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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나와 보이는 나

고린도후 조용기 목사............... 조회 수 1642 추천 수 0 2009.07.28 17: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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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후4:16~ 5:1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5년 10월 16일 주일 3부 설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서론] 오늘 저는 “보이지 않는 나와 보이는 나”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사람을 지으실 때 먼저 흙으로 사람을 빚어 놓았었습니다. 완전한 사람 모습이 되었지만 그러나 생명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코에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시고 하나님의 영을 후~욱 불어 넣어 주시니까 사람이 생령이 되어 일어나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찬양을 하고 자연만물을 보게 되고 기뻐 뛰며 춤을 출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육체 속에 하나님의 생령을 받아들인 생명의 영혼인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에스겔서 37장 1절로 10절에 놀라운 비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에스겔을 거대한 골짜기로 데려갔는데 그 속에 마른 뼈가 가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기를 “에스겔아 이 뼈들이 살겠느냐?” 너무나 기가 막힌 질문이라 에스겔은 “저는 모릅니다.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러면 이 뼈들로 명하여 사람이 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니 뼈들이 서로 연결되고 심줄이 덮여지고 살이 채워지고 가죽이 덮여서 거대한 군중이 누워 있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생기로 명령하여 들어가게 하라고 하시매 그대로 하여 사방에서 생기가 불어 들어와서 그 속에 들어가니 살아 일어나서 큰 군대가 되었더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사람의 모습으로 지음을 받았어도 생기가 있어야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생기 즉, 하나님이 불어 넣어 주신 영이 떠나면 그는 죽은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본론]
1. 속사람인 영혼의 실상


첫째로, 안 보이는 나 즉, 영혼의 실상을 우리가 잘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안 보이는 나 즉, 영혼이 떠나면 보이는 나 육체적인 그 사람은 죽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초대교회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의논하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토지를 팔았습니다. 일부는 숨겨 놓고 그 다음 남은 돈을 베드로에게 가지고 와서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 전부를 다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아나니아를 보고 말했습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가득해서 하나님의 성령께 거짓말 하느냐? 땅에 있을 때도 네 땅이고 팔아도 네 것인데 왜 그중에 얼마를 감춰 놓고 다 가지고 나왔다고 거짓말 하느냐?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을 속였다”고 말하자마자 아나니아의 영혼이 떠나갔습니다. 그러자 육체는 쓰러져서 죽었습니다. 청년들이 메어다가 장례지내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이제 장례를 지내고 돌아 올쯤 되었을 때에 그 아내 삽비라가 일어난 사건을 모르고 역시 베드로가 있는 교회에 왔을 때 “삽비라여~” 베드로가 불렀습니다. “과연 너희들이 땅을 판 돈이 이것이더냐?” 맞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찌하여 네가 남편과 공모해서 하나님의 영을 속이느냐? 너희 남편을 장례지낸 사람들이 지금 문 앞에 도착했으니 너도 곧 실려 나가서 장례 지내게 될 것이다.”라고 하니까 그 영혼이 떠나가매 육체가 죽어서 그도 청년들이 장례지내고 만 것입니다. 그것 보십시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분명히 살아있다가도 하나님께 꾸중을 듣자 그 영혼이 떠나가게 되니 육체는 죽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람은 영혼이 들어있을 때 살아있지 영혼이 떠나가면 죽고 마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께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8절로 9절에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우리는 죽는 것 다 겁내잖아요. 그러나 바울선생은 오히려 마음에 담대해져서 차라리 몸을 떠나 주 예수님과 같이 있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몸속에 있을 때도 우리 자신이 살아있거니와 이 몸을 떠나도 우리의 속사람 영혼의 사람은 그대로 살아있다는 것을 바울선생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몸 안에 있을 때라도 몸을 떠나서 주님과 같이 있을 때라도 항상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선생은 담대하여 원하는 바가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이 좋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생각하고 너무나 틀리잖아요. 우리는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소똥 밭에 굴러도 이 땅에 사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말하는데 바울선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우리 실상을 너무나 잘 압니다. 우리가 몸은 죽어도 영혼은 영원히 산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구원받은 영혼은 지금보다도 너무나 아름다운 천국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담대하여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라고 그는 말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 것입니까? 바울은 또 빌립보서 1장 21절로 23절에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이다” 사는 것만 유익이 아니라 죽는 것도 유익이다. 오늘 우리가 생각할 때 사는 것만 유익이고 죽는 것은 손해가 나는 줄 우리가 생각합니다. 