했습니다. 아! 아브라함이 위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은혜로 거두어 주셨다는 사실을.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잘한 것 투성이로 보입니다마는 치명적인 실수를 합니다. 남의 아내를 빼앗고 그 남편을 죽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다행입니까? 만일 다윗이 아무 잘못도 안했으면 우리는 언제나 할 말이 없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자만 스카웃해 가는 분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시며 자비를 베푸시며 우리의 못난 것과 모자란 것과 죄인 된 것을 불쌍히 여기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라는 것은 우리에게, 내가 누구였는가라는 그 과거로 말미암아 현재를 늘 확인할 수 있게 해줄만큼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내가 하나님 앞에 아무리 잘 쓰여도 그것이 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은혜라는 것을 한시도 놓치지 않게 합니다. 그것이 디모데전서 1장에 있었던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딤전 1:12) 입니다. 이런 말이 늘 사도 바울의 입에서 떠나지 않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도 바울은 오해했을 겁니다. 난 이렇게 하는데 너희는 왜 못하냐고 했을겁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내가 어떻게 은혜로 하나님 앞에 용납받았는가를 아는 것과 비례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시려고만 한다면 여기 있는 돌들로도 능히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 라고 세례요한이 잘난 척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공격했던 것입니다. 세상과 우리 자신에게 변한 것은 없습니다. 단 우리 안목이 변했지요. 무엇이 진리인 줄 알고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알며 우리가 어떻게 은혜 안에 있음을 인식하고 복종하며 겸손하며 하나님 안에만 매어 달려 있어야만 하는가를 알 뿐입니다.

그 외에 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한걸음 더나아가서 과거만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과거에 우리가 하나님 모를 때 죄 짓고 잘못하도록 내버려 두었어야만 했겠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였는가를, 세상이 무엇인가를, 죄가 무엇인가를 확인케 하여 주 앞에 나를 붙들어 매는 어떤 닻 구실을 한다면 앞으로 살아나가는 길에서야말로 오히려 형통하게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과거에는 몰라서 그랬지만, 이제 그것으로 깨우쳐 분명한 기초를 세웠으니 승승장구해서 가야 맞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거기에는 다른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의 실패를 거울 삼아서 우리의 우리  된 신분과 우리가 무엇이었는가를 놓치지 않고 우리의 근거를 나 아닌 십자가만으로 해야 된다는 것을 평생 잊지 않도록 과거를 움켜 쥐고 있어야 된다면, 변화한 우리가 이 세상을 목표로 하지 않고 내세를 목표로 하고 가는 사람인 것을 세상의 유혹과 공갈과 협박에 타협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세상에 주저 앉아 있지 않고 영원을 향하여 그 고난과 비극의 길을 걸어 가는 것으로 맡은 직분을 감당토록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없습니다. 난 예수를 믿었다. 이제 다 됐다, 이제는 걱정없다. 오히려 정작 앞으로가 어렵습니다. 아파서 병원에 가면 주사를 맞습니다. 철들 만큼 나이가 드시면 주사 맞는데 엄살부리지 않습니다. 저도 병원에 자주 입원했던 경력이 있고 배 수술을 두 번 한 적이 있는데 복부수술을 하고 나면 꿰맨 자리가 당기니까 기침을 잘 안하게 되고 기침을 잘 안하면 기관지에 가래가 쌓여서 폐렴이 되니까 매일 의사가 와서 써킹을 합니다. 진공소제기를 기관지에 넣고 소제를 해줍니다.

와서, 기침 했는가를 물어봅니다. “기침 많이 했어요?” “가래 많이 뱉었어요?” 그러면 나는 이게 하기 싫어서 한 번도 안하고도 많이 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어차피 해야 됩니다. 폐렴에 걸리는 것보다 써킹하는게 나으니까요.

