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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시편 조용기 목사............... 조회 수 2216 추천 수 0 2009.07.28 17: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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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시23:6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5년 10월 9일 주일 2부 설교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서론>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주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에 관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는 곳은 부모님 슬하입니다. 부모님이 자녀에 대한 생각은 다 선한 것입니다. 부모님이 자녀에 대해서 악한 생각하는 분은 계시지 않습니다. 자기 자식에 대하여 나쁘게 생각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부모는 자식이 잘되기를 원하시고 자식에 대하여는 항상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인자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부모 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가지신 마음이 그 얼마나 선하시고 인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게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본론>

1.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첫째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의 나환자촌에 가서 일생을 그들과 하나 되어 보낸 것을 알고 사랑의 사도라고 합니다. 혹은 테레사 수녀가 캘커타의 가난하고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하나 되어 그들 속에서 섬기고 평생을 살아간 것을 생각하고 감화 감동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 수천 배가 넘는 은혜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 되기 위해서 육신의 몸을 쓰시고 세상에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하늘에 계시면 편안하고 좋으실 텐데 우리의 죄와 질병, 저주와 죽음과 고통 속에 하나 되기 위해서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 가운데 사시고 죄인 된 인간과 하나 되셔서 십자가에서 인간을 위하여 형벌을 자원해서 받으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6장 6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하셨고
요한일서 4장 10절에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형벌은 고대 파사에서 사용한 후 로마제국에 도입되어 4세기까지 가장 잔인하고 치욕적인 사형방법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형은 단순히 나무에 사람을 못 박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연구결과에 따르면 십자가에 매다는 것은 맨 마지막 단계이고 그 형벌은 심한 채찍질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당시 채찍의 끝에는 납이나 동물의 뼈 같은 것을 달아 놓았기 때문에 한번 맞으면 살 속에 박혀서 뼈가 들어날 정도였습니다. 고통이 극심해서 채찍에 맞다가 쇼크사로 죽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매달리기 위해서는 손목과 발목에 약 20센티의 대못을 박는데 이때 죄수의 몸무게로 인해 살이 찢어집니다. 손발의 신경이 다 끊어지는 그런 끝없는 육체적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몸이 늘어져 있어서 가슴근육이 당겨져 호흡도 제대로 할 수 없고 나중에는 산소부족으로 온몸 전체가 경련을 일으킵니다. 의사인 리히터(Richter)박사가 쓴 ‘십자가 처형이 육체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에 보면 십자가 처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자연스러운 자세나 육체적인 긴장은 모든 동작에 고통을 준다. 못이 박혀진 손 부분은 신경이 예민하고 몹시 아픔을 느끼기 쉬운 곳이었으므로 움직일 때마다 극심한 고통을 준다. 못의 상처와 채찍에 맞은 자국은 곧 염증을 일으키고 몸이 썩어 들어가는 괴저현상까지 일으켰다. 신체의 위치가 피의 순환을 방해하고 고통을 일으켰으며, 육체의 긴장은 죽음 자체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십자가의 고통은 최악의 고통이요, 그것은 순간순간 괴로움이 증가하는 긴 고통이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형벌은 즉시로 타는 듯한 갈증을 사형수에게 느끼게 해서 목말라 견딜 수 없게 만들고···’ 왜 우리 주님이 이런 고통을 당했습니까? 우리는 그냥 십자가 고통을 노래하고 평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고통은 말로다 할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는 영육 간에 고통이요, 괴로움이요, 치욕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이 나 같은 죄인 위하여 이 십자가를 짊어져야만 했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이런 예수님은 좋으신 하나님, 좋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틴 루터는 말하기를 ‘성경을 짜보라. 