그것은 안 믿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고 우리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사는 것만 좋은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 우리에게 더 유익이 된다니까 손해날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살아도 좋고 죽으면 더 좋고 이런 일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는 말하기를 “내가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다” 이 세상에 더욱 좋은 것이 돈을 많이 벌어서 더욱 좋은 것입니까? 좋은 집을 사서 더욱 좋은 것입니까? 지위나 명예를 얻어서 더욱 좋은 것입니까? 바울은 말하기를 “그런 것 아니라. 더욱 좋은 것은 내가 이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욱 좋은 일이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더욱 좋은 일이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원간 장래에 이 몸을 떠날 것 아닙니까? 슬퍼할 것이 없잖아요. 우리가 더욱 좋은 곳에 가는데 더욱 좋은 일이 일어나는데 몸을 떠나 더욱 좋은 곳으로 갈 욕망을 가진 것이 더 아름답다고 바울선생은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예수믿는 사람에게는 사는 것도 좋지만 죽는 것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상식을 뛰어넘는 말인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사는 것이 좋고 또 사는 것이 좋고 죽는 것은 나쁘다고 하는데 우리는 사는 것도 좋지만 죽는 것이 더 좋다. 태어나는 것도 좋지만 죽는 날이 더 좋은 날이다. 육신의 장막 집에 있는 것도 좋지만은 장막집이 무너져서 하늘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이 더 좋은 일이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 영혼은 불멸의 존재인 것입니다. 육신은 불멸이 아닙니다. 육신은 젊을 때 아름답지만 늙어서 추해지고 죽는 것입니다. 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만개 되었을 때 정말 아름답지요. 그러나 꽃이 시들 때는 정말 보기가 흉하지 않습니까? 사람도 그렇습니다. 젊을 때 얼마나 이쁩니까? 꼬집어 주고 싶도록 이쁩니다. 그런 젊은 사람이 나이 늙으면 아주 시들은 꽃과 같이 쭈글쭈글 해지고 젊은 사람들 눈에 공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체를 떠나야 돼요. 그러나 슬퍼할 것이 없는 것은 눈에 보이는 육신은 잠시 잠깐이나 눈에 안 보이는 영혼은 영원불멸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 22절로 24절에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기를 한 부자가 세마포 옷을 입고 자색옷을 걸치고 밤낮 연락하며 주지육림속에 빠져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영혼의 불멸도 믿지 않았었습니다. 내일 죽을 것이니 오늘 먹고 마시자. 그래서 요란스럽게 잔치를 베풀며 호의호식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대문간에는 나사로라는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 집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몸은 헐고 병들어서 문간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추우니까 개를 끌어안고 자므로 개들도 그를 사랑해서 헌데를 핥아 주었습니다. 그는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연명을 하고 있었는데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세상에 세월이 안 흐르나요? 시간은 다 흘러가는 것입니다. 시간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돈 있고 부자라고 해서 시간이 천천히 가고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시간이 빨리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 똑같은 시간을 타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가니 나사로가 죽었어요. 그가 죽으니까 일꾼들이 거적대기에 둘둘 말아서 무덤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가 무덤에 있다고 말합니까? 성경은 말하기를 육체는 무덤에 던져졌으니 그 속사람은 천사에게 받들려 낙원에 들어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고 말한 것입니다. 겉 사람은 후패했습니다.속사람은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습니다. 부자도 안 죽나요? 죽을 날이 와서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슬퍼하고 거창스러운 장례식을 치르고 아름다운 상여를 꾸며서 비석을 세우고 초호화로운 묘를 만들었지만 그 속에 그가 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음부에 떨어졌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세상은 지나가고 다른 세상에 왔습니다. 거기에는 낙원이 있고 음부가 있고 그 사이에 큰 구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음부에서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며 낙원을 쳐다보니 거지 나사로가 영화로운 사람이 되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있는 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사로를 보내어 손가락으로 냉수 한 방울 찍어서 내 혀를 서늘케 하소서.” 여러분! 냉수 한 컵도 아닙니다. 너무 호화롭습니다. 냉수 한 그릇도 구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불꽃 가운데 고통스럽고 괴롭기에 냉수 단 한 방울만 내 혀를 서늘케 해달라고 간청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상황이 나쁘고 고통스럽고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국가고 지옥가면 알게 뭐냐. 여기에 분명히 나사로는 그대로 나사로고 부자는 그대로 인격을 가지고 간 부자였습니다. 이목구비가 다 있고 그들의 희노애락의 감정도 그대로 있고 느낌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야 이 사람아! 너는 세상에 살 동안에 모든 호의호식 하면서도 마음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 무신론자요,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고 쾌락주의로 살았으니 이제 지옥에 떨어져서 고통을 당한다. 그러나 나사로는 비록 거지요, 병들었으나 그 속이 가득했다.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을 예비하고 섬겼기 때문에 그는 오늘 이곳에 와서 사랑을 받고 영화를 누리고 너는 고통을 당한다.” 그때 그는 말하기를 “그러면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부탁하오니 나사로를 다시 살려서 세상으로 보내 주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는데 제발 이곳에 안 오도록 경고하게 해주시옵소서.” 그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이 사람아! 