고무호수가 기관에 들어가서 막 훑어내는 것을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지만 해야 됩니다. 비명이 저절로 나오고 눈물이 저절로 나옵니다. 안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철이 든 거죠. 이것을 모르면 애들 경우처럼 주사맞는게 싫어서 안 아프다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고 나면 주사가 안 아파지거나, 같은 주사라도 안 아픈 주사를 놔 준다든가, 아픈 주사를 맞아도 안 아프게 내가 변하는 일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 변화는 절대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알게 됩니까? 이 주사를 맞아야 된다는 걸 아는 겁니다. 그래서 그 주사를 웃으면서 묵묵히 맞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맞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을 ‘신앙이 없다’ 이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우는 것은 포기하지 않는 겁니다. 포기하면 안 웁니다. 포기하면 웃어요. 포기하면 고통이 없습니다. 싸울 게 아니니까요. 쏠 테면 쏴라 이렇게 나가는 것은 이제 죽는 게 낫다고 결심을 하고 드디어 숨지 않고 가슴 펼치고 나가는 것입니다. 웃으면서 껌 씹어가면서 쏴라 이거죠. 오히려 포기하거나 타협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숨고 울고 한숨 쉬고 울부짖는 겁니다. 누가 신앙생활을 행복하고 평안하다고만 얘기를 합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어제보다 오늘 더 극악스럽게 굴고 내일은 더그럴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조금도 편안해지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게 있습니다. 이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약속한 것이 잠깐 받는 고난으로 방해받을 수도 없고 포기되어서는 안되는 만큼 중요하다는 것도 압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수고하고 울며 뿌리는 씨들이 헛되지 않다는 것까지도 압니다.

이것이 불연속입니다. 안목이 불연속입니다. 옛날에 알았던 세상, 옛날에 알았던 인생과 다른 이것이 불연속이지 나머지는 불연속 되는게 없습니다. 삶에서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여러분이 십일조 헌금을 내면 십분의 일만큼 쪼들리지 그것 때문에 더 풍성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위하여 세상에서의 고난을 감수하기로 해서 십일조를 바치는 것입니다. 타협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남 속이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혹 속이는 일이 있으면 빨리 회개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모았다가 한꺼번에 회개합니다만 그때그때 회개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이런 기대를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 앞길을 준비하셨고 예정하셨고 모든 것을 함께 하신다면서 어찌하여 나에게 이런 고통이 있습니까?’ 이것은 잘 몰라서 하는 하소연입니다. 여기 오늘 사도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성령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를 창세 전에 어머니의 태중에서 부터 택하시고 준비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얼 준비하셨지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고 계시는은혜를 펼치십니다. 스데반을 죽인 나도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셨다. 이것보다 더 큰일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모두는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완벽한 것으로 세상 앞에 서는 게 아니라 세상이 우리에게 공격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사실 우리가 답변할 것이 없습니다, 잘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나는 주를 붙잡는 사람이 되었네’ 라고 우리보고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달라진 것이 무엇에서 나타나는가?  이제는 세상을 목표로 삼지 않고 세상의 공갈과 위협과 유혹과 그 교활한 시험에 타협하지 않고 영원한 나라를 위하여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과 불이익을 감수하며 걸어가기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혹 목숨을 위협하는 일이라도 말입니다.

여기에 사도직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름받은 모든 귀중한 생명들이 이 세상에서 갖는 특권이요 책임이요 도무지 방해받을 수 없는 증거해야 할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 생명 되고 진리 되고 영광된 것을 우리의 걸음과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과 사건과 시간 속에서 이웃들에게 늘 넘치도록 증거해야 되는 책임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을 빼앗기고 쓸데없는 데 가서 안주하기 위하여 마취약을 들지 마십시오. 예수를 믿는다는 이름으로 세상을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되고 모든 고통에서 면제받는다는 유혹에 여러분을 내어 던지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그의 종들을 그런 일로 부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해야 되는 싸웁들은 죽도록 충성하는 것이요, 인내해야 되는 것이요, 자기를 쳐 복종케 하는 싸움으로써 계속해야 되는 것이요, 사도 바울이 요구하는 것같이 주께서 당하셨던 환난에 동참하는 일임을 잊지 않고 여러분의 신앙을 경주하셔야 됩니다. 미혹하는 일과 위협과 그리고 여러분 마음 속에 있는 고통과 절망에 지지 말고 승리하시는 신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밎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렬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리라”     사도행전 13:1-3 

