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김남준  | 출판사 : 솔로몬
판매가 : 4,500원4,050원 (10.0%, 450↓)





1 교회의 존재와 능력의 회복


오늘날처럼 조국 교회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지적되고, 교회 갱신의 필요성이 강조된 시대도 없을 것입니다. 어린 학생들도 조국 교회의 갱신을 이야기하고, 불신자들도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알아서 책을  써냅니다. 다 좋은 이야기입니다. 다 귀담아 들을 만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도덕적으로 고상한 집단으로 개혁되고, 부패가 사라지고 사회를 섬기는 사랑의 봉사자가 되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이 세상의 죄악을 책망하고 사람과 사회를 거듭나게 함으로 하나님 앞에 경배하게 하고 세상이 그분을 찬양하게 하는 이 같은 영적인 권능이 없다면, 이러한 영광스러움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고장난 기독교의 수선에 불과한 것입니다.

2. 교회의 영광스러움이 회복되려면


오늘날의 가장 비극적인 정경은 교회와 개인의 신앙이 복음을 떠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 대한 신앙을 잃어갈 때, 교회는 자신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 능력과 사랑을 잃어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들의 사고 속에는 여전히 세속적인 욕망과 소원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동기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교회의 강단에서는 윤리적인 설교가 선포의 주종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신자들의 삶은 점점 비윤리적이 되어가고, 교회 자체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대신 비윤리적인 집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어 왔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교회와 신자의 타락은 윤리적인 설교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신앙과 삶이 복음에 뿌리를 박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존재가 복음에 회복되는 것 없이는 결코 이 같은 악순환을 끊을 수 없고 교회의 영광스러움도 회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3. 교회의 화석화 현상


 작금 조국 교회에 찾아들고 있는 무서운 현상은 전통적인 신앙을 고수하는 소위 보수적인 교회들의 화석화 현상입니다. 분명히 그들의 신앙고백은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복음적입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교회의 생명력이 사라지고 화석화되어 갑니다.
생명력의 상실로 인한 교회의 이 같은 화석화 현상은 교리적으로 자유로운 입장에 서있던 교회들이 합리주의적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먼저 경험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가장 전통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교회들에게서도 똑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겪고 있는 가장 무서운 기독교적 전염병입니다. 저는 이러한 교회의 화석화 현상을 가리켜서 기독교의 에이즈(AIDS)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4. 화석화현상에 대한 교회의 반응


교회가 생명을 상실해 가는 화석화 현상에 직면하면서 조국 교회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생명이 있는 체 가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들은 항상 수많은 행사들을 주최하고 여러 가지 내용의 현수막을 교회 밖에 내걸기를 좋아합니다. 교회는 사람들로 붐비고 기관들은 분주하게 기능하나 생명의 증거들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참석하는 것과 행사를 즐기지만 죄인들이 회개하고, 그의 자녀가 되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생명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과 감격이 없고, 인격이 변화되며 세상에 대해 능력을 갖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싸워가는 전투적인 모습이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 생명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둘째 교회를 초월해서 번지고 있는 탈교리(脫敎理) 현상입니다. 정통적인 교회가 비교적 신중하기는 하지만 예외는 아닙니다. 교회가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이 시대 속에 무기력해져있는 것은 교리의 속박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보다는 삶"이라는 가치 아래 '경건주의 운동'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건주의 운동'은 시간이 흐를수록 필연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으로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셋째는 파라쳐치 운동(para-church movement)입니다. 변화된 세상 뒤에는 반드시 "변화된 사람들"이 있는데, 교회 안에서 "사람이 변화하는 생명"이 사라지자, 교회가 사회개혁을 위한 행동 매체로 변해가고 그 변화의 사회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려는 시도들입니다. 이것 도한 올바른 대처가 아닙니다.
성경은 교회가 역사 속에서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복음 안에 머묾으로서 말씀, 성령, 기도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서야 한다고 말합니다.

5.변화된 사람을 통해 변화된 세상이 만들어진다


정치가가 의로움을 버리고, 종교가 사랑에서 떠나고, 사람들 사이에 신뢰가 사라져버린 시대, 상아탑이 화염에 휩싸이고, 흉악한 범죄가 창궐하고, 온갖 더러운 탐욕들이 이 시대의 도덕상을 대변하는 물결 속에서 우리는 고민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더 이상 이 잘못되어 가는 현실에 대해서 교회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이 시대 속에서 너희는 무엇이냐?" 라는 질문 앞에 오래도록 죄인처럼 마주 서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시대 속에서 교회가 할 일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면 이러한 시대를 깨우는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어두운 세상을 변화시키고, 죄의 잠에 깊이 빠진 거룩한 영혼들을 깨우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심령 깊이 그의 말씀이 임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변화된 사람을 통해 변화된 세상을 만들어 가십니다.