이 세상에는 모세와 선지자들의 글이 있는데 그것으로써 족하다. 모세와 선지자의 글을 읽고서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나사로가 죽었다가 부활해서 나가서 전도해도 안 믿을 것이다.” 마지막 그의 기도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말씀을 배반한 사람은 음부에 떨어져서 아무리 울부짖어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면 주님께서 천국에서 기도하는 것조차 응답하여 주는 것이에요. 저는 놀라운 것은 47년간 목회하면서 많은 초상집에 갔는데 부모가 예수믿고 자녀들이 예수를 안 믿어도 부모님이 세상을 뜨고는 거의 100% 자녀들이 예수를 믿고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볼 때 ‘아~ 부모님들이 천국가서 예수님께 기도를 드렸구나~’ 예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자녀들을 구원해 주신 것을 저는 수없이 보았었습니다. 음부에 내려간 사람의 기도는 들어주지 않아도 구원받아 천당에 간 사람의 호소는 천국에서도 주님이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 우편에 계시면서 주야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안 보이는 영혼은 불멸의 영혼인 것입니다.

2. 왜 거듭나야 하는가?

둘째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거듭나야 됩니다. 인간은 타락하자 영혼이 죽었지 않습니까? 죽었다는 것은 없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었다는 것은 교통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은 사람이 없었졌나요? 이목구비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죽은 사람보고 사랑한다 해도 대답하지 않고 미워해도 분노하지 않습니다. 교통이 끊어진 것입니다. 영혼이 죽으니까 영인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 사람들은 아담의 자손들로 영혼이 죽어서 태어나서 영혼이 죽은 대로 육체를 가지고 살기 때문에 육체에 대한 것은 알지만 영에 속한 것은 전혀 모릅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성령님도 천국도 지옥도 마이동풍입니다. 그런 말을 하면 우스꽝스럽게 생각하고 무식하다고 생각하고 미개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이 죽었기 때문에 영적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가 없고 전혀 영적세계와의 교통이 없는 것입니다.
에스겔 18장 4절에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했고
에베소서 2장 5절에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라고 했으니 모든 사람들이 범죄로 말미암아 허물로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육체만 가지고 삽니다. 육체만 가지고 사니 감각적인 사람이지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것만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사람은 욕심만 따라서 삽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 자랑을 따라 살며 육체에 속한 사람은 이성적인 사람입니다. 무엇이든지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만 생각하려고 하고 그 이상에 하나님의 계시적인 지시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육체를 따라서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 사라질 것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과 이 세상 끝만 취하고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빈손 들고 영원히 버림을 당케 되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지도자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는 밤에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시지 않고야 이런 큰 기사와 이적을 행할 수가 있나이까?” 이에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눈을 뚫어지게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게 무슨 말씀이 이런 말씀이 있습니까? 주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거듭나다니요. 그럼 나 같은 이 늙은 노인이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서 다시 태어난다는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아니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니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음이라.” 바람이란 것은 영이란 말과 똑같은 프뉴마토스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육이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영이 거듭난다는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속사람 즉, 영혼이 죽었다가 거듭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죽은 영혼이 거듭납니까? 왜 죽었어요. 죄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러면 죄를 청산해야 영혼이 도로 살아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누가 죄를 청산할 수 있습니까? 그를 위해서 죄 없는 예수님이 육신을 쓰고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재물이 되어 십자가에 올라가서 몸을 찢고 피를 흘려서 우리 죄를 다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실 때 아담이 지은 모든 죄에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세상이 끝날 때까지 인류의 모든 죄를 다 청산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를 청산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앞에 나오면 예수님을 의지하면 그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모든 죄를 한번도 짓지 않은 것처럼 깨끗이 씻어 버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더러운 옷이라도 비누로써 잘 빨아서 씻어 버리면 더러움은 사라지고 깨끗한 옷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죄는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어지고 정결하게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장사지내고 함께 부활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 속에서 하늘에 올라가 보좌 우편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앉아 있다는 것을 믿어야 될 것인 것입니다.