사도행전 13:1-3까지 기록된 말씀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신자들에게 심각해 보이지 않는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고 다음 사건으로 넘어가는 연결고리에 불과해 보입니다만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왜냐하먼 여기 우리가 좋아하는 많은 단어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행 13:2,3)

우리가 좋아하는단어가 다 들어있지요?  금식이 있고 기도가 있고 성령의 부르심이 있고 택하심이 있고 안수함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이 본문을 지난  번에 이어서 또 한 번 생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 번에는 신자가 되면 불신자였을 때와 무엇이 달라지는가를 내용으로 삼고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무엇이 불연속이고 무엇이 연속적인가?  환경과 조건에서는 연속적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일이 잘되고 형통하고 승승장구하는 식으로 변하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예수 믿지 않을 때보다 환경과 조건이 나빠질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불연속인 것은 환경과 조건의 차원에서나 능력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안목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무엇이가?  우리가 누군가?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데 대하여 바른 안목을 가지게 됩니다. 진리를 알고 생명을 알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려는 것은 바로 이 사건을 가지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인이라면 그의 신앙을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것이냐는 문제입니다. 보통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며 신앙의 무기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왜 이 대목을 중요하게 말씀드리는가 하면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뜻밖에 기도라든가 금식이라든가 또는 성령의 간섭이라든가 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쉽게 단번에 완성할 수 있는 것으로 기대를 하기 때문입니다. 열심을 갖는다는 것, 간절하다는 것, 마음과 전심을 기울여서 모은다는 것, 이런 것이 신앙의깊이도 아니고 신앙이 어떤 일을 이루어내는 데 있어서 필요한 조건도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생걱해 낸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갖는 인간적인 종교심이지 성경은 신앙을 그런식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부분에 대해 갖고 있는 어떤 후유증입니다.

일본이 재정 러시아와 러일 전쟁을 벌였을 때에 원래 일본은 국운이 걸린 싸움을 했습니다. 재정 러시아에게 일본하고의 싸움은 조선을 먹느냐 마느냐 하는 남진정책의 싸움, 즉 배부른 싸움이었지만 일본으로서는 조선을 빼앗기면 그 세력으로 일본 까지 러시아가 먹으로 내려올 것이 자명했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에게는 국운이 걸린, 사활이 걸린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기서 한 치도 물러날 데가 없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면 죽으니까 죽는 순간까지 대들 수 밖에 없었던 반면 재정 러시아는 국내에 여러 가지 혁명의 기운도 있고 내란도 있고 해서 그렇게 죽자살자 싸울 싸움도 아니었기 때문에 중간에 슬그머니 그만두므로 일본이 이기게 되었숩니다. 여기서 일본 군부에 좋지 않은 습관이 하나 생기게됩니다. 그게 뭐냐하면 정신일도하사불성이라는 생각입니다.

원래 국력으로나 군대 무기로나 모든 면에서 일본이 러시아를 이길 실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하나, 사생결단의 마음으로 덤벼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기게 되자 정신적으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좋지 않은 버릇이 생겨서 그 다음부터는 모든 싸움에 무모한 작전, 무모한 모험을 하게 됩니다. 그 후유증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 운동선수들은 뭐 하다 좀 안되면 머리 깎고 나오는 사람이 무척 많습니다. 머리 깎는 것은 성경적으로 전혀 일치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깎으면 힘을 잃지요. 그리고 모든 스포츠계에 있는 시합의 예상평을 살펴보면 객관적 전력은 열세이나 정신력으로 이를 극복하면 못 이길 것도 없다는 식입니다.