예수님의 피가 뚝뚝 떨어질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경 전체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보혈의 능력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을 받고 죽으실 뿐 아니라 부활하셔서 이제는 우리들로 하여금 부활에 참여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부활하신 주님과 인간이 하나 되게 하사 값없이 한없는 영화를 누리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5절로 6절을 보세요.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세상에 벌레같은 우리들을 주님이 끌어안고 함께 일으키사 함께 승천시켜서 함께 보좌에 앉게 하셨으니 웬 말입니까? 웬 은혜입니까? 웬 영화입니까? 웬 축복입니까? 우리의 상상을 너무나 초월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러므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지내고 함께 부활시켜서 함께 승천시킨 그 놀라운 은혜를 이룩하신 좋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우리 마음속에 깊이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정말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성령을 보내사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라고 말하고 우리 한국어로는 ‘보혜사’라고 기록했지만 보혜사라는 말은 ‘변호사’라는 말이고, 또한 유대인들은 어머니를 말할 때 ‘파라클레토스’라는 말을 종종 썼습니다. 어머니는 ‘파라클레토스’라고 썼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의 변호사가 될 뿐 아니라 우리의 어머니같이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오순절 날 이후로 지금까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를 돌보시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우리 안에 계셔서 끊임없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님처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8절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그러므로 오늘 예수 믿는 사람은 성령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고아가 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고아원은 없습니다. 성령이 ‘파라클레토스’ 즉, 우리 어머니와 같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디도서 2장 12절에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도록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은 제자를 기르시는 선생님처럼 우리들을 늘 가르치고 길러 주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6장 13절에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르네상스 미술계의 거장으로 꼽히는 미켈란젤로의 성공 뒤에는 그의 선생 베르톨도가 있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14살 때 조각가 베르톨도의 문하생으로 들어갔습니다. 베르톨도는 어린 미켈란젤로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보고 위대한 조각가가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제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기술을 더 닦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하자 베르톨도가 말했습니다. “네 기술만으로는 안 된다. 너는 먼저 네 기술을 무엇을 위하여 쓸 것 인가에 대하여 분명히 결정을 내려야 된다. 기술만 가지면 그냥 장인에 불과하다. 기술을 무엇 때문에 쓰겠는가. 목적이 있어야 된다.” 그리고 미켈란젤로를 데리고 나갔습니다. 베르톨도가 처음 미켈란젤로를 데리고 간 곳은 술집이었습니다. 그 술집 입구에는 아름다운 조각상이 서 있었습니다. 베르톨도는 미켈란젤로에게 “이 조각을 잘 보아 두거라.” 이렇게 말하고 다시 그를 데리고 성당을 갔습니다. 성당 입구에는 아름다운 천사의 조각상이 있었습니다. 베르톨도는 미켈란젤로에게 “너는 이 아름다운 천사의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아니면 아까 술집 입구에 있었던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똑같은 조각이지만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또 하나는 술 마시는 쾌락을 위해서 세워졌다. 너는 앞으로 네 기술로 재능을 위하여 무엇을 위해서 사용하겠느냐?” 그렇게 물었을 때 어린 미켈란젤로가 큰 소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쓰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결국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대답처럼 평생을 하나님을 위하여 재능을 사용했고 그 결과 지금까지 손꼽히는 미술계의 거장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선생은 제자가 잘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가르침과 지도로써 제자들을 돕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님도 우리가 잘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우리에게 늘 묻는 말이 있습니다. ‘너는 너의 인생을 무엇을 위해서 사용하겠는가? 