디도서 3장 5절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믿지 않고는 거듭날 도리가 없습니다. 세상에 종교도 많고 철학도 많고 좋은 가르침도 많지만 그것은 세상적인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길은 한길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을 헐어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할 때 우리는 하나님 보좌 앞으로 나갈 수가 있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영혼을 살려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해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예수님을 주로 부르시게 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미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살아나야 하나님과 교통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1절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영접 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하나님께 나갈 길은 절대로 없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천하 인간에게 구원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면 그는 지옥으로 직행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버지 품에 안기고 성령이 임하시는 길이고 거듭날 수 있는 길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이요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위대한 설교가로 유명한 스펄전 목사님은 원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가 목사였습니다. 할아버지 교회에 어릴 때부터 나갔기 때문에 그는 형식적으로 크리스챤이었고 마음속으로는 아직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냥 왔다갔다 종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1850년 1월 6일 어느 주일날 눈이 굉장히 많이 왔습니다. 도저히 할아버지 교회에 갈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가까운 교회에 갔는데 눈이 얼마나 많이 왔든지 그 교회 목사님이 주일 교회 예배를 인도하러 올수가 없었습니다. 교인만 6,7명 정도 모여서 목사님 오기를 기다리는데 목사님이 오지 않으니까 어떤 집사님이 성경을 들고 일어났어요. 그래서 이사야 45장 22절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이 말씀을 읽고 그 집사님이 열심히 설교를 하기 시작합니다. 손을 휘저으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는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매우 간단합니다. 야훼를 앙망하는 것은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닙니다. 바라보기 위해서 다리를 높이 들 필요도 없습니다. 바라보기 위해서 손을 움직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바라보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성경이 말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밑천이 다 떨어졌어요. 그래서 집사님이 가만히 서서 두리번 두리번 거리고 “에또~ 에또~” 그러다가 애꿎은 스펄전이 처음 교회에 나와서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청년이여! 왜 그렇게 피곤하게 보이는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구원을 받으라!” 그리고 난 다음 “예배 끝났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두 날 가진 검보다 예리하게 스펄전의 영과 혼을 찔렀습니다. 스펄전은 지금까지 교회 왔다 갔다만 했지 예수님을 바라본 적이 없습니다. 그 집사님의 말에 마음이 깊이 감동되고 그 길로 즉시로 예수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는 거듭나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평범한 집사님의 즉석 설교라고 무시하지 마십시오. 즉석 설교를 성령이 사용하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설교할줄 모른다고 탄식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지식으로 이웃에 설교하면 성령님이 그것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별 볼일 없는 말 같지만 그 말이 성령께 사용되면 두 날 가진 검처럼 심령을 쪼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이 장차 얼마나 위대한 종이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스펄전은 이 이름모를 집사님의 설교를 듣고 난 이후로 17살에 목사가 되어서 자기가 부임한 교회가 한달이 못되어서 450명의 교인으로 부흥시켰고 1년 만에 2만 명의 집회를 인도하는 위대한 주의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그 은혜를 의지하면 어떠한 사람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남녀, 노유, 빈부, 귀천 할 것 없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바라보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리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영으로 사는 사람


셋째로,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서 영의 사람이 되면 영의 사람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육의 사람으로 삽니다. 감각으로 살고, 정욕으로 살고, 이성으로 살고, 영으로 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육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장례지내고 부활해서 그리스도의 품에 안긴 사람은 영의 사람입니다. 영의 사람은 영으로써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영의 사람으로 영으로 살고 있는지 아닌지 오늘 여러분 마음을 테스트 해보시기 바랍니다.