이래서 지고 나면 모든 욕을 다 퍼붓는 겁니다.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기 때문에 졌습니다. 객관적으로 전력이 모자라는데 어떻게 이기자고 덤비겠습니까?  긴 시간을 두고 배워서 하나씩하나씩 해결해 가야지요. 이 정신력이라는 문제 때문에 한국 스포츠계는 노하우를 축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술개발과 전략개발과 장기적인 포석(布石)을 못하고 늘 정신력, 정신력, 해가지고 팀을 운영하고 선수를 소진시켜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고스란히 한국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부분에도 적용이 됩니다. 그래서 어느날 자기가 간절한 소망이 있을 때 느닷없이 하루 저녁을 울고불고 덤비는 겁니다. 신앙은 쌓은 것이 있고 헤아리는 것이 있고 지혜와 지식이 있고 경험이 있고 축적된 실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날 갑자기 40일 금식기도부터 들어가서 위장 버리고 돌아기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도의 응답은 없습니다.

이런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은 제가 조금 너무한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이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양보할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사무엘상 4장으로 가보십시다.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 쳤더니 이스라엘을 대하여 항오를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장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명 가량이라 백성이 진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는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이에 백성이 실로에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 있었더라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히브리 진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찜이뇨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가로되 신이 진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가로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일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어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같이 말고 대장부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블레셋 사람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켜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이었으며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삼상 4:1-11)

이것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을 마치 귀신을 불러내는 주문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필요한 일에 능력만을 빌어오는 주문, 비법으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가 하는 일이 신앙적인 일이냐 하는 것은 묻지 않습니다. 그가 필요한 일에 하나님의 능력만을 들여 기독교인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열심히요 진심이요 간절함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같이 신자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도 없습니다.

갈멜산 전투에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싸울 때 바알 선지자들은 자기 몸을 상하게 하여 피가 나오기까지 열심을 부렸습니다. 하지만 실패하지 않아습니까?  왜 그렇죠?

없는 신을 불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사무엘상 7장으로 가 보십시다. 뒷이야기가 어떻게 되나 보십시오. 이 궤를 빼앗겼는데 언약궤가 블레셋 사람 진영에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블레셋에 자꾸 재앙을 내립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할 수 없이 돌려 보냅니다. 또한 7:3 보면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 내시리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사무엘이 가로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드스리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방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이 듣고 그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듣고 블레셋 사람을 두려워하여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뢰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을 따라 벧갈 아래에이르기까지 쳤더라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셋이라 하니라 이에블레셋 사람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지경을 블렛셋 사람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삼상 7:3-14)

여기 전쟁을 보십시오. 전쟁에 필요한 힘을 요구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자 대적을 누가 치느냐 하면 하나님이 쳐버리십니다. 신약적인 표현을 들어볼까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이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신앙에서 무엇을 오해하고 있느냐 하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과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것, 내가 기뻐하는 것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사이에는 신앙이라는 말을 도입하지않고 능력만을 빌려 쓰는 방법을 자꾸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힘을 빌려오기 위해서는 내가 하나님 편에 서야 되는 것은 모르고 무조건 간절해야 된다고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이 마치 혈서 쓰는 것과 같습니다. 혈서 쓰기의 원조인 일본 사람들은 대부분 양미간에 가로로 주름이 잡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후까시를 많이 넣는 종족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잘 보시면 발전한 서구사회에서는 악당도 절대 인상을 안씁니다. 악당도 꼭 껌을 씹습니다. 그리고 웃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어금니를 무는 것으로 야구선수 연봉을 주는 게 아니라 누가 안타를 치느냐로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장 잘못되어 있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제가 미국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닙니다마는 이 부분에서는 이원리가 기독교적인 것과 우리식, 샤마니즘에 의한 것과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부분에서 여러분이 조심하셔야 될 책이 하나 있습니다.