네 지혜, 네 총명, 네 모략, 네 재능, 네 지식, 네 건강, 네 가정, 네 부귀, 네 성공을 무엇을 위해서 사용하겠는가?’ 성령은 우리 일생을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도록 인도하여 주시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가장 중요한 역사인 것입니다. 성령은 위대한 선생으로써 우리 일생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도록 만들어 주시지 내 쾌락을 위해서 세상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도록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여러분 좋으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심을 가슴 깊숙이 생각하면 마음이 저리도록 기쁘고 행복하고 용기가 나며 삶에 신바람이 납니다. 옛날에 우리 집 과수원에 개를 많이 길렀는데 어머님이나 아버님이 시골로 내려가시면 개들이 따라갑니다. 그런데 이 개들이 우리 아버지, 어머님과 같이 가면 동리 개들 앞에서 어깨에 힘을 주고 꼬리를 하늘로 높이 들고 흔들며 갑니다. 그러면 모든 동리 개들이 다 움츠려 들어가고 사람들은 다 말하기를 “부잣집 개 내려 왔다. 부잣집 개 내려 왔다.”고 합니다. 개도 자기 주인과 같이 걸어갈 때 신바람이 나는 것입니다. 적당한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좋으신 하나님을 모신 우리가 어떻게 우리 마음속에 저리도록 기쁘고 즐겁고 소망차고 신바람이 나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좋으신 하나님이 계시는데요. 나쁜 하나님이 아닙니다. 기가 막히게 좋으신 하나님이 계시는데 우리가 어찌 마음이 긍정적이 되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좋으신 하나님의 사상은 너무나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예수 믿는 많은 사람들이 기가 죽고 좌절되고 낙심하고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무서운 하나님, 징계하시는 하나님, 늘 꾸짖는 하나님, 벌주시는 하나님, 지옥 불에 넣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인간으로 하여금 좌절과 절망 속에 떨어지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고 예수님이 십자가 짊어지시고 날 위하여 온갖 고통 다 당하시고 부활하사 그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시고 그때까지 우리를 기르시기 위해서 어머니 같은 성령, 변호사 같은 성령님을 보내 주셔서 가르치시고 이끄시고 돌보시는데 이 얼마나 좋은 하나님입니까? 이 하나님을 우리가 잘못 알면 얼마나 큰 죄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2. 역경과 고난에도 꿈을 잃지 않게 하심

둘째로, 좋으신 하나님 사상은 역경과 고난에도 꿈을 잃지 않게 하시는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내게 다가오는 어떠한 역경과 고난도 좋으신 하나님이 배후에 계시므로 이겨 나갈 수 있는 용기가 생기게 하고 꿈을 갖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좋으신 하나님 사상이 역경을 이기게 하는 사실은 요셉의 생애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일찍이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았습니다. 자기가 꿈에 형들과 함께 밀 수확을 갔는데 열한명의 형의 단들이 자기 단을 둘러서서 절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 장차 모든 형제 중에 내가 으뜸이 되겠구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한번 또 꿈을 꾸었는데 하늘을 쳐다보니 해와 달과 열한별이 자기를 향하여 절을 합니다. 해와 달은 아버지, 어머니고, 열한별은 형제들입니다. 자기 가정에 으뜸이 될 것을 하나님이 보여 주셨습니다. 이 꿈은 그의 마음속에 깊이 인박혔습니다. 항상 그 꿈속에 그는 살고 언제고 부모, 형제들을 자기가 리드하고 돌보아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는 17살에 형들에게 배반당하고 죽을 고비를 넘어서 종으로 팔려갔고 애굽의 보디발의 집에 종이 되어서 10년이 넘도록 종살이에 온갖 고통을 당하고 그 다음에는 보디발의 아내에게 참소를 당하고 수모를 당하고 감옥에 들어가서 3년 동안 감옥에서 썩었습니다. 기나긴 고생과 괴로움 속에서 요셉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모든 배후에 좋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무리 역경이 다가오고 거센 풍랑이 다가와도 배후에 좋은 하나님이 계시므로 하나님이 다스려 주신다는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그는 낙심하지 아니하고 좌절하지 아니하고 정신병에 걸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든 파도를 뛰어넘어 저 건너편에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았었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신앙고백이 창세기 50장 20절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미국 동남부에는 땅콩의 생산지로 이름난 앨라배마 주가 있습니다. 그 주의 한 마을에 가면 기념탑이 있는데 목화를 갉아먹는 벌레들을 위해 세운 것입니다. 그 비문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대들은 우리에게 번영의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또 무엇이든지 하면 된다고 하는 신념을 일으켜 주었다. 