영으로 사는 사람은 말씀으로 변화된 삶을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말씀을 읽지도 않았어요. 말씀을 듣지도 않았어요. 말씀이 어리석게 보이고 무식하게 보였었습니다. 성경을 주면 닫혀서 내가 모르겠노라. 그리고 너무 잔소리가 많아서 알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성령이 속에 계시므로 성경은 열린 책으로 읽어보면 이해를 할 수 있고 은혜가 되고 복이 되고 성경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변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로 24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말씀을 읽으므로 자꾸 옛사람은 벗어지고 새사람으로 변화 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 28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이렇기 때문에 영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를 받는 사람인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깨달으면 내가 한걸음 더 나아가고 조금 더 변화되고 조금 더 신령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말씀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제1세대 카피라이터인 이만재씨가 쓴 ‘막쪄낸 찐빵’이라는 책에 보면 그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 잘 나와 있습니다. 원래 그는 성경말씀을 하나도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상식이나 철학으로는 도저히 예수믿는 것이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단지 아내와 교회 가겠다고 약속을 했으므로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냥 끌려서 나와서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설교하고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예수님이 물위로 걸으셨다는 얘기가 나오면 ‘허~ 겉은 말짱한 목사님이 속은 바보 같은 소리하고 거짓말 하네.’ 그렇게 속으로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이 마음속에 전광석화와 같이 임하였습니다. “평범한 말 같은데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다. 와~ 그 참말이구나!” 갑자기 영혼 속에 깨달아지고 믿어졌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을 인정하고 믿기 시작하자 인간의 이성과 철학이 깨어지고 거듭나게 되어 속사람이 살아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거듭남에 관하여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참 희한한 일도 다 있다. 참 별 희한한 일도 다 있다. 내 나이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별일은 별일이다. 세상에 나처럼 한평생 엉덩이에 뿔 높이 달고 휘젖고 다니며 오로지 술과 법과 객기를 인생의 낙인양 믿고 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참으로 갑자기 좋은 술벗들 대신에 예수님 사랑해요. 어쩌고 저쩌고를 속에 어물거리며 이 세상에 호적이 존재하지도 않은 까닭에 이전에 한번도 본 일이 없는 먼 나라 목수네 털보의 아들을 은근히 속으로 짝사랑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재밌는 표현입니다. 여러분 육체의 감각과 욕망과 이성으로 사는 사람은 영의 일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게 되면 인간의 육신의 감각도 정욕도 이성도 뛰어 넘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놀랍게 도저히 육신의 사람으로써는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신의 사람은 인정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구주라고 믿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으로 살면 또 성령과 더불어 살고 감동과 기도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와 계십니다. 주께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는 너와 함께 계시겠고 너희 안에 계시겠다. 성령은 오순절 날 이후에 우리에게 와서 함께 계시고 우리 속에 계십니다.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고 예수님 안에서 꿈을 꿀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꿈을 꾸잖아요.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받은 사람이 되는 꿈을 꿀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우리는 거룩하고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는 꿈을 꿀 수 있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병에서 고침 받아 건강한 사람이 된 꿈을 꿀 수가 있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저주에서 해방되어 아브라함의 축복과 번영을 받은 것을 꿈 꿀 수 있고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과 영생과 천국을 꿈 꿀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영으로 사는 사람은 성령님을 통하여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삼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말씀을 들을 때 가슴이 저미도록 감격적입니다. 새로운 자화상을 얻습니다. 나는 재앙을 받은 사람이 아니요, 그리스도 안에서 전인구원의 은총을 받은 사람이구나. 아침에 일어나도 저녁에 잠자리 들어가도 나는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사람이 되었다고 꿈을 꿀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이 사실을 우리는 꿈꿀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16절에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여러분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사랑이 마음속에 부은바 되고 그리스도의 소망이 마음속에 넘치게 되는 것이 영으로 사는 사람의 체험인 것입니다.
1846년에 토스토예프스키는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일약 작가로 명성을 날렸으나 소련의 전제군주에 대한 저항 결사대에 가입했다가 그것이 밝혀져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다 간신히 황제의 특사로 형이 감면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실은 열차가 간이역에 멈췄을 때 그의 동료의 아내가 그에게 작은 성경을 하나 건네주었습니다. 그는 이 성경을 유배지에서 밤마다 읽었습니다. 몸부림치면서도 유일하게 성경책만 친구가 되어서 성경을 읽다가 그 안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토스토예프스키는 시베리아의 강재노동수용소에서 성경 안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 그 말씀을 듣고 성령이 역사해서 그 영혼이 빛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에게 시베리아유형은 파멸의 현장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진리를 깨닫는 새 삶의 출발지였습니다. 이로 인해 1859년 유형을 마친 후 토스토예프스키는 시베리아에서 유형을 당하고 고통 중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 받은 그 감격 가운데 그것을 소재로 해서 ‘죄와 벌’이라는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었고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설가가 된 것입니다. 그 후에 그는 자신의 신앙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누군가가 내게 그리스도는 진리가 아니라고 증명한다 할지라도 나는 그리스도와 같이 있고 싶다. 나는 진리보다도 차라리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다.’ 어떤 사람이 와서 예수는 거짓말이다. 예수님은 진리가 아니라고 해도 나는 그 예수님과 같이 살고 그 예수님과 같이 있고 싶다. 그는 뼈저리게 예수님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이론적인 예수님, 의식적인 예수님, 종교적인 예수님이 아니라 시베리아의 살을 에는 추위 가운데서 그 고독과 배고픔과 절망상황에서 그와 함께 살아준 체험적인 예수님, 그는 그 예수님과 살기를 원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같이 사는 부부를 이론적으로 증명 못한다고 해도 논리적으로 이 사람이 내 남편이고 내 아내라고 증명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같이 살기 때문에 체험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사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지금 계십니다. 그가 기도를 들으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힘을 주시는 것을 우리는 체험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니까 그의 친구가 하는 말이 “참 이상하다. 예수님을 나는 오늘 아침에도 만나고 왔는데···” “어디 계시냐?” “나는 그분과 같이 이야기하고 그분에게 안수 받고 그분에게 은혜 받고 큰 평안과 기쁨을 오늘 마음속에 가득하게 채워서 살기 때문에 날보고 예수님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너는 체험 안했지만 나는 체험했다.”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참말입니다.