이런 책을 보셨습니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 감동적인 책입니다. 미국에서도 아주 유명한 베스트셀러입니다. 굉장히 많이 팔린 책인데 그 책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 책의 내용은 누구나 다 예수님이 하시는 것같이 전심으로 뒤를 따르자,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식의 얘기인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를 닮아가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주를 닮는 방법에 얼마만큼 진심을 기울이느냐의 싸움으로 밀고 가면 안됩니다. 그 일에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모르고 내가 더 많이 진심을 쏟아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꾸 철야, 금식, 눈물, 회개만을 강조합니다. 시간적 과정이 없습니다. 그것이 만들어져가야 된다는 개념은 없고 얼마나 많이 쏟아붓느냐의 싸움으로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과 같은가 하면 하루 저녁에 공부를 완성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운동이든지 하루 배우고 전심을 기울인다고 해서 갑자기 운동이 되는 것은 아니닙니다.

모든 것은 그렇습니다. 신앙이라는 것도 제일 중요한 게 주를 닮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과정을 쌓아가야 되는 것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안됩니다. 이것을 호세아서 4장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제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4:6)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말하는데 여기서의 지식은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그 말 속에 다 포함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는가?  그 일을 어떻게 하시는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이것을 빼놓고는 신앙이라는 말을 쓰시면 안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다라는 것은 그때그때 지켜야 될 규칙으로서의 율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이 의미하고 있는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하는 데로는 신앙이 뻗어나가지 않고 내가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것으로만, 그것을 이루는 방법으로만 신앙이 도입되므로 간절함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비나이다 비나이다와 똑같습니다. 손가락에 불 당기고 자해하는 행위로써 자기의 열심을 증거하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40일 금식기도가 그런 차원이라면 전혀 무의미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닙니다. 자기의 욕심과 어리석은 허황된 꿈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을 그렇게 간단한 말로 속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로마서 10장을 보면 이런 것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 벡성을 꾸짖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롬 10: 1-3 )

이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배우는 싸움입니다. 알아가는 싸움, 하나님이 무엇을 어떻게 하시기를 좋아하는가를 알아가는 싸움입니다.

신앙은 어느날 내가 객기를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울컥 치솟아 나오는 어떤 정열을 하나님 앞에 쏟아부어 피 흘리고 눈 부릅뜨고 주먹을 쥐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냉정하게 쌓아가야 되고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더 깊이 알아가야 되는 싸움입니다. 그것을 베드로후서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 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벧후 1:1-2). 믿음이라는 것을 여기서는 안다는 말로 대치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주의 깊게 보아 주십시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벧후 11:3). 그래서 믿는다는 말을 안다는 말로 대치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악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벧후 1:4)

신앙이란 무엇이냐?  신의 성품을 갖는 것입니다. 신앙, 이 믿음 이라는 것은 내가 요구하는 어떤 일을 해내는 능력이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된 인격과 성품, 그 사람의 존재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신앙입니다.

성품적이고 인격적이고 지식적인 것입니다. 지.정.의 모두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작정 열심을 내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열심은 열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빌려오기 위한 열심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실 것이라는 것이 나에게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지 내가 간절히 구했으니까 될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가지고 ‘이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라고 얘기하는 것은 순 사기입니다. 그런 믿음은 없습니다. ‘그렇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해야지 ‘주여 믿습니다’ 그러는 것은 순 사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내가 믿는다고 했으니까 하나님 안해 주시면 이제 하나님 책임입니다 이겁니까?  그런 사기는 없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이렇게 하시고 이런 것을 하신다.’ 이것이 나로 하여금 이것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자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병행하는 것입니다. 5절을 보세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되느냐?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벧후 1:5)

여기 이 부분만 놓고 믿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좀더 분명하게 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최소한의 믿음을 얘기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내세가 있는 것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얻는 것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거기에 무엇을 쌓아야 되느냐 하면 덕을 쌓아야 됩니다 (처음에 말한 믿음이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얻는 지식이라고 합시다. 그리고 생명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이 어디로 자라나가야 되느냐 하면 덕을 세우는 데까지 가야 됩니다. 덕은 이 진리와 생명이 풍성한 것을 말합니다. 풍성한 것, 거기에는 용서가 있고 온유가 있고 사랑이 있고 긍휼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거기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좋다는 게 뭡니까?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고 천국 가는 것을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것같이 아직도 구원의 문을 넓혀서 우리를 통하여 더 많은 사람을 긍휼과 자비 속에 부르시며 나 같은 것을 쓴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내 자유를 절제하고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내가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부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내가 누리고 내 이웃이 나누어 갖게 하는 것, 이것이 덕입니다. 심판으로 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지식은 뭐냐 하면 그렇게 되기 위한 요령을 말합니다.