목화 벌레들이여, 우리는 다시 한번 그대들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세상에 살다보니 희한한 비문이 다 있습니다. 목화 벌레들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비를 세워서 그 비문에 그렇게 기록해 놓았었습니다. 본래 앨라배마 주는 목화 생산지로 유명했습니다. 목화 재배 때가 되면 주변에 있는 많은 일꾼들이 앨라배마로 모이고 많은 흑인 노동자들이 가혹할 정도로 목화 농장에서 노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에 어디선가 수많은 벌레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목화를 갉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이 벌레들 때문에 그해 농사는 완전히 망쳐서 목화 수확이 없었습니다. 목화 때문에 몰려왔던 일꾼들도 뿔뿔이 다른 곳으로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해도 또 벌레들이 날아왔습니다. 목화를 모두 갉아먹는 바람에 손도 쓰지 못하고 농사를 망쳤습니다. 2년째 계속해서 흉작이 들자 주민들의 형편이 어려워졌습니다. 병들고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민심도 흉흉해져서 살벌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때 그 앨라배마 주의 목사와 성도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를 하다가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서 로마서 8장 28절을 레마로 받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시련을 주셔서 2년째 계속하여 목화 벌레가 날아와서 목화를 다 갉아먹으므로 우리가 이제는 수입이 없어 헐벗고 굶주리고 처자들이 굶어죽는 처지에 대한 것도 하나님이 합동하여 유익을 이루게 하시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시다. 현실적으로 눈에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이것조차도 하나님이 우리를 좋은 길로 인도하시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그들은 시련 가운데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그들 마음속에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목화농사만 지으면 벌레들이 와서 먹어버리기 때문에 목화 대신에 이 넓은 땅에 땅콩을 심자. 그래서 땅콩을 심기 시작하니 비옥한 땅에 땅콩이 얼마든지 잘되고 풍년이 들고 땅콩을 통해서 그들은 굉장히 생활이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산업발달이 이루어져서 나일론실이 발견되므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일론으로 짠 좋은 옷을 입기 시작하고 목화를 안사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다른 주에서 목화밭을 하는 사람들은 전부 망해버렸습니다. 그러나 앨라배마 주에서는 목화 농사를 짓지 않고 땅콩 농사를 지어서 땅콩 부자들이 된 것입니다. 카터 대통령도 땅콩부자 아닙니까? 땅콩 심어서 부자 된 대표적인 분이 카터 대통령인 것입니다. 그래서 화학섬유가 발견되어 사람들이 목화씨로 만든 무명보다는 질 좋고 값싼 나일론으로 만든 옷을 입기 시작하므로 목화 농장을 하던 다른 주의 사람들은 다 망했습니다만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며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룬다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고 목화 대신 땅콩을 심은 앨라배마 주 주민들은 부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고 나쁜 것을 좋게 해주셔서 결국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우리가 긍정적으로 감사하고 찬송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려야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구름이 끼고 비가 쏟아져도 구름 저 위에 햇빛이 쨍쨍 비치고 있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구름이 끼고 비가 온다고 해서 해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해가 사라졌다고 땅을 치고 가슴을 치고 통탄하고 울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아무리 인생에 구름이 끼고 소나기가 쏟아지고 좌절과 절망이 다가와도 그 배후에 하나님의 좋은 손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입니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조차도 그를 통해서 하나님은 좋게 하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쁘게 하려고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 좋은 하나님을 확실히 마음속에 알면 결단코 우리의 생애 속에 꿈을 저버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냐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하나님 사상”이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가 굳게 믿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눈에 보기에 악한 일이 생겨도 결국에는 좋게 된다. 왜냐? 좋은 것은 좋아서 좋고, 나쁜 것은 좋게 하여 주시니 좋다. 따라 말씀하세요. 