그리고 영으로 사는 사람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육체로 사는 사람은 감각으로 살고, 감정으로 살고, 정욕으로 살고, 이성으로 살지만 예수믿는 사람은 말씀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했으며
히브리서 10장 38절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요한일서 5장 4절에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영으로 사는 사람은 항상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고 내 앞길 칠흙같이 어두워도 나는 하나님이 성경에 말씀하셨으니 그대로 믿노라.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나는 말씀대로 믿는다고 나가는 사람이 영의 사람인 것입니다. 영의 사람은 믿음으로 삽니다. 그리고 믿음은 운명을 변화 시킵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강서대교구의 이원군 장로님의 간증을 읽고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장로님은 어릴 때 화상을 입은 적이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자리에 부작용이 생겨 병원에 가서 정밀하게 진찰하니까 어릴 때 입은 그 화상이 암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암세포가 무릎뼈까지 전이되어 다리를 잘라내야 하는데 몸속에 나쁜 세균이 있어서 수술을 하면 온몸이 다 썩어 들어가기 때문에 수술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장로님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제게 와서 안수기도를 원했습니다. 저는 장로님을 보고 기가 막혔습니다. 또 얼마 있지 않다가 ‘초상치르게 되었네.’ 왜 암이 온 다리에 뼈 속까지 퍼졌는데 수술도 못하고.. 내 속으로 제가 주의 종이면서도 항상 믿음의 투쟁이 있지 않습니까? 내 감정으로 감각으로 볼 때 ‘못 살아나. 괜히 기도해봤자 못 살아나.’ 그런 생각이 떠오르잖아요. ‘또 초상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또 다른 면으로는 ‘웃기는 소리하네. 기록하였으되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느니라고 말씀하지 않았느냐.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했으니 제가 믿음을 가다듬어서 장로님을 격려하고 안수를 해드렸었습니다. 저는 암을 고쳐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장로님은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었지만 아멘하고 믿음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암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는 치료를 받았다. 믿음을 굳게 잡고 이 암은 거짓말이다. 마귀의 헛된 수작이다. 이것은 불법주차다. 나는 이미 2천년 전에 고침을 받았다. 그런 믿음을 굳게 가졌습니다. 그는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으므로 나는 나았다. 눈으로 보이는 것은 거짓되며 헛된 것이다. 나는 나았다. 치료받았다. 계속해서 믿음으로 싸웠습니다. 그는 감각과 모든 이성을 믿음으로 싸우고 믿고 입으로 시인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며칠 후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는데 의사 선생님이 “야~ 희한한 일이 생겼네요. 세균이 다 사라져서 다리를 안 잘라도 괜찮겠습니다. 단지 암 덩어리만 제거하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의사선생님은 다리를 자르지 않고 암 덩어리만 제거를 했는데 그는 하나님 고쳐준 것을 감사하고 절룩거리면서 열심히 교회에 봉사를 하고 제가 복음전하는 곳마다 따라다니면서 하나님 사업을 했습니다. 3년 후에 병원에 가서 조사하니까 암은 흔적도 없어요. 깨끗이 나아버린 것입니다. 그가 만일 육의 사람이었다면 절망하고 인생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기왕 죽을 것이니 먹고 마시자고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영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바라 본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믿음의 말씀을 가지고 싸웠기 때문에 믿음대로 된 것인 것입니다. 영의 사람은 육의 눈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갈 때 보이는 세상을 뛰어넘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영의 사람은 천국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천국 말을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세상 사람은 세상 말 하고 하늘나라 사람은 하늘나라 말을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말을 쓰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1절에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라고 말했습니다.