언제가 한 번 스포츠과학을 하는 사람이 이런 것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운동선수들이 하는 썰키 츄레이닝이라는 것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그 사람 얘기는 누구에게나 어느 운동선수에게나 그것이 필요하지는 않더라 이겁니다. 사람의 몸에는 근육이 크게 둘로 대별 되는데 하나는 적근, 하나는 백근이라고 한답니다. 적근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붉은 근육, 백근은 흰 근육인데 하나는 힘을 내는 근육이고 하나는 지구력이랍니다. 근육도 이렇게 기능과 역할이 구분됩니다.

마라톤을 하는 사람은 근육이 울퉁불퉁하지 않습니다. 말 다리가 가는 것과 같습니다. 지구력이 필요한 데는 절대로 근육이 울퉁불퉁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힘을 쓰는 데는 근육이 울퉁불퉁 나와야지요. 마른 천하장사는 못봤지요?  다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피는 믿음이라는 것이 바로 이 지식과 결부되는 것입니다. 한 번 내가 머리 싸매고, 머리 깎고,혈서쓰고, 눈을 부릅뜨고, 주님과 사생결단을 하러 들어가는 것, 이런 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위하여 기도 하라든가, 금식 하라든가, 성령님이 간섭한다든가 이렇게 약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신앙이란 훨씬 긴 싸움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고, 그 위에 덕을, 그 위에 지식을, 그 위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쌓아가는 싸움입니다. 마치 국민학교 다니고 중학교 다니고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루 저녁 밤 새운다고 국민학교 1학년이 대학을 졸업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걸립니다. 인간이란 제한되어 있는 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든 신자들은 천국 간다는 것과 지금 벌어진 일을 해결해 주는 것이 신앙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풍성함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그것보다 놀라운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고 우리에게 채워 우리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신앙의 전 내용들은 놀랍고 영광되고 무한한 것입니다.

성령의 간섭, 금식, 기도 이런 것들이 여러분의 신앙이 더 깊고 풍성하고 높게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일본에 살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유명한 무도인이 있습니다. 최영의라는 무도인인데 그 사람이 중동에 있는 어떤 국왕을 가르칠적에 무도의 필요성을 설명하자 그 왕이 뭐라고 그랬느냐 하면 “나는  권총을 잘 쏘니까 권총이 있으면 된다”  고 반박하더랍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이렇게 대답을 했답니다. “권총이 있으면 좋지요. 그러나 권총을 쏠 수 없는 상황도 있는 법입니다. 권총을 쏠 수 없는 상황을 위해서 몸 자체를 무기로 만들어 놓는다는 것은 권총을 갖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확실합니다. 그 위에 권총까지 가지고 있으면 더 좋겠지요.” 그것을 왜 마다하겠습니까?  그 사람 얘기로는 인간의 모든 몸의 부위가 다 무기라는 것입니다. 머리도 무기고 물론 이빨도 무기이지요. 옛날부터 팔꿈치, 정갱이, 무기가 아닌 곳이 없습니다.