6.빈 들


세례 요한에게 말씀이 임한 곳이 "빈 들"이었다는 사실이 가르쳐 주는 바는 실로 크다고 봅니다. 특별히 이 시대처럼 모든 사람들이 바쁘게 살아가고 마음에 온갖 것들이 가득 차 있을 때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 "빈들"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팔레스타인의 빈들은 아기자기한 숲이나 논밭이 이어진 풍요로운 곳이 아닙니다. 낮에는 열사의 햇볕이 있지만 해가 지면 모닥불을 지펴서 추위를 피해야 하는 곳입니다. 맹수들의 습격이 있는 곳입니다.
빈들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속으로부터 분리되어 오직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곳을 말합니다. 이것은 장소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겠지요.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심령의 빈들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속된 것을 떠나, 우리의 심령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수 있게 되는 시간, 그런 시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탐심으로 얼룩진 심령, 죄악 된 행실에 사로잡힌 일상생활, 뜻 없이 되풀이되는 예배의식,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빈 들"이 아닙니다. 

7.말씀과 말씀의 경험


우리나라에서 주일 11시가 되면 수 만편의 설교가 동시에 행해지고, 천만 가까운 인파가 그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공식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한다면 1주일에 12-13편의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영적인 수준이 자꾸 하락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성경본문만 봐도 어떤 설교를 할 것이라 짐작이 될 만큼 그렇게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우리의 머리속에 있어도 왜 자꾸 영적인 수준은 변함이 없는 것일까요?
우리의 심령 깊은 곳을 파헤치는 말씀의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많은데 그 말씀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알아도 그 말씀이 삶의 원리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8.복음의 능력을 믿지 못하면


요즘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남미 증세가 나타난다고 염려를 합니다.  저는 '해방신학'을 낳을 수밖에 없었던 남미의 형편에 대해 소상히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회에서 제기되는 부패한 정권, 식민지적인 경제 예속, 빈부의 격차, 인권유린, 사회 도덕 상실, 자본주의의 극단적인 해악의 만연등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처음에는 교회가 고민하고 말씀으로 선포도 하고 기도도 했지요. 그런데 사회를 향해 복음과 말씀으로 선포를 해도 안되더란 말입니다. 소위 "고전적인 방법"-기도하고, 말씀을 전하고, 착하게 살고-이런 것들 가지고는 싸움이 안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영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믿기보다는 십자가를 버리고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테러리스트들을 양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해방신학'입니다.

9.그것은 나의 한계이다


우리가 성경의 진리를 대할 때 자주 범하는 오류는 경험에 의해서 진리를 인식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머리로는 성경의 어떤 약속이나 진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면서도, 그것을 삶 속에서 경험하는 일에 계속 실패할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의 한계로 마음속에 치부해 둡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산다고 해도 거기에 삶을 맡기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 올바른 태도는 그런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이루어주시기로 약속하신 언약들, 현실로 나타나게 하고자 열망하는 축복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되어지지 못할 때 우리는 그 문제점의 근원을 교회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신의 존재에서 발견하도록 노력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서 우리가 진지한 견해를 갖지 못할 때 우리는 흔히 자신들의 한계를 하나님의 한계로 착각하게 됩니다.

10.사라진 설교제목


오늘 현대교회의 강단에서 점차 사라져 가고 있는 설교 제목들이 많은데 그 중에 하나를 들어보라면 그것은 '사탄'이라는 주제일 것입니다. -사탄, 악령, 귀신, 마귀, 악한 영과의 싸움 - 이 모두 점차 희미하게 잊혀져 가는 설교 제목들이 되었습니다. 확신하건데 이러한 이 시대의 강단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사탄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 것입니다. 언제부터인지 조국 교회는 '사탄, 악령, 귀신, 마귀'등의 낱말을 거침없이 쓰기에는 조심스러운 환경이 되어 버렸고, 강단도 그러한 용어를 현대인의 지성에 거스리는 '원색적인'발언으로 치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

11.평화가 아니라 샬롬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윤리적으로 착하게 살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올까요? 모든 교회가 평화를 위해 봉사하고 비무장 평화주의자들의 집단이 된다면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옵니까?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존경하고 여호와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까요?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은 채 그리스도인 행세를 하는 악한 자들이 그러한 평화주의 그리스도인들을 등쳐먹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단지 '평화'를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십자가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샬롬'을 얻으라고 합니다. '샬롬' 은 영적인 싸움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점령입니다. 