말하는 사람은 모두다 하나님 말씀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입술에 말이 얼마나 권세가 큰지 압니까?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를 따라서 그 흉내를 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말씀으로 우리 운명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우리 한국 속담에 있지 않습니까? 무엇이든지 말로써 묶으면 하늘에서 묶이고 말로써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영적인 사람은 영적인 말을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인도의 선교사로 잘 알려진 스텐리 존스 목사님이 89세가 가까웠을 때 갑자기 중풍으로 쓰러져 걸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수개월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지만 목사님은 믿음을 잃지 않고 오히려 간호사들에게 자기가 잠에서 깨어나 눈만 뜨거든 밤이고 낮이고 상관없이 자기를 보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령하노니 일어나라!’ 그렇게 명령을 하라고 간호사들에게 부탁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미했네 하는 노래가 있는 것처럼 이 스텐리 존스 목사님은 89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국 나이로 90살입니다. 중풍에서 고침 받는 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것도 말씀으로 고침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자기가 중풍에 걸려서 말을 잘 못하니까 간호사들이 와서 볼 때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라!’ 그러면 그는 “아멘, 아멘, 아멘” 그렇게 했습니다. 간호사들은 존수 목사님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볼 때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말이 들릴 때마다 목사님은 아멘했습니다.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지만 존스 목사님은 하나님이 반드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인도의 히말리야 산지로 휴양을 갔습니다. 목사님은 그곳에서도 믿음의 선포를 쉬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전부다 그가 명령하는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런데 마침내 그는 중풍에서 해방되어 일어나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말씀의 선포는 천국 언어인 것입니다. 한번해서 안되면 두 번 말하고 두 번해서 안 되면 세 번 말하고 세 번해도 안 되면 네 번 말하고 네 번 말하면 다섯 번 말하고 열 번, 백 번, 천 번, 만 번 말을 하십시오. 처마밑에 떨어지는 물방울이 똑똑 떨어질 때 저것이 바위에 구멍을 뚫겠느냐 싶지만 나중에 바위에 구멍이 뚫어지는 것입니다. 확대경으로 종이를 태울 때 햇빛을 초점에 모으면 저것이 과연 불을 붙이게 되는데 얼마 있지 않으면 연기가 모락모락나고 불이 붙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집중적으로 천국말씀을 선언하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내 입에 말로 내가 묶였으며 내 입에 말로 내가 사로잡힌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선포는 천국의 언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스텐리 존스 목사님은 땅의 말이 아니라 천국 말을 사용하고 또 믿음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이처럼 영의 사람은 하늘나라 말을 사용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영의 사람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의 사람은 사랑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거듭나서 신령한 사람이 되었으면 사랑으로 살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예수님을 우리 구주로 모시면 우리는 별도리 없이 용서하고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끌어안고 용서와 사랑을 받은 우리들은 용서와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용서해 주옵소서. 사랑해 주시옵소서”라고 하면서 우리 이웃을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위선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남편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됩니다. 우리 아내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되고 우리의 자녀들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영의 사람이 되면 개들도 여러분이 거듭난 것을 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요? 집에 오면 옛날에는 육의 사람이었으니 개를 보고 발길로 차고 욕을 하던 사람이 이제는 개들도 쓰다듬어 주고 사랑해 준다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영의 사람은 사랑의 사람인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7절로 8절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4절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일서 2장 5절에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미움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벗기고 할퀴고 먹칠을 하고 짓밟는 것이 미움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삽니까? 여러분의 이웃을 자꾸 벗기고 흉을 보고 할퀴고 먹칠하고 짓밟으면 그것은 육의 사람이지 영의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영의 사람은 허다한 허물을 덮습니다. 허물을 덮어주고 치료해주고 살려주고 추슬러 주는 영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의 사람은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이 영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테레사 수녀는 평생을 캘커타의 빈민촌에서 사랑을 실천하면서 산 사람입니다. 그녀는 버림받은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의 상처를 씻겨 주고 그들의 아픔을 달려 주었습니다. 생명이 꺼져가는 사람에게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녀는 어떻게 그런 삶을 살수 있냐고 묻는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분명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자선사업가로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봉사를 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면서 마지막 유언을 남길 때 “서로 사랑하십시오. 