좋은 것은 좋아서 좋고, 나쁜 것은 좋게 만들어 주실 것이니 좋고, 그러니 다 좋은 것이다. 로마서 8장 28절에는 그런 점에 있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놀랍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러므로 역경과 고난이 다가올 때 좋으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키고 악이 선으로 바뀔 것을 우리가 기대하고 꿈꾸고 굳게 믿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나쁜 것만 바라보고 탄식하고 통탄하고 원망하고 부정적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언제나 나쁜 것 저 건너편에 있는 좋으신 하나님의 손을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 모든 시간과 모든 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어떤 나쁜 것도 그 위에는 하나님의 손이 있어서 다스릴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저는 순복음가족신문에 있는 동작대교구 최윤옥 성도님의 간증하신 것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2003년 4월 25일자입니다. 최윤옥 성도에게는 평소에 치질로 고생하던 완고한 친정아버지가 있었는데 아무리 전도해도 예수를 믿지 않았어요. 하루는 하혈이 심해서 급히 병원에 가서 검사한 결과 직장암 말기로 판정이 되었습니다. 큰 병원으로 옮겨서 정밀검사를 받았더니 이번에는 직장뿐 아니라 방광까지 암덩어리가 꽉 들어차서 달리 손쓸 방도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큰 불행이 다가와서 온 집안이 초상집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살다가 이런 불행이 다가올 수 있는가. 온 집안이 모두 다 우울하고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이제 살길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길밖에 없다고 우리 최윤옥 성도께서 열심히 아버지와 집안 식구들에게 전도를 했으나 다 떨떠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구장, 구역식구들을 모시고 와서 합심기도를 하고 심방 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사흘 예배를 드리고 난 후 병원에 가서 조사를 하니 암투성이던 방광에서 암이 깨끗이 사라져 버리고 없었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들도 놀라서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느냐? 이런 것은 처음 보았다.’ 하면서 이구동성으로 감탄했습니다. 가족들과 구역식구들은 서로 얼싸안고 눈물로 감사했었습니다. 이제 부친은 외과 병동으로 옮겨 직장암 치료만 받으면 되었습니다. 의사는 남아있는 직장암 덩어리가 너무 크고 또 여러 곳에 붙어 있어서 위험하니 5주후에 방사선 치료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부모님은 통원치료를 하면서 매일 기도처에 나가 새벽기도를 드렸고 성도들도 5주간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2002년 12월 11일에 제게 찾아와서 제가 안수 기도를 해드렸습니다. 그리고 방사선 치료를 3일 앞둔 어느 날 가족들이 한결같이 꿈을 꾸었는데요. 아버지는 꿈에 커다란 것이 몸에서 쑥 빠져 나가는 것을 꾸고, 어머니는 암덩어리를 비닐에 담아서 들고 나가는 꿈을 꾸었고, 최윤옥 성도는 꿈에서 네 아버지가 나았다는 음성을 듣고, 며느리 꿈에는 올케가 나타나서 ‘아버님이 나았으니 하나님께 감사예물 준비하세요’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온 집안 식구에게 하나님이 다 계시를 주셨습니다. 그날 이후 부친은 일주일 동안 하루에 4,5번씩 검은 핏덩어리를 아래로 쏟아내더니 치질이 깨끗이 나았고 암세포도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모든 제사를 다 없애 버리고 추도 예배로 대신하고 주님만 믿기로 가족 전체가 모여서 새로운 결심을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검사해 보니 의사가 온몸에 퍼졌던 직장암세포가 거의 다 사리지고 없지만 암이 있던 자리를 떼어내는 것이 원칙이라고 해서 수술을 했습니다. 보통 4시간 걸리는 수술을 2시간 만에 쉽게 끝내고 다시 조직 검사한 결과 직장암은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이 기적으로 성도님의 친정아버지는 물론 일가친척 모두가 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암이라는 흉악한 악이 다가왔지만 하나님께 의지하니 하나님께서 이를 치료해 주셔서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 영광이 나타나서 아버지뿐 아니라 일가친척 모두가 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구원받는 기적이 일어났으니 악이 변하여 선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대히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경 속에 꿈을 버리면 안 됩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이 될 수가 있는 것은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3. 좋으신 하나님이 희망이 되심

셋째로, 좋은 하나님을 우리가 모시고 좋은 하나님을 믿으면 우리 내일에 희망이 늘 있습니다.
절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절망보다 더 크신 하나님,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 죽음보다 크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요, 나의 하나님이요, 좋은 하나님이니까 희망이 사라질 수가 없습니다.