12.주님의 애통을 아십니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애통을 압니까? 민족을 향해 목놓아 우시는 예수님의 심정에 관심이 있습니까? 저마다 예수 믿고 복 받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방신상 앞에서나 구하는 탐심과 부패한 욕망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기독교에 대해서 아는바가 없습니다. 이런 무지함이 우리 속에 있는 한 우리는 결단코 이 시대와 조국의 교회를 향한 주님의 애통하시는 그 눈물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멸망 받을 예루살렘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려고 올라가시는 우리 예수님의 심정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13.예수님의 진노


자신의 제자가 자신을 팔아 넘기는 순간에도, 저주스러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에도, 진노하지 않으셨던 예수님께서 "별 다른 일이 없는" 이곳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왜 그토록 진노하셨습니까? 그의 공생에 중에 이처럼 치를 떨 듯 분노하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유독 성전에서 왜 이토록 뷴노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정염(情炎), 하나님의 파토스(pathos)를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각(視角), 교회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별 의심 없이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교회 예식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너무도 가증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요? 우리가 매주 반복하고 있는 예배형식은 완전한가요? 하나님의 시각으로 봤을 때 하나님의 진노를 살만한 부분은 없는지요?  

14. 주님의 눈으로 보게 하여 주소서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엄청난 인파가 모여 하나님을 환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순간의 종교적인 충동으로 헌신을 다짐하다가 정신을 차리고서 후회하는 무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이 시대와 교회를 분별하고,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그 아픔을 느낄 줄 아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교회의 역사는 구름 같은 많은 군중들이 모여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기록이 아니라, 이러한 각성된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용하셨는지에 대한 기록입니다.
별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시대의 교회를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분노에 차서 외치시는 주님의 격정과 눈물을 갖게 해달라고 매달리십시오! 

15.기도의 집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막11:17) 기도의 집! 히브리어 성경과 헬라어 원문은 성전을, 단순히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지 않고 소유격을 써서 "기도의 집(a house of prayer)"이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기도도 하는 집이 아니라, 기도하는 것이 특징이 되어버린 집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 시대, 조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열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와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중심적인 일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기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섬김, 구원받지 못한 백성들을 위한 제사장적인 애끓는 중보의 기도가 없이는, 결코 교회가 그 존재의 목적을 다 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이 성전에 이처럼 진노하신 것도 "내 집"이 기도의 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16.더 깊은 기도의 세계로


많이 기도하면서 좀 더 깊은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해 고민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도해도 왠지 그 기도가 능력있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 현실을 느끼십니까? 먼저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돈 바꾸는 상"을 둘러 엎으십시오. "매매하는 자들"을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몰아내십시오. 여러분의 삶 속에 자리잡은 탐욕과 심령에 뿌리박은 더러운 것들을 몰아내기 전에는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도의 능력을 결단코 경험해 보지 못할 것입니다. 

17.우리가 참으로 기도를 압니까?


기도가 하나님 앞에서 단순한 언어적인 보고가 결코 아님을 아십니까?
마음을 다 해 하는 기도, 단지 그것이 가장 높은 수준의 기도가 아님을 아십니까? 우리가 과연 하나님과의 기도의 진수인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기도 속에서 영적인 세력들과의 싸움이 있음을 느끼십니까? 그들의 칼날과 맞부딪치는 금속의 굉음을 듣습니까? 기도가 깊어지면서 언어가 영혼의 신음소리로 바뀌어 가는 것을 이해하십니까? 기도가 피할 수 없는 영적인 전쟁임을 느끼십니까?
이제는 깨어나십시오. 일어나십시오. 기도함으로 자신의 심령과 이 시대의 교회를 기경하십시오. 

18.예수님 그분의 삶은


그분의 생애는 피의 생애였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땀의 생애였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눈물의 생애였습니다.
오래도록 무릎을 꿇으십시오.
교회가 기도의 집이 되게 하십시오
기도가 여러분의 신앙 인격의 특징이 되게 하십시오         ⓒ김남준 (열린교회 목사)

묵은땅.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