진정한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고 또 주고 줄 따름입니다.” 맞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만큼 주니 저만큼 받을 것이라고 계산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편 된 여러분은 아내를 조건 없이 사랑하십시오. 아내 된 여러분은 남편을 무조건 사랑하십시오. 부모가 자식을 무조건 사랑하는 것처럼 자식 여러분도 부모를 무조건 사랑하십시오.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그냥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안 보이는 나 즉, 속사람인 영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므로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이 영으로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영으로 사는 가를 알고 싶으면 얼마나 매일같이 사랑의 생각을 하고 사랑의 말을 하고 사랑의 손길을 베풀면서 사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1912년 눈의 굴절광학연구로 노벨의학상을 수상한 알렉시스 카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이해할 줄 아는 사람보다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에게 그의 참모습을 드러내신다. 지혜와 총명이 있어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지식이 있어서 박식한 그런 사람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지혜와 지식과 모략과 재능이 부족해도 사랑을 할줄 아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이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이 없는 웅변은 소리 나는 구리요, 울리는 괭가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과 예언과 지식은 아무 이익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이 구제하고 몸을 불사르는데 내어 줄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영으로 사는 사람은 사랑으로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집에 들어갈 때 여러분의 아내가 우리 남편은 구원받은 신령한 사람입니다. 우리 아내는 구원받은 신령한 사람입니다. 우리 부모는 구원받은 신령한 사람인 줄을 어떻게 압니까? 고함쳐 기도하기 때문에 압니까? 성경책 높이 들고 다닌다고 압니까? 말씀을 많이 외운다고 압니까? 아닙니다.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 남편은 영의 사람이구나. 우리 아내는 영의 사람이구나. 우리 부모는 영의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육체의 사랑 즉 그 겉 사람은 날이 갈수록 늙어지고 후패하고 결국은 죽어요. 그러나 보이지 않는 나의 속사람 즉, 영혼은 하나님께 버림받고 살다가 지옥에 가든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 살아나서 말씀과 성령으로 날로 새로워져 영적으로 성장하다가 천국으로 가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로 5장 1절을 우리 다같이 소리 내어 한번 읽으십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보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도다.” 며칠 후 며칠 후 우리들은 이 육신의 장막 집을 떠납니다. 보이는 육신의 삶을 청산하고 보이지 않는 천국, 보이지 않는 우리 속사람, 영혼의 사람은 영원한 영광의 세계로 들어가서 영적 세계 속에서 주님과 함께 세세무궁토록 왕 노릇 하며 살게 되실 것입니다.

[기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육신이 영혼을 닮고 있습니다. 우리 영원이 사는 불멸의 영혼이 육신의 장막집 속에 살고 있지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죽은 영혼이고 구원받은 사람은 살아있는 영혼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육신의 노예가 되어서 세상을 따라 살다가 세상과 함께 멸망받습니다만 구원받은 사람은 육신이 사라질 때 천국에 들어가서 더 좋은 곳에 더 아름다운 곳에 영원한 영광을 누리고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다 구원받은 영의 사람으로써 영의 삶을 굳건히 살다가 주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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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5 다니엘 성공적 삶을 위한 3대 길 단1:8-17  이한규 목사  2009-07-31 1997
1824 다니엘 거룩한 자존심으로 사십시오 단1:1-9  이한규 목사  2009-07-30 2290
1823 다니엘 고통 중에 꽃피는 영성 단1:1-2  이한규 목사  2009-07-30 2137
1822 에배소서 변함없는 사랑의 축복 엡6:21-24  이한규 목사  2009-07-30 2163
1821 에배소서 자기를 극복하십시오 엡6:10-13  이한규 목사  2009-07-30 1950
1820 에배소서 오늘의 은혜에 감격하십시오 엡3:7-9  이한규 목사  2009-07-30 2547
1819 아모스 말씀 망각의 심판 암8:4-12  정용섭 목사  2009-07-29 2171
1818 골로새서 믿음과 사랑의 뿌리 골1:3-8  정용섭 목사  2009-07-29 2182
1817 누가복음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눅10:1-12  정용섭 목사  2009-07-29 1878
1816 열왕기하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왕하2:7-14  정용섭 목사  2009-07-29 2790
1815 빌립보서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빌3:2-9  정용섭 목사  2009-07-29 1803
» 고린도후 보이지 않는 나와 보이는 나 고후4:16~ 5:1  조용기 목사  2009-07-28 1642
1813 시편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시23:6  조용기 목사  2009-07-28 2216
1812 창세기 사랑의 수고 창24:10~24  조용기 목사  2009-07-28 2336
1811 시편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시23:3  정삼지 목사  2009-07-27 2385
1810 마태복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마5:6  한태완 목사  2009-07-27 2049
1809 마태복음 화평케하는 자의 복 마5: 9  연규홍 교수  2009-07-27 2168
1808 마태복음 온유한 자의 복 마5:5  한태완 목사  2009-07-27 2193
1807 마태복음 애통하는 자의 복 마5:5  한태완 목사  2009-07-27 660
1806 고린도전 생명의 출산 고전4:11-15  강종수 목사  2009-07-26 1939
1805 마태복음 심령이 가난한자의 복 마5:3  한태완 목사  2009-07-24 1299
1804 누가복음 한가지가 부족하다 눅18:18∼30  송기식 목사  2009-07-24 2163
1803 신명기 어미새는 반드시 놓아주고 신22: 6-7  서문수 목사  2009-07-24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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