제가 대조동에 개척할 때 이 좋은 하나님을 발견하고 제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정말 그때 대조동에 가면 참 처참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이 6.25동란에 온 나라가 다 초토화 되었지만 1958년도까지 나라는 회복되지 못하고 살길이 막연했습니다. 시골에서 서울로 살러 왔다가 서울에서도 있을 곳이 없는 사람이 퇴출 되서 나온 것이 대조동, 불광동 산들이었습니다. 판자촌이 빽빽하게 들어서고 너무나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처참했습니다. 그곳에 가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너무나 괴로웠기 때문에 사람들이 천당도 지옥도 겁을 안냅니다. 보통 때에야 천당도 지옥도 생각하지 너무 어려우면 천당도 바라지 않고 지옥도 겁을 안냅니다. 뭐라고 말 하냐면 “지옥? 이미 지옥에서 살고 있는데 무슨 지옥이 또 겁나냐?”라고 합니다. 그러니 말할 필요 없지요. 천당 이야기 하니까 “천당이 있기는 어디 있어. 하나님이 천당같이 좋은 곳 가지고 있으면 여기에 살 동안에 조금 주면 우리가 믿겠다.”고 합니다. 여기에 살 동안에 조금도 안보여주는 천당을 죽고 난 다음에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아냐고 따집니다.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환경적으로 봐서나 감각적으로 느끼거나 이성적으로 생각하거나 현실적으로 볼 때 모두다 절망인데 어디에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습니까? 그때에 하나님께서 저의 마음속에 주신 것이 희망의 메시지, 삼박자 축복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삼중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것을 햇빛같이 제 영혼 속에 비춰 주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나가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정죄하시고 심판하시며 생명을 빼앗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이 잘되면 이 땅에 살아있을 동안에 범사에도 잘되고 병도 고쳐 주어서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난 다음에 많은 사람이 나와서 예수를 믿고 병이 나았습니다. 폐병이 낫고, 암이 떨어지고 관절염, 신경통이 고침 받으니까 “야~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과연 좋은 하나님이구나” 그래서 회개하고 믿고 나오기 시작하고 주님의 은총을 받아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진실로 삼대재앙에서 삼중축복을 주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하므로 말미암아 삼대재앙을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원래 에덴이 있던 곳에는 하나님이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만든 처소였습니다. 에덴에는 죄가 없었습니다. 저주도 없었고 죽음도 물론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하므로 말미암아 에덴에서 쫓겨 나와서 그 결과로 가져온 것이 죄로 말미암아 영적인 죽음의 재앙이요,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가난과 저주와 고통이 다가오는 재앙이요, 육체는 병들고 늙고 죽고 지옥에 떨어지는 재앙을 당했습니다. 이 삼대재앙을 인류는 태어날 때부터 짊어지고 벗으려고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벗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여 영적죽음에서 인간이 해방될 수 있으며 저주와 가난과 낭패와 실망과 배고픔에서 해방될 수 있으며 질병과 죽음에서 놓여남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의 저주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시고 몸 찢고 피 흘려 극심한 고통에서 이 모든 죄가를 청산하고 ‘내가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고난과 장사지내심과 부활을 통하여 주님은 아담과 하와가 가져온 삼대재앙을 벗어 버렸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담 안에서 영적으로 죽고 환경적으로 저주받고 육체의 죽음과 지옥의 노예였으나 예수 그리스도 마지막 아담을 통하여 우리는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은총을 얻어 삼중축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극작가 셰익스피어는 ‘안락은 하늘에 있고 우리가 사는 이 지상에는 오직 불안과 고뇌와 탄식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고 미국의 사상가요, 문학가인 헨리 데이빗 쏘로우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요한 절망 속에 인생을 살아간다.’고 말했고 영국의 성직자 토마스 풀러 역시 ‘사람은 비명과 함께 울면서 태어나고 고통과 함께 살다가 결국에는 절망하여 죽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땅에서 인간은 영적 죽음과 환경적인 저주와 육체적인 죽음의 삼대재앙을 벗어날 수 없었지만은 예수님 안에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오면 용서와 의와 영광과 영생이 있고 예수님 안에서 저주에서 해방을 얻어 축복이 약속되고 예수님 안에서 치료되고 부활을 얻고 영생 천국을 얻는 축복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좋은 하나님 아닙니까? 예수님의 삼중축복을 받으면 희망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삼서 1장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말했고