신앙이란 이렇게 내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다른 것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 속에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빼앗기지 않는 것 그리고 그것을 닦아나가고 훈련하고 연습해서 나의 것이 되게 해야 되는 싸웁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걸리고 더 많이 걸리고 더 많이 생각하고 연습해야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어느날 하루 아침에 울고불고 매달려서 무슨일 하나를 얻어내는 식으로 여러분의 신앙을 사용하지 않도록 조심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당한 신앙의 길을 걷는 것으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더 알게 되고 여러분이 더 많이 신자다워지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져서 하나님께서 오늘 하시는 일에 여러분이 함께 참여하게 되어 매일매일의 삶이 기적과 감사의 연속인 신앙의 삶을 누리는 자가 되기까지 신앙의 연습과 깨우침과 경주를 쉬지 말기로 여러분 자신을 일으켜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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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 사도행전 연속성과 불연속성 행13:1-3  박영선 목사  2009-06-25 2241
1695 사도행전 성경적 종말관 행11:27-30  박영선 목사  2009-06-24 2068
1694 사도행전 고넬료 행10:1- 11:18  박영선 목사  2009-06-22 3998
1693 사도행전 애니아와 도르가 행9:32-43  박영선 목사  2009-06-22 2567
1692 사도행전 든든히 서가는 교회 행9:23-31  박영선 목사  2009-06-22 2849
1691 사도행전 바뀌어진 바울 행9:10-30  박영선 목사  2009-06-22 2320
1690 사도행전 바뀌어진 사울 행9:1-9  박영선 목사  2009-06-22 2606
1689 사도행전 민족주의를 넘어서 행8:14-17  박영선 목사  2009-06-22 1558
1688 사도행전 마술사 시몬 행8:9-24  박영선 목사  2009-06-22 3081
1687 사도행전 빌립 집사 행8:5-8  박영선 목사  2009-06-22 3588
1686 사도행전 흩어진 사람들 행8:1-8  박영선 목사  2009-06-22 2189
1685 마태복음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마27:38-42  강종수 목사  2009-06-21 2124
1684 사도행전 스데반과 성전 행7:44-50  박영선 목사  2009-06-20 2031
1683 사도행전 스데반과 율법 행7:30-38  박영선 목사  2009-06-20 1868
1682 사도행전 스데반과 할례 행7:1-10  박영선 목사  2009-06-20 1806
1681 사도행전 스데반의 설교 행7:51-53  박영선 목사  2009-06-20 2966
1680 사도행전 스데반의 생애 행6:8-15  박영선 목사  2009-06-20 2497
1679 사도행전 일곱집사 행6:1-7  박영선 목사  2009-06-20 3467
1678 사도행전 사도들- 공회 앞의 증거 행5:27-42  박영선 목사  2009-06-20 2110
1677 사도행전 사도들 -표적과 기사 행5:12-16  박영선 목사  2009-06-20 2811
1676 사도행전 아나니아와 삽비라 행5:1-11  박영선 목사  2009-06-20 4936
1675 사도행전 베드로와 요한의 설교 행4:5-31  박영선 목사  2009-06-20 2862
1674 사도행전 체포 행4:1-4  박영선 목사  2009-06-20 1728
1673 사도행전 앉은뱅이 행3:1-26  박영선 목사  2009-06-20 4001
1672 사도행전 종말론적 삶 행2:43-47  박영선 목사  2009-06-19 2195
1671 사도행전 죄 씻음과 회개 행2:37-41  박영선 목사  2009-06-19 2821
1670 사도행전 흔들리지 않는 근거 행2:37-42  박영선 목사  2009-06-19 1794
1669 사도행전 새 시대를 여는 설교 행2:32-36  박영선 목사  2009-06-19 1974
1668 사도행전 베드로의 설교 행2:22-36  박영선 목사  2009-06-19 3320
1667 사도행전 오순절 성령강림 행2:1-4  박영선 목사  2009-06-19 3345
1666 사도행전 제자도 행1:8-10  박영선 목사  2009-06-19 2473
1665 사도행전 증인 행1:6-8  박영선 목사  2009-06-19 2546
1664 사도행전 성령강림의 역사적 의미 행1:4-5  박영선 목사  2009-06-19 2734
1663 사도행전 동적인 신앙 행1:1-3  박영선 목사  2009-06-19 3062
1662 스바냐 늦기 전에 해야 할 일 습2:1-3  한태완 목사  2009-06-18 2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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