시편 103편 1절로 5절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 좋으신 하나님을 제가 불광동에 낭패와 절망에 처한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전하니까 모든 사람들의 눈에 빛이 생기고 얼굴에 웃음이 생기고 마음에 희망을 갖게 되고 그들이 교회 와서 기도하게 되고 부르짖게 되고 하나님이 응답하게 되고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지난 9월 15일 순복음가족신문에 난 이레전자 우리 정문식 집사님의 간증을 읽고 마음에 큰 감동을 입었습니다. 정문식 집사님은 이레전자를 일으켜 세우셔서 중소기업으로 정부에 표창까지 받은 자랑스러운 우리 교회 성도입니다. 정문식 집사님은 10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13살 어린 나이부터 청계천에 있는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가난과 굶주림이 싫었기 때문에 CEO들에 관한 책을 읽으며 사장이 될 꿈을 키웠습니다. 학업과 공장일을 병행하며 돈도 벌고 고등학교도 야간을 졸업했지만 쉽게 공장생활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어 1990년 퇴직금 50만원으로 중고압착기를 구입해서 아파트 지하실에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예비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이름도 ‘이레전자’로 지었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사업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너무 힘이 들어 한강변에서 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철야예배에 나온 성도들을 보고 다시 용기를 얻었습니다. 모두가 자신을 외면할지라도 좋으신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를 지켜보시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생활이 어렵고 고통스럽고 자살하고 싶지만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의 좋으신 손길이 섭리하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 후 집사님은 좋으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함께 꿈을 가지고 사업을 운영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니 꿈을 져버릴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로부터 15년 후 50만원으로 시작했던 사업이 무려 매출액 1,400억원의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정문식 집사님은 회사의 규모가 처음 시작할 때 보다 많이 커졌다는 꿈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지금 자신이 받은 축복을 함께 나누기 위해 직원들을 위한 사내대학을 운영하며 장학사업도 꾸준히 전개하고 계십니다. 그 어려운 가운데도 항상 교회 와서 교회학교 애들을 가르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정문식 집사님이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더라면 좌절하고 낙심했을 것입니다. 내 앞길 캄캄하고 환경이 아무리 어두워도 좋은 하나님이 배후에서 역사하시므로 결국에는 좋게 된다는 것을 믿고 희망을 버리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오늘 그를 있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믿고 꿈과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결론>

마태복음 7장 11절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저는 한평생 좋으신 하나님을 믿고 전하며 살아왔습니다. 47년간 목회를 했으니 산전수전 다 겪었습니다. 많은 좌절도 느낄 때가 있었고 깊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도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돌아서고 싶은 생각이 날 때도 있었습니다. 고난의 폭풍에 휘말리고 외로울 때도 언제나 배후에 계신 좋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고 꿈과 희망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어둡고 캄캄해도 저 건너편에 좋은 하나님이 계신다. 아무리 먹장구름이 끼어도 저 건너편에 좋으신 하나님이 계신다. 결과에 가면 좋게 된다. 하나님이 끝에 가서는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운명을 환경을 바라보고 좌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까지도 한번도 저를 실망시키지 아니하셨습니다. 성경말씀에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을 불러서 예수를 믿게 하시고 구원을 받으시고 성령으로 인을 쳐주신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 좋고 선하신 하나님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같습니다. 이 좋은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이 좋은 하나님의 손을 잡고 항상 눈에 보고 귀로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손으로 만지는 현실을 바라보지 말고 그 건너편에 계신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시고 한없는 사랑으로 여러분을 사랑해 주시는 좋은 하나님 안에서 여러분이 꿈을 갖고 희망을 펼치며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너무나 좋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벌레 같은 우리 위해서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시고 우리와 하나 되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우리 과거의 잘못된 인생을 다 청산해 주시고 부활하사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게 해주시니 우리 하나님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좋은 하나님이요, 영원히 좋은 하나님이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 안에서 꿈을 버릴 수가 없고 이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 마음속에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달은 금번 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영원은 지금보다 얼마나 영광스러울 것을 꿈꾸고 희망가지고 나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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